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3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 (1절) 버네이(C.F. Burney)는 말하기를, "여기서 지방 이름("길르앗")이 입다의 아버지로 인격화(人格化) 되어 나온 것을 보면, 1절 하반에서 2절까지는 후대인의 삽입구이고 본래의 원본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Here the district is personified as father of Jephtha-a mark of late for vv. I -2, which can have formed no part of the original narrative.-The Book of Judges, with Introduction and Notes, 1970, p.308). 그러나 버네이의 이와 같은 추측은 합당치 않다. 사람의 이름이 지방 이름과 같은 실례는 역사상에 많이 있다. 특별히 민 26:29, 32:40을 참조하라. 그러면 "입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1) 기생의 아들이요(1절), (2) 이복(異腹) 형제들에게서 축출된 자요(2절), (3)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하류배(下流輩)와 함께 사는 자였다(3절). "돕"(* )이란 땅은 요단강 동쪽에 있는 곳이다. 삼하 10:6, 8 참조. "잡류"란 말(* )은 반드시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이 말이 생활 안정을 얻지 못하고 유리하는 가난한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의 실정이 입다의 처지와 같기 때문에 그들이 그와 동조했을 것이다. 삼상 22:1-2 참조.
=====11:4-9
당신이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 (6절 끝) 암몬 족속의 침략을 대항하기 위하여"길르앗 장로들" "입다"를 그들의 "장관"(* ), 곧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였다.여기 이른 바 "장로"는 인도자를 가리켰을 것이다.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 (9절 하반) 입다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하는 진실한 신자였다(11절 하반). 진실한 신자가 사람들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고고독한 중에 신앙을 지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주시는 한 때가 오는 법이다. 그를 박대하던 자들이 그에게 절하게도 된다. 미 7:7-8; 계 3:9 참조. 요셉을 이방인들에게 팔아버린 그 형들은 마침내 그에게 찾아와서 그에게 은혜를 구히기 위하여무릎을 꿇었다(창 37:27-28, 42:6). 입다는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하였다. (1) 그는 길르앗 장로들의 약속을 신중히 취급하며 그들의 진실성을 검토하였음. 그는 말하기를,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란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라고 하였다(7절). 그 장로들은 길르앗의 정치적 지도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일찌기 입다의 형제들이 그를 내어쫓는 불의한 처사를 알고도 그대로 방임, 혹은 찬동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 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임을 추궁하는 입다의 말을 그대로 받아 들인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입다를저희의 최고 지도자로 삼겠다고 다시 약속한 것이다(8절). 그들은 변동 없이 끝까지입다를 최고 지도자로 삼을 것을 하나님 앞에 맹세하였다(10절). (2) 그는 "큰 용사"였으나 자기힘으로 승리할수 있다고 장담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였음. 그는 믿음으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9절 하반). 이 말은, 그가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믿은 증거이다. 삼상 17:47 참조. (3) 그는 암몬 족속과 전쟁 할 책임을 지고 하나님께 그의 사정을 고하며 기도하였음. 그는 구원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믿고 그렇게 기도한 것이다. (4) 그는 암몬 자손을 반격하기 전에 먼저 평화적으로 일을 해결하고자 하여 암몬 왕에게사신(使臣)을보냈다(12-27). 그러므로 봉크(C. Vonk)는 말하기를, "입다는 신앙이 진실할 뿐 아니라 지혜롭고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었다.
"라고 하였다(Jefta nietalleen eengelooig - man was--maar ook een wijs en voorzichtig man.-De Voorzeide Leer, Deel I, De Heilige Schrift, Inleiding op De Profeten, Jdzua, 1973, p.563).
