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사사기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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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 본절은 5절과 더불어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 총회에서 맹세하여 가결하였던 사항들(20:1-11) 중에서 미처 밝히지
않았던 사항을 회상하여 기록함으로써 본장에 기록된 사건의 배경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곧 베냐민 지파와의 싸움에 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혈기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맹세하였던 두 가지
사항이다. 첫째는 자기 딸을 베냐민 자손에게 아내로 주지 않겠다는 것과,
둘째는 온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미스바 총회에 참석치 아니한 자들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5절) 등이다. 결국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이 두 맹세를 이행치 않을 수 없었는데 이로써 또 다른
살상(8-12절)과 무모한 납치극(13-25절)이 벌어진다(Pulpit Commentary).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기시하여 왔었다(창 28:6-9). 그리고 그것은
가나안 원주민과 관련해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사항이기도
하다(신 20:16, 17). 따라서    이스라엘자손이 미스바 총회에서 본절과 같은
맹세를 하였다는 것은 곧 그들이 베냐민 지파를가나안 이방인들과 동등히
취급함으로써(신 7:3) 이스라엘 사회에서 축출하려 한 것임을 알 수
있다(Matthew Henry).

 

=====21:2
 벧엘에 이르러...대성 통곡하여 -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벧엘에
이르렀다'는것은 그들이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을 마친 후(20:48) 다시금
하나님의 언약궤와 대제사장 비느하스가 있는 벧엘(20:26-28)로 되돌아온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베냐민 지파와의 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쟁의 열기가 가시면서 미스바에서 한 그들의 처음
맹세에 따르면 그들은 위대한 성전(聖戰)을 훌륭히 수행한 셈이다(20:8-11).
그러나 결과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열 두 지파 중에 한 지파가 거의 멸종
위기에 닥치게 되므로서 언약 백성으로서의 구성 요건이 상실되게 되었던
것이다.따라서 백성들은 이 문제를 긴급히 해결하여야 했는데 이미 저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 맹세로 인해 해결책이 없자 대성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서 장탄식을 늘어놓고 만다(3절).


=====21:3
 어찌하여 한 지파가 이즈러졌나이까 - 이스라엘 백성들이 12지파로
존속할 수 없게된 것이 마치 하나님의 탓인 양 하나님께 원망하는
장면이다(Goslinga). 아무튼 이스라엘 12지파의 존속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입장에서 필수적인 전제였다(출24:4;신 27:11-13). 즉 언약
공동체 중 한 지파가 빠진다는 것은 언약 백성으로서의성립 요건을 결여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베냐민 지파의 멸절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한 지파의 몰락이 아니라 그 공동체 전체의 사활(死活)에 관계된
심각한 문제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 지파의 멸절 위기에 대하여
이렇게    거국적으로 노심 초사(勞心焦思)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21:4
 거기 한 단을 쌓고 - 당시 벧엘에는 이미 제단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20:26) 본절에서 그들이 또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어쩐지 이상하게
보인다. 그러나 통상적인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르면 이에 대한 설명도
가능해진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분별하게함부로 아무 곳에서나 제단을
쌓지는 않으며 반드시 신의 현현이 있는 곳에서만 단을쌓는 것을 관습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민족적인 위기를 직면했거나 축제 등을치룰
때에도 단을 쌓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특히 전쟁 전(前)이나 후(後)에
단을 쌓는 경우가 많았다(삼상 7:9;13:9;14:35). 따라서 본절에서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전쟁을 마친 후 재기된 민족적 과제를 놓고서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새롭게단을 쌓았을 것이다(Keil & Delitzsch).
 번제와 화목제 - 20:26 주석 참조.


=====21:5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 본절로 보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베냐민 지파의 멸절 위기를 타개할 방도를 모색하던 중 일전에
그들이 미스바 총회에서 맹세하였던 중 일전에 그들이 미스바 총회에서
맹세하였던 사항을 기억하게 된 듯하다.그것은 곧 기브아 거민을 응징하기
위해 모인 미스바 총회(20:1, 2)에 참석치 아니한이스라엘 자손들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1절 주석 참조. 따라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실을 새롭게 확인하여 불참자들의 성읍을 친 후 그곳 처녀들을 사로잡아
베냐민 자손에게 줄 계획(12절)을 수립하였을 것이다.
 크게 맹세하기를...하였음이라 - 여기서 '크게 맹세하였다'는 것은
불이행의 경우에는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뜻한다(Keil & Delitzsch).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맹세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1) 긍정적인 면 : 언약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을 온전케 하는 일에 발뺌한 자들을 응징하는 것은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발뺌자들은 소극적이나마 기브아 사람들의
죄악(19:22-26)을 묵인한 셈이니 어떤 의미에서 적극적으로 범행에 동조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2) 부정적인 면 :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순수한동기에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응징하지 않고
베냐민 지파의 멸절 위기를 타개하는타개책으로 그들을 응징하였다는
점이다.


=====21:6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가로되 - 여기서 '뉘우쳐'에 해당하는 '나함'(*
)은'한숨 쉬다', 호의적으로 '동정심을 갖다', 소극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다' 등의 뜻이다. 따라서 이는 적극적인 의미의 회개와는 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스라엘백성들은 베냐민 지파가 멸절하게 된 그
현상 자체에 대해서만 안타까와하였을 뿐 그에 대한 책임이 자신들에게도
있다는 연대 의식(solidarty)을 느끼고 회개하는 자리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던 것이다.


=====21:7
 그 남은 자들 -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패퇴(敗退)하여 림몬 바위로
도망, 간신히목숨을 보존한 베냐민 자손 600명을 가리킨다(20:47).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하였도다 - 본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들은 두 가지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1) 남아
있는 600명의 베냐민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딸들을 주어 한
지파의 사멸을 방지하는 것이다. (2) 딸을그들의 아내로 주지 않겠다고 한
맹세(1절)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이 맹세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딸을 베냐민인에게 주는 것이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둘러
조사를 시작하였는데 그 결과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일전의 미스바
총회에도, 그 같은맹세에도 참여치 않았음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의도는 감추고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치기로결의한다(8-11절). 5절
주석 참조.


