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사사기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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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북으로 가서 - 이의 원어 '야아보르 차포나'(* )는 '북쪽으로건너서' 또는 '사본으로 건너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차포나'의 명사형인 원어'차폰'(* )은 '북쪽'을 의미하기도 하고 고유 명사로서 '사본'(Zaphon)이라는도시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KJV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역 성경들과 공동번역은'차포나'를 '사본으로'라고 번역했다(RSV, NIV, Ling Bible). 이것은 '사본으로'(* , 에이스 세피나)라고 번역한 70인역(LXX)의 전통을 따른 번역임에 틀림없다. 한편 '사본'은 갓 지파의 땅인 숙곳(Succoth)근처에 위치해 있다(수13:27). 이곳은 미스바(11:34)와도 별로 멀어지지 않은 곳이니 본절을 '사본으로 가서'로 번역해도 큰 무리는 없다(Wycliffe, Pulpit Commentary, Keil & DelitzschCommentary, Vo1.2,p.396).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같 때에 - 에브라임 사람들은 사사 기드온에게 했던대로 압제자를 쫓아낸 입다에게도 시비를 걸어왔다(8:1). 여기서 에브라임 사람들은입다의 승리와 온 길르앗의 머리로서(11:11) 받는 그의 명성을 시기했다(Goslinga).다시 말해 그들은 기드온의 경우에서와 같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자하는 욕망에서 그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 -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와 싸워 그가 길르앗의 우두머리로 군림하지 못하도록 멸하겠다는 의미이다. 특히 '불'이란 말은기드온의 막내 아들 요담의 우화에서도 '싸움'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9:15), 성경전체에서는 종종 '징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1:8; 수 6:24; 7:25; 8:19; 11:9,11).아무튼 본절은 당시 에브라임 지파의 타락된 모습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들은 마치 대적을 진멸하려고 나서는 원정군인양 무리를 지어 먼길을 행군해 왔을 뿐 아니라입다에게 다짜고짜로 잔혹한 협박을 가하였던 것이다.

=====12:2
내가 너희를 부르되 - 11장에서는 입다가 암몬 자손과 싸우기 전 에브라임 지파를소집했다는 말이 없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 혹자는 에브라임 지파가 암몬과의 싸움에소집통고를 받았으나 입다가 전군대의 지휘관이 되었으므로 이에 협조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Keil, Hervey). 항상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주도권을 잡고자 했던에브라임 지파의 성격으로 보아 이러한 해석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주장이다.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하므로 - 사실상 입다는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이러한 변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 이유는 (1) 암몬 자손과의 싸움은 암몬자손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받고 있던 요단 동편 지파들에 의해 주도되어야 했으며,(2) 반드시 입다가 에브라임 지파에게 도움을 호소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다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잘못을 확실하게 지적해 주기 위해서 본절과같이 말했던 것이다(Matthew Henry). 한편 본절은 의미상 '너희는 내가 바라던 도움을제공하려고 하지 않았다'로 해석될 수 있다(Living Bible).

=====12:3
내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 입다와 암존족 간의 전쟁이 매우 치열했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처럼 입다는 여유있게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사력(死力)을 다해 싸워야만 했다. 따라서 그가 얻은 승리와 영예는 고된 싸움 끝에 얻는정말로 값진 것이었다. 그런데도 입다는 겸손히 그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렸다. 이는손끝하나 움직이지 않고서도 입다의 영광을 시기한 에브라임 지파와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손에 붙이셨거늘 - 입다는 그의 승리에 대한 근본 원인을 여호와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에브라임 사람들의 질투심이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말은 입다가 그들의 입을 막는 최후의 진술로서 매우 적절했다.

=====12: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 아마도 길르앗 사람들은 암몬족과의 전쟁이 끝난 직후 제각기 고향으로 흩어졌을 것이다(11:32-34). 따라서 입다가 에브라임 지파의도전을 응징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그들을 소집하는 일이 필요하였을 것이다(Wycliffe).
너희 길르앗 사람은...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 본질은 (1)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 지파에서 도망친 분파주의자 또는 망명자들이라는 의미와, (2) 길르앗 사람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땅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근거없는 트집으로서 길르앗 사람들을 무시한 처사이므로 길르앗 사람들의 분노를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길르앗 사람들은 므낫세 지파의 한 분파로서 마길의아들 길르앗의 후손이지(민 26:29) 결코 에브라임 지파에서 떨어져 나온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모욕적인 언사(言辭)를 받은 길르앗 사람들은 대동 단결하여에브라임 지파를 단호히 응징하였던 것이다(5,6절).