=====11:12-28
입다는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전쟁 없이 외교(外交)에 의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암몬 왕은 "아르논에서 부터 얍복과 요단까지"의 영토를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다고 하면서 그땅을 반환하라고 주장하였다(13절). 그 때에 입다는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한 것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셨기 때문이라고 길게 변론하였다. (1) 이스라엘은 언제나다른 민족들을 침략한 적이 없다고 함(16-18). 이스라엘이 일찌기 광야를 통과하던 때에도 에돔에게나 모압에게나 화평스럽게 행했다고 하였다. 민 20:14-22; 신 2:9 참조. (2) "헤스본 왕 곧 아모리 왕 시혼"과도 이스라엘은전쟁하기를 원치 않았으나 그가선제공격(先制攻擊)으로 이스라엘을 침해하였다는 것(19-22). 그때 전쟁의 책임은 헤스본 왕 시혼에게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쟁하여 시혼왕의땅(아르논에서 얍복, 요단까지)을 취하도록 해 주셨던 것이다. 그러니 결국 그 땅은암몬 족속의 소유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소유라고 설명하였다(23-27).
네가 그 땅을 얻고자 하는 것이 가하냐 - (23절 하반) 여기 "네가"란 말(* )은 역설체(力設體)인데 암몬 왕을 힘있게 지적하는 것이다. 이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을 암몬 왕 "네가" 차지할 권리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얻게 한 땅을 네가 얻지 않겠느냐 - (24절 상반) "그모스"(* )는 모압 신(神)인데(민 21:29; 왕상 11:7, 33; 렘 48:7, 13, 46), 그때의 암몬 왕이 혹시 모압 사람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암몬 족속의 신 "밀곰"(*)(왕상 11:5)을 관설하지 않고, 모압의 신"그모스"(* )를 관설한 듯하다. 여기서 입다가 그모스 신을 믿을 만한 신이라고 간주하는 뜻에서 관설한 것은 물론아니다. 그모스에 대한 그의 관설에 있어서 그의 중심에는 그것을 헛된 것으로 판단하면서도 다만 이론을 위하여 그것을 관설한 것 뿐이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었다(27절).
=====11:29-32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 (31절) 이것은 입다가 서원(誓願)하는 말이다. 그는 암몬족속과 전쟁하기에 앞서 여호와께 이와 같은 서원을 올렸다. 여호와께서 이번 전쟁에승리케 해주시면 집에 돌아가서 가장 먼저 영접 나온 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는 것이다. 여기 이른 자 "번제"(* )는 반드시 불에 태워서 바치는 제물만을의미하지 않고, 여기서는 그저 바쳐 올리우는 제물(ascending offering)을 의미한 것이다. 사람을 태워 바치는 제물로 사용하는 것은 율법에 엄금되었다(레 18:21,20:2-5; 신 12:31, 18:10). 입다는 이 율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암몬 족속이 몰록 우상(혹은"밀곰"이라고도 함, 왕상 11:5,33)을 섬겼는데(왕상 11:7), 저희 자녀를 불살라 그 우상에게 바치는 악한 미신(迷信)에 젖어 있었다. 그 때에 입다가 암몬을 대적하면서 저런 미신도 미워하였을 것은 물론이다.
