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삼손이 가사에 가서 - '가사'(Gaza)는 가드,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과 더불어블레셋의 주요 다섯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그중에도 가장 최남단에 자리하고 있는 가사에는 애굽에서 서아시아로 통하는 상업로가 있어 중요한 전략 도시로 알려져 있다.이 도시는 가나안 정복시 이스라엘에 의해 정복되었으나(1:18) 해안에 있는 다른 도시들과 함께 곧 블레셋에 의해 재탈환되고 말았다. 한편 가사는 삼손의 주요 활동지인소라에서(13:2) 약 60Km가량 떨어진 곳인데 어떻게 해서 삼손이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추측컨대 레히에서의 삼손의 활약으로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몹시 두려워 하였고 삼손도 어느정도 자신의 힘을 믿고 교만해 있었기 때문에 블레셋 땅을 맘대로 다닐 수 있었던 것 같다(15:14-17). 이것이 삼손을 실족케 하고 비참한 종말을 가져온 것이다.
한 기생을 보고 - 여기서 삼손은 또 다시 안목의 정욕에 사로잡혀(14:1) 죄의 늪에서 헤매이게 된다. 한편 여기서 기생에 해당하는 '조나'(* )는 '매춘부' 라는뜻이다(창 38:15 ; 수 2:1). 그런데 아람 탈굼역에는 이 '조나'가 '여관의 여주인'으로 번역되어있다. 그렇다면 삼손은 기생으로 인하여 음욕에 사로잡혀 그녀와 동침한것이 아니라 단지 여관에서 잠을 잔 셈이 된다(Cassel). 그러나 '조나'는 분명히 '창녀', '매춘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동 번역과 KJV, RSV등 대부분의 역본들도 이를'매춘부'(Harlot)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삼손이 가사에 어떤 일로 갔다가매춘부의 유혹을 받고 그녀와 동침하였다는 의미이다. 삼손의 이러한 행위는 (1)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죄악이며 특히 이스라엘의 사사 위치에 있는 자로서는 도저히 취해서는 안될 행동이었다. (2) 한편으로는 당시 이스라엘 사사의 일반적 풍조가매우 문란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러한 죄악된 습성은 더 자라기 전에 근절되어야마땅하며, 그러지 못할 경우 필경 엄청난 멸망을 초래하게 되는데 이는 삼손의 경우에서 잘 입증되었다.
=====16:2
혹이 가사 사람에게 고하여 가로되 - 여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얼마나 두려운 존재로 여겼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가사 사람들은 삼손의 출현 자체를 거리낌과 위해(危害)로 여겨 어떻게 해서든지 삼손을 죽이려고 했다.
곧 그를 에워싸고 - '에워싸다'에 해당하는 '사바브'(* )는 '주위를 돌다','주위에 포진(布陣)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블레셋인들이 성문 입구에 복병을 배치하고 또한 삼손을 감시하기 위해 기생집 부근에 파수꾼을 파견한 것을 의미한다.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 블레셋 병사들은 삼손이 있는 기생집을 에워싸며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새벽을 기다렸다. 그들은 삼손이 두려웠기 때문에 정면대결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기습 공격할수 있는 기회만을 노렸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삼손이 성문을 나설 때 뒤에서 기습 공격을 하려했을 것이다(Pulpit Commentary).한편 본절 문맥의 전후 상황을 볼 때 이 기생 집은 가나안 정탐시의 기생 라합의 집과같이 성벽 위나 성문 가까이에 있었던 것 같다(수 2:15).
=====16:3
삼손이 밤중까지 누웠다가 그 밤중에일어나 - 본절은 삼손이 밤에 깊이 잠들었다가문득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이미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를 잡으러 온 것을 알고는밤이 될 때까지 기다린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본절에는 삼손이 어떻게 하여 가사사람들의 흉계를 알아차리고 밤중에 일어나게 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아마 기생 라합의 경우처럼 기생이 삼손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었는지도 모른다(수 2;16).
성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 삼손은 성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들과 병사들의 눈을 피해 성문 전체를 뽑아 메고 헤브론까지 가버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성문은 그 성읍을 대표하는 것으로 그 민족의 국력(國力)을 상징한다(창 22:17 ; 24:60).따라서 삼손이 가사의 성문을 유다의 중심지인 헤브론으로 옮겼다는 것은 블레셋의 권세가 유다에게 복속(服屬)될것을 상징한다(Lange).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 헤브론(Hebron)은 가사에서 동쪽으로 약62Km 정도떨어진 곳에 위치한 유다 지파의 성읍이다(수 15:13). 따라서 삼손이 성문들을 메고약 62Km나 되는 먼 거리를 옮겼다는 것은 그의 힘이 얼마나 엄청났는가를 가히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카일(keil) 등과 같은 학자들은 삼손이 그 성문을 메고실제로 헤브론까지 간 것이 아니라 가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언덕 꼭대기까지 간것이라고 주장한다(Cundall, Hervey). 하지만 삼손이 성문을 그런 언덕으로 옮길 수있었다면 헤브론까지도 충분히 옮길 수 있었을 것이다. 추측컨대 삼손은 헤브론이 유다의 중심지이기때문에 유다 사람(15:10, 11)과 더불어 완전한 승리를 만끽하려고 가사 성문을 헤브론 앞산까지 옮겨 놓았을 것이다(Cassel).