=====12:5
요단 나투턱 - '나루턱'은 나룻배가 들어와서 닿는 곳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절에사용된 원어 '아바라'(* )는 배로 건너는 나루(ferry)가 아니라 수심이 얕아배 없이 건널 수 있는 곳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일종의 여울(ford)과 같은 곳이다.당시 갈릴리 호수에서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요단 강은 그 폭이 27m가량, 깊이가 1-3m가량이었다. 따라서 아주 얕은 곳은 배 없이도 충분히 걸어서 건널 수 있었다.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페리테 에프라임'(* )은 '에브라임으로부터 도망하는 자'란 의미로서 4절의 '에브라임에서도망한자'와 같은 말이다.그래서 혹자는 이와 관련 에브라임 사람들이 길르앗 사람들에게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라고 말한 것으로 추정한다(Gosinga, Hervey).그러나만일 그렇게 되면 길르앗 사람들이 나루턱을 건너 에브라임 지파 땅으로 도망치려는사람이 아닌 단순히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사람들을 처치했다는 결론이 나온다(6절).그러므로 위와 같은 해석은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저자는 길르앗 사람을 '도망자'로비난했던 에브라임 사람들(4절)이 그들의 비난과는 반대로 도리어 자기들이 도망자가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본절과 같은 말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2:6
십볼렛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쉽볼렛'(* )은 '시내' 또는 '곡식 이삭'을의미한다. 여기서는 요단 강의 여울목에서 발생된 사건과 관련이 있으므로 '시내'란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1.2,p.397).
씹볼렛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십볼렛'(* )은 특정한 의미가 없다. 혹자는 이것이 '무거운 짐'을 뜻할 것으로 추정하기도하나 분명치 않다. 여기서는 단지 에브라임 사람들이 시내의 의미인 십볼렛'을 발음할 때 '쉰'(* )을 발음하지 못하고 '사멕'(* )으로 발음한 것일 뿐이다(Keil & Delitzsch, Matthew Henry). 이와 같은동일어에 대한 발음상의 차이는 이스라엘의 경우에서 뿐 아니라 다른나라에서도 발견된다. 이것은 각 지방의 특징적인 발음이 전통적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우리 나라에서도 표준말 '의'가 어떤지방에서는 '어'로, 또 어떤 지방에서는 '으이'로발음되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 요단 나루턱에서 이 정도의에브라임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것이며 여러 차례의 간헐적(間歇的)인 혈전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 첫번째 인구 조사에서 에브라임 지파의 장정 수는 45,000명이었다(민 1:33). 그리고 2차 조사에서는그보다 줄어든 32,500명이었다(민 26:37). 따라서 그 이후부터 입다 당시까지 300여년이 흐르는 동안(11:26) 각 지파마다 인구가 많이 증가했을 것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에브라임의 장정 42,000명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에브라임 지파에 있어서는 매우 큰 타격이었을 것이다.

=====12:7
입다가...길르앗 한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 본절의 서술 형식은 다른 '소사사들'(Minor Judges)의 생애에 대한 서술형식과 꼭 같다. 그 형식이란 곧 사사로서의 통치기간, 죽음, 매장지 등의 순서이다(10:2,5; 12:10,12,15). 한편 본절에서 '길르앗 한성읍'으로 번역되어 있는 구절은 각 번역서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즉 공동 번역은 이를 '길르앗에 있는 자기의 성읍 미스바'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RSV는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his city in Gilead)으로, 70인역(LXX)의 한 사본은 '그의 성읍길르앗에서'(* , 엔 테 폴레이 아우투 갈라드)로 각기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히브리 원문의 애매 모호함 때문이다. 즉 원문 '베아레길르앗'(* )은 '길르앗의 그 도시들에서'란 뜻이다. 여기서 '그 도시들'이란 복수형이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입다의 주요 활동 무대가 미스바였고 또한 그의 고향 역시 그곳이었던 점에 의거할 때(11:9,34) 길르앗이 장사(葬事)된 '길르앗 한 성읍'은 '미스바'일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12:8
베들레헴 입산 -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은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과 스불론 지파의베들레헴이 있으므로(수 19:5) 어떤 지파의 성읍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본절의 베들레헴을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으로 주장하지만특별한 근거가 없다(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일반적으로 유다 지파의베들레헴은 '유다 베들레헴'(17:7,9) 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미 5:2)로 불리워졌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사 대부분은 북부 지파의 출신들이었다. 본서 서론 '이스라엘의 사사들' 참조. 이로 미루어 보아 본절의 베들레헴은 스불론 지파에 속한 베들레헴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므깃도에서 약 18km정도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한편 이곳 출신 입산(Ibzan) 역시 돌라(10:1,2), 야일(10:3-5), 엘론(8-10절), 압돈(11,12절)과 더불어 두드러진 공적이 없는 이스라엘의 '소사사'였다.

