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사사기 01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 이것은 본서의 서론적 표현으로서 사사기의 시대적 배경을나타낸다. 이와 유사한 표현은 "모세가 죽은 후에"(수 1:1)라는 말로 시작되는 여호수아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곧, 전에 모세가 죽었을때와 마찬가지로 이제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인해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한편여호수아는 110년을 향수하였는데(수 24:29), 그동안 모세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의통치권과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특히 그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나안 땅 분배에 중추적역할을 담당하였다(수 14-21장). 그로써 자신의 직임을 성공적으로 마친 여호수아는백성들에 대한 권면을 마지막으로 평안히 죽음을 맞이하셨다(수 23:1 - 24:31).그런데문제는 막상 여호수아가 죽고나자 그를 이을 적당한 후계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사사기는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정치적 배경으로 하여 기록되었다. 즉 여호수아 사후 강력한 통치자가 없던 이스라엘은 주변 열강들과 미처 정복치 못한 가나안 원주민들로부터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였다. 그러한 때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등장한 이들이 곧사사인 바, 사사기는 이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서가 여호수하의 죽음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8,9에는 다시금 여호수아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이와 관련, 학자들 간에서는 1:1 - 2:9에 기록된 사건들이 여호수아의 죽음 이전의 사건들인지 아니면 그 이후의 사건들인지에 대하여 의견이 나뉘고 있다.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1:1-20 강해, '본장에 기록된 가나안 정복 사건의 발생 시기 문제'를 참조하라.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 이는 곧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을 가리킨다.이러한 표현은 사사기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많이 나타난다(별18:5;20:18,23,28:삼상 10:22;22:10;23:2).구약시대에는 주로 대제사장들이 우림과 둠밈으로 여호와의뜻을 구했는데(출 28:30;민27:21;삼상28:6), 아마 이때에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여호와께 물었을 것이다(Keil,Delitzsch). 한편,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 사후하나님의 뜻을 물은 이유는 여호수하가 남긴 유업을 마저 성취하기 위해서였다. 즉 비록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에 안식을 가졌다 주었지만(수11:23;21:44;23:1) 아직도 가나안 땅에는 미정복지와 잔존 원주민들, 그리고 그들의우상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때문에 가나안 땅을 마저 정복하고 그것들을 제거하는 것은 여호수아의 사후 이스라엘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였던 것이다(수24:22-24).따라서 이스라엘의 각 지파들이 이 일을 의논하기 위해 모였고 하나님께 그 뜻을 물은 것이다.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싸우리까 - '올라가서'에 해당하는 원어 '알라'(* )는 단순히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대신 이는 수 8: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싸움터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Lange,Keil & Delitzsch Commentary,Vol. II, p. 250) 때문에 Living Bible은 이를 '전쟁에 나가다'(go to war)로 분명히 번역하고 있다.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질문 속에서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던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은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아직도 여전히 미정복 상태로 남아 있는 많은 지역(수 13:1-7 등)을 정벌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민족적 대과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누가 먼저 가나안 족속의정벌에 나서서 백성들의 사기를 복돋워 주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물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가 선봉에 나서라고 일러주셨다(2절).
가나안 사람 - 정확히 얘기하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당시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가나안 후기 원주민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아브라함 당시 가나안에 거주하던 '초기 원주민들'(창 2: 5, 6)과는 엄연히 구별된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여호수아 서론, '가나안의 여러족속들'을 참조하라.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즉시 이스라엘 족속들의 질문에 응답하셨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먼저 여호와께 물은 행위가 옳았음을 가리킨다.이것은 사사 시대 전반에 걸쳐 되풀이 되던 극심한 타락상과는 달리 사사 시대 초기에는 그래도 여호와 신앙이 유지되었음을 보여 주는 일례이다. 이러한 사실은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동안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2:7)는 기록에 의해서도 뒷받침 된다.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 여기서 '유다'란 '유다 지파'를 가리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나안 미정복지 정벌 전쟁에 이스라엘 여러 지파 둥 유다 지파가 먼저 출전토록명하신 까닭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1) 우선 이스라엘 지파들 중 유다 지파의 수효가 가장 많았기 때문(민 1:27 ; 26:22)일 것이다(MathewHenry's Commentary, Vol. II, p.121). (2)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미 하나님께서 야곱의 예언(창 49:8-12)을 통해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 중 가장 탁월한 지위를차치하리라 축복하셨기때문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 251). 그러므로 본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에서 우선 출전 명령과 함께 과거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것(수 13:1)과 같은 승리의 약속도 함께 주고 계시는 것이다.
