=====15:1
하나님의 신이...임하시매 - 이는 주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어떠한 행위를 하거나 예언, 말씀 선포하는 것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20:14;24:20;대상 12:18). 한편 성경에는 '하나님의 신'이라는 표현과 '여호와의 신'이라는 표현이 서로 번갈아 나타나는데 이는 각기 다른 성령의 사역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 같다. 즉, '하나님의 신'이라는 표현은 주로 일반 은총적인 측면에서 언급된 듯하고(창 1:2), '여호와의 신'은 특별 은총과 연관된 듯하다(20:14-17). 그렇지만 특별한 의미없이 두 말이 교호적(交互的)으로 쓰인 경우 또한 많으니 반드시 다 그렇다고 만은 볼 수 없다(삼상 10:6, 10). 아무튼 이상의 사실들은 구약 시대에도 성령께서 성부(聖父), 성자(聖子) 하나님과 더불어 활약하셨음을 증거해 준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창 1:26 주석을 참조하라.
오뎃의 아들 아사랴 - '아사랴'(Azariah)란 동명 이인(同名異人)은 성경에 여러 명 나온다(21:2; 23:1; 대상 2:8; 스 7:3;느 7:7). 그렇지만 오뎃의 아들 아사랴가 언급된 곳은 여기뿐이다. 아마 역대기 저자는 대제사장 요하난의 아들 아사랴(대상 6:10)와 구별하기 위해서 이 선지자를 '오뎃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 고대 역본들(Vulgate, LXX)에는 '오뎃의 아들 아사랴'가 단지 '오뎃'이라고만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혹자(Movers)는 본절을 '아사랴의 아들 오뎃'이라고 읽어야 옳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 근거로 본장 8절에서 '오뎃의 아들 아사랴' 대신 '선지자 오뎃'이 언급되고 있음을 든다. 그렇지만 8절에서 '선지자 오셋' 뒤에는 '-의 아들 아사랴'가 필사자의 실수로 인해 빠졌거나 '오뎃'이라는 이름이 잘못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Pulpit Co-mmentary). 따라서 위의 주장의 사실성 여부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한편 '오뎃'(Oded)의 행적에 대해서는 성경에 달리 언급된 바가 없다. 고대 주석가들은 '오뎃'을 선견자 잇도(9:29;12:15;13:22)와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하는데 어디까지나 추측일 따름이다(O.Zockler).
=====15:2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 - 이스라엘 열지파의 반 역시 그들에게 동조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다윗 왕조를 섬긴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가리킨다(10:1-19). 이 중 베냐민 지파가 다윗 왕조를 섬기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왕상 12:21 주석에서 상세히 언급하였으니 참조하라.
함께하실지라...버리시리라 - 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의 말씀으로서 모세 때에도(신 4:29), 다윗과 솔로몬의 때에도(24:20;대상 28:9), 그리고 신약 시대에도(약 4:8) 주어졌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개선하여 돌아오는 아사 왕에게도 선지자 아사랴를 통하여 이 같은 언약의 말씀을 상기시키신 것은 그로 하여금 언약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축복을 계속해서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15:3
이스라엘에는...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은 지가 - 이와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제사장이 없었던 시대는 많았다. 사사기 시대에도 그랬고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 때에도 그랬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육이 부재(不在)할 때 참신이신 여호와가 인식되지 못하고 진리가 밝히 드러나지 못했다.
이제 오래였으나 - 이것은 과거 시제로만 국한하여 해석할 수 없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원문에 따라 본절은 "많은 날들을...그렇게 할 것이다"로도 번될 수 있기 때문이다(P.C. Barker). 따라서 본절은 과거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부재했던 때가 있었듯이 앞으로도 그러한 때가 있을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5:4그
환난 때에...돌아가서 찾으매 - 본절의 시제는 3절의 시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와우(* ) 접속법에 따라 본절의 완료형 동사도 미완료 동사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서 찾으면 저가 그들의 만난 바가 되신다는 말씀은 어느 시대에든 적용될 수 있는 영원한 언약의 말씀이라 하겠다. 실상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약속하셨다(렘 29:13).
=====15:5
그때에 - 이것은 어떤 특정한 때를 가리키기보다는 3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참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을 때, 즉 일반적을 그러한 현상이 있는 때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열국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아라초트'(* )의 본래 뜻은 단순히 '그 땅들'이다. 물론 이 말은 '열국'을 의미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역대기 저자는 이 단어를 이스라엘 땅의 여러 지역을 가리키는 단어로 자주 사용하고 있다(11:23;대상 13:2). 따라서 본절 역시 열국이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땅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전후 문맥과도 잘 부합된다.