=====11:35,36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 (35절) 입다가 승전하고 집으로 돌와왔을 때에 그의 외딸("무남독녀")이누구부다도 먼저 나와서 아버지를 영접했다. 이 때에 입다는 그의 서원한 것 때문에걱정하였다. 여기 이른 바 "슬프다"란 감탄사(感歎詞)는 히브리어로 "아하"(* )인데 그저 염려를 나타내는 말이다. "슬프다"는 말은 너무 심각한 불행을 표현하므로여기서 적당한 번역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나로 참담케 하는 자"란 말(* )은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곧, "너는 나를 당황케 만드는구나"라고. 우리 한역의 "나로 참담케 하는 자"란 번역은 역시 너무 심각한 불행에 대한 표현이다. 35절상반의 히브리어를 보면 입다의 걱정은 그 딸이 죽임이 될 지경의 불행을 염두에 둔것이 아닌 것 같다. 입다의 걱정은, 그 딸이 결혼하지 못하고 독신으로 성전 봉사에평생 바침이 되어 그(입다)의 기업이 계승되지 못하게 됨을 그 중점으로 하였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 (36절) 입다의 딸은 이 말로써 그 자신의 인격을 보여 주었다.(1) 하나님께 대하여 신실하며, (2) 아버지께 순종함으로 효도를 행하였고, (3) 의리(義理)를 위하여는 자신이 희생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11:37-39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입다의 딸이 죽어 번제물이 되었는가 함이다. 37절 하반과38절 하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란 말(* )은, 실상 "나의 처녀됨을 인하여"라고 번역되어야 하며, 또 39절 하반의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고한 말(* )은, "그녀가남자를 알지 못하니라"라고 번역되어야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하나님께 "올려 바침" 이되었다는 것(31절의 "번제"라고 번역된* )은, 그녀가 평생도록 결혼하지 못하고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이 된 것을 가리킨다. 출 38:8참조. 중세대(15세기) 이전에는 입다의 서원 실행이 그 딸을 죽여서 번제로 드린 것이라고 해석하였으나, 중세대 이후에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다만 그녀로 하여금 평생도록 성막에서 봉사하도록 처녀로 바쳐진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해석이 옳다고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입다의 성격으로 보아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서원할 인물이아닌 까닭이다. 그는 자기를 등용하려고 찾아 온 길르앗 장로들의 청원도 신중히 검토한 후에 받아 들였었다(7절). 9절 참조. (2) 입다가 암몬 왕에게 전한 말(15-26)을 미루어 보아 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적(事蹟)도 자세히 알고 있었으니 만큼, 그가 구약 율법에 대하여 무식한 인물이 아니었음이 분명한 까닭이다. 구약 율법에 자녀를 불로 태워 바치는 것은 극악한 죄로 규정되어 있다(레 18:21, 20:2-5). (3) 입다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신뢰하는 인물이었으니 만큼(9절 끝, 11절 끝), 그가 하나님이 금하시는 죄악을 범했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만일 입다가 하나님이 엄금하시는 죄를범하였다면 그는 레 20:2-5의 말씀대로 저주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도이스라엘의 사사(士師)로서 6년 간이나 역사하고 죽었다(12:7). (4)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이 입다를 신앙 인물로 칭찬하기 때문이다(히 11:32). 우리는 입다의 행적에서 배울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서원했던 대로용감하게 실행한 그의 진실성과 및 그의 신앙 용단이다(35절 하반, 39절 하반). 그리고 그의 실행력(實行力)의 모본을 따라서 그의 딸도 경건의 법에 잘 순종한 사실이다(36절 상반). 시 15:4 참조.
=====11:40
나흘씩 애곡하더라 - 델리취(Delitzsch)는 여기 이른 바 "애곡하더라"란 말의 히브리어(* )를 "찬송하더라"라고 번역해야 된다고 하였다. 버네이(Burney)는,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한 것은, 신화적(神話的) 근거에 의하여 지켜진 축제(祝祭)였다고 한다(The Book of judges wiht Introductionand Notes, 1970, pp.332-224).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는 구약 성경의 역사성(歷史性)을 그대로 받지 않는 잘못된 학설이다.
전장에서 우리는 범죄한 이스라엘이 18년 동안 계속된 암몬의 압제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10:6-16). 그리고 암몬의 길르앗 침입이
라는 위기를 앞두고 백성들이 강력한 용사를 갈구하는 장면도 눈여겨 보았다(10:17,
18). 그러한때 하나님께서는 입다를 보내 주셨는데 그는 곧 길르앗 출신의 사사이다.
이중 본장 첫머리에는 형제들에게 쫓겨나 이방 돕 땅에서 거하던 입다가 길르앗 장로
들의 요청에 의해 길르앗의 우두머리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비교적 자세히 묘사되어 있
다(1-11절). 그 다음으론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하기 전 입다가 암몬 왕과 벌인 논쟁
(12-28절)이 언급되는데 이는 역사에 대한 사사 입다의 정확한 안목을 돋보이게 해준
다. 즉 비록 기생의 아들로 태어났으나(1절)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만큼 신앙 교육을 잘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론 본격적인 전투와
그에 얽힌 입다의 경솔한 실수가 언급되어 있다(29-40절). 이는 곧 그가 아무리 큰 용
사이며 훌륭한 사사라 할지라도 인간이기에 실수를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
이었음을 잘 가르쳐 준다. 이러한 경우는 다윗 왕의 기록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다윗은 위대한 이스라엘의 왕이었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신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밧세바와 동침하고 그 결과를 무마시키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는 엄청난 잘못을 범했던 적이 있다(삼하 11장; 왕상 15:4, 5).