이 땅 - 이미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각 지파들에게 기업으로 분배해 주었으나 그들이 미처 정복하지 못한 탓에 아직 남아 있는 가나안 미정복지를 가리킨다(수 13:1-7).그런데 혹자는 이를 유다 지파에게 기업으로 분배되었던 땅만을 가리키는것으로 보기도 하나(Bertheau),그 것은 지나치게 의미를 축소시킨 견해이다.
그 손에 붙였노라 - '붙였노라'에 해당하는 원어 '나탄'(* )은 '넘겨 주다' 또는 '양도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미 하나님의 작정하에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의 소유가 되도록 계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한편 성경에는 비단 민족간의 전쟁 뿐아니라(민21:2) 개인의 생명(16:23)도 하나님께서 상대방의 손에 붙이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는 개인의 생명과 더불어 모든 국가의장래도 곧 하나님의 주권하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1:3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함께...싸우자 - 이처럼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가나안 미정복지 정벌 전쟁에 함께 출전할 것을 요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기업 중에서 자신의 분깃을 나누어 받았기때문이다(수 19:1-9). 그러므로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와 행동을 같이 하여 자신들의 기업을 얻을 필요성이 있었다. 한편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의 기업 가운데서 분깃을 나누어 받게 된 까닭은 야곱 당시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과거 시므온은 자기누이 디나가 세겜 추장에게 강간당하자 그에 대한 복수로 과도하게 세겜 사람들을 멸한 일이 있었다(창 34:25-29). 그러자 야곱은 이에 대한 징벌로 시므온 자손들이 이스라엘 지파중에서 흩어질 것을 예언하였다(창 49:5-7).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는바, 시므온 지파는 가나안 정복 직전에 실시한 인구조사(민 26:14) 때 그 수가 가장적었을 뿐만 아니라 모세의 축복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신 33장). 그리고 그 결과 시므온 지파는 독립된 기업을 얻지 못하고 유다 지파의 기업 중 일부만을 자신의 몫으로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수19:1-9). 하지만 본절 이하에 의하면 이처럼 열세한 상황에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므온 지파는 불평 불만에만 빠져 있지 않고, 유다 지파와 협력하여 가나안 미정복지를 성공적으로 정벌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다 지파는가장 수가 많고 강한 지파였으나(민 1:27;26:22)미약한 시므온 지파를 무시해 버리지아니하고 유기적인 협력 관계를 잘 유지했음도 알 수 있다. 이로 보건대 사사 시대 초기 당시는 아직 말기적 현상(20장)과는 달리 각 지파간의 관계가 돈독했을 뿐만 아니라 가나안 정벌에 대한 열망으로 서로의 마음도 똘똘 뭉쳐져 있었다고하겠다.
제비뽑아 얻은 땅 - 일전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각 지파들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해 줄때 제비뽑기를 통하여 실시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곧 각 지파에게 분배될 땅의 상태가 좋고 나쁜 데 따르는 시비를 사전에 방지할 뿐 아니라 제비로 결정된땅은 곧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기업이란 점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민 26:52-56 강해, '제비 뽑기'를 참조하라.

