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사사기 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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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 17:6 및 18:1과 유사한 구절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 때에'라고 한 것은 본장의 배경이 17, 18장과 동일한 시대임을 암시해 준다.그런데 본서 기자가 이미 왕정 제도에 대하여 알고 있는 점으로 보아 본장의 사건을기록하던 시기는 사사기 시대 이후로 상당 기간이 지난 때임을 알 수 있다(Goslinga).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 전장(前章)에 이어 본장에 등장하는 주인공도 레위인이란 점은 당시 극도로 타락한 이스라엘의 사회상을 여실히 증거해 준다. 한편 여기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이란 에브라임 산지의 북쪽 끝 실로(Shiloh)의 인근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Keil). 그런데 레위인이 그곳에 '우거'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 레위인도 전장(前章)에 나오는 게르손의 아들인 요나단(18:30)처럼 에브라임 산지를 떠도는 나그네였음이 틀림없다(Pulpit Commentary).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더니 - 17:7에 나오는 레위 소년도 유다 베들레헴에있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그곳에는 레위인들의 거주지가 따로 있었던 것 같다. 한편이 레위인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했는데, 고대 사회에서 첩을 취하는 일은 흔히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첩 때문에 기드온의 가정이 파멸된 것처럼(8:31) 본장에서도 이 레위인이 첩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창16:1-6 강해 '축첩 제도의 부당성'을 참조하라.

=====19:2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 여기서 '행음하다'에 해당되는 원어 '자나'(* )는 주로 창기와 같은 직업적인 음란 행위나 또는 그와 같은 성향의 행음(行淫)을 가리킨다. 그런데 히브리 원문에는 '자나'뒤에 '그에게 대항하여'라는 뚱의 전치사'알라이우'(* )가있어서 이 여인이 남편에 대한 불만으로 그같은 행음을 하였음을 보여 준다. 아마 이 레위인이 먼저 동일한 행음을 범하므로서 자기 첩으로 하여금그렇게 행음하도록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Moore).다음으로 여기서 '남편을 떠나'라는말은 그러한 원인으로 인하여 양자 간에 불화(不和)하여 서로 헤어진 것을 가리킨다(Cassel). 한편 레 21:7에 따르면 여호와의 집에서 봉사하는 모든 레위인은 기생이나부정한여인을 취하지 못하도록 엄격하케 규정되어 있다.그런데도 이 레위인이 이같이행한 것은 당시의성직자들이 윤리적으로 얼마나 타락했었는가를 잘 보여 준다.

=====19:3
그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맡하고 - 이에 해당하는 원문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녀의 마음에 말하고'이다. 이것은 레위인이 진정으로 그녀와 다시 화해하고자했음을 보여준다(Wycliffe). 한편 율법상으로 살인죄(민 35:31), 간음죄(레 20:10) 부모를 치는 죄(출 21:15) 등은 어떠한 제믈로도 속(贖)할 수 없다.그런데도 본문의 레위인은 자기 첩이 넉 달 동안(2절)이나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오히려 그녀를 연모하므로 다시 그녀를 데려오고자 했던것이다. 이로 볼 때 당시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거의무시되고 있어 사회의 기강이 많이 흐트러져 있었음이 분명하다(Matthew Henry).
하인 하나와 나귀 두 필을 데리고 - 나귀 두 필 중에 한필은 그의 첩을 태워 데리고 오기 위한 것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그 여자가 다시금 남편을 따라 나서게 된 것도그 같은 남편의 세심한 배려에 마음이 동해서였을 것이다(Hervey).

=====19:4
그 첩 장인 곧 여자가 아비의 그를 머물리매 - 여기서 '머물리다'에 해당하는 '하자크'(* )는 붙잡다', 제지하다'는 뜻으로 강권(强勸)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레위인의 장인은 금방 그를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강권하여 몇 일 처가댁에 머물도록종용한 것이다. 이렇게 자기 집에 머물도록 권하는 것은 대단한 예우이며 친절의 표시이다(창 18:5). 이로 볼 때 레위인은 처와 화해하는 일 뿐만 아니라 장인의 사랑을 얻는 데도 성공하였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삼일 동안 그녀와 함께 목고 마시며 편히 쉴 수 있었다.

=====19:5
그대의 기력을 도운 후에 - 이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당신의 마음을 쾌활케한 후에'가 된다(창18:5). 여기서 `쾌활케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세아드'(* )는`(마음을) 신선케 하다'라는 뜻의 동사 `사아드'(* )의 명령형으로서, 여기에는강한 권고의 뜻이 담겨 있다. 한편 고대 근동에서는 일반적으로 신부를 데려올 때 일정 기간 동안 처가댁에서 머문 후에 데려오는 풍습이 있었다(창24:55). 따라서 레위인의 장인이 어떻게든 레위인을 그의 집에서 하루라도 더 유숙케 하려한 것은 아마 이같은 풍습에서였을 것이다.