사람의 출입이 평안치 못하며 - 이는 이스라엘 땅에 평화가 사라지고 큰 공포 분위기가 조성될 것을 가리킨다(삿 5:6;6:2). 즉, 다시 말하면 외적이 이스라엘을 침입하여 이스라엘을 다시르게 되고 나라는 무정부 상태로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박탈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출입'이 끊어지게 되는 것은 성경에서 대개 완전한 멸망을 상징한다(수 6:1;대하 16:1). 하나님 앞에서 패역했던 북왕국과 남왕국은 모두 이러한 경우를 당했었다(왕하 17:6;25:8-12).
=====15:6
이 나라가 저 나라와 서로 치고 - 혹자는 이를 민족 간의 전쟁으로 해석하나(Kamphausen)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배교(背敎)에 대한 경고의 말씀인고로 그러한 해석은 맞지 않다. 따라서 이것은 이스라엘 지파 간의 싸움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베냐민 지파와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과의 싸움(삿 20:35-45)이나, 길르앗 사람과 에브라임 사람간의 싸움(삿 12:4-6) 등을 들 수 있다. 즉, 본절은 여호와의 율법이 부재할 경우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다툼과 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요란케 하셨음이니라 - 위와 같은 경우를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심판을 당할 때에는 반드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서 그를 찾아야 하며 그렇게 할 때 저가 만나 주실 것이라는 의미이다(4절).
=====15:7
본절은 선지자 아사랴의 예언의 결론 부분으로서 아사 왕으로 하여금 내부적인 종교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말고 박차를 가하도록 촉구하는 말씀이다.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 이는 용기를 잃지 말라는 뜻으로(느 6:9;습 3:16)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갈 6:9)라는 말씀과 일맥 상통한다. 즉, 이는 다시 바꾸어 말하면 개혁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이 여호와께 있으므로 아사는 낙심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와 유사하게 예수께서도 자신이 세상을 이기셨으므로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담대'하라고 당부하셨다(요 16:33). 한편 본절은 아사의 종교 개혁이 강력히 실시되므로 인해 우상 숭배자들의 반발과 저항이 거세게 일어날 것을 예견해 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후에 나오는 구절들 속에는 그러한 반발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는데 이는 아사가 얼마나 훌륭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종교 개혁을 수행했는가를 암시해 준다.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 - 의(義)를 행하는 자가 받을 상급에 관해서 성경은 여러 번 자주 언급하고 있다(창 15:1;잠 11:18;전 4:9;렘 31:16;고전 3:8;15:58). 그 가운데서도 특히 예수께서 말씀하신 '팔복'(八福)은 백미(白眉)를 이루는 것이니 참조하라(마 5:1-12).
=====15:8
선지자 오뎃의 예언 - 1절의 '오뎃의 아들 아사랴'와는 달리 본절에서 단순히 '선지자 오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이유를 정확히 규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본절은 1절에서와 같이 '선지자 오뎃의 아들 아사랴의 예언'이라고 보아야 한다면 '예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명사의 연계형(construct state)이 되어야 하는데 원문에는 독립형(absolute state)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즉, '예언'이라는 단어에 어떠한 수식어가 붙든지 이 단어는 연계형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는 왜 독립형으로 기록되어 있는지 아무도 설명을 못 한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에서 '선지자 오뎃'이라는 단어를 빼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비교적 유력시되는 견해이다(Pulpit Commentary).
가증한 물건 - 이는 우상 또는 우상 숭배와 관계있는 물건들을 가리킨다(왕상 11:5;15:12;왕하 23:13, 24;겔 30:7, 8;단 9:27). 이는 곧 하나님께서 그 같은 우상들을 얼마나 혐오하시는지를 잘 나타내 주는 표현이다.
에브라임 산지에서 빼앗은 성읍들에서 제하고 - 아사가 등극한 이래 지금까지 남왕국과 북왕국 간에는 전쟁이 없었다. 아사가 북왕국과 전쟁한 것은 이스라엘 왕 바아사 때에 가서이다(왕상 15:16-22). 그러므로 본절은 아사의부친 아비야가 여로보암 왕에게서 빼앗은 성읍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13:19). 이는 많은 학자들도 지지하는 견해이다(Payne, P.C. Barker).
여호와의 낭실 앞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 솔로몬 성전의 제단은 여호와의 낭실 앞에 있었다(8:12). 그런데 여기서 '중수하고'(* , 하다쉬)라는 단어는 '깨끗하게 하다', '새롭게 하다'(삼상 11:14;시 51:10)라는 뜻도 지니고 있는바 비유적으로 우상으로 더러워진 것을 '다시 성별한다'는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아사가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오염된 여호와의 제단을 깨끗하게 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Bertheau). 그러나 '하다쉬'(* )라는 단어가 문자적으로 사용될 때도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는 '고치다', '수선하다'(repair)라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본절 역시 문자적인 의미로 보는 데에는 전혀 무리가 없다(Pulpit Commentary). 한편 이와 관련하여 카일(Keil)은 솔로몬 성전을 건축한 지 이미 60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여호와 신앙을 새롭게 장려하기 위해서 아사가 제단을 수축(修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Keil & Delitzch, vol. III, p.