결국 이상과 같은 사실들은 (1) 성경은 인간을 영웅으로 만드는 작품이 아니며, (2)
인간은 항상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고,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께서 붙들어 사용하시는 자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음을 교훈해 준다. 사실 입다는 출
생이 매우 비천했고 돕 땅에서 잡류(雜類)와 함께 생활하던 자이다(3절). 그렇지만 하
나님께서 그를 붙들어 주시자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대적 암몬을 물리칠 수 있
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역사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서도 능히 일어날 수 있
다. 즉 우리 자신은 비록 연약하여 대적 마귀를 물리칠 수 없으나 이미 사단의 머리를
밟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장중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사단과 모든 악의 권세를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이다(눅 10:17-20).
1. 입다의 등장(11:1-11)
이스라엘의 새로운 구원자로 등장하는 입다의 가정 환경 및 그의 내력(來歷)등이
소개되고 있는 부분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입다의 성장 과정 가운데서 역사하신 하
나님의 손길도 더듬어 볼 수 있다.
입다는 보잘것없는 기생의 몸에서 태어났으므로 배다른 형제들에 의해 고향에서 쫓겨
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1-3절). 아마 이때에 길르앗의 장로들도 입다를 추방시키는
일에 동조했을 것이다(7절). 이처럼 그는 동족과 형제들로부터 버림을 받아 이방 땅
돕에 거했는데 이때 그는 큰 용사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왜
냐하면 그는 형제들과 동족들로부터 배신을 당한 아픔을 잊기 위해 스스로 갖은 노력
을 다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이방인의 땅에 머무르면서 삶의 기반을 얻기
위해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아무도 의지할 자 없는 무엇보
다 아무도 의지할 자 없는 이방 땅에 홀로 있었기에 더욱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앙의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선 마치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내몰아
훈련시키셨듯(출 2장)입다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삼으시기 위해 돕 땅에서 훈련시키
셨던 것이다.
아무튼 입다의 명성은 마침 암몬과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지도자가 없이 고민하던 길
르앗 백성들에게도 전달된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자기를 쫓아낸 사람들에 의해 다시
고향으로 금의환향(錦衣還鄕), 사사로서 구속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4-11절). 분
명 입다는 기생의 아들로서 온갖 수모와 고생을 겪는 와중에서도 굳건히 하나님을 의
지하였기에 길르앗 백성들의 머리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마치 형들의 미움을 산 요
셉이 애굽으로 팔려갔으나 믿음을 잃지 않으므로서 다시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기 가
족 모두를 구원하였던 것과 같다(창 45:1-8). 따라서 입다의 경우나 요셉의 경우 둘
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진리를(롬 8:28)입증시켜 준다.
2. 입다와 암몬 왕 간의 논쟁(11:12-28)
길르앗의 머리가 된 입다가(11절) 암몬과 전쟁을 시도하기 전 먼저 아르논 강에서
얍복강까지의 요단 동편의 영토권을 놓고 암몬 자손의 왕과 단판을 벌이는 장면이다.