=====19:6
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 이처럼 레위인의 장인이 그를 떠나지 못하게하고 연일 잔치를 베푸는 이면(裏面)에는 사위에게 자기 딸을 부탁하는 당부의 마음이크게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과년한 딸이 아비의 집에 계속 머무는 것은 예나지금이나 근심거리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레위인의 첩은 행음하고서 남편과헤어진 상태였으니(2절) 그 아비의 심정이 어떠했겠는 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장인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사위가 자기 딸을 버리지 아니하고 잘 살아주기만을바랬을 것이다.

=====19:7
그 사람이...다시 유숙하더니 - 레위인 장인의 과민한 노파심과 레위인의 우유 부단한 성격을 보여 주고있는 구절이다. 즉 레위인의 장인은 아직도 자신이 사위의 환심을 살 정도로충분히 대접치 못하였다고 생각하였기에 계속사위를 집에 머물게 하려했을 것이다. 반면 레위인은 장인의 호의틀 떨쳐 버릴 정도로 심지(心志)가 굳지 못하였기 때문예 계속 장인에게 이끌림 당했을 것이다.

=====19:8
일찌기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해가 기울도톡 머물라 - 여기서 `해가 기울도록'이란말은 `한낮이 지나도록'이라는 뜻이다(Keil and Delitzsch Commentary, Vol.2,p.443). 대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한낮의 더위를 피하려고 아침 일찍이 떠나는 법이다. 그런데도 레위인의 장인은 낮 동안 층분히 휴식한 후 오후에 길을 떠나라고 말한다. 추측컨대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베들레헴에서 래위인이 거주하는 에브라임 산지 까지는 반나절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에 늦게 출발해도 괜찮았기 때문일 것이다.

=====19:9
이 밤도 유숙하라 보라 해가 기울었느니라 - 오후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레위인은 그의 장인과 먹고 마시는 동안 그만 너무 시간이 지체되어 밤이 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가라 - 문자적 뜻은 `장막으로 돌아가라'이다. 한편 `장막`(Tent)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반적인 주거 형태이다(20:8;왕상 12:16).

=====19:10
그 사람이 다시 밤을 지내고자 아니하여 일어나 떠나서 - 이처럼 레위인이 밤중에라도 집으로 돌아가려 한 것은 아마 그 다음날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종교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자였으므로 안식일에는 성소에서봉사하여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Lang).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니 - 여기서`여부스 맞은편'은 예루살렘의 서쪽을 가리킨다.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 까지는걸어서 약 1시간 반 거리이다. 그리고 베들레헴에서세겜 쪽의 에브라임 산지로 가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의 서쪽에 있는 도로틀 반드시지나야 한다. 한편 여부스(Jebus)라는 이름은 여부스 족이 다욋 시대까지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삼하5:6).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대상11:4-9 강해, `예루살렘'을 참조하라.

=====19:11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사이다 - 레위인 일행이 예루살렘 근처에 이르렀을 때이미 날이 어둑어둑 해졌다. 그러자 레위인의 종은 이처럼 레위인에게 여부스 사람의성읍에 들어가 밤을 지내자고 간청한다. 왜냐하면 밤 에는 들짐승이나 도적때의 공격을 받기가 쉬우므로 더이상 여행을 계속하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주인은 이방인의 성읍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 부터 해를 받을지도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종의 청을 거부했다.

=====19:12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외인의 성읍 -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가나안을정복 하였지만 아직 미 정복지가 남아 있었둣이(1:19-21,27-36) 예루살렘 역시 다윗시대까지 가나안 후기 원주민인 여부스족(Jebusites)의 성읍으로 남아 있었던 것을 일컫는 말이다. 1:21 주석참조.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 기브아(Gibeah)는 예루살렴 북쪽 약6.4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베냐민 지파의 지경이다(수 18:28). 또한 이곳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고향이기도 하다(삼상 10:26).

=====19:13
라마 - 기브아에서 북쪽으로 약 3.2km 가량 떨어진 곳이다(수 18:25). 현재의 엘람(er-Ram)으로서, 과거 여사사 드보라의 고향이자(4:5) 사무엘의 활동 중심지이기도했다(삼상 7:17).

=====19:14
해가 진지라 - 레위인 일행이 기브아에 도착했을 때 해가 완전히 져버려 더이상여행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라마 까지 가지 못하고 베냐민 땅 기브아에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19:15
성읍 거리에 앉았으나 - 레위인 일행이 앉아 있던 거리는 성문 안쪽에 있는 넓은광장으로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공회(公會)를 열거나 재판을 행하기도하며 장사도 하는 그런 곳이었다. 창 19:1 주석 참조.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케 하는 자가 없었더라 - 레위인 일행이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에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그들을 환대하는 기본적인 예절을 보이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는 것은 기브아 사람들의 성품이 얼마나 악했는가를 보여준다(창18:3-8;19:2,3; 마25:43;벧전4:9). 즉 나그네를 사랑하고 대접하라는 것이 율법의가르침 이었는데도(신10:19) 그들은 이를 철저히 무시하였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레위인과 그의 첩과 하인은 이방인의 성읍인 여부스에서 머물기를 마다하고 이스라엘사람들이 사는 성읍까지 오면서 가졌던 기대를 한꺼번에 잊어버리고 낙심할 수 밖에없었을 것이다(Wycliffe).