=====16:4
삼손이...여인을 사랑하매 - 가사에서 기생집에 들렀다가 큰 변을 당할뻔 했던 삼손(1-3절)은 이처럼 다시 육신의 정욕에 빠져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하다'는 말은 삼손이 들릴라와 합법적인 결혼을 하였다는 말이 아니다. 추측컨대 들릴라의 신분은 기생이거나 적어도 그다지 도덕적인 여인은 아닌 것 같다. 한편 본문을 통해서는 들릴라가 블레셋 여인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분명히 알 수없다. 그러나 '들릴라'라는 이름이 '음탕한' 또는 '연약한'이란 뜻의 샘어이고(Cundall) 그녀의 거주지가 삼손의 고향인 소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소렉 골짜기인 것으로 보아(Eusebius) 유다 여인일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당시 블레셋 치하에서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통혼이 횡행하던 점에 비추어 볼 때 들릴라는 블레셋사람과 결혼한여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것은 그녀가 블레셋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고 있던 것(5절)으로 보아 충분히 타당한 주장인것으로 보인다.
소렉 골짜기 - '좋은 포도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예루살렘 서남쪽 약 21Km지점에서지중 해변의 서북 방향으로 약 32Km나 뻗어 있는 골짜기이다. 오늘날 '와디 에스 사랄'(Wadi es-sarar)로 불리우고 있는데 그 부근에는 소라, 딤나, 레히 같은 성읍이 위치해 있다(Wycliffe).
=====16:5
들릴라의 유혹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 - 여기서 '방백들'이라 함은 3:3에 언급된 것처럼 블레셋의 주요 다섯 도시인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의 다섯 방백을 가리킨다(Cundall, Hervey). 여기서 우리는 블레셋족이 삼손의 문제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매우 심각하게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힘이 있는지 - 블레셋의 방백들은 삼손의 초자연적인 힘이당시의 이방인들이 지니고 다니던 호신패(護身牌)나 부적(符籍)과 같은 것에서 나오는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미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널리 유행되고 있던 것이다(Cassel).
은 일천 일백 - 곧 '은 천 백 세걸'을 가리킨다(공동 번역). 블레셋 방백들은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들릴라를 설득하고 은 일천 일백 세겔로 모종의 계약을체결했다. 일반적으로 은 한 세겔(Shekel)은 일반 노동자의 4일간의 품삯에 해당된다.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그러므로 들릴라에게 있어서 은일천 일백은 그녀가 십 년동안 쓰지 않고 모으기만 한다 해도 모으기 힘든 엄청난 액수이다. 들릴라는 이와 같이 엄청난 재물에 혹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한 경우에 당할 보복이 두려워 어떻게든 삼손의 힘의 근원을 알아내려고 애쓴다(6-17절).
=====16:6
어떻게 하면...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 여기서 '곤고케 하다'에 해당하는 '아나'(*)는 '억압하다', '비천케 하다'라는 뜻이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삼손에게 이와 같이 직설적인 표현으로 질문한 것으로 보아 들릴라는 상당히 우둔한 여자였던 것 같다. 이에 대해 삼손은 세번씩 거짓말을 하면서 그녀의 질문에 정직하게 말하는 것을 회피했다(7, 11, 13절). 그리고 또 삼손은 들릴라의 질문이 그 당시 블레셋인들과 같이 이방인들의 미신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임을 눈치채고 그럴듯한 미신적인 투로 대답을 한다.
=====16:7,8
푸른 칡 일곱으로 - 여기서 '칡'에 해당하는 '예테르'(* )는 현악기의 현이나 활시위(시 11:2) 또는 동물의 심줄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Hervet, Keill &Delitzsch, Wycliffe). 따라서 정확히 어떤 줄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미신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들릴라나 블레셋 방백들에게는 삼손의 대답이 신빙성있게 보였던 것같다. 더욱이 당시 히브리인들은 '일곱'이라는 수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기때문에(창 2:2, 3) 삼손의 대답은 더욱 그럴 듯하게 보였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 당시 블레셋인들이 삼손을 보통의 인간으로 본 것이 아니라 신화 속의 인물들처럼 생각했음을 시사해 주는 구절이다. 아무튼 그들이 이러한 삼손의 대답을 얼마나 신빙성있게 받아들였는가는 이어지는 그들의 즉각적인 반응에서분명히 알 수 있다.
=====16:9
이미 사람을 내실에 매복시켰으므로 - 이에 해당하는 원문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매복한 사람이 내실에 앉아 있었고'이다. 여기서 '매복한 사람'에 해당하는 '하오렙'(* )은 단수형이지만 집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Hervey). 즉 들릴라는삼손을 이미 일곱 개의 칡 줄로 묶어 두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블레셋 사람들을 불러들여 내실에 매복시켰던 것이다.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 - 삼손은 저의(底意)를 감춘 채 이렇게자기에게 위험을 알려 준 들릴라에 대하여 호의를 품었을런지 모른다. 아니면 들릴라의 음모를 알고도 육적인 욕망에 깊이 빠져 있어서 그녀를 포기할 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삼손은 이와 같이 위험을 당하고도 여전히 들릴라를 가까이 하고 있기때문이다(10절 이하). 이처럼 죄의 유혹은 눈을 멀게 하고 현명한 판단력을 상실케 만드는 것이다.