즉 입다는 무조건 상대국과 싸우기 보다는 먼저 그들을 말로 설득시키는 방법을 선택
한 것이다. 이것은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적으로 분쟁을 해결하고자 하는 입다의 의지
를 반영해 준다. 뿐만 아니라 입다가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 훌륭한 구속사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음을 증거해 준다. 즉 비록 입다는 그의 출신이 비천하다는 니유로 형제들
에 의해 국외로 추방되어 살았으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역사하셨던 사실에 대
해 매우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입다는 암몬 왕과 논쟁함에 있어 과거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정착하
기까지 이방 나라를 침범한 적니 없으며 오히려 충돌을 염려하여 먼 길을 돌아갔던 사
실(민 20:14-21 ; 21:11-13)을 상기시킨다(12-18절). 그리고선 이스라엘이 가나안 입
성을 위해 불가피하게 평화적으로 아모리 땅을 통과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반격을 당하
자 그들을 물리치고 요단 동편 지역을 차지했었음(민 21:21-35)을 강조한다(19-22절).
이는 곧 요단 동편이 아모리 족속으로부터 빼앗은 것인바 암몬 족속과는 무관한 땅이
라는 주장이다. 특히 이점에 있어서 입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즉 아모리
족속으로부터 빼앗은 땅을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한 것은 단순한 영토 침략이 아니
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말미암은 역사였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다
는 설사 그 땅이 원래 암몬 족속의 땅이었다 할지라도 300년 동안 잠잠히 있다가 이제
와서 영토권을 주장한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라 공박한다(25-27절).
아무튼 입다는 대적과 싸우기에 앞서 평화적인 방법을 모색하여(신 20:10, 11) 할 수
만 있으면 유혈 투쟁을 피하고자 했다. 비록 이러한 그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지
만(28절), 상호간의 유혈 투쟁을 방지하고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고자 한 입다의
의도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웃
과 더불어 화평을 이루는 것이지 결코 분열과 다툼, 시기와 싸움 따위가 아니기 때문
이다(딛 3:2). 그렇기에 일찍이 예수님께서도 화평케 하는 자에 대해서 축복하셨다
(마 5:9). 그리고 사도 바울도 성도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할 것을 권면했다(롬
12:18).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과 화목할 뿐만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사람과도 화평을 이루며 살아야 한다(고후 5:18-20).
구속사적 안목(眼目)과 성도의 신앙 - 본문에는 매우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구속사
에 대한 사사 입다의 정확한 이해가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구속사관(救贖史
觀)을 지닌 입다가 대적 암몬과의 싸움에 있어서 어떻게 행동하였는지 잘 나타나 있
다. 즉 입다는 대적과의 싸움에 앞서 먼저 가장 평화적인 방법인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리고 짧은 대화 가운데서 매우 논리 정연하게 자신이 이해하고 있
는 구속사를 대적에게 펼침으로써 암몬 자손의 불의한 행동을 지적했다.
이처럼 성도가 구속사를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구속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성도의 신앙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
기서 구속사에 대한 이해라 함은 쉽게 말해서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에 언급된 하나님
께서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발자취를 더듬어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
다. 따라서 이 구속사에는 하나의 목표가 분명히 존재하며, 그 역사의 끝도 존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 구원의 완성과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되는 종말의 때가
곧 그것이다(계 21, 22장).
그러므로 성도들은 부단히 진행되는 역사 가운데서 이러한 구속사를 이해하는 안목을
길러야만 한다. 만일 성도가 이 구속사에 대한 안목이 결여되어 있다면 시시때때로 사
자와 같이 덤비는 사단의 세력을 꺽을 수 없을 것이다(벧전 5:8, 9). 그러나 성도는
끊임없이 성경을 읽음으로써 영안(靈眼)을 띄우며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자(엡
6:11, 13).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므로서(창 3;3) 사단의 유
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구속사적 안목을 지닌 성도는 대적 앞에서 두려움 없
이 설 수 있다(행 2:16-36 ; 3:11-26 ; 7:2-53 ; 13:15-41). 뿐만 아니라 진리에서
떠나게 만드는 대적의 유혹도 물리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
이 스스로 구속사적 안목을 가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교육해야 할 것이다.