=====19:16
본절에서 본서 기자는 레위인 일행에게 친절을 베푼 에브라임 출신의 노인 한사람을 소개하면서, 기브아 성읍에는 타지(他地)에서 온 이 한 사람 외에는 정직한 사람이없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우거하는 자 - 이에 해당하는 원어 `게르'(* )는 '나그네(손님)로서 체류(거주)하다'는 뜻의 '구르'(* )에서 온 말로, 타지에서 온 사람을 가리킨다.

=====19:17,18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 노인이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을때 레위인은 이처럼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중'이라고 대답을 했다. 당시 `여호와의 집` 즉`회막'은 실로에 있었다(수 18:1;삼상4:3,4). 그런데 실로는 레위인의 집이 있던에브라임산지(1절) 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때문에 본절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대하여서는 학자간에 서로 견해가 다르다. 먼저 혹자는 본절을`여호와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Keil). 그러나 다른 사람은 이 레위인이 그의 첩과 화해하였기 때문에 화목제를 드리러 실제로 `여호와의 집'으로 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말한다(Cundall). 반면, 또다른 사람은 이 레위인이 단지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고 말함으로써 그 노인에게 좋은 대우를 받기를 원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Cassel). 그런데 70인역(LXX)에서는 이를 `나의집 으로'로 번역하고 있어서 카일(Keil)의 주장이옳음을 반증해 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레위인이 `여호와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간다고 말함으로써 그 노인에게 좋은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의도를 가졌었음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왜냐하면 실제로 레위인 일행은 그 노인으로부터 크게 환대를 받았었기 매문이다(19, 20절).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 여기서 `영접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아사프'(* )는 `받아들이다'는 뜻으로. 가벼운 선심을 쓰거나 계산에 의거하여 일정한 혜택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뜨거운 마음으로 열렬히 환영하는것'을 가리키는 `카라'(* )와는 엄연히 구별된다. 이로 보아 레위인 일행은 기브아에서 숙박비를제공하려 해도 유숙할 장소를 얻지못했던 것 같다(15절).

=====19:19
우리에게는...부족함이 없나이다 - 레위인은 노인이 마음에 부담을 갖지 않도륵 하기 위하여 나귀 두 마리와 자신과 자기 첩과 종이 먹을 양식과 짚은 충분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말 속에는 기브아 사람들에게 단지 하룻밤 묵고 갈 숙소만을 요구했는데도 그들이 받아주지 일았다는 탄식이 내포되어 있다(Pulpit Commentary).

=====19:20
그대는 안심하라 - 이 노인은 레위인의 염려를 이해하고 안심시켰다. 여기서 `안심하라'에 해당하는 원어는 `솰롬'(* )으로서, 평안을 기원하는 히브리인의 인사이다. 이러한 히브리 인사에서 우리는 지난날 애굽의 종살이나 광야의 방황생활 중에서히브리인이 얼마나 평안을 희구(希求)했는지를 알 수있다.
모든 쓸 것은 나의 담책이니 - 옛부터 거리에 앉아 있는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데리고가 후히 대접하는 것이 히브리인의 관습이었다(창18:1-8;19:1-3). 만일 그렇지않을때는 공회 앞에서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신10:19;욥 31:32). 따라서 그 노인은전통적 관습대로 나그네가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에 상관없이 자기 양식으로 그들을대접하려고 했던 것이다.

=====19:21
이 노인은 레위인 일행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귀도 잘먹였다. 이는 곧 그가 진정한 마음으로 나그네들을 사랑하고 대접하였음을 잘 드러내준다.
발을 씻고 - 고대 근동에서는 여행자들이 주로 샌달을 신고 흙먼지 길을 다녔다.그러므로 손님을 영접하는 주인은 반드시 발씻을 물을 내어놓는 것이 예의였다(창18:4;24:32;43:24;요13:5-14).

