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 본절만으로는 본장에 기록된 찬송이'드보라'와 '바락'의 공동 저작인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3, 7절에서 본 찬송의 1인칭 주어가 '드보라'인 점을 고려할 때, 이 노래는 '드보라'의 저작임에 분명하다(Keil, Hervey, Lange, Matthew Henry). 그렇다면 본절에서는 왜 두 사람이 노래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는가?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결될 수 있다. 즉 드보라는 야빈 왕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사실을 기념하여 바락은 물론이고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찬미하는 일에 동참하기를 원했었다. 그리하여 히브리 노래의 한 유형인 화답송(和答頌)의 형태로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한편 성경에는 여인들이 지은 노래로 본장 외에'미리암의 노래'(출 15:21), '한나의 노래'(삼상 2:1-10), '마리아의 노래'(눅1:46-55) 등이 있다.
=====5:2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 본절에 해당하는 원문은 '비페로아 페라오트베이스라엘'(* )이다. 70인역(LXX)은 이를 개역 성경과 거의 동일한 의미인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인도로'(* , 엔 토 아르크사스타이 아르케구스 엔 이스라엘)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몇몇 학자들도 받아들이는 해석이다(S.R.Driver, C.A.Briggs). 그런데 본절에 사용된 히브리어 '비페로아'와 '페라오트'의 동사형 '파라'(* )는 '석방시키다', '(머리카락을) 풀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곧 상징적의미로서, 그 정확한 뜻은 '힘을 과시하다', '힘을 발휘하다'이다. 이에 따라 본문을다시 번역하면 '이스라엘의 힘 있는 자들이 힘을 다했고'란 의미가 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p.308). 즉 이 말은 이스라엘의 두령들, 방백들(9절)이 힘을 다해 충성했음을 가리킨다. 더욱이 이러한 해석은 이스라엘 시문서의 한 특징인 '평행법'(parallelism)과도 잘 조화된다. 왜냐하면 본절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서는지도자들의 헌신과 대비되는 백성들의 헌신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Cundall). 그러나 이상의 두 가지 해석 중 그 어느 쪽을 취하여도 상관은 없는데, 그 까닭은 둘 다이스라엘 지도자들의 헌신과 솔선 수범적 행위를 잘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 백성들이 지도자들의 말을 따라 기꺼이 헌신하여 전투에 참가한 것을 가리킨다. 이는 바락이 군사를 모집하자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 일만명이 지원한 것(4:10)과 그외 여러 지파도 적극 조력한 사실(4,15절)에서 잘 나타난다.
여호와를 찬송하라 - 본시(本詩) 전체의 내용은 언뜻 볼 때 전쟁에 참여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헌신과 용기 그리고 연합에 대하여 노래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배후에서 친히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능력을찬양하는 데 진정한 목적이 있었다(3,5,11,13절).
=====5:3
너희 왕들아 들으라 방백들아 귀를 기울이라 - 본절에도 역시 강조를 위한 '평행법'이 사용되어 본문의 의미를 보다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그런데 본절에 언급된 '왕들'과 '방백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지칭한 말이 아니다. 그 근거로는 (1)당시 이스라엘에는 왕이나 방백이 없었다는 점(17:6;18:1;19:1;21:25)을 들 수 있다. 또한(2)'왕'이란 단어가 복수 형태를 취하여 여러 나라의 왕들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을 들수 있다. 따라서 본절은 열방의 통치자들에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시며두려워하고 경외해야 할 유일하신 최고 통치자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라 하겠다(Keil,Lange, Wycliffe).
내가...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 여기서 '찬송하다'에 해당하는 '자마르'(* )는 '연주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단순히 노래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악기를 사용하여 찬송하는 것을 가리킨다(시 33:2;71:22;98:5; 147:7; 149:3). 이스라엘인들은 일찍부터 하나님을 찬앙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며 그에 화답하여 노래 부르는 예배법이 발달되어 있었다(출 15:20;삼하 6:5). 이와 관련하여서는 대하 5:11-22강해, '공중 예배에 있어서의 음악과 악기'를 참조하라.
=====5:4
주께서...진행하실 때에 - 여기서 드보라는 자기 선조들의 출애굽 노정 때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역사적인 사건을 회상하고 있다. 즉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 강림하셨다'는 모세의 회상과 연관지어(신 33:2), 드보라는 야빈과의 전쟁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세일...에돔 들 - 둘 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는 과정에서 지나온 사해 남동쪽의에돔인의 산지를 가리킨다. 신 33:2 주석 참조.
땅이 진동하고 - 출애굽 당시에 나타난 크고 두려운 하나님의 권능과 기이하신 역사를 가리키는 말이다(Matthew Henry). 이와 같이 드보라는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권위앞에 모든 피조물들이 두려워하며 떨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고백하였다(삼하 22:8;시 68:8;77:18;나 1:5;합 3:6).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내렸나이다 - 하늘에서 비가 쏟아진 것을 뜻하는 시적표현이다. 이는 노아 홍수를 연상케 한다. 즉 노아 홍수 때에도 하늘의 창들이 열리고땅의 샘이 터져 40주야 비가 쏟아졌다는 식으로 표현되어 있다(창 7:11,12). 이처럼드보라는 하나님의 기이하신 능력을 찬양함에 있어서 과거 실제적으로 발생했던 사건들을 중심으로 노래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생함을 더해주고 있다.
=====5:5
시내 산도...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 '시내 산'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의 율법을 베푸신 장소였다(출 19:18).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모세와 대면하실 때 그 주위는 연기로 자욱함과 동시에 온 산이 진동하였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위엄과 영광과 권세를 나타내신 것이다. 출 19:16-19 주석 참조. 그런데드보라가 여기서 그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최근에 드볼 산과 기손 강을 중심으로 시스라와 싸워 대승한 사실(4:12-16) 역시 그같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는 사건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5:6
삼갈의 날...야엘의 날 -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족과 하솔 왕 야빈의 압제 하에서고통당하던 때를 가리킨다. 이때 '삼갈'은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블레셋 사람 600명을 소 모는 막대기로 죽여 이스라엘을 구원했었다(3:31). 그리고 '야엘'은 이스라엘의 압제자 야빈 왕의 군대 장관인 시스라를 지혜롭게 처치했었다(4:17-22).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도다 - 당시 이스라엘의 황폐상을 표현한 것이다. 즉 당시에는 블레셋족과 야빈의 압제가 극심하여 상거래(商去來)도 없었으며 법질서도 마비되어 있었기에 노상(路上)에서 약탈 행위가 빈번히 자행되었다. 때문에 약탈, 폭행 등을 피하여 행인들은 큰길로 다니지 않고 소로로 다녀야 할 형편에 처해 있었다. 다시말해 블레셋족과 야빈의 압제 하에서 이스라엘은 경제가 핍절되었으며, 무법 천지가 되어 백성들에게 평안이 없었던 것이다.