=====1:4
가나안 사람 - 1절에도 같은 말이 나오지만 그것과는 조금 의미가 다르다. 즉 이말은 성경에서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두가지 경우로 사용되고 있다. 그중 넓은 의미로는 1절에서와 같이 가나안에 거주하는 모든 족속을 가리킨다(창 10:19).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시돈과 두로의 베니게 지역 해변가와 요단 강계곡 및 평원에 살았던 가나안 후기 원주민 중 한 종족을 가리킨다<수 서론, 가나안의 여러족속들>. 여기서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브리스사람 - 이 역시 가나안 후기 원주민 중 하나이다(수 3:10;11:3;17:15;24:1).한편 '브리스'에 해당하는 원어 '페리지'(* )는 '성벽도 없고 문이나 빗장이 없는 장소'라는 뜻의 '페라조트'(* )와 어원이같다(겔 38:11). 이로 보아 브리스 사람이란 요새화된 성이나 성벽이 없는 성읍, 또는 작은 마을에 살았던 가나안의 한 종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들이 성벽을 세우지않은 것은 그들의 거주지가 주로 산지였으므로(수 17:15) 그지형 자체가 충분한 요새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Kalisch).
베섹 - 이 지명은 본절 외에 삼상 11:8에 딱 한번 언급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베섹은 기브아와 길르앗의 야베스 사이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곳은 유다 지파의 땅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다.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베섹'과 동일한 곳은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유다와 시므온 지파가 올라간 베섹은 유다 지파의 기업 내에위치한 곳이기 때문이다(Rosenmuller). 따라서 여기서 오늘날의 '베즈카'(Bezqa)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혹자(Lange,P. Cassel)는 '베섹'(* )이라는 지명의 뜻을 '빛'(겔 1:14에는 '번개'로 번역되어 있음)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베섹'이란모래가 많아 태양 빛에 반사되는 지역을 통칭하는 지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약적인 논리에 불과하다.

=====1:5
아도니 베섹 - '베섹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개인 이름이 아닌 베섹 성읍 통치자의 칭호이다. 이같은 칭호로는 애굽 왕을 가리키는 '바로'(출 1:11), 그랄 왕을 가리키는 '아비멜렉'(창20:2) 등이 있다. 창26:1 주석 참조. 한편 혹자(G.E.Wright)는 이아도니 베섹을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수10:1)과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하나 분명치않다.

=====1:6
그 수족의 엄지 가락을 끊으매 - 고대 근동에서는 전쟁 포로를 다룸에 있어서 이처럼 불구로 만들거나 눈을 뽑아 버리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민16:14;삼상11:2;왕하25:7). 이러한 형벌은 상대방에게 수치를 주기 위함이었음은 물론, 실제적인 목적도지니고 있었다. 즉 엄지 손가락을 자르는 것은 무기를 잡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엄지 발가락을 자르는 것은 도망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MatthewHenry's Commentary, Vol. II, p.122). 그리고 눈을 뽑는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방의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실례로는 일찍이 페르시아 제국이 망하여(B.C. 331) 헬라의 포로가 되었을 때, 헬라인들이 포로들의 수족과귀 따위를 잘랐던 사건을 들 수 있다(Lange). 아무튼 본절에서 아도니 베섹이 이같은형벌을 당한 까닭은 일찍이 그가 동일한 방법으로 70명의 군왕들을 능욕했기 때문이다(7절).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나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진리를 여기서도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1:7
칠십 왕 - 이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왕에' 해당하는 '멜레크'(* )는 종종 일개 성읍의 통치자를 가리키기도 한다(창 14:1,2 ; 수10:3;12:9-24). 따라서 이들은 아도니 배섹 당시 각기 가나안의 군소 성읍을 관장하던군왕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 마치 개처럼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행위(마15:27)를 가리킨다. 이는 인간이 맛볼 수 있는 가장 비참하기도 굴욕적인 대접 중 하나에 다름 아니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 p. 253).