=====19:22
레위인과 노인의 만남(16:21절)을 다룬 본장의 이야기는 룻이 소돔 성에서 천사를만난 이야기(창 19장)와 유사하다. 특히 본문22-24에 기록된 기사는 창19:4-8절의 기사와매우 유사하다. 그래서 혹자는 본서 기자가 창9장의 기사를 인용하여 본문 속에삽입한 것(interpolation)이라고도 주장한다.(Wellhausen). 그러나 전후 문맥이 엄연히 다를 뿐 아니라 또한 시대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으므로 본문의사건을 결코 삽입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Cassel).
그 성읍의 비류들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베네 벨리알'(* )로서 `벨리알의 자손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벨리알'은 `무익한', `무가치한'이라는 뜻의 형용사로서 주로사람과 결합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삼상 1:16에서는 `악한 여자'로, 삼상25:25에서는 `불량한사람', 삼하 16:7에서는`비루한 자'로각기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유대 묵시 문학에서 벨리알을 사단이나 거짓 예언자로 언급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 여기서 `두들기며'에 해당되는 원어 `미테두페킴'(* )은 강조행 동사로 `스스로 흥분하여 매우 세게 문을 두드리는'모습를 묘사한 말이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을 이렇게도 번역했다. "그 비류들이 문을부수고 들어갈 모양으로 문에 달려들어 두들기고 있었다"(G. R. Driver). 이와 같이기브아 비류들이 온건한 태도로서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레위인을 끌어내리려 했기 때문에 집주인은 문을 열고 그들을 설득하지 않을 수 없었던것이다(23,24절). 그런데도그들은 이를 듣지않았는데(25절), 이런 일이 후에 기브아와 통치자들에 의해 어떠한정죄함이나 책벌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기브아 성읍 백성들 전체가 암묵적으로 이 일에 동참했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 - 여기서 `상관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야다'(* )는분명 `성 관계를 가지다'는 뜻이다. 즉 기브아 비류들은 레위인을 끌어내어 남색(男色)하려고 한 것이다. 이는 소돔 사건의 재현인 둣한 인상을 준다. 과거 소돔인들의음란한 행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멸망을 초래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사해(死海)가 형성되었다(창 19:4-26). 한편 이 사해는 기브아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였다. 그래서 기브아 사람들은 자주 그곳을 지나다녔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과거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아무런 경고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소돔보다더 악하게 행하려 하였던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2, p.239).

=====19:23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 여기서 `망령된 일'에 해당되는 원어 `하네발라'(* ) 역시 남색(sodomy)과 같이 수치스러운일(창 19:5,7)이나 비 정상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어리석은 행위(창 34:7;신 22:21)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주로 성적범죄를 지칭한다(삼하 13:12).

=====19:24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있은즉 - 노인은 기브아의 비류들이 워낙 완악하여 말로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레위인을 보호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자기 딸과그 레위인의 첩올 그들에게 내어 주겠다고 말했다.이는 이스라엘 사회의 가부장적(家父長的) 권위를 잘 반영해 주는 실례이다. 당시에는 남성의 권위로 말미암아 여성이학대받거나 능욕을 당한다 해도 여성은 말없이 순종하여야 했다(11:39,40). 그러나 노인이 취한 방책은 최선의 것이 아니었다. 즉 하나의 악을 막기 위해 또다른 악을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진정하나님의 공의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면. 상황논리에 급급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하며 끝까지 비류들을 대항했어야 옳았던 것이다.

=====19:25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 자신의딸을 내어 놓겠다는 노인의 제안은 비류들에 의해거절되었다. 아마도 그들은 같은 경내(境內)에 살고 있는 노인에게는 해를 끼치려 하지않은 것 같다. 아니면 그들은 남녀간의 성 행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비정상적인남색(男色) 행위에만 관심을 둔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레 18:1-5 강해, `성경에나타난 성범죄의 이해'를 참조하라.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 내매 - 많은 학자들이 여기서 `그사람'은노인을 가리킨다고 본다(Keil, Goslinga). 그러나 전후 문맥을 살펴볼 때 여기서 `그사람'이란 분명히 `그 레위인'을 가리킨다. 그 레위인은 노인의 제안이 거절 되는 것을 보고 그들이요구하는 것이 자신과 자기의 첩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일단은자기 첩을 그들에게 내어 주었다. 즉 비록 사랑을 고백하며 설득하여 장인에게 데려온아내 였지만 (3-10절) 이 레위인은 자기의 안전을 위하여 아내를 비류들에게 내어주고말았던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인간들의 극한적인 이기주의 성향을 보게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반대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그보다 더 큰사랑은 없을 것이라고 교훈 하셨다(요15:13).
그들이 그에게 행음하여 - 기브아 비류들이 요구 한것은 레위인의 첩이아니라 레위인 이었다(22절).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그의 첩에게만 행음하고 만족하였는지 의문시된다. 아마 그 비류들은 그의가 첩의 뛰어난 미모에 만족하였을 지도 모른다(Cassel).
욕보이다가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알랄'(* )은 `지나치게 하다' `철저히 실행하다'는 뜻이다. Living Bible은 이를 `교대로 겁탈했다'(taking turns raping her)로번역 하고 있다.

=====19:26
그 주인의 우거한...문에 이르러 - 밤새도록 비류들에게 욕을당한 그 첩은 거의 초죽음이 된 자신의 육신을 끌고 가까스로 자신의 남편이 있는 집 문 앞에까지 기어와서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비록 이 여인이 남편에대한 분노 때문에 행음하였으나(2절주석 참조),여기서 볼 때 그녀가 그 레위인보다 더 진실한 사랑을 소유하였음을 알 수있다. 즉 비록 자신을 내어버린 남편이지만 그 여인은 자기 주인에게로 돌아오기 위해이같이 사력을 다했던 것이다(Hervey).