=====5:7
이스라엘에 관원이 그치고 그쳤더니 - KJV는 이를 '이스라엘에 마을 주민들이 끊어지고 끊어졌다'(The inhabitants of the villages ceased, they ceased in Israel)로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KJV는 '관원'에 해당하는 원어 '페라존'(* )을 성벽이 없는 마을의 주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 주민들은튼튼한 성벽이 있는 성읍으로 피신하기 위하여 마을을 떠난 셈이 된다(Lange,Wycliffe).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페라존'을 '능력자' 즉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가리키는것으로 본다(Gesenius, Teller). 이는 70인역(LXX)도 '페라존'을 '능력 있는자들', '힘 있는자들'(* , 뒤나토이)로 번역하고 있는것에 의해 뒷받침된다. 따라서 본절을 뒷부분과 연결시켜 이해한다면, 당시 이스라엘에 강력한 지도자들이 없었음으로 부득불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뜻이 된다(Keil& Delitzsch Commentary, Vol.II.p.311).
나 드보라가...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도다 - 야빈의 학정에 시달리던 이스라엘에는 참된 지도자가 없었는데, 드보라 자신이 이스라엘의 보호자가 되었다는 의미이다.특히 여기서 '어미'라는 표현은 욥이 자기에게 의탁하던 자들과 관련하여 스스로를'빈궁한 자의 아비'라고 고백한것과(욥 29:16)같이 하나님께서 보낸 '보호자'란 의미를 지닌다((Keil & Delitzsch Commentary,Vol.II.p.312) 다만 드보라는 자신이 여성이므로 '어미'란 표현을 사용했으며, 욥은 자신이 남성이므로 '아비'란 표현을 사용했을따름이다.
=====5:8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 이스라엘에 이방인의 압제와 전쟁의 참화(慘禍)가 임하게 된 원인이다. 즉 이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과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의 노를 격동시킨 탓이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여기서 우상과 이방신들을 가리켜 '새신들'(new gods)이라 표현한 것은 그것들이 과거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전혀 알지 못했던 것들(신 32:17)이기 때문이다(Keil, Lange). 즉 이스라엘은 영원하시고 참된 신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마치 새 옷 입기를 즐기는 어린 아이처럼 새 신(神)들을 섬긴 것이다(2:17;3:6,7).
전쟁이 성문에 미쳤으나...방패와 창이 보였던고 - 드보라는 대적들이 이스라엘을에워싸고 곧 공략하려 드는 일촉 즉발의 위기 상황을 '전쟁이 성문에 미쳤다'는 말로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에겐 적을 방어하거나 공격할무기가 변변찮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철병거를 지닌 하솔 군을 격멸시켰는데,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이적과 권능을 베풀어 이스라엘을 도우셨기때문이다(4:12-16,23,24). 따라서 드보라가 당시 이스라엘에 무기가 있었느냐고 반문한 것은 역설적으로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 사만 명 - 시스라와의 싸움을 위해 출전하였던 이스라엘의 주력군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 군사 일만 명이었다(4:10).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사만 명'은 어떻게 된 것인가? 아마 이는 이들 주력군을 도와 같이 전쟁에 참전하였던 이스라엘 여러 지파의 병력을 합한 대략적 수효일 것이다. 즉 14,15절을 보면 시스라와의 싸움에는 비단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 뿐 아니라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 반, 잇사갈 지파등이 참여했었음을 알 수 있다.
=====5:9
앞 부분에서의 분위기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구절이다. 즉 6-8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중단하므로 압제자의 멍에에서 신음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본절에서부터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고서기뻐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Goslinga). 더욱이 본절에서 드보라는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 이스라엘 방백들이 시스라와의 전투에 즐거이 헌신한 사실에 대하여노래하고 있다. 이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사실의 재차 반복이다. 2절 주석참조.
내 마음이...사모함은 - 이처럼 드보라가 이스라엘 방백들을 사모하였다는 말에 대하여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를 다음과 같은 뜻으로 보았다. "나는 참으로 그들을 사랑하며 존경한다. 그들은 영원토록 내 마음을 차지하였다. 나는 결단코 그들을잊지 못할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Vol.II.p.147). 즉 이는 곧 이스라엘의 방백과 두령들이 자신을 도와 전쟁에 적극 참여하고, 솔선 수범한 것에 대하여 드보라가 깊이 감사하고 있는 말이다.
=====5:10
흰 나귀를 탄 자들 - 이스라엘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것은 어린 나귀를 탄 것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상류층에 속한 신분임을 암시하는것과 같은 의미이다(10:4;12:14). 고대 근동에서 나귀는 중요한 운송 수단이었다(창22:3;수 9:4;느 13:15). 그런데 흰색의 나귀는 좀처럼 드문 짐승이니, 이것을 타고 다닌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 아닐 수 없었다(Keil, P.Cassel).
화문석에 앉은 자들 - '화문석'은 오늘날에도 평민들이 구하기 힘든 귀하고 비싼물건이다. 따라서 '화문석에 앉은 자들'이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부유하고 여유있는 계층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길에 행하는 자들 - 일반 평민 또는 행상(行商)을 가리킨다. 이들은 압제자의 시대에는 마음놓고 길을 갈수 없었으나(6절), 하나님께서 그 대적들을 훼파하셨으니(4:12-24) 이제 안전하게 길을 갈 수 있었다. 한편 이상과 같은 흰나귀 탄 자, 화문석에 앉은 자, 길에 행하는 자들이란 결국 이스라엘 모든 계층,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것임을 알 수 있다.
선파할지어다 - 본문에는 어떤 사실을 선파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다만 다음에 이어지는 드보라의 노래 중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11절)이 언급되어 있으므로, 드보라는 백성들에게 압제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신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라고 가르친 것으로 추정된다.
=====5:11
활 쏘는 자의 지꺼림에서, 멀리 떨어진 - 여기서 '활 쏘는 자'란 다름아닌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심하게 괴롭혔는지는 4:3에 잘 암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로부터 '멀리 떨어졌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에 대한 대적들의 압제가 종식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 이들을 진멸하셨으니 이제 이스라엘백성들에게는 다시금 평화가 찾아든 것이다(10절).
물 긷는 곳에서도...칭술하라 - 여기서 '물 긷는 곳'이란 우물을 가리킨다. 그런데보통 고대 근동 지역의 우물은 마을 어귀에 있었다(요 4:5-8,28). 그래서 이스라엘이적의 압제 하에 있을 때에는 마음놓고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적들을 분쇄해 주셨으니 안심하고 물을 길으러 갈 수 있게 되었다.드보라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두고서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한 것이다.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 고대 사회에서 성문은 백성들의 주요 회합(會合) 장소였다. 그곳에선 비단 상거래 뿐 아니라 공식 재판, 중요 사항 공지, 친교등이 이루어졌었다(창 19:1;신 21:19;느 13:19). 그러나 이스라엘이 야빈과 시스라의군대와 전쟁하는 동안에는 이러한 회합이 이루어질 리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고(4:12-24) 다시금 팔레스틴에는 평화가 깃들었다. 그러니자연스럽게 백성들은 생활의 주요 무대인 성문으로 모여들 수 있었는데, 본절은 바로이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5:12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노래할지어다 - 드보라가 이처럼 스스로에 대하여네번이나 '깰지어다'는 말을 반복한 것은 자신을 향해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즉 그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앞에서 영적으로 깨어 그 놀라움과 영광을 힘있게 찬송할 지도자적 책임이 있었다(Matthew Henry).