364)
=====15:9
무리를 모으고 - 아사 왕은 전국가적인 개혁을 수행하고 새롭게 언약을 세우며 백성들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대집회를 열었다. 이는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기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열었던 대집회(5:2) 이후 처음 있었던 대집회로서 이때 치르었던 제사의 규모도 상당히 컸다(11절). 에브라임과...저희 중에 우거하는 자 - 이러한 표현은 이방인들을 가리킬 때 종종 사용되는 것이다(출 12:49;신 28:43;수 20:9). 그런데 여기서 이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남하(南下)한 에브라임과 므낫세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한 이주 사건은 과거 르호보암 때에도 있었는데(11:13-17) 본문은 이제 아사 왕 때에도 여호와께서 아사 왕과 함께하심을 보고 남하한 사람들이 많았음을 증거해 준다.
시므온 가운데서 나와서 - 시므온 지파는 유다 남쪽 지방에 거주하면서 유다 자손의 기업 가운데서 기업을 얻었다(수 19:1-9). 그러므로 여기서 시므온 지파가 북쪽의 에브라임 및 므낫세 지파와 함께 나왔다는 말은 좀 이상하게 보인다. 이에 대해서 혹자는 시므온 지파가 이전에 북쪽으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함께 내려온 것이라고 생각한(Bertheau), 이에 대한 역사적인 근거가 불확실하다. 그리고 카일(Keil)은 이에 대해서 정치적으로는 시모온 지파가 유다 지파와 함께 하였지만 종교적으로는 예루살렘에서 여호와를 숭배하지 않고 북이스라엘처럼(왕상 12:25-33) 자기 성읍들에 우상을 세워 숭배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근거로 아모스서에서 시므온 땅인 브엘세바가 벧엘이나 길갈과 함께 우상 숭배지로 언급되고 있음을 든다(암 4:4;5:5;8:14). 그러나 왕상 11:31을 보면 시므온 지파도 분명히 정치적으로 북왕국의 열 지파에 속하였음을 시사하고 있으므로 이 견해는 타당치 않다. 한편 대상 4:24 이후를 보면 시므온의 성읍이 대체적으로 유다 지파에 흡수되어 버린 것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그 일로 인해 시므온 지파의 상당수가 북쪽으로 이주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창 49:7에서 시므온 지파에 대하여 예언한 바,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고 한 것의 성취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그를 뒷받침해 주는 정확한 역사적인 자료가 없다. 따라서 이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더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15:10
아사 왕 십오 년 - 14:1에 보면 아사가 즉위한 지 10년 동안은 유다가 평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세라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침입한 것(14:9-15)은 아사 왕 11년경의 일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Pulpit Commentary). 그렇다면 아사와 구스 왕 세라 간의 전쟁은 적어도 4년 정도 걸렸다는 뜻이 된다(Curtis). 무론 이것은 아사 왕 15년에 열린 축제(11-15절)가 세라에게서 승리한 직후에 있었다는 가정(假定)에서 비롯된 결론이다(P.C. Barker, Keil). 실제적으로 아사 왕이 노획물을 거두고 그랄 사면 모든 성읍들을 평정하는 데에는(14:13-15) 상당 기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11-15절에 언급된 축제가 아사 왕 십 오년(B.C. 895년경)에 있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삼월에 - 이는 '시완 월'로서 양력으로 5, 6월에 해당되는데 이 달에 칠칠절(오순절) 절기가 있었다. 이 절기는 이스라엘의 3대 절기 가운데 하나이다. 레위기 서론, '히브리 절기와 축제' 참조. 아사 왕은 이 절기를 맞아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새롭게 하였다(12-15절).
=====15:11
그 날에 노략하여 온 물건 중에서 - 아사가 구스 사람에게서 탈취한 노획물 가운데에는 소에 대한 언급이 없다(14:13, 15). 따라서 본절에 언급된 소 제물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아사가 특별히 구별하여 준비한 것인 듯하다. 한편 당시 아사가 탈취한 양과 약대 따위는 그 동안 상당한 숫자로 불어났을 것이다.
=====15:12
마음을 다하고...언약하고 - 이것은 백성들이 엄중한 맹세로 자신들을 여호와께 결속시켰음을 나타낸다. 렘 34:10에서도 이와 유사한 언약식이 소개되고 있다. 즉, 그들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맹세한 것이다(신 4:29).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과 사랑은 실상 인간의 제일가는 기본 의무이다. 때문에 아사는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이에 대하여 맹세한 것이다.