3. 입다의 승리와 실책(11:29-40)
평화적 방법으로 암몬 자손과의 분쟁을 해결하고자 했던 입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암몬 자손들의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결국 전쟁을 치루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싸움
에서의 승패는 이미 판가름되어 있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자신들의 죄
에 대해 철저히 회개하였고(10:10-16)하나님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였으니(29절) 입다
가 이끄는 이스라엘의 승리는 명백하였던 것이다. 실제 전투에 있어서도 이 같은 사
실은 충분히 입증되었는바 결국 암몬 자손은 무조건하고 이스라엘에게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32, 33절).
그런데 불행히도 입다는 이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크나큰 실수를 범하고야 만다.
그것은 곧 그가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수행하면서 율법에서 금지된 인간 제물을 하나
님께 바칠 것을 서우가한 점이다(30, 31절). 이것은 지나친 신앙의 열정이 초래한 비
극이다. 즉 입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신실한 동기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열심으로 스스로 비극을 만들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당시 사람을
제물로 바쳐 신에 대한 최대의 충성을 표하던 이방 우상 숭배 의식을 무의식 중에 따
랐던 것 같다(왕하 16:3). 아무튼 그는 자신의 서원한 바를 변개치 못하고 자신의 딸
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고 마는데 자신 뿐 아니라 온 가정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34-40절).
한편 이상과 같은 본문에서 우리는 두가지 교훈을 배우개 된다.
첫째, 환경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은 매우 심각하다는 점이다. 즉 입다는 이방 풍
속이 성행했던 돕 땅에 거하는 동안(3절) 자신도 모르게 사악한 풍습에 물들었던 것이
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처하고 있는 주변 황경은 일찍이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가자도로 세속화, 저속화, 향락화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도 끊임없이 자신을 지켜 세
상과 구별된 삶을 살지않으면 입다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에 물들 수 있음을 명
심하자(딤전 6:11, 12).
둘째, 비록 입다가 한 가지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끝까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켰
다는 점이다. 즉 하나님께 바쳐야할 제물이 곧 자신의 무남 독녀임을 안 순간(34, 35
절) 입다는 자신의 서원을 저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살을 베는 고통
을 감내하면서까지 서원한 바를 루었으니 그의 순수한 신앙을 반영해 준다. 마찬가지
로 언제 어떠한 상황에 처하여서도 우리 성도들은 그 같은 순수 신앙을 견지해야 하는
데 그리할 때 주는 미쁘시사 우리에게 또 다른 긍휼과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살
전 5:23, 24).
경솔한 서원(誓願) - 입다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지나쳐서 무모하게 하나님 앞에
서원하므로 슬픔을 당한 사사였다. 물론 그가 번제물의 내용을 하나님께 맡기긴 했으
나(31절) 분명한 것은 그가 인간 제물을 바치기로 의도했기에 슬픔과 고통이 시작되었
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초기 왕 사울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큰 승리
를 눈앞에 두고 무모하고 경솔하게 맹세하여 전재을 수행하고 있는 백성들을 어려움에
처하게 했다(삼상 14:24, 28-30). 이처럼 입다나 사울의 경우 모두는 하나님께 대한
지나친 열심으로 인해 성급하고 경솔하게 서원하므로서 자신 뿐 아니라 자기와 함께
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때문에 성경은 경솔하게 서원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잠 20:25). 그리고 누구든
지 일단 하나님께 서원을 했으면 자신에게 해가 될지라도 그 서원을 지켜야 함을 강조
하고 있다(신 23:23 ; 시 15:4 ; 전 5:4). 따라서 일시적인 감정에 의해서 서원을 하
거나 자신의 지혜와 의지를 믿고 하나님께 서원을 하는 자는 그 서원 때문에 크게 낭
패를 당하기 마련이다. 발이 급한 사람이 그릇 행할 수 밖에 없듯이(잠 19:2) 성급하
거나 그릇된 열심으로 서원한 자는 반드시 그것이 그에게 올무와 가시가 될 것이다.
헤롯은 자신의 지위를 믿고 경솔하게 약속하므로서 세례 요한의 목을 베게 되는 크나
큰 죄를 범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백성들의 원망을 샀었다(마 14:5, 7-10).