바락이여...네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 - 여기서 '사로잡은 자'란 바락이 시스라군을 진멸할 때 생포한 포로들을 가리킨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이제 그들을 끌고서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가라 하였는데, 이는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케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Lange, Matthew Henry).
=====5:13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 야빈의 압제 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정에 시달렸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재산과 가족을 외국으로 피신시키거나 아니면 그 와중에서적에게 살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20년 동안 야빈의 압제 하에서도(4:3) 굳건히 살아남은 백성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곧 시스라와의 전투에 참여한 것을 가리킨다(4:6-10).
여호와께서...용사를 치시려고 강림하셨도다 - 여기서 '용사'란 야빈의 군대 장관인 시스라와 그의 군사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대적과 싸우시기 위해 나서신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여호와께서 강림하셨다'는것은 그분이 눈에 보이게 이 땅에 임하신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는 그분이 초자연적인 이적으로 적들을 패퇴시키며 이스라엘을 도우신것을 가리킬 뿐이다(4:15).
=====5:14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는 아말렉에 뿌리박힌 자요 - 에브라임 지파 중 이번 전투에 참가한 자들은 전에 아말렉 족속이 거주했던 지역(12:15)의 사람들이란 의미이다.그런데 70인역에 따라 RSV와 공동 번역에는 이 '아말렉'이 '골짜기'로 번역되어 있다.아마 이는 과거 에브라임 지파의 영토 내에서 아말렉 족속이 거주했던 지역이 에브라임 산지와 그 골짜기 주변이었던 점에 근거한 번역일 것이다.
베냐민은 너희 백성 중에 섞였으며 - 본절을 통해 볼 때 베냐민 사람들은 일개 지파의 자격으로서 참전한 것 같지는 않다. 대신 그들은 여러 지파들 틈에 섞여 일개인적으로 참전(參戰)했던것 같다. 이는 아마 그들이 팔레스틴 남부 지역에 위치해 있었던 탓에 북부 지역의 지파들과는 달리 야빈의 압제를 덜 받았기 때문일것이다. 따라서그들은 야빈과의 전쟁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고 자연히 일부 사람들만이 개인적으로 전쟁에 참여했을 것이다.
마길에게서는 다스리는 자들이 내려왔고 - '마길'은 므낫세의 독자였다(창 50:23).그런데 이 '마길'의 자손, 곧 므낫세 지파 중 절반은 요단 동편에 정착하였으며(수13:29-31) 나머지는 요단 서편에 들어갔다(수 17:1-13). 따라서 본절에서 '마길'이라는 표현은 이 중 요단 서편에 거한 므낫세 반 지파만을 의미한다. 이 지파는 아셀, 스불론 그리고 잇사갈 지파와 북쪽 경계를 이루며 살았으므로 잇사갈 지파의 경내에 있는 다볼 산(4:12)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한편 여기서 '다스리는 자들'이란 군대의 지도자들을 의미한다. 이는 곧 므낫세 지파에서는 군 지휘관들이 군사를 거느리고내려왔음을 알려 준다.
스블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가 내려왔도다 - '대장군'에 해당하는원어 '소페르'(* )는 '계수하는 자' 또는 '서기관' 등의 뜻이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된 단어이다(Keil). 그런데 '대장군의 지팡이'가 무엇을지칭하는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의 여지가 있다. 즉 RSV, NIV, Living Bible, 공동번역 등은 모두 개역 성경과 같이 번역하고 있으나 KJV에서만은 '작가의 붓'(pen ofthe writer)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KJV의 번역을 지지하여, 스불론 사람들은 시돈 사람들처럼 상업에 능하고 장사를 전문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이번 전쟁에서도 전쟁 경비를 계산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고 주장한다(P. Cassel). 그러나 이 해석은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서기관'은 전시에 국민을 초모(招募)하는 일도 맡아 보았으니(왕하25:19;렘 52:25), 스불론 지파는 그 전쟁에 있어서 서기관의 직무를 담당했다고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5:15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하니 - 잇사갈 지파도 스불론, 납달리 지파(4:6,10)를 돕기 위해 드보라와 행동을 같이 하였으며 친히 방백들이 자기 지파를 인솔해 나온 것을 가리킨다.
잇사갈의 심사를 바락도 가졌도다 - 즉 바락이 잇사갈 지파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을 가리킨다. RSV는 이를 '잇사갈이 바락에게 충실하였다'(Issachar faithfulto Barak)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준해 공동 번역도 '잇사갈도 바락에게 충성을 바쳐'로 번역하고 있다.
그 발을 좇아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 잇사갈 지파가 바락의 군사와 더불어 시스라 군대를 치기 위해 다볼 산에서 기손 강가로 내려간 것을 의미한다(4:14,15).
르우벤 시냇가에 큰 결심이 있었도다 - 르우벤 지파가 차지한 요단 동편 땅에는 시내가 많이 있었고, 그에 따라 목초지가 널려 있었다(수 13:15-23). 따라서 드보라가르우벤 지파의 지경(地境)을 가리켜 '르우벤의 시냇가'라는 표현을 쓴 까닭은 이 때문이다. 한편 본절에 의거하면 르우벤 지파는 타지파로부터 전쟁에 참여하라는 요청을받았으나 직접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큰 결심'이란 표현은 16절의 '마음에 크게 살핌'(* , 히크레 레브)이란 표현처럼 그들이 전쟁에 참여할 것인지 안할 것인지에 대하여 많은 토론이 있었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5:16
본절은 르우벤 지파가 다른 지파의 전쟁 소식을 듣고도 평안한 목자의 생활에 안주하고 있음을 비꼬는 내용이다. 즉 다른 지파들은 전쟁의 나팔 소리를 듣고 모두들 참전, 전쟁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14,15절) 르우벤 지파는 편안히 목자의 저(笛)부는 소리를 들으며, 단지 탁상 공론(卓上空論)만을 벌였다는 것이다.
양의 우리 가운데 앉아서 - 기록에 의하면 르우벤 지파는 갓 지파와 더불어 이스라엘 여러 지파 중에서도 특히 많은 가축들을 소유하고 있었다(민 32:1). 그들이 요단서편 땅에서 기업을 차지하지 않고 요단 동편의 모압 북방 지역을 기업으로 차지한 까닭도 그 때문으로서, 그곳은 목축(牧畜)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목축사업은 날로 번창하였을 터인데, 본절은 바로 이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목자의 저 부는 소리를 들음 - 이는 곧 르우벤 지파가 한가로운 목가적(牧歌的)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즉 저들은 요단 강 건너편의 소식과는 무관한 채목자들이 가축을 치면서 부는 피리 소리나 들을 정도로 평안을 구가하셨던 것이다.