=====19:27
그의 주인이 일찌기 일어나 - 자신의 아내를 죽음으로 내어 몰았던 이 비정한 레위인은 간밤에 당한 공포스런 일을 생각하며 일찌기 그 성읍을 떠나 위험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아내의 행방이나 생사여부를 확인해 보려는 최소한의 관심 조차도 기울이지 않았다. 이로 볼 때 이 레위인에게는 그의 첩에 대한 육적인 사랑은 있었을지 모르나 진정한 사랑은 전혀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앞서 그의 장인이 계속해서 떠나려는 이 레위인 사위로 하여금 자기 집에 하루라도 더 묵도륵 한 것도 아마 자기 딸에 대한 이 레위인 사위의 사랑을 의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5-8절).
그 두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 새벽 미명에 홀로 도주하려고 허겁지겁 하던레위인은 그의 아내가 엎드러져 그 두 손을 문지방에 올려 놓은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문지방에 손을 올려 놓는 행위는 당시 고대 근동의 미신적 풍습을 반영한 것이다.즉 당시 가나안 인들은 문지방 밑에 그 집안 사람들을 보호하는 여러 종류의 귀신들이살고 있다고 믿었었다. 따라서 이런 미신을 잘알고 있던 레위인의 첩은 거의 초죽음이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잡는 심정으로, 두 손을 문지방 위에 올려놓으면서 자신이 소생(蘇生)하기를 바랬을것이다. 삼상 5:4 주석 참조.

=====19:28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 레위인은 눈으로 보아 그의 아내가 죽은 것을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아내와 동일한 미신적 사고 방식에서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그녀를 계속해서 깨웠을런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내가 비참한 모습으로 완전히 죽은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에 블타 자기 아내의 시신을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간다.

=====19:29
그 마디를 찍어 열 두 덩이에 나누고 - 집에 도착한 레위인은 즉시 아내의 시신을각을 뜨듯이 열 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보냈다. 이같이 시체를 절단하여 지파들에게 보내는 것은 일종의 상징적 행위로서.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를 온이스라엘 앞에 공개하며 응당한 징벌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Keil and delizsch). 사울의 경우에도 이와 유사하게 소 한 겨리를 각을 떠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각성을 촉구한 적이 있다(삼상 11:7). 이와같이 이것은 당시 중앙 통제 기구가 없었던 시절에 본문과 같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이었다. 즉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고대그리이스에서 볼 수 있었던 인보 동맹(隣保同盟)과 유사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지파 간의 결속이 해이해지고 중앙 통제 기구가 결여된 상태였기 때문에본문의 사건을 해결해달라고 고소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따라서 그 레위인은 첩의 시체를 12등분하여 각 지파에게 보내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비류들의 죄상을 강력히고발하고 전 민족적 차원의 징계를 호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레위인의 이같은 끔찍스러운 행동은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을 저버리는 죄악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상대방의 허물에 대한 적개심에만 불타 있었기 때문이다(마7:3-5).