=====12:9
그가 아들 삼십과 딸 삼십을 두었더니 - 입산은 입다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11:34) 기드온이나(8:30,31) 야일과 같이(10:4) 자녀를 많이 두었다. 이것은 입산이누리는 부와 권세를 상징해 준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식을 여호와에서 주신 기업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시 127:3).
타국으로 시집보내었고 - '타국으로'에 해당하는 '하후차'(* )는 '외국'이라는 뜻과 함께 단순히 '바깥'(outside)이라는 의미도 지닌다(B.D.B). 입산은 사사였으므로 자기의 아들과 딸을 위해 이방인과 교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타국'이란 말은 '다른 가문' 또는 '다른 지파'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공동 번역은 이를 '일가 아닌 사람들에게'로 번역했으며, 대부분의 영역 성경도 '그의가문 밖으로'(outside his clan)라고 번역했다(RSV, NIV, Living Bible).
아들들을 위하여는 타국에서 - 여기서 우리는 입산이 자기의 아들과 딸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른 지파 사람들과 결혼시킨 것은 의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그는 각 지파간의 유대 관계를 강화시키고자 자신의 아들과 딸을 다른 지파 사람들의 아들과, 딸과 정략적으로 결혼시켰을 것이다.

=====12:10
입산이...베들레헴에 징사되었더라 - 이처럼 묘지를 고인(故人)이 생전에 거주하던 거지나 고향, 연고지 근처에 마련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한 일반적 관습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후 요셉의 뼈가 애굽에서부터 고향땅 세겜으로 돌아온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이다(수 24:32).

======12:11
스블론 사람 엘론 - 엘론에 대한 기록은 사사들의 사적(事蹟) 중 가장 간단하다.아까 사사 입다 이후에서 사사 압돈까지(13절) 이스라엘에는 특별히 큰 대적이 없었던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도 사사들은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그때문에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호와 종교가 계속적으로 유지되었던 것 같다.

=====12:12
스불론 땅 아알론 - 단 지파의 땅인 아얄론과는(수 10:12; 19:42) 분명히 구별되는 곳이다. 이 아얄론(* )은 히브리어 자음만으로는 사사 엘론(* )과 같은 철자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70인역(LXX)과 공동번역은 아예 '아얄론'을'엘론'으로 번역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이곳은 사사 엘론이 건축한 성읍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혹자들은 이곳을 오늘날의 야룬(Jalun)과 동일시 하지만(Keil, Hervey)확실한 근거가 없다. 추측컨대 갈릴리 호수 서쪽 15km 지점에 있는 오늘날의 '텔 엘부메'(Tell el-Butmeh)가 바로 이 '아얄론'이 아닌가 사료된다.

=====12:13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 - '비라돈'은 에브라임 지파의 땅 중 아말렉 산지에 위치하고 있다(15절; 5:14). 이곳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듯이 마카비 서와 요세푸스의 글에 나오는 '파라톤'(* )과 같은 곳이다. 오늘날에는 '파라타'(Farata)로 알려져 있는데(Keil, goslinga, Hervey, Cundall) 현재 세겜 서남쪽 약10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다. 한편 압돈(Abdon)은 입산이나 엘론과 달리 그의 신분이'힐렐(Hillel)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아마 이는 베냐민 지파의 계보에 나오는 '압돈'(대상 8:23,30; 9:36)과는 구별하기 위함인 듯하다.

=====12:14
압돈이 사사로서 누린 부와 권위는 '아들 사십과 손자 삼십' 그리고 '어린 나귀칠십 필'이란 내용 속에 잘 암시되어 있다. 왜냐하면 어린 나귀를 탄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높은 지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5:10; 10:4. 주석 참조.

=====12:15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 5:14에 이어 본절에서도 아말렉 족속이 에브라임 땅과 연관되어 언급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에브라임 땅은 과거에 아말렉 족속이거주하던 곳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사사 시대 초기에 유목민인 아말렉 족속 중 소수의 무리가 남쪽에서부터 이동해 와 에브라임 산지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아무튼본절은 에브라임 땅이 아말렉 사람들과 어떠한 식으로든 관련이 있음을 시사해 준다.