마음을 크게 살핌이 있도다 - 공동 번역은 이를 '끝도 없이 토론이나 벌이는구나'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15절의 '큰 결심이 있었도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5:17
길르앗은 요단 저편에 거하거늘 - '길르앗'(Gilead)은 넓은 의미에서 요단 강 동편의 전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중심부는 갓 지파가 차지하고 있지만 북쪽으로는 므낫세 반 지파, 남쪽으로는 르우벤 지파의 지경에까지 뻗쳐있는 요단 동편의 산지가 곧길르앗이다. 그런데 이 중 르우벤 지파는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으니(15,16절), 여기서'길르앗'이란 갓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드보라는 이들지파 역시 요단 동편땅에 거하면서 동족의 전쟁에 조력지 않았음을 책망하고 있다(Keil & Delitzsch Commentary,Vol.II.p.319).
단은 배에 머무름은 어찜이뇨 - 이 표현은 단 지파도 르우벤 지파나 갓, 므낫세 반지파와 같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자기들의 이기적인 생활을 즐기고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특히 '배에 머무르다'라는 표현은 단 지파가 뱃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베니게 사람들과 함께 욥바에서(수 19:46) 무역을 했다는 의미이다(Goslinga). 이것으로 보아 단 지파는 이때까지는 아모리족에 밀려 팔레스틴 최북방의 라이스 지방으로쫓겨나지 않은 것 같다(18장).
아셀은 해빈에 앉고 자기 시냇가에 거하도다 - 여기서 '해빈'과 '시냇가'는 각기지중해변을 가리킨다. '아셀 지파'는 지중해 연안에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야빈의 압제가 가장 심했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에 연접해 있었다(수 19:24-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기 동족들의 전투에 무관심하며 자기들의 생업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5:18
들의 높은 곳 - 납달리 지파가 거주하던 게네사렛 호수 북서쪽의 산악 지역(수19:32-39)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정예 부대 만 명이집결했던 다볼 산을 가리킨다(4:6,12). 그곳에서 스불론, 납달리 지파는 시스라 군을맞이하여 일사 각오의 정신으로 용감히 싸웠던 것이다.
=====5:19
열왕이 와서 싸울 때에 - '열왕'은 북부 가나안의 여러 동맹군을 지휘하여 싸우러온 시스라(4:13) 및 동맹군들의 군사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여호수아 때에도 하솔 왕야빈은 북부 가나안 지경에 거주하던 열왕들과 동맹군을 형성해서 여호수아의 군대와메롬 물가에서 싸운 적이 있었다(수 11:1-9).
므깃도 물가 다아낙 - '므깃도 물가'는 므깃도와 남쪽 산지사이, 즉 므깃도 후방의분지로 흘러 들어가는 마른 계곡인 '와디'(Wadi)를 가리킨다. 이곳은 우기(雨期)때 비가 와야만 물이 흐른다. 이러한 사실은 14세기의 유대인 학자 에쉬토리 하파리(Eshtori Haparhi)에 의해서 밝혀졌다. 따라서 '므깃도 물가'는 기손 강(4:7)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4:7,15 주석 참조. 한편 '다아낙'은 '므깃도'에서 불과 8km도 채 안되는 이스르엘 계곡의 남쪽에 위치한 성읍이었다(수 12:21). 기손 강은 평지를 지나 므깃도와 다아낙의 북부로 흘러 들어갔다.
돈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 '돈'에 해당하는 '케세프'(* )는 구약 시대 당시화폐로 통용되었던 '은'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쟁시 취하는 전리품이나 노획물 따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Keil, Lange). 즉, 시스라와 그 동맹군들은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전리품을 얻고자 하였으나 하나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진멸당하고 말았던 것이다(4:15,16,23,24).
=====5:20
별들이...시스라와 싸웠도다 - 칼데아역(The Chaldee)은 본절을 '하늘로부터 별들이 나오는 곳에서 시스라에 대항하는 싸움이 시작되었다'로 번역하고 있다(MatthewHenry Commentary, Vol.II.p.149). 그러나 이 역시 정확히 무슨 뜻인지 잘 이해되지않는다. 그런데 요세푸스(Josephus)는 본절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해한다. 즉 하나님께서 시스라의 군대 앞에서 일으키신 바람과 벼락, 폭풍우와 우뢰로 인하여 원수들이 진멸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Lange, Pulpit Commentary).이러한 견해는본장이 곧 시스라와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현상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에게승리 주신 사실에 대한 노래인 점(21절;4:15)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타당하다. 그리고대부분의 학자들도 이에 찬동한다(Keil, Goslinga, Hervey, Matthew Henry, Cundall).즉 본절은 하나님께서 대자연의 힘을 빌어 이스라엘을 도우신 사실에 대한 시적 표현인 것이다. 역사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파하기 위해 사용하신 자연 현상들은 바람, 하수, 뇌성, 우박, 숯불, 번개등 아주 다양하다(출 14:27;15:10;수 10:11;삼상 7:10;시 18:13,14).
=====5:21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 '기손 강'은 겨울 우기를 제외하고서는 보통메말라 있었으므로 시스라의 군대가 그 주변에 주둔할 수 있었다. 4:13 주석 참조.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강을 범람케 하셨으니 시스라의 무리들은표류(漂流)할 수 밖에 없었다. 즉 그때 시스라의 군대는 뜻하지 않은 재난으로 인해우왕 좌왕하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군대를 칼로 쳐 파했었다(4:15).
기손 강은 옛 강이라 - 이처럼 드보라가 '기손 강'을 '옛 강'이라 부른 이유에 대하여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오래 전부터 고대 역사가들이나 시인들이 그곳을찬양해 왔거나 아니면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시스라군을 멸하시기로 예정하셨기 때문인 것으로 주장한다(Matthew Henry). 그리고 어떤 학자는 그 강 가에서 옛부터 무수한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그 강이 옛날부터 유명해진 탓으로 추정한다(Gosinga, Hervey). 그밖에 단지 기손 강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흘러 내려온 오래된 강이기 때문에 '옛 강'으로 불리웠다는 주장도 있다(Keil). 이상과 같은 견해를 종합해볼 때 기손 강은 드보라시대에 이미 옛날의 어떤 사건들과 연관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 본절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개역 성경과 KJV, 그리고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밟았다'고 해석한 공동번역 등은 본절을시스라 군대에 대한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4:12-24)를 노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밟았도다'에 해당하는 원어 '티드레키'(* )가 명령형인 점에 근거, 다른 영역본들은 이를 달리 번역하고 있다. 즉 RSV, NIV, Living Bible 등은 본절을 '내영혼아 힘차게 진군하라'(March on, my soul;be strong !)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면이는 시스라와의 전쟁 당시 드보라가 힘차게 이스라엘군을 격려했던 사실을 노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어쨌든 본절은 시스라와의 전투에서 용맹히 싸웠던 백성들을 치하하는 것이므로, 양 견해 중 그 어느 쪽을 택하여도 무방하다.