=====16:10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 여기서 '희롱하여'에 해당하는 '헤탈르타'(* )는 '엉덩이를 치켜 세우다'라는 뜻의 동사 '탈랄'(* )의 사역형능동태로서 '속임수에 의해서 심한 모욕감을 주는 것'을 가리킨다. 이 말 속에서 들릴라의 우둔함과 여성으로서의 귀염성을 느낄 수 있는데 아마 삼손은 이러한 들릴라의매력에 매료되어 더욱 죄악 속 깊이 빠져 들어간 듯하다.
=====16:11,12
만일 쓰지 아니한 새 줄로 나를 결박하면 - 여기서 '줄'이란 비틀어 꼰 밧줄을 가리키는데 15:13에도 동일한 어휘가 사용되었다. 한편 본절과 같은 삼손의 대답도 들릴라에게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럴 듯하게 여겨졌을 것이다(7, 8절). 그러나 사실은 이번에도 삼손이 자신의 강함을 믿고서 마치 게임을 즐기듯이 들릴라를 희롱한 것과 다름없다. 삼손의 비참한 종말은 바로 이러한 그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자신을넘어뜨리려는 대적의 계교에 무방비 상태로 안일하게 자신의 힘만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삼손은 실족케 되고만 것이다(15-22절).
=====16:13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위선에 섞어 짜면 - 애초에 삼손은 들릴라의 계획적인 질문을 농담으로 받아들였고 그도 역시 농담로 답변하였다(7절).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결박사건으로 미루어(8, 9절) 삼손은 여인의 간청속에 블레셋인들의 계교가 담겨 있음을 충분히 짐작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들릴라의 질문을 물리치지못한 것은 정욕에 빠져 삼손의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유 부단한 태도로말미암아 들릴라는 끈질기게 유혹의 손길을 뻗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본절에 나타난 세번째 대답은 이전의 두 대답에 비해 더욱 사실에 가까와졌다. 즉 삼손은 나실인의 특징이자 자신의 힘의 근원인 머리털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이 사단은인간의 본질 저 밑바탕을 잠식함으로써 인간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머리털 일곱 가닥을 위선에 섞어 짠다는 것은 베틀에 있는 선 사이에 머리털을 집어넣고 옷을 짜듯이 짜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게 하고 나면 삼손의 머리털은 모두 일곱가닥씩 가지런히 짜여지게 될 것이다.
=====16:14
들릴라의 두 번째 유혹 바디 - '바디' (* , 야테드)는 대나무로 바늘처럼 만들어 베를 짤 때 베실을낱낱이 꿰어 짜는 데 사용하는 제구(製具)이다.
직조틀의 바디와 위선을 다 빼어내니라 - 본절의 상황으로 볼 때 삼손의 머리털은모두 베틀에 묶여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도 삼손을 완전히 결박하지는 못했다. 한편 당시에는 애굽을 중심으로 하여 베짜는 기술이 베니게 해안 지역에 널리 유행하였다.
이와 관련, 애굽의 한 비문은 베짜는 여인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Cassel)=====16:15
당신이 어찌 나를사랑한다 하느뇨 - 삼손에게 세 번씩이나 속은 들릴라는 이제 최후로 사랑을 빙자한 간책(奸策)을 동원한다. 딤나 여인의 간청에 있어서도, 삼손은 본절의 경우와 똑같이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수수께끼의 비밀을 털어놓고 말았다(14:16). 눈물과 사랑에 호소하는 들릴라의 집요한 유혹으로 말미암아 이제 삼손은 깊은 고뇌에 빠진다(16절). 아무튼 이상으로도 우리는 삼손이 얼마나 들릴라에게 깊이빠져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첫번째 아내를 떠난 후 아직 혼자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15;1-8).
=====16:16
낱마다 그 말로...마음이 번뇌하여 - 삼손이 이처럼 번뇌한 것으로 보아 그에게는 그래도 아직 하나님께로부터 구별받은 나실인이라는 자각이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 나름대로 하나님의 계명과 인간적 욕망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하나님을 떠난 자는 양심의 힘으로도 악의 손길을 쉽게 뿌리칠수 없는 법이다(고전 8:7,12 ). 그러므로 결국 삼손도 들릴라에게 자신의 힘의 근원을 털어놓고 만다(17절).
번뇌하여 - 원어 '카차르'(* )는 '잘게 자르다', '찢다'는 뜻이다. 이는 삼손이 극심한 갈등과 고뇌에 사로잡혀 마치 그 마음이 찢어질 듯한 상태임을 잘 나타내준다.
=====16:17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 결국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하나님의 게명을 끝까지 고수하기를 포기하고 인간적인 욕정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즉 삼손은 사자를 찢어 죽일 만큼 강하였으나(14:6) 사랑의 유혹에는 약했고 일천명의 블레셋인들을 나귀턱 뼈로 쳐죽일 수 있었으나(15:15) 사랑의 올무에서는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과 육의 싸움에서 삼손은 육에게 지고 만 셈이다(롬 8 :3-11).