=====21:8
 야베스 길르앗 - 요단 강 동쪽 길르앗 땅에 있는 갓 지파의 성읍이다. 이
성읍은요단강의 지류 중 갈릴리 바다 남쪽 32km 지점의 동쪽으로부터
요단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와디 엘 야비스(Wadi el-Yabis) 근처에
위치하였다. 이 성읍을 진멸하기 위해 1만 2천 명의 군사만을 보낸
것(10절)으로 볼 때에 그리 큰 성읍은 아니었던 것 같다.이러한 견해는 그
성읍에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4백 명 밖에 되지 않았던 사실로도 뒷받침
되어진다(12절). 이러한 야베스 길르앗은 훗날 사울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
성읍이다(삼상 11장). 야베스 거민이 아모리 사람 나하스에게 포위당했을
때 사울이 성읍을 도와 구출해 주었다. 그리고 야베스 사람들은 훗날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벧산 성벽에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가져다가 야베스에묻어 주었다(삼상 31:11-13).
때문에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용감하고 경건한 이들
야베스 사람들의 행위에 대하여 특별한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삼하2:5).

 

=====21:9
 백성을 계수할 때에...없음을 보았음이라 - 앞서 이스라엘이 미디안
총회로 모여베냐민과의 싸움을 결의했을 때(20:1-11) 그들은 분명 군사들의
수를 점호(點呼)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야베스 길르앗에서는 한
사람도 총회에 참석치 않은 것을 알았을 것이다. 본절은 바로 그 같은
사실을 일컫는 듯하다. 20:17 주석 참조.


=====21:10
 야베스 길르앗 거민과 및 부녀와 어린아이를 칼날로 치라 - 이는 곧
야베스 길르앗성읍에 대하여 철저한 심판을 가하라는 뜻이다. 한편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미스바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비록 그곳의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의 책임이 아닐 터인데도 이처럼 그들까지 모두 함께
진멸시키도록 한 이유는 공동체적 책임 때문이다. 즉당시 공동체 의식을
중요시 하던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한 성읍의 일개인이 범죄하였을경우에도
그 성읍에 대하여 전체 책임을 묻곤 하였다(신 21:1-9). 그것은 곧
이웃이범죄할 경우 그를 개도(開導)할 책임이 각자에게 있음을 교훈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본절에서 야베스 길르앗 성읍을 철저히 진멸토록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인데그러나 당시 남자를 알지 못하던 처녀
400명만은 멸절 대상에서 제외되었다(12절).


=====21:11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할 것이니라 - 여기서 '남자와 잔 여자'란 곧
'기혼녀'(married women, Living Bible)를 가리킨다. 고대 사회에서는 대개
전쟁이나 변란(變亂)이 일어났을 때 기혼녀를 죽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민
31:17). 아마 이는 그들을살려둘 경우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 획책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여기서 '진멸하다'에 해당하는 '하람'(* )은 '구분하다', '봉헌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자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듯
야베스 길르앗 거민들을 멸절시킨 것을 의미한다.


=====21:12
 젊은 처녀 사백인을 얻었으니 - 남은 베냐민 자손들(20:47)에게 주어
그들로 하여금 후사를 잇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야베스 길르앗을
치게 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의도가 분명히 나타난다. 그들은 겉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처럼 행했지만 실상은 교묘히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즉 이로써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이 서원한
것(1절)을 어김이 없이도 베냐민 자손들에게    아내를 구해줄 수 있게
된것이다. 7절 주석 참조.
 그들이 실로 진으로 끌어 오니라 - 2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 지파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여 번제를 드린 곳은 분명히
벧엘이었다. 그런데 본절에서 야베스 길르앗 처녀 400명을 이끌고 간 곳은
벧엘이 아니라 실로였다.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의 견해가 매우 다양하다.
혹자는 이제 베냐민의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벧엘로옮겼던 언약궤를 다시
실로로 복귀시켰다고 한다(Hervey). 그리하여 백성들은 다시금벧엘이 아닌
성소 실로로 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19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여호와의 절기가 가까웠기 때문에 언약궤를 실로로 옮겼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Goslinga). 그리하여 백성들은 다시금 성소로 모인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처럼실로는 엘리 제사장 당시까지(삼상 4:3, 4) 희막이
있던 성소로 여호수아 시대에도 이곳에서 자주 총회가 열렸었다(수
18:1;21:2;22:9).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 - 야베스 길르앗은 요단 동편의 성읍인 반면
실로는 요단 서편, 즉 가나안의 성읍이다. 따라서 이러한 실로를 야베스
길르앗과 대비시키기 위하여'가나안 땅'이란 말을 사용한 듯하다(Hervey,
Keil).


=====21:13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 베냐민 사람 600명은 이때까지 약 넉달
동안(20:47)림몬 바위에 숨어 지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평화를
공포하고 나서야 비로소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14, 23절). 아무튼
이스라엘 회중이 이처럼 남은 베냐민자손들에게 평화를 공포한 것은 백번
잘한 일이다. 성도는 비록 이웃과 다투었다 할지라도 먼저 화해를 청하는
것이 옳다(마 5:21-26). 뿐만 아니라 원수와 죄인조차도 회개할 때에는
용서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한다(고후 2:7).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진정한 사랑의 정신이다(요 13:34, 35).


=====21:14
 오히려 부족하므로 - 야베스 길르앗 성읍에서 데려온 처녀들은
400명이고(12절) 베냐민 사람들은 600명이었기 때문에(20:47) 약 200명의
처녀가 부족한 셈이다. 이를 위해 부득불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다시
계책을 짜내었는데 곧 실로    여인 납치극이다(19-23절).

=====21:15
 여호와께서...궐이 나게 하셨음이더라 - 본절에서 본서 기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궐이 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이 단지 지파간의 갈등으로 빚어진
내전이었던 것만은 아니며 거기에는 죄악중에 있던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이 개입되어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궐'에
해당하는 '페레츠'(* )는 '분열, '갈라진 틈' 등의 뜻으로서 3절의
'이지러지다', '빠지다'라는 뜻의 '파케드'(* )와 동의어이다. 따라서 본절을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한 틈이 나게 하셨다'는
말이 된다(KJV, RSV, 공동번역).