=====15:13
무릇...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 일견 잔혹하게 보이는 이 처형은 시명기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출애굽 당시 가나안인들의 다신교(polytheism)와 저속한 풍습은 이스라엘의 유일 신앙에 정신적인 위협이 되어 왔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인들과 우상 숭배자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하셨다(신 7:1-4;13:6-10;17:2-7). 이 명령은 이스라엘 신앙의 순수성을 보전하기 위한 필연적인 조치였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악한 신학과 타락한 윤리로부터 결별
하고 나아가 그것들을 멸절시키기 위해 단호한 행동을 취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차원에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징계 조례는 재고(再考)되고 강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교회 내에서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거나 복음의 진리를 흐리는 자들에 대해서 교회는 지체없이 징계 조례에 의거하여 명확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고전 5:3-5, 13;딤전 1:20). 신앙의 순결함을 수호하고, 신앙을 실천하는 일에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결국 파괴적인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다(계 3:16).
=====15:14
무리가 큰 소리로 부르며...나팔을 불어 - 이는 백성들이 이 언약의 맹세에 순종으로 응답하여 화답한 것을 가리킨다. 한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갱신하거나 기타 다른 기쁜 일이 있을 때 이와같이 악기를 동원한 사실은 다른 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23:13;느 12:27).
=====15:15
여호와께서도...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 이는 온 유다 백성이 언약 맺는 것을 기뻐하고 그 언약의 말씀을 준행한 데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이다. 그런데 이 평안의 기간이 얼마나 지속되었는가에 대해서는 19절 주석을 참조하라.
=====15:16
아사 왕의 모친 마아가 - 이미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마아가(Maachah)는 아사의 모친이 아니라 아비야의 모친이며(11:23;13:2) 아사의 조모(祖母)이다. 이 마아가는 르호보암의 아내였는바(11:20) 이때까지 왕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Payne). 따라서 아사가 감히 마아가의 태후의 위(位)를 폐할 수 있었다는 것은 가히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태후가 왕보다 더 큰 권위를 행사한 것이 통례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녀의 손자 요아스 일족을 완전히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던 경우를 들 수 있다(왕하 11:1-3). 이로 볼 때 아사의 개혁 의지가 얼마나 단호했던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 우상을 찍고 빻아 - 본절과 병행 구절인 왕상 15;13에는 '빻아'라는 단어가 없다. 이 단어는 당시에 아세라 목상 뿐만 아니라 그 주위에 돌비나 금속 재료로 된 우상도 있었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금송아지를 빻아 가루를 만든 것을 가리킬 때(출 32:20), 아세라 목상 이외의 것들을 파괴한 것을 가리킬 때(34:4, 7;왕하 23:6)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기드론 시냇가 - 이 강은 예루살렘 동편 갈람 산 사이를 흘러 사해(死海)로 들어가는 길이 약 5km의 간헐천이다. 왕상 2:37 주석 참조. 역사적으로 이 기드론(Kidron) 시냇가에서 우상 숭배하던 가증한 것들이 자주 파괴되었다(29:16;30:14;왕상 15:13;왕하 23:4, 6, 12). 그리고 요시야 시대에 이곳은 공동묘지로서 부정한 것들을 버리는 장소로 인식되기도 하였다(렘 26:23;31:40). 왕상 15:13 주석 참조.
=====15:17
산당은 이스라엘 중에서 제하지 아니하였으나 - 산당의 제거 문제에 관해서는 14:3 주석에서 상세히 다르었으니 참조하라. 한편 본절에서 '이스라엘'이란 국명(國名)은 남왕국 유다를 가르키며 유다만이 합법적인 이스라엘 백성임을 암시하고 있다. 혹자는 "산당을 없이하고"(14:3)라는 표현과 본절의 "산당은...제하지 아니하였으나"라는 표현 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라엘'을 북왕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Curtis, P.C. Barker). 그러나 본문은 북왕국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사 왕이 북왕국의 내적 문제에 관여할 하등의 정치적 권한도 없었다. 따라서 위의 견해는 마땅히 철회되어야 할 것이다.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 - 본절과 병행 구절인 왕상 15:14에는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온전'(* , 솰렘)이란 단어는 그 마음을 끝까지 일관되게 지속하여 어떤 일을 끝마쳤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로 볼 때 아사는 종교 개혁에 평생을 바쳤음이 틀림없다.