=====5:22
군마가 빨리 달리니...땅을 울리도다 - 시스라 군이 패퇴하여 급히 도망치는 것 뿐아니라 이스라엘 군이 그 뒤를 맹렬히 추격한 것(4:15,16)을 가리키는 시적 표현이다.즉 시스라 군은 목숨을 부지(扶支)하기 위하여 사력을 다해 도망친 반면 이스라엘 군은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다 진멸하기 위하여 말발굽 소리도 드높게 그 뒤를 추격한 것이다.
=====5:23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 '메로스'에 대한 저주와 '야엘'에 대한 축복(24절)은 드보라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대언한 것일 뿐임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한편'여호와의사자'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1 주석을 참조하라.
메로스를 저주하라...치지 아니함이니라 - '메로스'란 지명은 본절 외에 성경 어느곳에서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주받아 마땅한 메로스의 죄는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에 근거해 볼 때 '메로스'는 기손 강 부근에 위치해 있었던 마을임에는 분명하다. 혹자는 이를 사마리아 북방 약 20km지점에 위치한 '메루스'(Merrus)일 것으로 추정한다(Pulpit Commentary). 그리고 또 다른 이는 다볼 산 남방에 위치한'케플 무슬'(Kefr Musr)일 것으로도 추정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아무튼메로스 거민은 압제자의 손에서 구원받고자 싸우는 이스라엘을 도와줄 의무가 있었던것 같다. 그런데도 메로스의 주민은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이스라엘을 돕지 아니하므로 간집적이나마 폐해를 끼쳤었다.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메로스를 저주하였는데, 이는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도운 탓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야엘(24-27절)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5:24
겐 사람 헤벨 - 모세의 장인인 르우엘과는 일족(一族)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4:11 주석을 참조하라.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 야엘에 대한 축복은 '메로스에 대한 저주'와 완전이 대조된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압제자와 사귀고 있었고 자신 또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4:11)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러한 야엘의 행동에 대하여서는 앞장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4:17-22). 따라서 그 의의 및제반 사항에 대하여서는 4:21 주석을 참조하라.
=====5:25
우유...곧 엉긴 젖 - 여기서 '엉긴 젖'에 해당하는 원어 '헤므아'(* )는 '두껍게 엉긴 젖'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고급 우유를 의미하는 '할라브'(*)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Keil, Lange). 한편 여기서 '우유'와 '엉긴 젖'은 같은의미를 지니면서 서로의 뜻을 강조해 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는 히브리 시에서 흔히볼 수 있는 평행법적 표현이다.
=====5:26,27
4:21에 언급된 장면의 반복 기사이긴 하나 사건을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처럼 드보라가 야엘의 의거(義擧)를 노래하고 있는 것은 가냘픈 여인이 한때이스라엘 백성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죽인 사실을 부각시켜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었다.
살쩍 - 사람 얼굴의 귀와 눈 사이에 태양혈(太陽穴)이 있는 부분, 즉 '관자놀이'(temple)를 가리킨다.
죽었도다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솨다드'(* )는 '완전히 파괴된 것',즉 전혀소생할 가망성이 없이 완전히 죽은 상태에 이르른 것을 가리킨다. 이로써 시스라는 그목숨 뿐 아니라 권력과 영광도 다하고 만 것이다.
=====5:28
창문으로 바라보며 살창에서 부르짖기를 - 이 말은 자식을 전쟁에 보낸 후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며 안타까이 기다리는 어머니의 일반적인 심정을 나타낸다.
살창 - 원어 '에쉬나브'(* )는 '틈을 남기다'라는 말에서 온 단어로 좁은 나무나 쇠창살을 사이사이에 박아 만든 창문을 가리킨다. KJV는 이를 '격자창'(lattice)으로 번역하였다.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고 - 처음에 시스라의 어미는 승전의 소식을 실은아들의 병거가 늦게 오는 것에 대하여 이러한 말로 불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스라의 귀가가 한없이 늦어지자 그녀의 불평은 오히려 불안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어찌하여 병거가 더디 오는고'라는 말을 반복하며 근심과 걱정에 쌓였던것이다.
=====5:29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겠고 - 드보라가 시스라의 어미를 위로한 시녀들을 가리켜 '지혜로운 시녀들'이라고 언급한 것은 역설적인 의미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즉그녀들은 시스라가 전리품을 많이 탈취하느라고 이렇게 늦을 것이라는 말로써 시스라의 어미를 위로하였다(30절). 하지만 정작 시스라는 그러한 기대와는 달리 이미 죽고말았으니 그녀들의 생각과 위로의 말은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5:30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 시스라가 적들과의 싸움에서 당연히 승리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시스라는 전쟁 때마다 승승 장구하여 많은 전리품을 갖고돌아왔었기에 시스라의 어미와 시녀들은 이번에도 그가 굉장한 전리품을 가지고 오리라 기대했던것이다. 아무튼 드보라는 이 표현을 통해 시스라가 전쟁에 능한 자임을 설명하면서 그러한 그를 죽인 야엘의 용기를 역설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와동시에 그러한 시스라와의 싸움에서 이긴 이스라엘의 승리가 매우 값진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마다 한 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 전쟁시 여인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노예로삼거나 아니면 첩으로 삼는 경우는 고대에 흔히 있던 일이다(신 21:10-14). 그런데 시스라의 모든 병사들이 제각기 한 두 명의 여인을 포로로 얻지 못하였겠느냐는 말은 곧시스라군이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굉장한 전과(戰果)를 올렸을 것이라는 뜻이다.
양편에 수놓은 채색옷 - '채색옷'에 해당하는 '리크마'(* )는 다앙한 색깔의자수품(刺繡品)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옷감의 안팎을 손이나 베틀로 수놓아 만든 옷을가리키는데 고대에는 매우 값비싸 주로 상류 계층 사람들만 착용 했었다(창 37:3).
노략한 자의 목 - 혹자는 '노략한자'에 해당하는 '솨랄'(* )이 '여왕'이라는뜻을 지닌 '쉐갈'(* )에 대한 필사자의 실수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노략한 자의목'이란 '시스라 아내의 목'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였다(Ewald).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원본을 뚜렷한 이유 없이 바꾸어 버린 것으로 타당치 않다. 한편 또 다른 이는 '노략한 자'를 '노략물'로 해석하여 시스라가 각 노략물 곧 약대나 나귀, 말 등과 같은 짐승에 채색옷을 두른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ervey). 그러나 이러한 해석 역시 전후 문맥상 잘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노략향 자'는 시스라를 가리키며 그가 승리를기념하여 채색옷을 감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5:31
본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처분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즉 이스라엘의 대적이자 하나님의 대적인 시스라를 망하게 하셨던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모든 대적들을 그와같이 처리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자들에 대해서는 해가 힘있게 돋음 같이 미래가 영광스럽게 되도록축복해 달라는 의미이다.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태평하였더라 - 이것은 전쟁의 결과를 요약적으로 설명하고있다. 뿐만 아니라 이 기간은 전쟁 이후 드보라가 살았던 기간이며(비교, 2:18),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았던 기간을 지칭하기도 한다.