=====21:16
 회중 장로들이 가로되...얻게 할꼬 - 모자라는 200명의 처녀 때문에 다시
장로들의회의가 열렸다. 한편 여기서의 문제 제기(16-18절)는 6, 7절에서의
문제 제기와 거의유사하지만 다음과 같은 새로운 내용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1) 6, 7절에서와는달리 베냐민 지파의 실상(14절)을 분명히 목격한
뒤였다. (2) 여호와께서 한 지파를궐이 나게 하셨기 때문에(15절) 그들이
길르앗 야베스를 쳐서 처녀를 데려온 것으로(12절)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없었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 남은 자들에게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꼬'라고 한 장로들의 탄식 및 의견 제시는 6,
7절에서제기했던 것보다 더욱 강한 어조를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1:17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하리니 - 여기서 '기업'에 해당하는 '예레솨'(*
)의일반적 의미는 '산업', 또는 '소유'를 뜻한다. 그러나 베냐민 사람
600명은 이미 자신드의 영토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있는 상태이다(14절).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기업'은 아내를 얻어 이룬 '가정'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아내가 없으면 베냐민 지파의 후사(後嗣)를 얻을 수가 없고
그렇게 되면 베냐민 지파의 이즈러짐은 여전히 방지할 수 없다. 추측컨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모자라는 처녀 때문에 베냐민    지파간에일어날 불화를
염려하고 있었던 것 같다.

 

=====21:18
 맹세하여 이르기를...저주를 받으리라 -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선
하나님과의 맹세이든, 사람과의 맹세이든 모두를 막론하고 '맹세'는 반드시
시행되어야만 하는 불변의약속이었다. 따라서 대개 히브리인들은 무엇을
맹세할 때, 그것을 이행치 못할 경우죽음이나 어떠한 저주라도
감수하겠다는 약속을 곧잘 첨언(添言)한다(수 6:26;삼상14:28;왕상 2:42).
본절 역시 바로 그러한 한 예인데 '맹세의 엄정성'을 잘 드러내 준다. 민
30:1-8 강해, '서원과 맹세에 대하여' 참조.

 

=====21:19
 벧엘 북편...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편 실로 -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실로'는12절에 나오는 '실로'와 다른 곳이 아니다. 성경에 언급된
'실로'(Shiloh)란 지명은언제나 한 곳을 가리키는데 본절의 설명에 의하면
그 위치는 예루살렘 북쪽    약 32km지점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호수아 때(수
18:1)부터 엘리 제사장 때(삼상 4:3, 4)까지그곳에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성막이 있었는바 종교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성읍이었다.현재 실로는 '길벳
세일룬'(Khirbet Seilun)으로 알려지고 있다.
 르보나 - 실로와 세겜 사이에 있는 큰 길가의 마을이다. 이 마을은
실로에서 서북쪽으로 약 5km 정도 떨어져 있는 오늘날의 '루반'(Lubban)인
것으로 추정된다.
 세겜 -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49.6km 정도 떨어진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 성읍이다. 8:31 주석 참조.
 매년 여호와의 절기가 있도가 - 실로에서 매년 절기가 있었다는 언급은
삼상 1:3,7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무슨 절기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다만
    여기서    '절기'에해당되는 '하그'(* )는 주로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
등 3대 절기에만 사용되는 말이다. 따라서 어떤 주석가들은
유월절이었다고 생각한다(Keil & Delitzsch,Hengstenberg, Lange). 왜냐하면
그들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었다는 것은(21절)과거 이스라엘의 홍해
도하(渡河)후 미리암의 지도하에 이스라엘의 딸들이 춤을 춘 것(출
15:20)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Lange). 그러나 다른 주것가들은
그것은실로 고유의 축제로서 신 12:10-12에 언급된 축제와 관련된다고
    생각한다(Hervey,Rosenmuller). 하지만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 이
세 절기 가운데 올리브(olive)와 포도등의 수확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장막절이다(신 16:13). 레위기 서론, '히브리절기와 축제' 참조. 따라서
본절의 축제도 포도원과 깊이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20, 21절)
장막절임이 분명한 것 같다(Patrick, Cundall). 장막절의 주요 행사는 주로
밤에 거행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베냐민 자손들이 춤추는 여자들을 쉽게
납치할 수있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대낮에
여인을 납치했다면 실로에서 베냐민 땅까지 데려가기도 전에 발각되었을
것이며, 발각되었다면 율법에 따라죽임을 당했을 것이다(출 21:16;신 24:7).

 

=====21:20,21
 본절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처럼 철저한 계획 속에서 베냐민    
사람들로 하여금아내를 취하여 갈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장로들이 이와
같은 납치극을 꾸민 이유는22절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편 베냐민 사람들
중에 아내가 없는 200명 뿐만 아니라 아내가 있는 나머지 400명의 베냐민
사람들도 분명히 이 일을 돕기 위해 나섰을 것이다.
 실로의 여자들이 무도하려 나오거든 - 패트릭(Patrick) 주교에 따르면
장막절에는이스라엘 처녀들이 춤을 추도록 허용되었는데 이들이 춤을 출
수 있도록 허용된 절기는 오직 장막절 뿐이라고 한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p. 251).
 붙들어 가지고...돌아가라 - 여기서 '붙들다'에 해당하는 '하타프'(* )는
마치 죄수를 체포하듯 '꽉 붙들어 놓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베냐민인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하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모습을 잘 드러내 주는 말이다.