 

 

 

   전장(前章)에서 우리는 사사 입다가 암몬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건을  살펴
보았다.  그런데 본장에서는 암몬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입다를 에브라임  사람들이
시기하는 장면이 나온다(1-3절).  그리하여 급기야 동족 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  발
발하는데 에브라임 지파가 크게 패함으로서(4-6절) 이스라엘은  다시  안정을  찾는다
(7-15절).
 한편 이러한 본장의 중심 테마는 이스라엘의 구원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암몬과의  전
재에서 승리한 것이 누구로 인한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에브라임  사람
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한 인간적 영웅인 입다로부터 났으며 자신들이  그  전쟁에서
승리한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고 전리품을 공유하지 못한 데 대해 분개하였다.  에브라
임 지파의 이러한 사고 방식은 자기 지파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과 교만에서 비롯된 것
으로서 기드온 당시에도 이와 동일한 시비를 제기했었다(8:1, 2)
 그러나 기드온과 마찬가지로 입다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전쟁의 승리는  여호와에게서
기인한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3절).  그리고 에브라임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곧 구
원과 승리의 참원인이신 여호와께 대한 불신과 대항이었는바 입다는 비록 동족이라 할
지라도 승리의 참원인이신 여호와께 대한 불신과 대항이었는바 입다는 비록  동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불신하고 민족의 화합을 깨뜨린 그들 교만한 무리들을 대항하여 싸
웠다.  그 결과 참된 구원의 원인을 깨닫지 못한 에브라임 지파는 42,000명이나  되는
자망자를 내고 대패할 수 밖에 없었다(6절).  반면에 자신의 영웅적 행위를  자랑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여호와만이 참된 구세주 되심을 믿었던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은  약
32년여 동안 평안을 누리게 되었으니 곧 입다에 이어 입산, 엘론, 압돈에  이르기까지
평안은 계속돠었다(7-15절).
 이상에서 우리는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여 다 구원과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믿음 위에 굳게 서야만 구원 얻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나
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
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에브라임 지파와 같은 교만에 사로잡혀 행여 믿음의 본분을  그르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본래 이방인으로서 믿음의 반열에  선  자들이니
하나님께서 지긍하던 원 가지도 아끼지 않으셨던 점을 기억하여 결단코  영적  교만의
자리에 이르러서는 아니될 것이다(롬 11:13-21).

         1. 에브라임 사람들의 시비(12:1-7)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가 암몬 족속을 치러갈 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는 것을 빌
미로 하여 시비를 제기하는 장면이다(1-3절).  그리하여 이스라엘에 내분이  일어나고
급기야 피비린내 나는 동족간의 전쟁을 치루는 장면이다(4-7절).  우리는 이러한 본문
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1) 자기 욕심에 근거한 시기심이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몰아넣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에브라임 사람들은 함께 전쟁에 참여하여 힘써야 할 때에는 뒷전에서 방관만  하
다가(2절)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영광스러운 결과에 개해서는 시기하였
다.  그리하여 싸움을 걸어왔는데 오히려 42,000명이라는 막개한 인명 피해만을  보고
말았다.  이와 관련 욥기 저자는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고 했다(욥 5:2).  
그리고 사도 바울도 시기와 분쟁은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고  전제
하면서(고전 3:3) 이러한 불신앙적 행위는 반드시 책망과 징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고 교훈했다.
 (2) 남을 욕하고 멸시하면 자신도 또한 멸시당하고 욕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본문
을 보면 에브라임 사람들은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라고  비난하지
만 도리어 자신들이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4, 5절).  그리고 에브라임  지
파에 속하였음을 자랑으로 삼던 자들이 이제는 에브라임 지파임을 부끄럽게 여기고 스
스로 에브라임 사람이 아니라고 부인하게 되었다(5절).  이와 관련, 잠언 25:8은  "너
는 급거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 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고 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고 하셨다.  그리고 그와 아울러 예수
님께서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
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 5:11)라는 축복의 말씀도 하셨다.
 (3) 성도의 선행으로 인한 영광은 스스로 자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이라는 것이다.  입다는 암몬 족속과의 싸움에서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
고 싸워 승리하였으나 결코 승리의 영광을 자취(自取)하지 않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그렇게 한 결과 그는 비천한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11:1) 도리어  뭇사람
들로부터 인정받고 길르앗의 우두머리로서의 영광을 당당히 누릴 수 있었다.   마찬가
지로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자기를 낮
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빌 2:6-9) 주시기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이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하나님의 세 가지 심판 - 본문에서 우리는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와 길르앗  사람
들을 시기하여 그들을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로 인하여 길르앗과 에브라임 간
에는 싸움이 발발하게 되고 엄청난 인명 피해를 보게 된다.  이렇듯 남을 비판하는 것
은 예외없이 분쟁과 다툼의 원인이 된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산상 수훈에  "비판
하지 말라:(마 7:1-5)고 명령하셨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선 기본적으로 준수해야 할 기독교 윤리 문제에 속하는 것
이다.  그런데 혹자들은 기독교의 이신 칭의 (以信稱議) 교리(롬 1:17)를 지나치게 숭
배한 나머지 이러한 기족교 윤리 문제를 등한시하므로 교회내에서나 사회  내에서  큰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은 한번 그리스도인이 되면  하나님의  심판
따위는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는 신앙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 경우가 많다.   그러므
로 여기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세 종류의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영원한 심판: 이것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양과 염소, 영생과 멸망을  결
정하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이다(마 25:31-46).  이 심판은 세상 종말에 있을 것인
데 주 에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단코 벗어날 수 없는  심판이다(요  5:24).  
따라서 이 심판의 정죄함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
다(롬 8:24).
 (2) 징계의 심판 : 이것은 종종 '판단'이라 불리워지는 심판으로서 하나님의  자녀에
게 임하는 하나님의 징벌이다.  예를 들면 고린도 전서 11:27-32에서 바울은 성찬식을
논하면서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
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
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판단은 그리스도인이 성도로서의 본분을 저버릴 때  하
나님께서 가하시는 징계를 의미한다.  즉 이는 예수의 날에 얻을 구원의 유무에  상관
없는(고전 5:5) 사랑하는 아들을 징계하시는 아비의 채찍과  같은  것이다(히  12:6).  
그렇다고 해서 '아비의 사랑'이나 '채찍'이라는 말에 혼돈되어 이러한 심판을  가볍게
여긴다면 그건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징계가  성도에겐
필연적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하심 자체가  성도로  구별된
증거'인 것처럼 오해한 데서 비롯된 어리석은 생각이다.  성도로 구별됨의 증거는  징
계받는 자체가 아니라 징계 후에 완성된 새로운 인격과 참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윤
리적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
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심이라"(고전 11:32)는 말씀은 바로 이
러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3) 보상의 심판 : 바울은 훗날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심판대 그리고 심판은 성도가 사후에 자신의 공력(功力)대로
받는 심판으로서(고전 3:13) 곧 선행의 정도에 따라 받는 보상의 심판을  가리킨다(고
후 5:10, 11).