=====19:30
그것을 보는 자가 다 가로되 - 레위인이 전한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는 전이스라엘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아마도 이런 엄청난 죄악은 소돔 성에서 일어난 사건(창19장)과유사 하였기에 더욱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일에 보다 신중하고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해 온 이스라엘의 총회(總會)를 소집하기에 이른다 상의한 후에 말하자 - 혹자는 이 구절을 레위인이 이스라엘 각 지파에 사자들을 보낼 때 그 사자들이 한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같은 해석은 본문과 잘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본절은 어디까지나 레위인의 사자들에게서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말로 보아야 한다. 한편 여기서 '말하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베루'(* )는 복수 명령형으로서 권고의 뜻이 있다. 그리고 이것의 원형 동사 '다바르'(* )의 기본 의미는 '말하다'이지만 파생적인 의미로 종종 '파괴하다','인도하다'라는, '심판'의 뜻도 가진다. 따라서 여기서의 '말하자'는 베냐민 사람에 대한 거국적차원의 대처 방안을 강구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아무튼 기브아 사람들의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백성들은 민족적 차원에서의 회개 운동을 일키지 않으면 안되었다(20장). 훗날 선지자호세아가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를 타락의 극치로 까지 들고 있는 것을 볼때(호9:9;10:9) 기브아 사람들의 행악의 여파가 얼마나 컸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전장으로써 미가의 우상과 돤련된 이야기는 끝나고 이제 본장에서부터 21장까지는 레위인의 첩과 관련된 이스라엘의 내분(內紛) 사건이 언급된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본장은 발단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레위인과 그의 음행한 첩에 관련된 이야기가 소개된다(1-15절). 그리고 기브아 비류(匪類)들이 레위인의 첩을 윤간(輪姦), 첩이 죽게 되자 이스라엘 지파간의 내분에 도화선이 당겨지게 됨을 언급한다(16-30절).
 전장(17, 18장)에 기록된 미가의 이야기와 이러한 본장의 이야기는 연대적으로는 직접적으로 연속되지 않으나 내용상, 주제상으로는 다음과 같은 연결점이 있다. (1) 두 사건이 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때'(1절 ; 17:6 ; 18:1)에 일어난 사건으로서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 전반적으로 만연되어 있었던 타락상의 일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2) 두 사건이 다 레위인과 연관된 타락의 일면이라는 점이다. (3) 두 사건이 모두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는 레위인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이다(1절 ; 17:1). 아마 이러한 연관성으로 인하여 본서 기자는 이 두 사건이 서로 시차(時差)를 두고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란하게 기록하였을 것이다.
 한편 본장에 기록된 사건은 시대 초기(사사 옷니엘의 활동 당시로 추정됨)에 발생한 사건으로서 이때엔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대제사장으로 있었다(20:28). 2장에서 이미 사사기 시대 전반에 걸쳐 펼쳐질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에 대하여 암시된 바가 있으나(2:7, 11-15) 결국 본장은 그 실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소개함으로써 타락의 심각성을 지적해 주고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특히 본서 기자가 사사기 초기에 발생한 본장의 사건을 본서의 맨 끝에 배치한 것은 사사기 시대 전체가 이러한 부패한 양상들로 전개되었음을 강조하려는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더욱이 이런 부패한 사건의 책임의 절반은 여호와의 신앙으로 전체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야 할 레위인에게 있었다는 점(1절)은 사태의 심각성을 한층 고조시켜 준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神政) 시대에 그분의 백성들은 거의 모든 하나님의 법을 파괴하고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므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악으로 물들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출애굽 후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인들이 섬기는 우상과 그들의 도덕과 관습을 그대로 비판없이 수용하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성결 의무(출 19:5, 6 ; 20:1-17)를 저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성직자인 레위인들조차도 가나안의 풍습에 따라 행하는 범죄가 무감각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백성들에게 새롭고 독특한 하나님 나라의 문화와 법도 도덕과 삶의 체계를 교육시켜야 할 당위성을 제공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시야 53:6의 말씀은 아주 적절하다. "우리는 다 양 같아고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2) 따라서 본장 초두에서도 암시되고 있는 것과 같은 왕정 제도(1절)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나라의 백성으로서 바로 살게끔 교육하는데 적절한 장치로서 도입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18:1-10 강해, 이스라엘 왕정 제도의 필요성과 부정성(不正性>. 한편 선지자 호세아는 사사기 시대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한 전초기로서 사사기 시대를 거친 백성들이 그제서야 비로소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함으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호 3:5)고 말했다. 여기서 '그 왕 다윗'은 본서 기자가 17:6과 18:1, 그리고 본장 1절에서 희구한 '왕'의 표본이며 다윗이 다스리던 나라도 그 당시에 희구하던 이상적인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다.

   1. 도망간 레위인의 첩(19:1-15)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한 레위인의 문란한 사생활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본문에는 이 레위인이 본처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나타나 있지 않으며 다만 그의 첩과의 삶이 소개되고 있다.
 본문에서 두 등장 인물이 레위인과 첩이라는 데서부터 이미 긍,가 파생적인 가장 구조가 암시되고 있지만(1절) 그 첩이 다른 남자와 행음한 뒤 남편에게서 달아가다는 사실(2절)에서 이 레위인은 대단히 비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친정으로 달아난 첩이 넉 달 동안이나 머물 수 있었다는 사실(2절)에서 이 첩이 레위이늬 아내로서 온당치 못했으을 뿐만 아니라 이 첩의 아버지, 즉 그의 장인도 정상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상황하에서 레위인은 장인 집으로 찾아가 며칠을 머문뒤 첩과 함께 귀가 길에 오른다(3-10절). 그리고 도중에 날이 저물자 여부스족의 성읍인 예루살렘에서 유숙자는 그의 종의 간청을 뿌리치고 자스라엘 백성이 사는 기브아 성읍에까지 힘들게 여행한다(10-14절). 그러나 그곳에서 아무도 그들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맞이하는 사람이 없는 어려움에 봉착한다(15절). 이는 곧 당시 도덕적 붕괴가 한레위인의 가정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며 전체 민족에 만연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은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한 가정의 삶은 당대의 전체 사회적인 삶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정을 중요시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사실 가정은 사회의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이다. 따라서 건전한 가정이 있는 사회응 그만큼 더 건전하기 마련이다. 신약 시대에도 가정의 중요성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는 까닭이 그 때문이다. 이와 관련 사도 바울은 특히 교회의 직분자를 세울 때는 단정하고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이어야 하낟고 교훈하였다(딤전 3:12).
 (2) 올바른 가정 교육이 시행되지 않은 한 건전한 가정의 존립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넉 달 동안이나 친정에 돌아와 있어도(2절) 한번도 딸을 책망하지 않고 시댁으로 돌아가라고 권면하지 않은 레위인 첩의 아버지는 가정 교육에 실패한 대표적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잘못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책망하기 보다는 지나친 관용으로 방임해 두었기 때문에 그의 딸은 자신의 가정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의무를 배우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편을 경멸하는 어리석은 아내가 되고 말았았던 것이다.
 (3) 한 사회의 기본적인 윤리의 건재(建在)는 도덕성의 척도가 된다는 것이다. 나그네를 대접하고 사랑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이다(신 10: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브아 사람들은 이 레위인 일행을 냉대하므로 그들의 도덕성성의 실상을 드러냈다(15절). 예수님께서는 나그네 된 자를 영접하는 기본적인 윤리조차 없는 자들을 저주하셨다(마 25:43). 이러한 윤리의 부재(不在)가 이방인인 여부스 사람들(10-12절)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인 기브아 사람들에 의해 드러났다는 점에서 당시대의 타락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