=====16:18
이 제 한번만 올라오라 - 이것으로 볼 때 들릴라는 블레셋 방백들에게 거의 신임을잃고 있었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블레셋 인들도 더 이상 삼손의 비밀을 알 수 없을것이라고 생각하여 거의 포기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이번 게임이 삼손에게는마지막 승부에서 돈에 대해 강한 욕망을 가진 들릴라가 삼손을 이긴 것이다. 결국 삼손은 육욕에 눈이 어두워 신앙을 저버린 것이다.
=====16:19
괴롭게 하여본즉 그 힘이 없어졌더라 - 지금까지 들릴라는 삼손이 가르쳐 준 대로그의 힘이 사라지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면서도 스스로는 한번도 정말 그의 힘이 없어졌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또 한번의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직접 삼손을 시험하여 그의 힘이 없어졌는가를 확인하는 신중성을 나타냈다. 한편삼손의 힘은 외적인 머리카락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나실인으로서의 성별(聖別)의 상징이며 증거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이 힘이 사라진 때는 그의 머리카락이 잘리운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들릴라에게 진정을 토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거부한 때에 사라졌다고 할 것이다(Lange, Matthew, Henry).
=====16:20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 구약 성경에서 이보다슬픈 장면을 묘사한 구절은 없다. 민 14:40-45에는 이와 유사하게 모세가 자기 민족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 대적 앞에서패할까 하노라'(42절)고 한 장면이 나온다. 아무튼 나실인의 상징인 머리털을 깎이운삼손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였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권능도 더 이상그에게 머물지 않고 떠나 버렸다. 그러나 그런 사실도 모르고 위기에 처한 삼손은 예전의 힘을 과시해 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무기력해진 자신과 사랑했던 여인으로부터 철저히 배신당하고 이방 대적들의 능욕거리로 전락한 스스로를 발견하고 절망과회한 가운데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절망케 만든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본 장면을 통해 다음 몇가지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다. (1) 성도들이 타락의 길로 들어서면 불신자들보다 더욱 비참한 형벌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방 나라 백성들보다 더높은 도덕 수준의 행실이 요구되었는데 특권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의무가 따르기마련이기 때문이다. (2)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 나서 자라고 죽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버리심을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다(시 51:5 롬 3:23). 그러나 죄인들을 대신하여 버림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거룩한 나라의 시민들로 인정받게 되었다(마 27:46 ; 빌 3:20). (3) '구원받은' 성도들은 더 이상 '개가토했던 것을 다시먹는' 식으로 구습(舊習)을 반복할 것이 아니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할 것이다(잠 26:11 빌 3:13).
=====16:21
그 눈을빼고 -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승리자가 패한 자에게 이같이 잔인한 형벌을내리는 것이 관례였다(민 16:14 ; 왕하 25:7).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Zedekiah)도 느부갓네살에게 잡혔을 때 두 눈을 뽑히우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일이 있다(왕하 25:7). 한편으로 삼손이 당한 이런 형벌은 그가 눈으로 여인을 '보므로' 죄악에빠진 당연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14:1 ; 16:1). 이와 관련 예수님께서는"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마 5:29)고 하셨다. 그리고 바울은 "땅에 있는 지체롤 죽이라"(골 3:5)고 하셨다.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니 - 본래 조그마한 맷돌은 가정에서 여인들이 돌리었다.그러나 가축을 사용하여야만 돌릴 수 있는 정도의 큰 맷돌을 돌리는 일은 대개 노예가 맡아 하였는데 이는 노예의 사역 중에서도 가장 고된 일로서 천히 여기던 것이었다. 특히 이러한 형벌은 로마와 헬라 시대에 유행하였다(Lange, Hervey, Keil & DelitzschCommentary, Vol, 2, pp, 423 f).
=====16:22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 '시작하다'라는 단어는 이미 13:5에서도 나온 적이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도 본서 기자는 이 단어를 통하여 삼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그리고 또 육의 눈을 잃고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는 중에 삼손이 서서히 영의 눈을 뜨기 시작하였음도 암시해 주고 있다.
=====16:23
블레셋의 다곤 축제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 다곤(Dagon)은 블레셋의 주신(主神)으로서 '날씨의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곡물의 신'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 명칭은 곡물을 뜻하는 '다간'(* )에서 온 것이다(Philo). 그런데 중세 율법학자들은 가사(Gaza) 지역이 해안 지방인 것으로 보아 다곤은 '바다의 신'이며 그 명칭은 물고기를 뜻하는 '다그'(* )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그 같은 주장도 상당히 일리가 있는바 오늘날에도 그런 견해를 추종하는 학자들이 일부 있다(Hervey, Cassel, Keil). 그러나 블레셋사람들이 자기들의 토지를 황폐화시킨 삼손(15:4, 5)을 다곤 신이 자기들의 손에 붙였다고찬양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곤은 곡물 신임이 분명하다. 한편 이 다곤 숭배는 이스라엘 백성중에서도 널리 유행되었는데 벧산(삼상 5:2-7) 지역에서 특히 많았고 다곤의이름을 딴 도시도 있었다(벧다곤, 수 19: 27).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레26:1-13강해. '가나안 땅의 신들'을 참조하라.
즐거워하고 - 이에 해당하는 '사마흐'* )는 '원기를 돋우다'는 뜻으로 대개종교적 축제와 연관되어 사용되는 말이다. 이로 보아 블레셋인들은 다곤에게 제사를드린 후 축제를 베풀었음에 분명하다.