 

=====21:22
 만일...쟁론하면 - 앞서 미스바 총회에서 자신들이 베냐민 자손에게 딸을
주지 않기로 맹세한 이스라엘 자손들(1절)은 아무도 그 같은 서원을
범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베냐민 자손들이 자기들의 딸을
납치해 가려는 일이 탄로나면 싸움이 일어날 것임이 분명하다. 본절은
바로 그 같은 사태를 가리키는데 만일 그러한 일이 발생할 경우 이스라엘
장로들은 자신들이 친히 베냐민인들을 위해 변호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너희에게 죄가 없을 없을 것임이니라 - 이처럼 이스라엘 장로들이
자신들의 딸을납치당한 실로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의 무죄성을 납득시키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논거(論據)가 있었을 것이다. (1) 길르앗
야베스와의 전쟁에서 베냐민 사람들의아내를 다 마련해 주지 못한 데 대한
이스라엘의 공동 책임이 있기 때문에(10-14절)실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딸을 납치당한 것은 실로인들의 책임만일 수 는 없다는 점이다. (2)
실로인들이 고의로 자신들의 딸을 내준 것이 아니라 베냐민 사람들이
강제로납치해 간 것이기 때문에 실로인들은 그들이 한 맹세를 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전쟁 때에는 자신들의 의지와는 달리
이방인들에게도 딸을 빼앗길 수 있는 일이다.그러므로 장로들의 이러한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21:23
 베냐민 사람들은 장로들의 계획대로 실로에서 춤을 추던 여인 200명을
데리고 그들의 기업으로 돌아갔다.
 성읍들을 중건하고 - 이처럼 베냐민 사람들이 아내를 얻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간후 가장 시급했던 일은 거의 잿더미로 변한 성읍들을
수리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베냐민들에게 속한 성읍은 앞서 이스라엘
연맹군과의 싸움에서 대부분 완파(完破)되었기때문이다(20:48).

 

=====21:24
 그때에 이스라엘 자손이...자기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 본절은 모든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모든 이스라엘
지파는 베냐민 지파의 문제가완전히 종결될 때까지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다가 이제서야 각자 자기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곳을 떠나 - 여기서 '그곳'이란 일차적으로 실로라고 생각할 수
있다(12절). 그러나 혹자는 16-23절의 상황에 의거해 대부분의 백성들은
미스바에서 베냐민 지파의문제가 종결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고
주장하기도 한다(Goslinga).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 마지막으로 본서 기자는 사사기의
역사를 마감하면서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그러한 불법적인 일들이
발생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7-21장에 걸쳐 기록된 불법적인
일들에 대한 본서 기자의 이러한 결말은 사사기 시대의 예비적인 성격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고 있다.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7:6 주석을 참조하라.

 

 

 

앞장에서의 동족 상잔(同族相殘)의 비극으로 인하여 이즈러진 베냐민 지파를 회복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고 있는 장면이다. 즉 림몬 바위에 숨어 살아난 600명의 베냐민 사람들(20:47)에게 아내를 마련해 주어 기업을 보존케 하려고 이스라엘은 먼저 야베스 길르앗을 쳐 처녀 400인을 얻는다(1-12절). 그리고 나머지 모자라는 처녀 200인에 대해서는 베냐민인들로 하여금 직접 실로에 가서 구하도록 방편을 베풀어 준다(13-24절).
그런데 본서 기자는 이러한 본장을 결론 지음에 있어서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925절0란 말로 맺음으로써 당시 사회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시사해 준다. 물론 본장을 살펴보면 바알 숭배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백성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 민족적인 유대감이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지파간의 긴밀도도 매우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문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지도자(2:7)가 없으므로 이스리엘 백성들은 어떤 당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20장에서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을 결의하는 과정에서 그러했고(20:10, 11) 본장에서 길르앗 야베스를 치는 과정과 베냐민 사람들로 하여금 실로에서 무도하는 처녀들을 납치하도록 충고한 과정에서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상 가운데서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과거 조상들이 지켜 오던 종교적 관습은 명맥을 유지해 왔다는 점이다. 즉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서 회개한다거나(2절) 하나님 앞에 맹세한 바는 변개치 못하는 것인 줄로 알고 있는 점 등이 그것이다(1, 5절). 하지만 이러한 인본주의적 요소와 명맥만울 유지하는 산본주의적 요소의 병존(倂存)은 결국 상호 충돌과 모순만을 일으킬 뿐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자신들의 소견대로 행하고서는 결과적으로 혼란에 빠지자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께 부르짖는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분명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데 곧 참 신앙이 없는 외형적, 가시적 신앙 행위는 스스로를 곤경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은 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라고 말했고 이사야 선지자도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사 1:19)라고 말했다.
그러니 이상과 같은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즉 하나님을 떠난 자의 삶은 꼬리를 무는 죄의 악순환과 혼돈뿐이란 점을 ! 그리고 그러한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피상적, 형식적 신앙과 해결책만으로는 안 되고 진정 하나님께 자신을 내맡기고 인도하심에 따르는 길뿐이란 점을 !

1. 이스라엘 총회의 당면 문제(21:1-7)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서 사라지게 될 위기에 처한 베냐민 지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이스라엘 총회가 당면한 어려움에 대하여 가록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스라엘 총회는 림몬 바위에 숨어 겨우 목숨을 보존하였던 베냐민인들이(20:47) 다시금 한 지파를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 600명에게 아내를 주어 기업을 잇도록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들이 미스바에서 기브아의 죄악을 듣고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베냐민 사람에게는 절대로 딸을 주지 않겠다고 저주하여 맹세한 바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아내를 구하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1절). 만일 이방 여인을 보내어 그들과 결혼시키며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지파가 아닌 이방 민족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런 방법은 아예 제기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이스라엘 딸들 중에서 아내를 구해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맹세한 서원을 준수해야만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본문은 우리에게 크나큰 교훈을 던져 주는데 곧 다음과 같다.
(1) 하나의 범죄 또는 실책은 연속되는 범죄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즉 베냐민 지파는 스스로의 자존심과 완악함 때문에 비참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고(20:12-16) 이스라엘 자손들은 혈기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은 채 한 지파를 멸절케 하는 무서운 맹세를 하였던 것이다(1절).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악순환 내지 모순은 하나님을 배반한 그들의 죄악에서 비롯된 것이다.
(2) 함부로 맹세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 가운데는 베냐민 사람에게 딸을 아내로 주지 않겠다는 맹세 외에도 미스바 총회에 참석치 아니한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맹세가 나온다(5절). 결국 이스라엘은 이 같은 맹세도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하였는바 야베스 길르앗 거민은 이스라엘에 의해 무참히 도륙당하고 만다. 물론 그 결과, 베냐민인들의 아내를 구하는 문제는 해결되었지만(21:8-12) 이처럼 경솔한 맹세로 인하여 무고한 인명이 살상당한 것은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큰 문제이다.