=====15:18
하나님의 전에 드렸더니 - 아사가 하나님의 전에 드린 보물들은 그 부친 아비야가 여로보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거둔 전리품(13:19)과 아사가 구스 사람 세라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이다(14:13-15). 여호와의 전 곳간에 이같이 많은 보물들을 쌓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아사가 여호와께 큰 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15:19
삼십 오 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 - 본절은 해석상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가 있다. (1) 왕상 15:16, 32에는 아사와 북왕국의 바아사 사이에 일생 전쟁이 있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본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2) 이스라엘의 바아사는 유다의 아사 왕 3년에 즉위하여 아사 왕 26년에 죽었는데(왕상 16:8) 본절 및 16:1에서는 아사 왕 35년까지 평안했고 아사 왕 36년에 바아사와 전쟁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문제들에 대하여 혹자는 여기서 35년은 왕국 분열 이후부터 35년을 가리크는 것이며 바아사와의 전쟁은 아사 왕 즉위 16년(르호보암 17년+아비야 3년+아사 15년=35년)에 있었다고 생각한다(Keil, Payne). 만일 그렇다면 아사의 생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처음 10년간은 평안했고(14:1), 아사 왕 11년에 세라와의 전쟁이 있었으며, 16년에 바아사와의 전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왕상 15:16, 32의 '아사와 바아사 사이에 일생 전쟁이 있으니라'는 구절의 해석에는 도움이 되지만 왕상 16:8의 구절을 해석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본절의 35년은 아사 왕 25년을 잘못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P.C. Barker)이 비교적 옳은 듯하다. 그렇다면 아사와 바아사 사이에는 일생 실제적인 전투가 있었다기보다는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의 관계처럼(이에 대해서는 12:15의 주석을 참조하라) 일생 서로 적의에 가득차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아사 왕 26년에 죽임을 당했던 것 같다(왕상 16:1-4). 더욱이 26년에 있었던 바아사와의 전쟁에서도 아사 왕은 아람 군대의 원조를 요청하여 바아사를 물리쳤으니(16:2-5) 이로 보아 아사 왕 때에는 그 후에도 평안했음이 분명하다.
남유다의 외적인 대적, 즉 구스 침략군에 대해 큰 승리를 거둔 장면을 언급한 앞단락(14:9-15)에 이어지는 본장은 유다의 내부에 존재해 있던 내적인 대적을 가리치는 장면이다. 즉, 본장은 구스 군대를 대파하고 개선가를 부르며 예루살렘에 입성한 아사 왕이 아사랴가 선포한 예언의 메시지를 듣고 제2차 종교 개혁을 단행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역대 열왕들을 살펴볼 때 아사 왕과 같이 두 번씩이나 종교 개혁을 단행한 왕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사의 행적은 역사적으로 더욱 큰 의의를 갖는 것이다. 물론 그의 2차 개혁은 엄밀한 의미에서 1차 개혁의 연장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사가 행한 2차 개혁은, 구스와의 전쟁에서 큭 승리하여 스스로 자고(自高)해져 개혁을 중단하고 하나님을 떠날 위험의 소지가 많은 때임에도 가구하고 악의 길로 행치 않고 오히려 아사랴의 예언에 따라 개혁 의지를 재개(再開)하여 과감히 개혁을 단행하였다는 점에서 살펴볼 때 어느 누가 행한 개혁보다 더 큰 의의를 갖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본장은 크게 (1)아사랴의 예언(1-7절)과 (2) 이에 따른 아사의 개혁과 언약의 갱신(8-19절)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때 아사랴가 선포한 에언은 다음의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가)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2절). 이늘 여호와의 말씀에 기초한 성실한 신앙 생활에 대한 권고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사 왕은 이 말씀을 좇아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 (11, 12절)한 것이다. (나)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 (2절)신다. 이는 환난 때에 오직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만 돌아갈 것을 권고(4절)하는 말씀이다. 이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여호와를 주권자로 인정하라는 뜻이며 삶의 가치의 기초를 오직 여호와께만 두라는 뜻이다. 이 말씀에 응하여 아사는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하고 (13절) 여호와께 뱅세하였다. (다)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2절). 이는 앞에서 언급하였던 축복의 조건과 상반되는 저주의 조건으로서, 누구든지 배교(背敎)하면 평화와 안정이 파괴되는 등의 혹독한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다(6절).
이러한 신명기적 예언의 말씀을 받은(신 28장) 아사 왕은 무릇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척결하였다. 그의 어머니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을 때 그 태후의 위를 폐한 사건(16절)이 그것이다. 그는 이렇게 일평생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힘썼던 왕이었다(17절).
한편, 본장에 언급된 사건 대부분은 오직 본서에만 기록된 사실이나 아사 왕이 마아가의 우상을 타파한 사실과 성전에 물품을 드린 사건(16-19절)은 왕상 15:13-15의 내용과 동일하다. 그런데 열왕기의 저자는 본 사건을 아사가 행한 종교 개혁의 연속적 사건으로 이해(왕상 15:9-15)한 반면 본서 저자는 아사랴의 훈계를 잘 이행하는 과정으로 언급한다. 그래서 본서 저자는 아사가 이처럼 하나님의 뜻(1-7절)에 잘 순종하였기 때문에(8-18절) 전쟁이 없는 평안의 시절을 맞게 되었다고 언급하는 것이다(19절). 이와 같은 본장의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1) 교회는 끊임없는 개혁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아사 왕은 외부적인 대적 뿐만 아니라 유다 내부에 존재해 있던 대적 전부를 물리쳤다. 이처럼 교회는 외부적인 것뿐만 아니라 도 내부적으로도 우상을 제거하는 개혁을 계속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개혁을 통해 교회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더욱 부흥하게 되기 때문이다(행 9:31).