4장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왕 야빈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그의 압제로부
터 벗어나게 된 것을 살펴보았다. 이제 본장에는 그 같은 승리를 기념하여 드보라가
전쟁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노래한 시(詩)가 기록되어 있다. 이 시를 통해서
드보라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송한다(2-5, 9, 11,
13, 31절). 그 다음 이 전쟁을 위해 헌신적으로 참가한 여러 지파들을 축복하고(2,
9, 14, 15, 18절), 방관한 지파에 대해서는 그들의 나태함을 비난한다(16, 17절) 그
리고 마지막으로 이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야엘의 업적을 노래한다(24-27절).
이러한 본시는 사사 시대의 유일한 시(詩)로서 4장의 역사적인 서술 다음에 이어져
언급되지만 내용면에 이었선 4장과 상호 보충 관계에 놓여 있다. 뿐만 아니라 생동감
이 넘치고 강력한 인상과 불타는 듯한 정열을 내포하고 있기에 세계의 고대 문학 작품
중 가히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Goslinga).
아무튼 이러한 드보라의 노래는 암울하고 비참했던 사사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활동하고 계셨음을 잘 보여 준다. 또한 이 시를 통해 우리는 그 시대가
영적인 가치와 본질리 위기에 처해 있던 시대였으며, 심지어 이스라엘 공동체의 존립
이 와해(瓦解)될 처지에 놓여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비록 야빈과의 전쟁에 여
러 지파에 참여하긴 했지만 다른 지파들은 그 전쟁을 수수 방관(袖手傍觀)하며 자기들
의 이기적인 생업에만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16, 17절). 또한 우상 숭배의 고질적
인 죄악이 만연되어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징계에 채찍이 사사들의 치리 기간을 제외하
고는 떠날 날이 없었던 것이다(8절). 이러한 상황에서 분명 드보라의 노래가 드보라
이후에도 계속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불려졌더라면 타락해 가는 이스라엘 백
성에게 여호와 신앙을 일깨워 주는 교육의 효과를 십분 발휘했을 것이다.
결국 이상과 같은 본장은 당시 왕이 없던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호와만이 참 왕이시
며, 모든 압제자의 손에서 구원해 주실 왕이심을 암시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즉 드보
라는 전쟁의 모든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11절) 친히 이스라엘의 압제자들을 치시기 위하여 강림하셨으므로 강조한다(13절).
이것은 사사시대에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대표자격 인물이 없었으나 오직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친히 당신의 백성을 지도하시며, 지키시고,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
을 내포하고 있다. 교회들은 왕과 같은 인간 지도자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직
왕이신 하나님만이 당신의 교회를 온전히 다스리시고 주장하신다. 따라서 그의 일꾼
에 불과한 교역자들은 어느 누구도 교회에서 주장하는 자세를 취해서는 안된다(벧전
5:3).
1.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찬양(5:1-11)
본문은 출애굽 이후 드보라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엄위(嚴威)와 사랑을 '찬양'함과 아울러(1-7절),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도탄(途炭)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련한 처지와 이러한 곤경에서 구원해 주신 여호와의 은총을
대조하여 술회한 부분이다(8-11절). 다시 말해 드보라는 그 이전 역사 가운데서 이스
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동일시하면서 변치 않으신 하나님의 속성을 노래 했
다.
이처럼 사사 시대에는 아브라함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이스라엘 역사와 단절된 것
이 있었다고 해도 과거의 역사 가운데서 활동하신 하나님께서 사사 시대에 잠잠해 계
셨던 것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드보라의 노래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를
나타내는 상징적 단어(시내 산-5절 ; 여호와의 백성 - 11절)가 언급된 것에서도 입증
된다. 따라서 사사 시대도 하나님의 이스라엘 간의 언약에 근거해서 이끌어진 구속사
임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사사 시대의 역사는 남은 역사와 관계되는 특별한 구속
사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바로의 손에서 구원받아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형식적으로는 안식을 얻었으며,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사는 자들이었
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직 영원한 안식, 참된 안식을 누리는 자들은 아니었다. 그들
에게도 여전히 진정한 안식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히 4:8-11).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 주위의 대적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한편 이러한 사사 시대의 구속사적 성격은 신약의 교회 시대와도 유사하다. 분명 하
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구원받은 자들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하
나님의 나라를 맛보면서 살아간다. 그렇지만 교회는 아직 진정한 안식 곧 영원한 안
식을 누리고 있지는 않다. 반면에 항상 악의 세력과 투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러나 이 싸움은 교회의 완전한 승리가 보장된 싸움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되신 예
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단의 권세를 이기셨고(요 16:33), 그분의 재림시에는 완전한
악의 세력을 진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계 20:11-5).
헌신적인 신앙 - 본문에서 드보라는 시스라와의 전쟁을 위해 이스라엘 두령들과 백
성들이 즐거이 헌신했던 사실을 노래했다(2, 9절). 그들의 헌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임과 동시에(4:6-10) 압제받는 자기 백성을 위한 희생이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바로 이러한 헌신적인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없었다
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압제자의 손에서 구원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즉 아무
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들로부터 구원해 주시고자 했을지라도 그 백성들
이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지도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레위 지파는 금송아지 우상 사건 때 하나님의 편에
서서 그의 명령에 순종하였기에 복을 받았다(출 32:29). 그리고 다윗은 자신의 생명
을 돌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를 처단하기 위해 나아갔을 때(삼상17:46,
47) 귀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얻을 수 있었다(삼상 18:7). 또한
기드온이 이끄는 300명 용사도 즐거이 여호와께 헌신하였기에 해변의 모래와 같이, 메
뚜기 무리와 같이 수많은 미디안 연합군을 쳐서 이길 수 있었다(7:12).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 같은 헌신을 요구하시는가 ? 그 이유
는 헌신하는 자에게 복주시고 궁극적으로 그를 통하여 당신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사실 어떠 사람이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표
현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진정으로 당신을 믿고 의뢰하며 사랑하는지를
헌신의 요구를 통하여 확인하신다. 이러한 점에서 사도 요한은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
고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곧 거잣말하는 것이라고 선포했다(요일 2:4,
9). 그리고 야보고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약 2:17)
고 경고했다.
성도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
신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자에게 마음의 평안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셨다(마 11:29, 30).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역설
적인(Paradonxical)종교가 되는 이유이다.
지도자의 중요성 - 어떤 사회든지 지도자의 자질에 따라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미국의 노예 해방은 아브라함 링컨의 희생적인 노력과 그의 비젼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16세기의 종교 개혁에 대한 비젼을 가지고 있었던 몇
몇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본문에서는 드보라는 노래의 첫머리
에 제일 먼저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해 언급하고 그들이 헌신을 두 번씩이나 노래했
다.(2, 9절). 이와 같이 한 사회에서 지도자의 한 위치는 결코 무시될 수 없다.