숫자 '12'의 의미 - 성경에 나오는 여러 숫자들은 제각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중 '12'는 '완전 수'라고 하는데 흔히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성취를 의미한다.
한편 이러한 숫자 12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적인 집착은 이스라엘 역사 상에 자주 나타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파의 수가 늘고 주는 것에 상관없이 12지파를 보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예를 들면 레위 지파의 자리를 채워서라도 12 지파를 유지하기 위하여 요셉 지파를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로 계수한 것이라든지(수 14:3, 4), 본장에서도 베냐민 지파의 멸절을 막기 위해 야베스 길르앗이라는 한 성읍의 멸절을 불사한 것 등을 들 수 있다(1-15절). 또 신약 시대에는 12명이란 예수 수제자의 고유 수를 유지하기 위해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제자로 산출하기까지 했다(행 1:15-26). 그밖에도 성경에는 숫자 12와 관련된 것이 많은데, 곧 하늘의 열 두 문, 성벽의 열 두 기초, 열 두 과일을 맺는 생명나무 등이다(계 21, 22장). 그런데 숫자 12에 대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여한 종교적 의미는 대부분 제사장 나라로서의 특별한 선민 의식(출 19:5, 6)이나 그들의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는 내세관과 깊은 연관이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한 증거로 제사장과 레위적을 24 반열로 나눈 것과(대상 24:4 ; 25:31) 하늘 보좌를 둘러싼 24명의 장로들(계 4:4 ; 5:8 ; 11:16 ; 19:4)등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2. 문제 해결을 위한 두 가지 계책(21:8-25)
이스라엘 자손들이 베냐민 사람 600명에게 아내를 구해 주기 위해 취했던 두 가지 방도에 대한 언급이다. 먼저 그중 하나는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그들을 치고 그들 중에서 처녀를 취하여 베냐민 사람의 아내로 주는 것이었다(8-12절).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딸을 베냐민인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한 자신들의 맹세(1절)를 준수할 수 있게 되고 베냐민 사란=바들도 아내를 얻어 한 지파의 사멸을 방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야베스 길르앗은 그리 크지 않은 성읍이라 그곳에서 초녀 600명을 다 구할 수가 없었으니 또 다른 방도를 강구치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모색한 두번째 방도는 베냐민 사람들로 하여금 살로에서 춤추러 나온 처녀들을 납치케 하는 것이었다(13-25절). 그렇게 할 때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의(自意)로 자기 딸을 준 것이 아니므로 맹세를 파기할 때 오는 형벌(레 19:12)을 면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단지 인간적인 꾀만 좇아 추진한 이 두 가지 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불의가 내포되어 있다.
(1) 만일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총회에 참석치 않은 것이 그렇게 큰 죄였다면 그들이 그와 같이 총회에 참석치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거나 그들로 하여금 총회에 나와 사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어야 했다는 점아다(마 18:15 ; 요일 5:16, 17).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러한 법적인 절차를 무시하면서까지 자신들의 당면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하며 한 성읍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버린 것이다.
(2) 베냐민 사람들로 하여금 실로의 처녀들을 납치하도록 한 것은 자신들의 죄책을 합리화시키는 또 다른 죄악을 범한 것이란 점이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당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보다는 그들의 잘못된 맹세를 지키기에만 급급하여 타인의 인격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또 다른 죄악을 범한 것이다.
(3) 모든 일반 백성들은 이에 대하여 침묵하므로 같은 죄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일반 백성들 중에는 아무도 이러한 불의한 방법에 의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다. 더욱이 그 당시 대제사장으로 있던 비느하스(20:28) 조차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같이 고의적으로 죄를 묵과하는 행위는 오히려 적극적인 범죄보다 더 죄악된 것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그들의 피상적인 해결책으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 오직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하여 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뿐이다(롬 5:9).

합리적 사고 방식의 맹점(盲點) - 합리적 사고 방식이란 일체의 비합리적이고 우연적인 것을 배척허고 이성(理性)과 논리(論理)에 근거하여 어떤 사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인식하는 사고 방식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 방식은 종종 지나치게 과학적인 경험을 중시한 나머지 우리의 이성을 초월한 양심이 증거해 주는 것조차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이성(理性)과 과학을 신격화하는 무신론(無神論)에 빠져 버리는 경우조차 있다, 이는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이성이 죄악에 물듦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칼빈주의적 사고 방식과 배치되는 위험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이러한 사고 방식의 소유자들은 종종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은폐하기 위하여 합리성을 주장하며 과학을 내세우게 되는데 이것은 더더욱이 인간이 전적 타락의 한 증거가 된다. 또한 이러한 사고주의자들은 합리적 이성의 작용에 의하여 성취되는 세계관을 지향하고 기존한 모든 비합리적인 것들을 합리적으로 개선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곧잘 한
다. 그 예로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일어난 자유 신학에서의 비산화화 작업이나 슐라이어막허의 종교관을 들 수 있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신앙 자체를 비합리적으로 규정하는 무신화(無神化) 작업임이 분명하다.
한편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이제 이스라엘 장로들이 실로의 춤추는 처녀들을 베냐민 사람들의 아내로 취하게 한 사건을 살펴보자(16-22절). 왜냐하면 이 사건은 바로 이러한 합리적 사고 방식이 갖는 잘못을 모두 범한 대표적인 예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딸들을 자의(自意)로 베냐민 사람의 아내로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한 맹세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22절) 그들의 맹세가 오직 하나님의 심판과 권위 아래 있음을 무시한 처사였다. 또한 맹세의 성취 여부는 만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건실함과 성실함에 달려 있다는 사실(출 22:7, 10, 11)을 망각한 것이다.
이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택함받은 성도들은 세상의 부패와 죄에 대하여 합리적으로 대처해 나갈 것이 아니라 날마다 썬어져 가는 구습들을 벗어버리는 노력에 게을리해서는 안 됨을 교훈받을 수 있다(엡 4:22; 딤후 1:10).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께서도 온 인류의 죄악을 합리적인 방법으로가 아닌 십자가의 희생으로 친히 해결하셨지 않는가(롬 3:25; 엡 1:22, 23)!