=====16:24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 레셋에게 큰 골치거리였던 삼손이 잡히므로 말미암아 이제 거국적(擧國的)인 감사 축제가 블레셋에서 열렸다. 이것으로 볼 때 그 동안반블레셋적인 삼손의 행위에 따른 블레셋인들의 피해가 얼마나 지대했는가를 짐작케된다.
=====16:25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 대개 큰 축제에는 많은 술이 제공되어 흥청거리기마련이다. 여기서 '마음이 즐거울 때'에 해당되는 '토브 리밤'(* )도 흔히 '술에 취해 마음이 흥분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18:20 ;19:6 ; 삼상 25:36 ;삼하 13:28). 블레셋인들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한때 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삼손을끌어내어 재주를 부리게하여 즐기는 등 온갖 모욕을 주었다.
재주를부리게 하자 - 문자적 뜻은 '희롱하자'(잠 26:19)이다 . 그러나 삼상 18:7과삼하 6: 5에서는 노래와 악기에 맞춰 춤을 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로 볼 때 블레셋인들은 앞을 못보는 삼손으로 하여금 음악만 듣고 춤을 추게 하고선 그것을 보고즐긴 것 같다(Pulpit Commentary).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 삼손이 춤을 추다가 기둥 사이에 세워지게 된것은 그에게 약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거나 아니면 블레셋인들이 거기서 삼손을 더잘 볼 수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16:26
이 집을 버린 기둥을 찾아서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 본절로 볼 때 삼손은 이전부터 이 집의 구조를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그는 잠깐의 휴식 시간을 통해 옆에 있던 소년으로 하여금 그 건물전체 또는 지붕을 바치고 있는 기둥을 찾아서그것에 의지할 수있도록 해달라고 말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의지하게'에 해당되는'솨안'(* )은 '조용히 쉬게 하다'라는 뜻이다(Living Bible). 즉 삼손은 피곤한체하면서 버팀 기둥에로 자연스럽게 접근해 간 것이다.
=====16:27
그 집에는...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 명 가량이라 - 여기서 본서 기자는 당시 그건물의 구조를 대충 묘사해 보임으로써 삼손이 행한 이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있다. 즉 당시 팔레스타인의 가옥의 형태는 대개 앞쪽에 넓은 마당이 있고 단층의 가옥일 때는 거실위에 평평한 지붕이 있다. 그리고 2층 이상의 가옥일 때는 거실은 2층에, 아래층은 하인들의 방과 창고로 되어 있다. 반면 그보다 더 큰 회당의 경우에는지붕이 넓어서 3천명 이상이 올라갈 수도 있었으며 지붕은 대개 목재로 된 두 개의 버팀대로 받쳐져 있었다. 따라서 이 버팀대를 빼버릴 경우에 지붕의 가운데 부분은 파괴되어 위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죽음을 면하기가 어렵다.삼손이 단번에 수많은 블레셋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 있었던 것(29, 30절)도 바로 그같은 가옥 구조 덕분이었다.
=====16: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 삼손은 '엔학고레'(15:19)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그때의 심정으로 다시 한번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본절에 기록된 삼손의 기도는 그가 사용한 하나님의 명칭 세 가지와 더불어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1) 주(* , 아도나이):이것은 삼손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주장하시는 분은 곧 주되신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자신을 사슬로 맨 블레셋이 주(主)가 될 수없으며 자신의 영혼을 주장하시는 하나님만이 '주'이심을 보여 준다. (2) 여호와(* ,예호와):이것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신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명칭이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분은 오직 여호와 뿐이심을 말하는 삼손의고백을 발견할 수 있다. (3) 하나님(* , 하엘로힘) : 여기서 관사 '하'(* )가 붙어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모든 신들 중의 신임을 나타낸다. 이로 볼때 삼손은 이 싸움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열방의 신들과의 싸움이며 이 싸움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반드시 숭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나를생각하옵소서 - 여기서 '생각하다'에 해당하는 '자카르'(* )는 '기억해내기 위해 표를 해두다'는 뜻이다. 즉 삼손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종'으로 구별해 주신 것(13:2-5) 에 의거, 다시금 자기를 권념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이는 하나님의 권능의 장중(掌中)에 다시 한번 사로잡히기를 소원하는 삼손의 심경을잘 나타내 준다.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 이러한 삼손의 기도는 마치 자신을 불구로 만든 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븍수심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일삼손이 정말로 그러한 마음으로 기도했다면 그것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롬12:19 ; 히 10:20)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여기서의 강조점은 '원수'인 블레셋에게 있다. 즉 삼손의 기도는 자신의 두 눈을 위해서 한 기도가 아니라 자신에게는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고통을 준 원수들인 블레셋족에 대하여원수를 갚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삼손의 민족적 정신을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16:29
삼손의 장렬한 최후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 삼손은 이처럼 다시 하나님께서 주신 완력으로 그 건물의 버팀대를 두 팔로 하나씩 끌어 안고 밀기 시작했다. 기도 후에 잇따른 이러한 즉각적인 행동 개시는 확신에 찬 믿음의 발로이다.