그런데 특히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지도자는 하나님의 전권대사(全權大使)로서 자
기 백성을 위해서 헌신한 지도자가 나타날 때마다 이스라엘은 평안을 누릴수 있었고
종교적으로도 매우 부흥했다(3:11, 30 ; 5:31). 그러나 반대로 지도자가 타락할 때
그 사회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부패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왕하 16:2-4).
분열 왕국 시대에 북쪽 이스라엘은 초대 왕 여로보함이 범한 죄인 금송아지 숭배와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은 것과 절기를 바꾼 것 등의 죄에 빠졌
다(왕상 12:28-33). 이러한 일련의 죄악은 북쪽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 저질
러졌다. 이는 신약 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고린도 교회는 지도자들의 잘못
에 의해 분열되었고(고전 3:10), 갈라디아 교회는 잘못된 교훈을 가지고 온 지도자들
에 의해 위기에 처해지기도 했다(갈 1:6-9 ; 2:4-6). 그리고 중세 1000년 동안도 지
도자들의 어리석음과 욕심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전파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교회가 도적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서 성도그릉다 진정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운 사람 그리고 하나
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지도자를 만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깨닫는다.
물론 당신의 온 교회를 주관하시고 종내 당신의 뜻대로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
다. 그러나 그분을 대리하여, 그분의 뜻대로 직접 하나님의 교회를 지도하고 목양(牧
羊)할 책무를 맡은 교회 지도자의 중요성은 결코 간과될 수 없는 사실이다.
성도의 노래 - 성경에서 음악과 관련되어 가장 먼저 언급된 인물은 가인의 6대손
(孫)인 유발이다. 그는 '수금과 퉁소 잡은 자의 조상'이었다(창 4:21). 고대에는 주
로 '노래'가 종교적 의식과 더불어 발달되었으므로 유발 당시에 이미 여러 종류의 종
교적인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무튼 '노래'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그 역사도 인간의 역사 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성경을 살펴볼 때 '노래'의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파수꾼의 노래가 있는가 하면(사
52:8), 노래하는 자의 노래가 있고(대상 15:61 ; 대하 5:13 ; 20:21 ; 23:12, 18 ;
29:28 ; 35:25 ; 시 87:7), 벙어리의 노래(사 35:6)와 잉태하지 못한 자의 노래(사
54:1)가 있다. 그 외에 사자(死者)의 노래(사 26:19), 새의 노래(시 104:12 ; 아
2:12). 나무의 노래(대상 16:33 ; 시 96:12 ; 사 49:13), 및 새벽 별의 노래(욥
38:7)도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귀중한 것은 구속받은 성도의 노래이다(시
149:5 ; 사 35:10 ; 51:11 ; 엡 5:19 ; 계 5:9).
본문에서 드보라는 이스라엘을 압제자의 손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모세
와 그의 누이 미리암도 이와 유사하게 이스라엘의 압제자인 바로이 군대를 홍해 바다
에 몰살시킨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찬양했다(출 15장). 또한 다윗도 환난에서 그를
보호해 주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했다(시 32:7). 이처럼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노래의 제목은 당연히 '구원의 노래'가 으뜸이 될 것이다. 원수 사단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노래는 하늘 나라에 가서도 부르게 될 귀중한
노래이다(계 11:17 ; 19:1, 2). 그러기에 초대 교회 성도들 사이에서도 여러 종류의
노래와 찬송이 작사 작곡되어 불려졌었다(고전 14:15 ; 엡 5:19 ; 약 5:13). 바울과
실라는 옥중에서도 노래하며 즐거워했다(행16:25). 물론 성도들은 슬프고 낙심될 때
에도 노래를 부를 수 있다(시 42, 43편). 그렇지만 이 노래는 세상 사람과 같이 신세
타령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소망하는 데서 비롯된 것
이다(시 42:5, 6, 8, 11;43:3-5).
이처럼 성도들은 '구원의 노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만 아니라, 환난과 고통,
슬픔과 좌절 가운데서도 날마다 도우시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
나님(룸 8:28)을 바라며 노래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당이나 기타 다른 어떤
마술적인 능력을 기대하는 의미에서 노래를 부를 것이 아니라, 우리 성도는 구원의 반
석 되신 하나님께(시 95:1) 그리고 날마다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하나님께 헌신하는
경건한 마음에서 비롯된 찬양을 불러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성도의 노래는 세상 사람들
이 부르는 노래와 달리 자기 만족적인 노래가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요 아
버지 되신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이니 만큼 자신의 마음이 드려지는 노래이어야 한다
(골 3:16).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대상 16:37-43 강해, '찬송에 대하여'를 참
조하라.
2. 전쟁에 임한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5:12-23)
입제자의 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독립 전쟁을 목전에 두고 각 지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특히 드보라는 전쟁에 임한 이
스라엘 백성들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주면서 언약 공동체의 단결심이 결여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에브라임, 베냐민,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 지파 등은 공동의 대적
에 맞서 전쟁에서 피땀을 흘렸는데 반해(12-15, 18-23절) 아셀과 르우벤, 그리고 므낫
세 지파는 자신들의 일상 생활에만 만족하며 지극히 이기적인 쌩각을 가지고 형제들의
수고에 동참하지 않았다(16, 17절).
물론 스불론 지파나 납달리 지파는 위치상으로 하솔 왕 야빈의 압제로 인해 직접적으
로 고통을 받고 있었기에 그 전쟁을 주도적으로 치루어야 했음을 당연하다. 그러나 아
셀 지파는 가장 고통을 많이 겪은 납달리 지파와 인접해 있었으면서도 수수 방관하는
자세를 취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 와중에 해상 무역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가 공동체적인 의식이 매우 해이(解弛)해졌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
다. 무엇보다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언약의 공동체라면 지리상의 문제를 초월하여
형제들의 고통에 동참했어야 옳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쟁에 참여한 백성들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 때문
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전쟁에 참여한 지파들에게는 영광스러움과 즐
거움을 주신 반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지파들에게는 수치로 갚아 주셨다(23절). 에
수님의 달란트비유에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자는 작은 일에도 충성하였으므
로 많은 것을 맡을 자격을 부여받았을 뿐 아니라 주인의 즐거움에 동참할 수 있는 영
광도 얻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자신의 게으름을 감추기 위해 여러가지 변
명을 하며 자신을 합리화시켰으나 주인은 그에게 맡겼던 달란트를 빼앗고, 또한 그를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는 저주를 했다(마 25:21-30). 마찬가지로 본문에서 전쟁
에 참여하지 않은 지파들은 하나님께서 수행하라고 명령하신 성전(聖戰)을 거부했으므
로 수치를 당해도 아마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한편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형제애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
다. 즉 오늘날 성도들도 주위에 있는 형제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자기와 상관 없는
것처럼 여겨 지나칠 것이 아니라 그 형제애의 고통에 동참해야 한다. 예수님의 선한
마리아인의 비유에서와 같이 어려움에 처한 자와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이웃이며 형제
이지, 명목상의 형제는 진정한 형제가 될 수 없다(눅 10:30-37).