한편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부흥회를 할 때에 여러 가지로 서원을 하는 것을 보게 된
다. 물론 그 서원 자체가 죄 된다거나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서원이 일시적 흥분 상태에서 비롯된 것일
때 그것은 서원한 그 사람에게 올무가 되거나 크나큰 고통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서원함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 앞에 그것이 합당한가의 여부를 확
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 자신의 능력으로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살
핀 후에 조심스럽게 서원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입다와 같이 자신의 무남
녀를 잃고 자신은 평생 그로 인해 슬퍼해야 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민
30:1-8 강해, 서원과 맹세에 대하여>.
입다의 서원과 그의 딸에 대한 문제 - 이것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성경 해석상 오
랜 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A.D.10세기 이
전까지는 입다가 자기의 서원대로(30, 31절) 자기 딸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쳤다는 주
장이 지배적이었(34-40절).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유력한 학자들 중에서도 입다의 딸
이 번제물로 희생당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피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상 "아비가 그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
(39절)라는 구절은 입다의 딸이 번제 제물로 죽지 않고 평생을 처녀로 지냈다는 주장
을 그럴 듯하게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인간 제물을 하나님께서 용납
하지 않으시므로 율법을 잘 아는 사사 입다가 서원을 변경했을 것으로도 추정할 수 있
다. 뿐만 아니라 입다는 위대한 신앙의 사람으로 불리워졌으므로(히 11:32), 결코 그
렇게 무모하고 죄악된 일을 수행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모든 추론
은 어디까지나 추론일 뿐 신빙성이 없다. 대신 다음과 같은 정황들로 미루어 보아 입
다는 자신의 서원을 좇아 분명 딸을 번제물로 바쳤음에 틀림없다.
(1) 입다는 서원 당시 '번제'를 생각해아지 사람을 성전으로 올라가게 하여 성전에서
봉사케 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번제(31절)에 해당하는 히
브리어 '올라'(* )는 '올린다'라는 어원을 갖고 있으나 제사 용어로 사용될
때에는 반드시 '번제'의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N. B. D).
(2)입다의 가운데에는 자기의 딸을 처녀로 지내게 하갰다는 내용이 없었다
(Wisemann).
(3) 입다는 형제들에게 추방되어 모압 땅에서 가까운 이방인의 땅 돕에서 거주했다(3
절). 때문에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모압의 종교 의식인 인간 번제
물에 매우 익숙해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경배를 나타
낸다는 의미에서 인간 번제를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율법이 시행되지 않고
우상 숭배가 만연되어 있던 암흑기인 사사 시대에 그러한 제사가 있었다고 해서 별로
놀라운 일이었을리는 없다.
(4) 성경에는 쳐녀만이 성전에서 봉사해야 한다는 규례가 없다. 다시 말해서 입다의
딸이 처녀로 성전에 올라가서 평생 봉사했다는 주장은 성경적인 뒷받침이 없다. 오히
려 성경에는 결혼한 적이 있던 여인이 성전에서 봉사한 기록이 있다(눅 2:36). 무엇
보다 '남자를 알지 못하고'(39절)란 말은 입다의 딸이 '남자를 알기 전 곧 처녀의 상
태로'란 의미이지 결코 처녀인 상태로 지냈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이상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입다는 자기 딸을 서원한 대로 번제로 바쳤음에 분명하
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일평생 후회와 탄식 가운데 살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아무리 위대한 신앙 인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살피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생
각에 치우칠 때에는 비록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다 하더라도 크나큰 실수를 범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사도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잘까 조심하라"
고 엄히 경고하고 있다(고전 10:12).
열두 사사들의 통치 중심지 - 본장에는 사사 입다가 길르앗 백성들의 통치자로 입신(立身)하는 장면이 나온다(4-11절). 이제 이와 관련 본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열 두 사사들의 통치 중심지를 지도로써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들 사사들은 비교적 각 지파에서 골고루 선정되었는데 그들의 통치 영역 역시 대체로 출신 지파에 속한 영역 내에 한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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