하나님이 나의 행한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 타인에게 가한 손상만큼 가해자에게도 동일한 형벌이 주어지게 하는 동해 보복법(Rex Talionis)은 모세 율법 이외에 함무라비 법전에도 언급되어 있다<출 21:18-36 강해, 동해 보복법>. 이러한 사실을 볼 때아도니 베섹의 이 한탄의 말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회개한 말이라기 보다는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었던 인과 응보(因果應報)적 사상에 따라 자신이 처한 곤고한 상태를 한탄한 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 유다와 시므온 연합군이 아도니 베섹을 사로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간 사실은 아도니 베섹이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과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5절>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즉 라이트(G.E.Wright)같은 학자는 예루살렘이 아도니 베섹의 왕도(王都)였기 때문에 유다 연합군이 그를 그곳으로 끌고 간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어디까지나 추측적 견해일 뿐 뒷받침될 만한객관적 증거가없다.

=====1:8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 예루살렘은 이미 여호수아 군대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수 10:23,26) 이스라엘 백성이 완전히 점령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본절에서도 유다 자손이 그 성읍을 치고 불살랐으나 역시 완전히 정복되지는 않았다(21절). 이러한 미정복 상태는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다윗이 이를 정복함으로 비로소 끝이 났다(삼하 5:6-9). 그런데 혹자는 이와는 약간 다른 견해를 표명하기도 한다. 즉본시점에서 예루살렘은 유다 연합군에게 완전히 점령되었으나 유다와 시므온 두 지파의 인구가 전지역을 장악할 만큼 충분치 못했기 때문에 곧 다시 여부스 족속들이 예루살렘을 차지해 버린 것이라고 주장한다(A.E.Cundall).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 오히려 19절의 기록에 의거하여 여부스 족속 중 평지 거민이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유다 지파가 그 성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는것이 더 타당하다.아무튼 예루살렘은 다윗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완전히 정복되었으며, 그곳에 성전이 건립됨으로 명실 공히 이스라엘의 수도로 부상하였다(삼하5:9).

=====1:9
내려가서 - 유다 지경(地境)의 북단 경계에 해당하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남쪽 경계인 네게브(Negeb)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산지와 남방과 평지 - 유다 지파가 기업으로 받은 가나안 땅 지경(수5:1-12)의 지형상 특징 및 구조를 나타내 주고 있는 말이다. 이 중 산지, 즉 유다 산지는 해발 약800m에 달하는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다 지경 내의 산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남방'은헤브론과 가데스바네아 사이의 반사막(semi-arid) 지대로서, 일명 '네게브'라고도 불리운다.
그리고 '평지'는 히브리어로 '쉐펠라'(* )라고 불리우는 저지대로서, 곧 지중해변의 해안 평야와 팔레스탄 중앙 산맥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지역을 가리킨다=====1:10
헤브론 -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30km 정도 거리에 위치한 해발 910여m 정도의고도(古都)이다. 오늘날 '엘 칼릴'(el-Khalil)로 불리우는 도시인데 상공업으로 유명하다. 한편 일찍이 헤브론은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던 곳이며(창 13:18) 아브라함과 사라가 매장된 곳이기도 하다(창 23:19 ; 25:9). 그리고 후에는 다윗의 통치초기 7년 동안 유다의 수도가 되기도 했다(삼하 5:5). 또한 '연맹'이란 뜻을 가지고있는 이 고대 도시는 이스라엘에 정복된 후 이스라엘의 여섯 도피성 중 하나가 된다(수 20:7)). 