 가정 윤리의 성서적 기초 - 성경에서 가르치는 가정 윤리의 기본 지침은 우선적으로 일부 일처제(一夫一妻制)에서 시작된다. 즉 가정은 한 남자가 그의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때 비로소 성립된다고 성경에 나와 있다(창 1;27 ; 2:24 ; 5:21). 그리고 계속해서 남편은 다스리는 자(창 3:16)로서, 그리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해야 할 자(출 20:12 ; 신 5:16)로서 언급되어 있다.
 한편 신양 성경에서는 구약에 비해 보다 엄격한 가정 윤리가 제시되고 있다(골 3:18-21 ; 엡 5:22, 23). 예수님께서는, 구약에서 허락한 이혼은(신 24:1-3)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것일 뿐이니, 보다 수준 높은 윤리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은 결코 이혼을 해서는 안된다고 강력히 주장하셨다(마 5:27-32 ; 19:1-12). 이러한 성경의 가정 윤리를 생각해 볼 때 부당하게 첩을 거느리거나<창 16:1-6 강해, 축첩 제도의 부당성>. 간음함으로 가정을 파괴하는 본장에 나오는 레위인의 행위는 반드시 지탄받아야 마땅하다(1, 2절). 사실 가정은 단순히 개인의 인간적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루고 그리하여 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근간을 이루는 가장 신성한 삶의 터로서 마땅히 책임과 의무를 다해 지켜야 하는 것이 곧 가정이다. 이러한 가정 윤리가 이 땅에 정착될 때 그곳에는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사회가 형성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흥왕할 것이다.

   2. 기브아 비류(匪類)의 죄악(19:16-30)
 마침내 레위인이 당한 비극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어렵게 기브아에 도착하였으나 유숙지를 얻지 못하고 있던 레위인과 그 일행(10-15절)은 우연히 같은 고향의 노인을 만나 그의 집으로 인도된다(16-21절). 그런데 그날 밤 기브아 비류둘이 찾아와 행패를 부리니 그로 인해 레위인 첩이 윤간(輪姦) 당하여 죽고 마는 비극이 발생한다(22-26절). 이에 레위인은 거향으러 돌아와서 첩의 시신을 열 두 조각으로 나누어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어 기브아 비류들의 만행을 고발한다(27-30절).
 이상과 같은 기브아 비류들의 만행은 마치 소돔 사건의 재현인 듯한 인상을 준다(창 19:1-11). 더욱이 소돔이 멸망한 자리인 사해(死海)와 가까운 기브아에서 이러한 음행이 자행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인상을 더욱 짙게 한다. 과거 소돔인들의 음란한 행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한 대표적인 사례로서 오늘날의 사해 바다가 이를 생생히 증거해 주고 있다(창 19:4-26). 본서 기자가 기브아 비류들의 만행을 증거하고 있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로 마땅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죄악이란 점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아무튼 이 같은 당시의 시대적 부패상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1) 사단의 나라는 기본 윤리의 파괴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기브아 비류들이 행하려던 악행(22절)은 소위 남색(男色)이라고 하는데이는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성관계를 갖는 추악한 성행위를 가리킨다<창 19:5 주석>. 이처럼 기브아 성읍은 나그네를 영접하는 기본적인 윤리의 부재(不在)는 두말할 나위 없고(15절) 오히려 적극적으로 인간의 기본 윤리를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비류들, 즉 벧리알의 아들<22절 주석>이라는 말에서 암시해 주듯이 그들의 사단과 동조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를 깨뜨리므로서 결과적으로 사단의 나라를 건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인간의 기본 윤리를 준수하고 수호하는 데도 솔선 수범하므로써 세상의 악의 세력에 잠식당하는 것을 막는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마 5:13).
 (2) 사회악을 대처함에 있어서도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집주인인 노인은 기브아 비류들의 욕정을 채워 주기 위해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그들에게 내어주겠다고 말했다(24절). 과거, 롯도 이와 동일하게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그들에게 내어 놓겠다는 어리석은 제안을 한 적이 있다(창 19:8).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옳은 것이 아니었다. 사회의 악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책망의 대상이지(엡 5:11) 결코 타협의 대상은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악에 대해 타협의 자세가 되면 사단은 도리어 더욱 거세게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고 말것이다(25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오로지 자신을 거룩히 함에 힘써야 할 것이며 악에 대해서 강하게 맞설 수 있도록 성령의 검과 방패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엡 6:13-17).
한편 이상에서처럼 레위인이 당한 비극은 그 자신의 축첩(蓄妾)행위와 첩의 음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겠다(1, 2절). 그런데 기브아 비류들의 만행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심판받아야 마땅한 죄악이었으니 이제 다음 두 장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결국 이 같은 사실은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여하한 죄악도 간과되어질 수 없음을 우리들에게 교훈해 준다(욥 34:10,11). 그런즉 우리는 매사에 삼가 행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에 손을 빠져 들어가지 않도록 경성해야 할 것이다(히 10:31).