=====16:30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 자기 한 몸을 던져 이스라엘을 구원코자 하는 이러한 삼손의 살신 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은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라고말한 에스더의 정신과 연결이 된다. 그리고 또 이러한 죽음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모형이 된다. 한편 이와 관련 우리는 삼손의 죽음을 자살로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일종의 전사(戰死)였다. 즉 삼손은 최후의 장렬한 죽음으로써 블레셋의 신다곤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화롭게 한 것이다(Keil).
=====16:31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 삼손은 독자(獨子)였다(13:2, 3). 때문에 여기서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라 함은 이스라엘 동포나 삼손의 부족들을가리키는 것이다(Cundall). 한편 고대에는 죽은 자의 시신을 처리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그리고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그들의 왕이나 지도자가 죽은 뒤 그시신을 처치하는 태도나 방법에 따라 생전의 업적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본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삼손을 당대의 지도자로 예우를 다하기 위하여 가사(Gaza)의 무너진 블레셋 신전으로 그의 시신을 찾으러 갔음을 보게 된다. 한편 본절에서 이스라엘인들이 아무런 방해없이 무너진 선전에서 블레셋인들의 시신들과 섞여 있는 삼손의 시신을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 당시 그 주변의 블레셋인들은 어떤 미신적인 두려움 때문에 모두 도망가 버린 것 같다.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 년을 지내었더라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사사로 들어 쓰신 자이자 기간이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3:7-11 강해, 이스라엘의 구원자 사사 참조. 한편 이상으로 파란 만장(波瀾萬丈)한삼손의 생애는 모두 끝난다.
삼손의 20년간의 사사 활동 가운데 대표적인 사건들은 이미 13-15장에 다 기록이
되었다. 이제 본장은 15장 이후에 추가된 기록으로서 삼손의 최후에 대해 특별히 따
로 한 장에 걸쳐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본장에는 삼손의 치명적 약점인 여자와 관계
된 사건이 나온다. 그중 하나는 삼손이 기생과 관계한 사건이다(1-3절). 그리고 다
른 하나는 들릴라라는 세속적인 여인과의 사랑에 빠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나
실인의 규례(13:5)를 깨뜨린 사건이다(4-20절). 이로 인해 삼손은 두 눈이 뽑히며 블
레셋인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과 같은 수치와 모독을 당한다(21-27절). 이 와중에서
삼손은 하나님께 회개하므로 최후의 긍휼을 덧입는데 곧 자신의 몸을 던져 대적을 멸
하고 더불어 자신도 죽는 것이다(28-31절). 삼손의 최후에 대한 이러한 본장의 기록
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멀어지며 그 규례를 깨뜨려 타
락해 가는 모습을 잘 보여 준다. 또한 이러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놀라운 하나님
의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본장의 기록들을 통해 우
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하나님께서는 철저한 공의의 하나님이시자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삼손이 나실인의 서원을 깨뜨렸을 때 당한 환난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21절). 그러
나 하나님께서 주신 그러한 환난은 공의에 입각한 징벌이면서도 동시에 그분의 사랑의
반영이었다. 왜냐하면 삼손이 자신을 실족케 하는 눈과 육체로부터 스스로 벗어나자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환난을 통하여 벗어나게 하셨기 때문이다(마 5:29, 30).
이와 같이 스스로는 무능하여 멸망할 수 밖에 없는 당신의 백성들을 환난을 통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시고,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참모습을 영안으로 보게
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역사인 것이다. 그 결과 삼손은 자신의 육
체를 버리면서까지 헌신하여 마지막에 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게 되
었다(28-31절). 이에 대하여 본서 기자는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고 기록하고 있다(30절). 결국 이로써 "그가 ...이스라
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13:5)고 한 여호와의 사자의 예고도 그 내용상 온전히 성
취된다.
(2)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인간의 범죄에 의해 단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단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하와를 꾀어 하나님과 인간 간의 언약 관계 및 인간과 인간 간의
유기적 연대 관계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구속사를 망치려 했다(창 3장). 그런데 그러
한 사단의 책동(策動)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사단은 거짓 선
지자를 선동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어그러진 길로 가게 하는데(마 24:24) 삼손이 여인
을 보고 미혹되어 하나님을 떠나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사단의 계교로 말미암은 것이
다.
그러나 그와 같이 사단이 인간들을 범죄의 도가니에 빠뜨릴지라도 하나님의 구속 역
사는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이는 최후에 삼손이 회개할 뿐 아니라 그러한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적 블레셋을 응징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하나
님의 구속 의지는 창 3:15, 요 19:30., 히 9:28 등에도 선명하게 표명되어 있다. 그
리고 실제로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늘날 사단의 책동은 망가
지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단번에' 성취되고 말았다. 즉 이제 우리 성도들은 하나
님의 작정하심과 섭리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운 구속에
동참케 된 것이다(엡 1:3-14).