21:1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본 절은 5절과 더불어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 총회에서 맹세하여 가결하였던 사항들(20:1-11) 중에서 미처 밝히지 않았던 사항을 회상하여 기록함으로써 본 장에 기록된 사건의 배경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곧 베냐민 지파와의 싸움에 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혈기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맹세하였던 두 가지 사항이다. 첫째는 자기 딸을 베냐민 자손에게 아내로 주지 않겠다는 것과, 둘째는 온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미스바 총회에 참석치 아니한 자들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5절) 등이다. 결국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이 두 맹세를 이행치 않을 수 없었는데 이로써 또 다른 살상(8-12절)과 무모한 납치극(13-25절)이 벌어진다(Pulpit Commentary).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기시하여 왔었다(창 28:6-9). 그리고 그것은 가나안 원주민과 관련해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사항이기도 하다(신 20:16-17). 따라서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 총회에서 본 절과 같은 맹세를 하였다는 것은 곧 그들이 베냐민 지파를 가나안 이방인들과 동등하게 취급함으로써(신 7:3) 이스라엘 사회에서 축출하려 한 것임을 알 수 있다(Matthew Henry).



21:2 벧엘에 이르러 … 큰 소리로 울며.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벧엘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들이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을 마친 후(20:48) 다시 하나님의 언약궤와 대제사장 비느하스가 있는 벧엘(20:26-28)로 되돌아온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우신 열 두 지파 중에 한 지파가 거의 멸종 위기에 닥치게 되므로서 언약 백성으로서의 구성 요건이 상실되게 되었다. 따라서 백성들은 이 문제를 긴급히 해결하여야 했는데 이미 저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 맹세로 인해 해결책이 없자 대성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서 탄식을 늘어 놓고 있다(3절).



21:3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12지파로 존속할 수 없게 된 것이 마치 하나님의 탓인 양 하나님께 원망하는 장면이다(Goslinga). 아무튼 이스라엘 12지파의 존속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입장에서 필수적인 전제였다(출 24:4, 신 27:11-13). 즉 언약 공동체 중 한 지파가 빠진다는 것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성립 요건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베냐민 지파의 멸절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한 지파의 몰락이 아니라 그 공동체 전체의 사활에 관계된 심각한 문제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 지파의 멸절 위기에 대하여 이렇게 거국적으로 노심초사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21:4 거기 한 제단을 쌓고. 당시 벧엘에는 이미 제단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20:26) 본 절에서 그들이 또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어쩐지 이상하게 보인다. 그러나 통상적인 이스라엘의 관습을 참고하면 이해하게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함부로 아무 곳에서나 제단을 쌓지는 않았으며 반드시 신의 현현이 있는 곳에서만 제단을 쌓는 것을 관습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민족적인 위기를 직면했거나 축제 등을 치룰 때에도 제단을 쌓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특히 전쟁 전이나 후에 제단을 쌓는 경우가 많았다(삼상 7:9, 13:9, 14:35). 따라서 본 절에서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전쟁을 마친 후 재기된 민족적 과제를 놓고서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새롭게 제단을 쌓았을 것이다(Keil & Delitzsch).

번제와 화목제. 20:26 주석 참조.



21:5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냐. 본 절로 보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베냐민 지파의 멸절 위기를 타개할 방도를 모색하던 중 일전에 그들이 미스바 총회에서 맹세하였던 사항을 기억하게 된 듯하다. 그것은 곧 기브아 거민을 응징하기 위해 모인 미스바 총회(20:1-2)에 참석치 아니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1절 주석 참조. 따라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실을 새롭게 확인하여 불참자들의 성읍을 친 후 그 곳 처녀들을 사로잡아 베냐민 자손에게 줄 계획(12절)을 수립하였을 것이다.

크게 맹세하기를 … 하였음이라. 여기서 ‘크게 맹세하였다’는 것은 불이행의 경우에는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뜻한다(Keil & Delitzsch).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맹세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1) 긍정적인 면 : 언약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을 온전케 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을 응징하는 것은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들은 소극적이나마 기브아 사람들의 죄악(19:22-26)을 묵인한 셈이니 어떤 의미에서 적극적으로 범행에 동조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2) 부정적인 면 :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순수한 동기에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응징하지 않고 베냐민 지파의 멸절 위기를 타개하는 타개책으로 그들을 응징하였다는 점이다.



21:6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이르되. 여기서 ‘뉘우쳐’에 해당하는 원어 ‘나함’은 ‘한숨 쉬다’, 호의적으로 ‘동정심을 갖다’, 소극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다’ 등의 뜻이 있다. 따라서 이는 적극적인 의미의 회개와는 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베냐민 지파가 멸절하게 된 그 현상 자체에 대해서만 안타까워했을 뿐 그에 대한 책임이 자신들에게도 있다는 연대 의식을 느끼고 회개하는 자리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21:7 그 남은 자들.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패퇴하여 림몬 바위로 도망, 간신히 목숨을 보존한 베냐민 자손 600명을 가리킨다(20:47).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 … 하였도다. 본 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들은 두 가지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1) 남아 있는 600명의 베냐민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딸들을 주어 한 지파의 사멸을 방지하는 것이다. (2)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않겠다고 한 맹세(1절)를 범하지 말아야 하였다. 따라서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이 맹세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딸을 베냐민인에게 주는 것이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둘러 조사를 시작하였는데 그 결과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일전의 미스바 총회에도, 그 같은 맹세에도 참여치 않았음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의도는 감추고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치기로 결의한다(8-11절). 5절 주석 참조.



21:8 야베스 길르앗. 요단 강 동쪽 길르앗 땅에 있는 갓 지파의 성읍이다. 이 성읍은 요단 강의 지류 중 갈릴리 바다 남쪽 32 km 지점의 동쪽으로부터 요단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와디 엘 야비스(Wadi el-Yabis) 근처에 위치한다. 이 성읍을 진멸하기 위해 1만 2천 명의 군사만을 보낸 것(10절)으로 볼 때에 그리 큰 성읍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러한 견해는 그 성읍에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4백 명 밖에 되지 않았던 사실로도 뒷받침 된다(12절). 이러한 야베스 길르앗은 훗날 사울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 성읍이다(삼상 11장). 야베스 거민이 아모리 사람 나하스에게 포위당했을 때 사울이 성읍을 도와 구출해 주었다. 그리고 야베스 사람들은 훗날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벧산 성벽에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가져다가 야베스에 묻어 주었다(삼상 31:11-13). 때문에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용감하고 경건한 야베스 사람들의 행위에 대하여 특별한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삼하 2:5).