 그리스도인의 성윤리(性倫理) - 본문에 나오는 기브아 사람들의 음란한 행위를 보면서 우리는 성(性)에 대한 올바른 기독교적 입장을 정립할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물론 성(性)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여(許與)하신 아름다운 선물이지만 이는 결코 남용될 수 없다. 이제 이와 관련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성경에서 성(性)은 상호간의 관계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과의 관계를 곤고히 하기 위해서 당신 백성들에게 성적 순결을 요구하셨다(신 5:18).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나 가족의 관계를 유지톰 하시기 위해 많은 성에 관해 규례를 말씀하셨다(출 20:13-17).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관계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비들은 자기 딸들이 매춘에 빠지지 못하도록 지켜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레 19:2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문제를 생각할 때 우선적으로 관계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2) 성경에서 성(性)은 올바른 인간상 정립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성 문제는 반드시 거룩성과 성실성의 문제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성적 타락은 어떤 타자(他者)외의 관계성의 포기임과 동시에 자신의 인격에 대한 자포 자기이다. 왜냐하면 탐욕과 충동적인 욕구는 이와 같은 관계와 인간성을 파괴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 지어다"(레 20:7)라고 명령하고 있다. 또한 간음한 자에게는 사형을 내릴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레 20:10).
 이러한 성경적 견해에서 볼 때 기브아 사람들의 비행은 크게 두 가지의 악한 결과를 초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이스라엘 사회의 사회적 관계나 서로에 대한 신뢰성에 파괴를 가져왔고, 둘째는 레위인의 첩인 한 개인의 인간성을 파멸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악한 결과가 연발해서 일어날 때 사회 기존 질서의 붕괴와 함께 하나님의 심판은 필연적으로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혹자는 성(性)에 대해 상황 윤리를 적용하여 성적 타락을 방조하려고 한다.그러나 이 문제는 방임해 둘 것이 아니라 그 자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권면 또는 징벌에 의해서 근절해야 할 문제이다. 또 다른 사람은 지나치게 상대방을 정죄하여 그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버리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 역시 관계성을 파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우에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요 8:11)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서로 관계와 인격을 정립하는 차원에서 성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여성관 - 본문에는 기브아 비류들이 레위인을 상관하기 위하여협박하자 노인이 레위인을 보호하기 위한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놓겠다고 사정하는 장면이 나온다(24절). 이와 유사하게 소돔성의 롯도 자기 두 딸을 소돔 사람들에게 내어 놓아 겁간(劫姦)케 하려 한 적이 있다. 또 입다는 자기 딸을 서원의 번제물로 바치기로 했다(11:39). 언뜻 보기에 이와 같은 사례들은 엄격한 이스라엘 사회의 가부장적(家父長的) 권위를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구약 시대에 여자들의 역할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위와 같이 그렇게 무조건 여자의 인격이 부정되거나 무시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여자들에게는 결혼에 있어서 남자를 선택할 궈닐도 있었고(창 24:58 ; 민 36:6), 기업을 물려받을 수도 있었다(민 27:1-8). 또한 여자의 권리와 순결은 율법에 의해 엄중하게 보호받았다(출 20:14, 17 ; 레 18:20 ; 19:29 ; 20:10-14, 18-21 ; 신 22:22-30 등). 그리고 남편의 변덕스러운 마음 때문에 이혼 당해서도 안 되었다(신 24:1-4). 더욱이 여인은 가정에서는 어머니로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녀들에 의해 존경도 받았다(출 20:12 ; 21:15 ; 레 19:3 ; 신 27:16 ; 잠 1:8). 특히 메시야가 여자의 몸에서 날 것이라는 후기 예언서의 예언(사 7:14)은 여자를 구속사의 특별한 위치에 두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간간이 목격되는 여성에 대한 무시 현상은 추첩제 및 일부 다체제와 함께 고대 근동의 이방 풍습에서 온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이 첩을 거느린것(창 16:1-3)은 종족의 번성이나 그 당시 사회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으나 그것 역시 엄연히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한 것으로 긴장과 불행의 우가인이 되었다<창 4:16-24 강해, 일부다처제>. 성경은 분명히 여자가 남자와 동등한 배필로 창조된 점을 들어 차별없는 인격체임을 강조하고 있다(창 1:27 ; 2:21-24). 그러기에 드물긴 하지만 미리암(출 15:20), 훌다(왕하 22:14 ; 대하 34:22) 같은 이가 여선지자로, 드보라(4:4-5:31)가 여사사로 활동하여 뭇사람의 존경을 받기도 하였다. 이로써 우리는 구약 성경에 나타나 있는 기본적 여성관이 어떠한 것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스 있다. 이와 관련 보다 자세한 내용은 창 2:18-24 강해, '창조론에 나타난 성경적 남녀 관계'를 보다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