극볼되어야 할 언약 공동채내의 적 - 이스라가마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뭉쳐쳤을 뿐
아니라(출 19:5, 6) 혈연으로 뭉쳐진 민족 공동체 사회이다(출 1:1-7). 따라서 이 공
동체는 다른 어떤 사회보다도 더욱 강한 연대 의식(solidarity)을 지닐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언약을 무시하는 풍토가 싹트고 형제 의식이 약해지면서 이스라엘 사회도 다
른 사회도 마찬가지로 연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사실상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정
착하여 살면서 그곳 원주민들이 섬기던 우상을 섬기기 시작하였으며 언약 관계의 개념
을 잊어버리고 아울러 형제의 개념도 약화되었다. 이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주위의
대적을 일으켜 그들에게 경종을 울려 언약 관계의 회복 과 형제 의식을 고취시켜 오셨
었다. 사사 시대는 우상 숭배와 연대 의식 결여가 매우 위기에 달했던 시기였기에 이
스라엘 역사 중 가장 침울했던 암흑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언약 관계 개념이나 형제 의식의 개념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서로 불가분리의 관
계에 놓여 있었다. 왜냐하면 언약관계로 들어오면 이방인이라 해도 언약 공동체의 일
원이 되어 한 형제가 될 수 있었으며 반면 그 언약 관계를 떠나서는 결코 형제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창 17:9-14). 따라서 이중 어느 한 개념이라도 약화된다면
그것은 자연히 다른 한 개념도 동시에 약화됨을 의미했다.
본장에서 어떤 지파는 대적과의 싸움에 헌신적으로 참여했으나 다른 지파는 참전하지
않아 드보라는 그들의 이기적인 생활을 노래 가운데서 비난했다(16, 17절). 이것은
형제의 개념이 매우 희박해졌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언약 공동체의
개념도 매우 약해졌음을 지적해 준다.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훗이 죽은 후에
여허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다(4:1). 그들의 악행이란 다름아닌 우상 숭배였다. 따라
서 그들의 여호와에 대한 신앙이 약해 졌으니 자연히 언약 관계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
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스라엘 전쟁을 치루었으므로 공동체 의식이 희박해진 것은 매
우 당연한 사실이다. 즉 이스라엘 모두는 가나안 왕 야빈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임을 깨닫고 참전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파는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것은 분명히 공동체의 연대 의식을 무너뜨리는 가장 큰
이적 행위(利敵行僞)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여리고 성을 공략
했을 때에 한 사람 아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므로 매우 약한 아이 성 사람
들로부터 수치를 당한 적이 있다(수 7장).
그런데 주의할 점은 신약의 언약 동동체인 교회내에도 이러한 무리가 존재할 수 있다
는 사실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견대로 행하며 형제
의 의식이 없어질 때 교회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초대 교회 당시 예루살렘 교
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모든 지역 교회들은 힘을 다해 도와 주었다(고후 8:1, 2). 그
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러한 정신이 매우 희박해진 것이 기정 사실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교회 지도자들은 언약 공동체가 자신이 소속한 교회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교
회까지 포함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다른 교회가 어려움에 처할 때 방관하는 어리
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3. 하나님의 큰 구원(5:24-31)
드보라는 시스라와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참여하지 않은 것을 언급한
후 곧 이어서 시스라를 말뚝에 박아 죽인 헤벧의 아내 야엘의 활약을 소개한다(24-27
절). 그리고 뒤이어 가상적으로 시스라의 어머니와 시녀들의 대화를 노래로 읊는다
(28-31절). 이러한 본문은 우리들에게 여러 의미를 던져 준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적
하고 넘어갈 점은 곧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이 독립 전쟁이 가정을 지키는 연약한 여인의 손에 의해서 결정적인 승
리로 장식된 점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능력에 의해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에 의해서 승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승리는 이미 드보
라가 바락에게 예언했던 바가 성취된 것이기에(4:7) 더욱 더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이다. 그리고 드보라가 시스라의 어머니와 시녀의 대화를 가상하여 노래한 것은
시스라가 전투에 능한자로서 이스라엘을 이길 수 있는 자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패하
게 하셨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이란 의미를 지닌다.
(2) 그 전쟁에 몇몇 지파가 참여하지 않았으나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은 하나님께서
수의 많고 적음, 그리고 강하고 약함에 관계 없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이스라엘을 지키
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사실 드보라의 노래대로 시스라는 이스라엘 백
성이 상대하기에 힘켜운 적이었다. 가나안 왕 야빈은 철병거 900승을 갖축고 있었으며
(4:3, 13), 전쟁에 능한 장군 시스라와 군대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지파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
였고, 살아계서서 당신의 백성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널리 증거할 수 있었다.
한편 이상에서 우리는 성도들도 대적 사단과의 싸움에서 패할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확신하게 된다. 사실 성도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에 승리하셨던 사
실을 의지하고(요 16:33)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넉넉히 승리케 하실 것이라는 확실
한 보증(保證)만 믿고 나아가면 된다(롬 8:37 ; 고후 2:14 ; 10:4). 즉 우리는 비록
타인의 도움이 없더라도 하나님만 의지하면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울 때에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악조건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전쟁이 여호와께 속하
였으며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싸웠기에 개승할 수 있었
던 것이다(삼상 17:45, 47).
약한 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 - 본문에서 드보라는 연약한 여인 야엘의 손을 통하
여 이스라엘이 결정적인 승리를 하게 된 사실을 노래 하였다(26, 27절). 이처럼 하나
님께서는 연약한 자를 사용해 강한 자를 쳐서 승리하게 하시고 세상의 미련한 자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전 1:27).
그래서 다윗은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릉 세
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시 8:2)라고 고백하였다.
다윗은 미천한 목동인 자기를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실 때에 주의 모든 대적을 물리
쳤으며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거백할 수
있었다. 바울도 아와 유사하게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지 않고 도리어 약한 것을 자랑
했다(고후 12:9, 10).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므로 바울 자신
이 약할 그때 곧 강하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실
때 강한 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
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사
53:2). 모세는 자기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그때에 하나님의 손
에 들림을 받아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출 4:10-17).
이러한 사실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약하다고 느끼는 자와 미련하다고 느끼는 자, 곧
겸손한 자를 들어 사용하심을 보여 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는 동안 겸손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고, 또한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눅18:14)고 교훈하기도 하셨다.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매우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자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자를 들어 사용함으로써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잠 3:34; 약 4:6; 벧전 5:5), 교만한 자에게 심판의 채찍을 예비하고 계신다(잠 19:29).
왜냐하면 겸손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마음의 발로(發露)이며, 교만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마음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만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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