(2)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전쟁에서 돌아온 아사 왕은 아사랴를 통해 하나님의 훈계를 들었다. 그것도 단순한 내용의 말씀이 아니라 요호와와 함께 해야 한다는 경고의 말씀이었다. 그래서 아사는 우상 숭배의 물건을 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언약을 새롭게 하였다. 그리고 모친 마아가가 섬기던 아세라의 목상을 찍고 그 태후의 위를 폐하였다. 이처럼 현대의 교회와 그 교회 속아 속해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쓴에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에는 어중간한 상태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께서도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계 3:15) 하라고 단호히 말씀하신다.
1. 아사랴의 에언(15:1-7)
본문은 선지가 아사랴가 구스 사람의 군대를 대파하고 돌아온 아사 왕을 맞아 예언의 말씀을 기록한 대목이다. 이때 아사랴가 선포한 예언의 말씀은 여호와를 찾는 일에 계속해서 힘쓰라 는 내용이 그 요점인 바, 이 메시지에 나타나 있는 특이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으 축복과 저주 : 이는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면 북을 받고 반대로 하나님을 거부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신명기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서도 아사랴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그를 찾으면 축복을 받을 것이지만(2a절) 그 반대로 배교를 하면 평호와 안정이 파괴되는 등의 혹독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2b, 5, 6절). 이 같은 심판과 축복의 경고는 거의 모든 선지자들의 공통적인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신자들과 특별히 교회의 지도자들은 참 선지자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자로서 말씀을 준행할 때 수반되는 축복 뿐 아니라 그것을 버릴때 찾아오는 심판과 저주도 동등하게 선포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일 뿐 아니라(창 12:2;24:1;신 2:7) 심판과 진노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28:9;수 23:16;렘 30:24).
둘째, 지속적인 종교 개혁 촉구 :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방도는 오직 심령의 변화를 통해 내적.외적인 개혁을 단행하는 것뿐이다. 아사랴가 하나님의 진노를 서술한 후에(5, 6절) 그런즉 이라는 말을 삽입하여 종교 개혁의 필연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아사와 유다 백성들이 강력하고 지속적인 개혁을 단행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7절). 오늘날 교회 일각에서 일고 있는 종교 개혁의 운동이 소정(所定)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숙고해 볼 수 있다.
(1) 여호와께서는 가장 필요한 때에 당신의 일꾼들을 보내신다. 당시는 아사 왕이 승리에 도취하여 스스로 교만해지기 쉬운 때였다. 12:1에서 언급되어지고 있는 르호보암도 나라가 견과고 세력이 강할 때에 오히려 여호와의 율법을 떠났다. 그러기에 아사 왕이 이와 동일한 상황에 처하였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 아사랴를 그에게 보내셨던 것이다. 당시 아사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선지자가 있었다는 것은 아사 왕에게 큰 축복이었다. 하나님께서 아사 왕의 시대에 아사랴 선지자를 쓰셨듯이,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사 6:8)라는 여호와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했던 이사야를 선지자로 사용하셨다. 이와같이 성도들은 여호와께서 적절한 때에 사용하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2) 역사적인 과거사는 미래의 삶을 위한 한 지표가 된다.3-5절에 기록된 사실들이 과거사인지 아니면 현재나 미래의 예언인지레 대해서는 이미 주석에서 언급했었다. 그 주석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미리 나타내시는 미래의 성도의 삶에 대한 예언은 그 결과에 있어서 과거사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과거를 기초로 하여 미래의 삶을 예시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과거상에 나타나 있는 믿음의 조상들의 삶을 주의 깊게 살피는 역사 의식을 가져 현재의 삶을 성찰하는 지헤를 소유해야 할 것이다.
(3) 평안이나 불안과 같은 심리적 변화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즉, 인간의 감정은 환경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기 마련인데, 하나님은 이러한 환경을 통하여 우리의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시고 당신의 뜻을 나타내신다(5절). 물론 감정이 어떠한 사실을 인식하기 위한 분명한 근거가 되지는 못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평안한 마음을 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4) 여호와는 위로와 격려의 하나님이시다.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 (7절)는 말씀은 선한 행위에 따른 내적, 외적 보상이 분명히 있을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궁극적인 승리는 여호와께 있음을 확고히 믿어야 할 것이다.
2. 아사의 개혁과 언약의 맹세(15:8-19)
선지자 아사랴의 훈계가 원인이 되어 아사왕이 재차 종교 개혁을 일으키는 장면인 본문은 아사랴가 충고한 말씀에 기초해서 우상을 타파하고 언약을 새롭게 하는 대목이다. 즉, 아사랴의 예언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임을 믿었던 아사 왕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자마자 개혁 운동을 일으키고(8-11절) 언약을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12-15절) 우상 타파의 시범적 행위로 모친이 섬기던 아세라의 목상을 찍고(16절), 은과 금과 기명들을 하나님의 전에 드렸다(18절).