21:9 백성을 계수할 때에 … 없음을 보았음이라. 앞서 이스라엘이 미디안 총회로 모여 베냐민과의 싸움을 결의했을 때(20:1-11) 그들은 분명 군사들의 수를 점호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야베스 길르앗에서는 한 사람도 총회에 참석치 않은 것을 알았을 것이다. 본 절은 바로 그 같은 사실을 일컫는 듯하다. 20:17 주석 참조.



21:10 야베스 길르앗 주민과 부녀와 어린 아이를 칼날로 치라. 이는 곧 야베스 길르앗 성읍에 대하여 철저한 심판을 가하라는 뜻이다. 한편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비록 그 곳의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의 책임이 아닐 터인데도 이처럼 그들까지 모두 함께 진멸시키도록 한 이유는 공동체적 책임 때문이다. 즉 당시 공동체 의식을 중요시 하던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한 성읍의 개인이 범죄하였을 경우에도 그 성읍에 대하여 전체 책임을 묻곤 하였다(신 21:1-9). 그것은 곧 이웃이 범죄할 경우 그를 지도할 책임이 각자에게 있음을 교훈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본 절에서 야베스 길르앗 성읍을 철저히 진멸토록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인데 그러나 당시 남자를 알지 못하던 처녀 400명만은 멸절 대상에서 제외되었다(12절).



21:11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하여 바질 것이니라. 여기서 ‘남자와 잔 여자’란 곧 ‘기혼녀’(married women, Living Bible)를 가리킨다. 고대 사회에서는 대개 전쟁이나 변란이 일어났을 때 기혼녀를 죽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민 31:17). 아마 이는 그들을 살려둘 경우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 책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여기서 ‘진멸하다’에 해당하는 ‘하람’은 ‘구분하다’, ‘봉헌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듯 야베스 길르앗 거민들을 멸절시킨 것을 의미한다.



21:12 젊은 처녀 사백 명을 얻었으니. 남은 베냐민 자손들(20:47)에게 주어 그들로 하여금 후사를 잇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야베스 길르앗을 치게 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의도가 분명히 나타난다. 그들은 겉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처럼 행했지만 실상은 교묘히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했다. 즉 이로써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이 서원한 것(1절)을 어김이 없이도 베냐민 자손들에게 아내를 구해줄 수 있게 되었다. 7절 주석 참조.

그들을 실로 진영으로 데려오니. 2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 지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여 번제를 드린 곳은 분명히 벧엘이었다. 그런데 본 절에서 야베스 길르앗 처녀 400명을 이끌고 간 곳은 벧엘이 아니라 실로였다.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의 견해가 다양하다. 혹자는 이제 베냐민의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벧엘로 옮겼던 언약궤를 다시 실로로 복귀시켰다고 한다(Hervey). 그리하여 백성들은 다시 벧엘이 아닌 성소 실로로 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19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 여호와의 절기가 가까웠기 때문에 언약궤를 실로로 옮겼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Goslinga). 그리하여 백성들은 다시 성소로 모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실로는 엘리 제사장 당시까지(삼상 4:3-4) 희막이 있던 성소로 여호수아 시대에도 이곳에서 자주 총회가 열렸다(수 18:1, 21:2, 22:9).

이 곳은 가나안 땅이더라. 야베스 길르앗은 요단 동편의 성읍인 반면 실로는 요단 서편, 즉 가나안의 성읍이다. 따라서 이러한 실로를 야베스 길르앗과 대비시키기 위하여 ‘가나안 땅’이란 말을 사용한 듯하다(Hervey, Keil).



21:13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베냐민 사람 600명은 이때까지 약 넉 달 동안(20:47) 림몬 바위에 숨어 지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평화를 공포하고 나서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14, 23절). 아무튼 이스라엘 회중이 이처럼 남은 베냐민 자손들에게 평화를 공포한 것은 잘한 일이다. 성도는 비록 이웃과 다투었다 할지라도 먼저 화해를 청하는 것이 옳다(마 5:21-26). 뿐만 아니라 원수와 죄인조차도 회개할 때에는 용서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한다(고후 2:7).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진정한 사랑의 정신이다(요 13:34-35).



21:14 아직도 부족하므로. 야베스 길르앗 성읍에서 데려온 처녀들은 400명이었고(12절) 베냐민 사람들은 600명이었기 때문에(20:47) 약 200명의 처녀가 부족하였다. 이를 위해 부득불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다시 계책을 짜내었는데 곧 실로 여인 납치극이다(19-23절).



21:15 여호와께서 … 빠지게 하셨음이었더라. 본 절에서 본서 기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빠지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이 단지 지파간의 갈등으로 빚어진 내전이었던 것만은 아니며 거기에는 죄악 중에 있던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이 개입되어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21:16 회중 장로들이 이르되 … 얻게 할까. 모자라는 200명의 처녀 때문에 다시 장로들의 회의가 열렸다. 한편 여기서의 문제 제기(16-18절)는 6-7절에서의 문제 제기와 거의 유사하지만 다음과 같은 새로운 내용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1) 6-7절에서와는 달리 베냐민 지파의 실상(14절)을 분명히 목격한 뒤였다. (2) 여호와께서 한 지파를 빠지게 하셨기 때문에(15절) 그들이 길르앗 야베스를 쳐서 처녀를 데려온 것으로(12절)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없었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까’라고 한 장로들의 탄식 및 의견 제시는 6-7절에서 제기했던 것보다 더욱 강한 어조를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1:17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하리니. 여기서 ‘기업’에 해당하는 원어 ‘예레솨’의 일반적 의미는 ‘산업’, 또는 ‘소유’를 뜻한다. 그러나 베냐민 사람 600명은 이미 자신들의 영토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있는 상태이다(14절).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기업’은 아내를 얻어 이룬 ‘가정’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아내가 없으면 베냐민 지파의 후사를 얻을 수가 없고 그렇게 되면 베냐민 지파의 이즈러짐은 여전히 방지할 수 없다. 추측컨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모자라는 처녀 때문에 베냐민 지파간에 일어날 불화를 염려하고 있었던 것 같다.