         입다의 후계자들(12:8-15)
   입다 사후 (7절) 이스라엘에 깃든 안정과 평화 및 당시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활동
하던 입산(8-10절), 엘론(11, 12절), 압돈(13-15절)의 행적에 대하여 간략히 기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입다의 시대와 입다의 후계자들의 시대는 상당히 대조를 이루
고 있다.  즉 전자의 시대를 다윗 시대에 비할 수 있다면 후자의 시대는 솔로몬  시대
에 비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에 나타난 입다 후계자들의 시대, 즉 다시 말하면 평화
의 시대에 나타난 특징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외침(外侵)이나 내분과 같은 전쟁이 없었다.  성경에서, 특히 사사 시대에 있어서
전쟁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다.  왜냐하면 주로 전쟁은 하나님을 배반
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 이후에 오는
평화는 종말 이후의 영원한 안식을 예표하는 것으로서(계 21:1-8) 성경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축복으로 간주했다.
 (2) 혼인 잔치가 빈번히 발생했다.  본문에서 입산은 아들 삼십과 딸 삼십을  혼인시
켰음을 보게 된다(9절).  물론 아것이 정책이긴 하지만 이러한 혼인 정책을 평화 시대
에만 있는 일이다.
 예수님의 첫번째 이적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일어났는데 이것은 그분의 오심이  평
화의 도래임을 상징하는 것이다(요 2:1-11).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신랑'으로
표현하시면서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마 9:15)
라고 바리새인에게 반문하셨다.
 (3) 자손이 번성했다.  본문을 보면 입산에게는 아들자 삼십과 딸 삼십이 있었고  압
돈에게는 아들 사십과 손자 삼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9, 14절).  사사들이  이렇게
많은 자손들을 고느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임이 틀림없다. 이에 대하
여 시편 기자는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라고 노래했다.  또한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箭筒)에 가득찬 자는 복되도다"(시 127:4, 5)라고 노래했다.  그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도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창 22:17)라고 했다.  이것은 자손  번성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이 같은 평화의 시대에는 반드시 찾아오는 한 가지 위험이 있다.  이것은 곧 자칫 영적 긴장이 해이해져서 향락과 방탕 생활에 빠져들 우려가 많다는 점이다.  솔로몬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며 다음 장(13장)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그대로 입증되고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러한 역사의 교훈을 깊이 되새김으로써 환경을 초월하여 늘 깨어 있는 신앙을 유지하여야 할 것이다(마 24:42 ; 벧전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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