1. 삼손의 타락과 하나님의 징벌(16:1-22)
앞서 딤나 여인(14, 15장)에 이어 재차 삼손을 궁지에 몰아넣는 음란한 두 여인에
관계된 기사이다. 그증 먼저 1-3절에는 가사 출신의 기생이 등장한다. 삼손은 이 기
생을 보고 정욕의 올가미에 사로잡혀 그 집에 들어갔다가 블레셋 사람들의 포로가 포
로가 될 뻔한다(1. 2절). 그러나 이때까지는 어느 정도의 신앙적인 양심을 소유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서 떠나가지 않은 때라 가사의 성문을 헤브론 앞산 꼭
대기로 옮기는 큰 역사를 이루게 된다(3절). 그렇다고 해서 본서 기자는 이에 대해
특별한 주석을 가하고 있지는 않은데 아마 그 까닭은 이 일이 삼손 타락 사건의 전초
(前哨)에 불과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으로 4-22절에 등장하는 여인은 소렉 골짜기
의 들릴라이다. 삼손은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윤리적 차원의 범과를 넘어 나살인으로
서의 규례를 어기고 하나님의 사명을 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4-17절).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무할례자에게 조롱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던 삼손이(15:18)블레셋인들로
부터 지독한 수치와 곤욕을 당하기까지 한다(18-22절). 따라서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1) 사단은 항상성도의 약점을 찾아내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블레셋 방백들과 음모를 꾸민 들릴라는 삼손을 곤고케 할 수 있는 방법이 무
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 쓰는데(6., 10, 13, 15, 16절) 이러한 그녀의 모
습에서 우리는 욥을 유혹하던 사단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욥 1, 2장). 한편 오늘날
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사단의 유혹과 인간적인 약점에 대한 공격은 쉴새 없이 계속
되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
코 정죄함이 없다"(롬8:1)고 단정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죄에 개한
두려움에 떨므로서 사단에게 공격의 여지를 보여줄 것이 아니라 신앙의 담대성을 기르
며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성결된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골 3:9 ; 벧전 1:5).
(2) 사단은 항상 자신의 행위를 미화시키고 위험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하낟는 것
이다. 블레셋 방백들이 처음 들릴라를 찾아와 은 일천 일백 세겔을 내어 놓으면서 제
안한 말은(5절) 단지 삼손의 힘의 근원을 알아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인
즉 단지 그를 곤고케하여 그외 교만을 꺽어 놓으려는 것뿐이었다는 것이다. 들릴라가
그들의 제안을 쉽게 수락한 것은 돈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이러한 제안을 그렇게
위험하게 보자 않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들릴라의 유혹으로 인해
삼손이 당한 고난은 상상 밖의 것으로 엄청나게 잔인한 것이었다(21절). 이와 같이
사단은 마치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성도의 생명을 위협해 오는 것이다(마 7:15).
(3) 사단의 유혹은 자주 음녀의 유혹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실 삼손과 같은 장
정이며 독신인 기자는 음녀로 해서 많은 사람이 상하여 엎드러지게 되었나니 그녀에
의해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잠 7:26)고 했고 또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
니라"(잠 6:26)고 했다.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돈에 혹한 자나 권세에 혹한 자에게
는 돈과 권세가 바로 음녀와 같은 작용을 할 것임에 틀림없다.
(4) 신앙 양심은 끝까지 고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들릴라의 재촉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삼손은 급기야 진정을 토하면서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17절)는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된다. 그
런데 실상 그러한 비밀은 지금까지 삼손이 지켜 온 마지막 신앙의 보루였었다. 따라
서 만일 삼손이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주신 나실인이라는 신앙적 자부심과 이에 대한
신앙적 양심을 무너뜨리지 않았다면 그의 종말은 그렇게 비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편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의 집사를 세울 때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딤전 3:9)를 집사로 세우라고 권면했다. 여기서 '믿음의 비밀'은 곧 성도들
의 삶을 지켜주는 신앙의 최후 보루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건의 비밀을 굳
게 지니면 지닐수록 성도의 신앙은 더욱 곤고해지고 어떠한 사단의 시험이라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세속적 사랑의 본질 - 본문에는 삼손이 세속적인 여인 들릴라와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나온다(4절). 이와 관련 우라는 세속적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
각해 볼 수 있다. 혹자는 세속적 사랑의 종류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만일(if)의
사랑'과 '때문에(because)의 사랑'으로 보고 있다. 이제 이에 대하여 살펴보면 곧 다
음과 같다.
(1) 만일(if)의사랑 : 이것은 미래적인 번영이나 가능성을 전제한 조건부의 사랑이
다. 사단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마
4:3, 6)이라는 말로 두 번 시험하였고, "만일 내게 엎두려 경배하면:(마 4:9)이라는
말로 한 번 시험하였다. 전자는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조건부적인 사랑을 묻는 시
험이었고 후자는 사단에 대한 조건부적인 사랑을 요구하는 시험이었다. 여기서 세속
적인 사랑은 반두시 주어질 어떤 좋은 결과에 좌우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
께서는 이러한 사랑에 대하여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
리요"(마 5:46)라고 말씀하셨다.