이러한 본문의 개혁은 14장에서 언급된 제1차 개혁(14:2-5)의 연속이기 때문에 그때보다는 지금이 내용 면에 있어 더욱 심도 깊은 개혁 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1차 개혁 시에는 이교적인 색채가 짙고 노골적인 우상들의 대대적인 파괴가 있었던 반면에 지금의 개혁에는 가장의 수호신들까지 제거하는 근본적인 개혁이 시행되었다(8절 주석 참조). 이와 더불어 본문에 나타나는 또하나의 특징은 왕가 내부의 개혁까지도 시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8절), 아울러 은과 금과 기명들을 하나님의 전에 바치는 일들도 있었다. 이 같은 본문에 나타난 개혁 운동의 과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확고한 신념과 실천 : 아사랴의 격려를 들은 아사 왕은 마음을 강하게 하여 개혁 운동을 단행하였다. 당시 온 유다와 베냐민 땅에는 솔로몬 말기 이후로부터 점증되어 왔던 우상 술배자들이 들끌호 있었다. 따라서 아사 왕이 우상을 파괴하면 커다란 반발이 야기될 것은 자명했다. 이 같은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아사 왕이 즉각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개혁 운동을 실시한 것은 그가 아사랴의 메시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했다는 것과 자신의 결단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응하여 주실 것(7b절)을 확고히 믿고 있었음을 드러내 준다.
(2) 경건한 자들이 모여듬 : 아사의 개혁 운동에 호응하여 북왕국의 에브라임, 므낫세, 시므온 지파 가운데서 그에게 돌아오는 자가 많았다(9절). 이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정책을 시행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실 뿐 아니라(9절), 그것이 대 내외적으로 드러나 경건한 신앙의 동지들이 모여든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악한 자들은 사람들을 이간시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지만 의인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는다(잠 11:30).
(3) 외적인 데서 내적인 개혁으로 진행 : 아사 왕은 성전 제단 수축, 우상 척결과 같은 외부적인 개혁을 실시하는 한편(8, 9절), 이를 내적인 개혁으로 발전시켰으니 곧 백성들의 마음을 개조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게 한 것이 그것이다(12-15절). 예배 의식의 변화나 환경의 개선은 개혁 운동의 계기가 될지는 몰라도 최종적인 목표나 성과가 될 수 없다. 개개인의 마음과 영혼의 변화 없이는 그 어떤 개혁 운동도 궁극적인 성공을 거둘 수 없다.
또한 아사 왕은 태후이며 모친인 마아가의 우상 숭배 행위까지도 처벌하였는데, 이는 그의 종교 개혁이 혈연의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지 않고 공정하게 시행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한편 그는 국가 지도층을 대변할 만한 인물을 처벌함으로써 자신의 개혁 의지를 확고하게 표명하고 나아가 우상 숭배를 자행하는 일반 국민에게 경종을 울리는 파급 효과도 노렸던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부모 공경은 인간 관곗 있어 중요한 계명임에 틀림 없지만 그것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전제하지 않고 이루어질 때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in the Lord) 순종하라 고 말씀하신다(출 32:26-29;신 33:9;엡 6:1;골 3:20). 따라서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1) 지속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마음을 강하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상당한 결단력이 없었다면 아사 왕의 2차 개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랜 세월 동안 민간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던 드라빔(가정 수호신), 즉 우상을 제거하게 되면 백성들의 큰 반발이 있을 것이고, 또한 자신의 모친인 마아가의 지위까지도 폐위시키는 일들이 개인적으로는 매우 큰 아픔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 왕은 마음을 강하게 하여 이런 일들까지도 훌륭히 개혁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 14:26)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이게 하신다는 것이다. 유다와 적대적이었던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지파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아사 왕과 함께 하심을 보고 그에게로 돌아왔다. 이런 일들은 르호보암 때에도 있었으나(11:13) 그 때는 여로보암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도망온 자들이 대부분이었다(11:14, 15). 그러나 아사 왕에게로 돌아온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증거를 직접 눈으로 목격한 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여호와께서는 의인을 중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되 다 자란 겨자 나뭇가지에 공중의 새들을 모으시는 것처럼(마 13:32) 모으시가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와 목회자들은 억지로 사람들을 모으려는 방법을 연구하기보다는 의를 나타낵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왜나하면 그 마음들을 움직여 모이게 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3) 여호와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섬기는 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언제든지 만나 주신다는 것이다(신 4:29). 일반적으로 구약 싣에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나 대제사장만이 여호와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본문 1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는 자들을 모두 만나셨음을 보게 된다. 이로 볼 때 하나님은 분면 어떤 특정한 대표적 인물 뿐 아닐 전체 백성들을 모두 만나시기를 원하심을 알 수 있다.