21:18 맹세하여 이르기를 … 저주를 받으리라. 이스라엘 사회에서 하나님과의 맹세든, 사람과의 맹세든 ‘맹세’는 반드시 시행되어야만 하는 불변의 약속이었다. 따라서 대개 히브리인들은 무엇을 맹세할 때, 그것을 이행치 못할 경우 죽음이나 어떠한 저주라도 감수하겠다는 약속을 첨언했다(수 6:26, 삼상 14:28, 왕상 2:42).



21:19 벧엘 북쪽 …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쪽 실로.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실로’는 12절에 나오는 ‘실로’와 다른 곳이 아니다. 성경에 언급된 ‘실로’란 지명은 언제나 한 곳을 가리키는데 본 절의 설명에 의하면 그 위치는 예루살렘 북쪽 약 32 km지점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호수아 때(수 18:1)부터 엘리 제사장 때(삼상 4:3-4)까지 그곳에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성막이 있었는데 종교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성읍이었다. 현재 실로는 ‘길벳 세일룬’(Khirbet Seilun)으로 알려지고 있다.

르보나. 실로와 세겜 사이에 있는 큰 길가의 마을이다. 이 마을은 실로에서 서북쪽으로 약 5 km 정도 떨어져 있는 오늘날의 ‘루반’(Lubban)인 것으로 추정된다.

세겜.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49.6 km 정도 떨어진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 성읍이다. 8:31 주석 참조.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도다. 실로에서 매년 명절이 있었다는 언급은 삼상 1:3, 7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무슨 명절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다만 여기서 ‘명절’에 해당되는 원어 ‘하그’는 주로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 등 3대 절기에만 사용되는 말이다. 따라서 어떤 주석가들은 유월절이었다고 생각한다(Keil & Delitzsch, Hengstenberg, Lange). 왜냐하면 그들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었다는 것은(21절) 과거 이스라엘의 홍해 도하 후 미리암의 지도하에 이스라엘의 딸들이 춤을 춘 것(출 15:20)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Lange). 그러나 다른 주석가들은 그것은 실로 고유의 축제로서 신 12:10-12에 언급된 축제와 관련된다고 생각한다(Hervey, Rosenmuller). 하지만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 이 세 절기 가운데 올리브와 포도 등의 수확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장막절이다(신 16:13). 따라서 본 절의 축제도 포도원과 깊이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20-21절) 장막절인 것 같다(Patrick, Cundall). 장막절의 주요 행사는 주로 밤에 거행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베냐민 자손들이 춤추는 여자들을 쉽게 납치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21:20 본 절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처럼 철저한 계획 속에서 베냐민 사람들로 하여금 아내를 붙들어 갈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장로들이 이와 같은 납치극을 꾸민 이유는 22절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편 베냐민 사람들 중에 아내가 없는 200명 뿐만 아니라 아내가 있는 나머지 400명의 베냐민 사람들도 분명히 이 일을 돕기 위해 나섰을 것이다.



21:21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오거든. 패트릭(Patrick) 주교에 따르면 장막절에는 이스라엘 처녀들이 춤을 추도록 허용되었는데 이들이 춤을 출 수 있도록 허용된 절기는 오직 장막절 뿐이라고 한다(Matthew Henry’s Commentary).

붙들어 가지고 … 돌아가라. 여기서 ‘붙들다’에 해당하는 원어 ‘하타프’는 마치 죄수를 체포하듯 ‘꽉 붙들어 놓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베냐민인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하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모습을 잘 드러내 준다.



21:22 만일 … 시비하면. 앞서 미스바 총회에서 자신들이 베냐민 자손에게 딸을 주지 않기로 맹세한 이스라엘 자손들(1절)은 아무도 그 같은 서원을 범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베냐민 자손들이 자기들의 딸을 납치해 가려는 일이 탄로나면 싸움이 일어날 것임이 분명하다. 본 절은 바로 그 같은 사태를 가리키는데 만일 그러한 일이 발생할 경우 이스라엘 장로들은 자신들이 친히 베냐민인들을 위해 변호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너희에게 죄가 없을 없을 것임이니라. 이처럼 이스라엘 장로들이 자신들의 딸을 납치당한 실로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의 무죄성을 납득시키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논지가 있었을 것이다. (1) 길르앗 야베스와의 전쟁에서 베냐민 사람들의 아내를 다 마련해 주지 못한 데 대한 이스라엘의 공동 책임이 있기 때문에(10-14절) 실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딸을 납치당한 것은 실로인들의 책임만일 수는 없다는 점이다. (2) 실로인들이 고의로 자신들의 딸을 내준 것이 아니라 베냐민 사람들이 강제로 납치해 간 것이기 때문에 실로인들은 그들이 한 맹세를 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전쟁 때에는 자신들의 의지와는 달리 이방인들에게도 딸을 빼앗길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장로들의 이러한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21:23 베냐민 사람들은 장로들의 계획대로 실로에서 춤을 추던 여인 200명을 데리고 그들의 기업으로 돌아갔다.

성읍들을 건축하고. 이처럼 베냐민 사람들이 아내를 얻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간 후 가장 시급했던 일은 거의 잿더미로 변한 성읍들을 보수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베냐민들에게 속한 성읍은 앞서 이스라엘 연맹군과의 싸움에서 대부분 완파되었기때문이다(20:48).



21:24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 자기의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본 절은 모든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모든 이스라엘 지파는 베냐민 지파의 문제가 완전히 종결될 때까지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다가 그제서야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 곳에서 나와서. 여기서 ‘그 곳’이란 일차적으로 실로라고 생각할 수 있다(12절). 그러나 혹자는 16-23절의 상황에 의거해 대부분의 백성들은 미스바에서 베냐민 지파의 문제가 종결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고 주장하기도 한다(Goslinga).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마지막으로 본서 기자는 사사기의 역사를 마감하면서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그러한 불법적인 일들이 발생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7-21장에 걸쳐 기록된 불법적인 일들에 대한 본서 기자의 이러한 결말은 사사기 시대의 예비적인 성격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고 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7:6 주석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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