(2) 때문에(because)의 사랑 : 이것은 현재에 주어진 결과에 만족하여 갖게 되는 사
랑이다. 이것을 역으로 표현하면 이 사랑은 현재의 만족을 얻기 위하여 언제든지 무
엇을 요구할 수 있다는 이기적인 사랑이 된다. 본문에 나오는 들릴라의 사랑은 바로
이러한 이기적인 사랑이었다. 들릴라는 현재의 만족을 얻기 위하여 사랑의 증거를 요
구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순간순간 자기에게 주어지는 만족한 결과 '때문에' 누군가
를 사랑하는 그러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15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들릴라는 삼손이 자기가 요구하는 것에 만족한 결과
를 주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라고 반문하게 된다. 여기
서 '때문에의 사랑'은 주어지는 결과에 따라 언제든지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있는 그
러한 종류의 사랑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손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도
바로 들릴라의 '때문에의 사랑'에 만족함을 주려고 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17-21
절). 즉 이러한 사랑은 항상 요구하면서도 결코 그 만족이 다함이 없기 때문에 심지
어 삼손의 목숨까지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바로 세속적인 사랑의 본질과 위
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상과 같은 세속적 사랑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불구하고(in spite of)의 사랑'이다. 즉 상대방에게 사
랑을 베풀어야 할 하등의 이유와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랑이다.
이의 전형(典型)은 곧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인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주신 사건에서 극치를 이룬다(요 3:16). 따라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
원을 얻은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이를 적극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고 명하고 계신다.
성려의 떠남을 결과 - 본문에는 삼손에게 임재해 있던 하나님의 권능이 떠나므로
말미암아 그에게 일어난 비참한 결과가 언급되고 있다. 즉 삼손은 머리털을 깍이므로
나실인의 상징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떠나므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격과 능력을 잃었던 것이다(19, 20절). 이처럼 평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던 자에
게서 성령이 떠났다는 것은 그 자의 완악함이 절정에 달했음을 의미하는 때가 종종 있
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는 대체적으로 공통된 현상이 나타나는데 곧 다음과 같다.
(1) 성려이 그사람에게서 떠나면 그 사람은 불신자들보다 더욱 심각한 도덕적 타락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마 12:43-45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처음에 더러
운 귀신 하나에 매인 바 되었던 자가 나중에는 더 악한 귀신 일곱에게 매인바 되어,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된 경우가 언급되어 있다(삼상 16:14).
그리고 베드로는 당시대의 타락상을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
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운 것'(벧후 2;22)에 비교하였다.
(2) 성령이 떠나면 성도는 불신자들보다 더욱 비참한 형벌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구별되는 형식이 요구되었던 만
큼 타락시에는 그에 상응하는 형벌도 더 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삼손의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데 실로 그는 두 눈을 뽑히우는 것과 같은 극한 형벌을 받았다
(21절). 그러나 삼손은 그러한 형벌 중에 회개하여 다시금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는
것의 중요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일상적으로 범하는 숱한 죄악
속에서 버림을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지만(시 51:5 ; 롬 3:23) 날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결된 삶과 믿음의 경주를 다할 때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의 반열에 동참할
수 있다(잠 26:11 ; 빌 3:13).
2. 삼손의 최후(16:23:31)
극한 환난 중에 빠져 있던 삼손이 하나님께 회개하므로 권능을 회복, 블레셋인들을 멸
하고 장열한 죽음을 맞이하는 최후의 감동적 장면이다. 즉 들릴라와 공모하여 삼손을
무력화(無力化)시키고 그를 사로잡은 블레셋인들(4-22절). 그러자 원수의 조롱을 받
으며 온갖 굴욕 가운데 처해 있던 삼손은 하나님께 통렬히 회개하고 도우심을 간구한
다. 그리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새 힘을 얻은 삼손은 다곤 신전을 무너뜨림으로써 그곳
에 모인 블레셋인들을 압사(壓死)시키고 자신도 더불어 장열한 죽음을 맞이한다(28-31
절).
이처럼 본문에는 블레셋인과 삼손의 죽음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 두 죽음은 전혀
상반된 성격을 띤다. 그중 블레셋인의 죽음은 악인의 죽음의 전형적인 본보기이다.
시편 기자는 노래하기를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시 73:12)라고 했으나 이 시의 후반부(19절)를 보면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猝地)에
황폐되었는가"라고 기록하고 있어 악인의 번영이 얼마나 일순간적이며 그들의 파멸이
얼마나 임박한가를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삼손은 죽음은 사단의 권세하에서 해방된 성도들의 일반적인 죽음이다. 일찍
이 시편 기자는 노래하기를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여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시
73:14)라고 했다. 이러한 탄식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일스록 더욱 자주 있어 왔는데
사도 바울 같은 경우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고 하면서 죄의 고통을 탄식했다. 그러나 성도들의 격국운 영적
싸움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복된 죽음이다(히 11:13-16).
그러기에 삼손도 깍인 머리카락이 다 자라는 날까지 원수의 조롱과 후욕(后縟) 속에서
지내는 동안 지난 날의 허물과 불충을 통절히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다시 덧입
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데 결정
적인 공헌을 함으로 영예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삼손의 죽
음을 통해 우리는 다시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숙고해 보게 된다.
(1) 고난 속에서 성장한 삼손의 신앙은 단순한 개인적인 보복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한 장면을 이루는 업적을 이루었다. (2) 회개를 통한 새로운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무한한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다. (3) 다곤 신전을 무너뜨린 삼손의 역사에서 사단의 왕국을 파괴하고 암흑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예견하게 된다. (40 결론적으로 삼손의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 국가 시대에 하나님을 진정한 주권자로 따르지 못하고 타락한 이스라엘 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징계하시며 인도하시며 구원하고 계시는가를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