* 결단하는 일에 대한 조언. 그리스도인들은 신앙 생활 속에서 종종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결단하는 일은 좀처럼 쉽지가 않다. 특히 그 결단으로 인하여 희생이 따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결단의 순간을 놓치고 갈팡질팡하는 경우를 흔히 겪는다. 그러나 졀단할 때에는 분명히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하므로 신앙적인 분별이 필요하다. 이와같이 결단해야 할 순간을 맞이할 경우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인가를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본문을 보면 아사 왕은 마음을 강하게 하여 개혁을 추진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아사 완은 이미 한번의 개혁릉 치르면서 많은 고난을 겪은 터라 다시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기에는 더 성공적인 개혁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결단을 내리는 데는 다음과 같은 준비와 과정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준비와 과정에 대해 본 강해에서 간략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촉구하시는가를 살피라 : 아사 왕에게는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7절)는 하나님의 촉구가 있었다. 참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항상 의로움 일에 대해서는 촉구하신다. 그리고 또 의로운 일들을 위하여 의로운 자들을 찾으신다. 야고보가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약 5:16)고 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라면 성령께서 그 마음을 계속 촉구하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결단할 때는 항상 하나님의 촉구가 있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다.
(2) 믿음의 사람들의 인정(認定)이 있는가를 확인하라 :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아사 왕과 함께하심을 보았고 그가 하는 일이 옳다고 인정하였다(9절). 과연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믿음의 사람들은 쉽게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도 하나이고 믿음도 하나이고 하나님도 하나이시기 때문이다(엡 4:4-6). 그러기에 우리는 어떠한 일을 결단하기에 앞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3)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께 충성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확인하라 : 결단하는 일에는 반드시 자신의 주위의 사람들이나 개인의 손익 문제가 항상 장애물로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사 왕은 모친을 폐위시키는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결단했다. 따라서 결단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가족까지라도 미워하며 자기를 부인하는(눅 14:26) 절대 충성된 마음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먼저 그런 마음을 갖도록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결단하는 일은 도리어 올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롯의 아내를 들 수 있능데 그녀는 결단의 마음을 온전히 갖추지 못한 채 소돔성을 더났기 때문에 소금 기둥으로 변하는 형벌을 당하게 된 것이다.
(4) 마음에 결단이 섰을 때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과감히 행하라 : 이는 일이 진행되는 도중에 생기는 장애물에 대해서 넘어지지 말고 그것을 끝까지 극복하라는 뜻인데,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불을 만날지라도 자신들이 결단한 바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승리할 수 있었다. 성경은 이같이 결단한 일을 힘써 행하라 고 촉구하며(19:11;스 10:4), 낙심하지 말라 고 격려한다. 그리고 그 일들에 대해 끝까지 인내할 때(행 11:23;딤후 1:14;벧전 5:9;계 2:26)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다고 함으로 결단하는 일을 장려하고 있다(잠 14:14;눅 6:35;고전 3:14;히 10:35).
*냉혹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일들에 관하여. 아사 왕은 유다 백성들과더불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12절)나서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라는 법령을 선포했다. 이것은 일견 매우 잔혹하게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인 사랑과 매우 동떨어지는 것처럼 생각된다. 비단 본문의 말슴 뿐만 아니라 이와 유사하게 이스라엘의 율법을 살펴보면 사형 에 관한 언급들이 자주 발견된다. 그 예로 신며이에서는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다(신 7:1-4;13:6-10). 그리고 출애굽기에서는 살인자와 사람을 유괴한 자와 부모를 치거나 저주한 자는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출 21:12-17).
참으로 이러한 율법을 얼핏 살펴볼 때에는 너무 엄격하고 냉혹학 보일 뿐만 아니라 매우 강제적이어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무시한 듯이 보여 배타적인 것처멀 느껴진다. 그러나 이러한 냉혹한 율법은 오히려 보다 깊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율법을 주신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출애굽할 때에 이스라엘의 유일 신앙을 크게 위협하는 요소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가나안인들의 다신교(polytheism)와 저속하고 음란한 풍습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 존재 기반을 잃어버리게 하기에 충분히 위협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위협적인 것들에 대해 매우 냉혹하게 대처하셨던 것이다. 만인 여호와께서 이러한 범죄를 그냥 버려 두신다면 언젠가는 또한번의 출애굽이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 명령은 참으로 이스라엘의 신앙의 순수성을 보전하기 위한 필연적인 조치였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우리가 신앙을 단순히 생활의 악세사리가 아니라 생활리 전부임을 이해한다면 이러한 명령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배치(背馳)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사랑의 결과임을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결국 스스로 멸망의 길을 찾는 거싱므로 하나님의 명령은 성도들이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의 길을 찾도록 촉구하는 것이라 하겠다. 진정으로 타락한 신학과 윤리가 횡행하고 있는 이때에 이 같은 냉혹한 조치는 오히려 필수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현대의 신학과 윤리는 하나님으 말씀에 범죄하는 것에 대해 비교적 완곡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도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늘 자나 복음의 진리를 흐리는 자들에 대해서 보다 선명한 징계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전 5:3-5, 13;딤전 1:20). 그래야만 교회가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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