한편 헤브론은 갈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20절;수 14:6-15), 그 이유는 아마 헤브론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탐 때에 갈렙의 책임 지역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민 13:22 이하).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 - 헤브론에 거하던 거인족 아낙의 세 자손이다(20절;민 13가22;수 15:14). 이 중 '세새'는 '애굽 왕 시삭' (왕상 14:25)처럼 '태양'을 의미하고 '아히만'은 이방 신인 '므니'(Meni)의 친구(사 65:11)를 의미한다. 그리고'달매'는 밭고랑을 각각 의미한다. 한편 일찍이 헤브론은 여호수아에 의해서 파괴되고헤브론왕 호함도 죽임당했었다(수 10:1-27,36,37), 그리고 드빌(11절), 아납 및 기타산지의 성읍들도 헤브론과 마찬가지로 파괴되었었다(수 11:21-23). 그러나 본절에 따르면 그 후에 아낙 자손으로 된 이 세 씨족이 헤브론을 재탈환했던것 같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를 다시금 정복해야 했었는데, 유다 지파 갈렙의 군대가 이를 재정복한 것으로 나와 있다(수 15:13,14). 한편 이 세 씨족의 이름들은 당시 그들이 섬기던 우상들의 이름에서 본딴 것으로 가나안 땅에 우상 숭배가 얼마나 만연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기럇 아르바 - 헤브론의 본래 이름으로 '넷으로 된 성읍'(테트라폴리스,Tetrapolis)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이름은 당시 서로의 필요에 의하여 네 성읍이 하나로 연합한 데서 유래된 듯하다(Lange). 그래서 아브라함 때에 이 기럇아르바는 '연합' 또는 '연맹'이란 뜻의 '헤브른'이란 명칭으로 바뀌었던 것이다(창 23:20).

=====1:11
드빌...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 '드빌'은 헤브론의 남서쪽 약20km 지점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븍 당시 이곳에는 아낙 자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수 11:21). 이곳은 오늘날 '히르벳 라붇(Hirbet Rabud)으로 불려지는 지역과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 1968년부터 모쉐 코카비(Moshe Kokhavy) 탐사반이 이곳을 발굴한 결과 가나안 정복 당시의 상황을 추정할 수 있게 해주는 유물들이 대량 발견되었다 한다. 한편 '드빌'의 본명인 '기럇 세벧'은 '책의 도시' 또는 '기록의도시'란 뜻이다. 드빌이 본래 이러한 이름으로 불리웠던 까닭은 그곳에 큰 도서관이나 문서 보관 창고 따위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수 15 : 15 주석 참조.

=====1:12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 갈렙이 이처럼 드빌을 정복하는 자에게 자기 딸을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고대의 포상(褒賞) 관습(삼상 17:25;18:17,27)을 따른것이긴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신앙의 용사를 사위로 맞이하려 한 갈렙의 신앙제일주의 사상이 작용하였던 것 같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 15:16 주석을 참조하라.

=====1:13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 - 본절을 그대로 번역할 경우, 옷니엘은 갈렙의 동생이 되며 갈렙은 그나스의 아들이 된다. 이러한 견해는 KJV,NIV,RSV과 같은영어 성경도 따르는 바이다(Othniel the son of Kenaz,Caleb's younger brother). 그러나 공동 번역은 본절을 '갈렙의 동생 크나즈의 아들인 오드니엘'로 번역하고 있다.그에 따르면 옷니엘은 갈렙의 조카가 되며 그나스는 갈렙의 동생이자 옷니엘의 아비가된다. 이는 Living Bible이 취하고 있는 견해이기도 하다(Caleb's nephew, Othniel,son of his younger brother Kenaz). 이러한 서로 다른 해석은 성경의 원문이 그 어느쪽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서 비롯된 현상이다. 때문에 학자들 간에는 옷니엘이 갈렙과 정확히 어떠한 관계인지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이 중대표적인 견해를 들자면은 곧 다음과 같다. (1) 옷니엘은 갈렙의 이복(異腹)동생이라는 견해(Bertheau):이는 갈렙이 '여분네의 아들'(민 13:6;수 14:14)인 데 반해 본절에서 옷니엘은 '그나스의 아들'인 것으로 나와 있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2) 옷니엘은 갈렙의 조카라는 견해(De Wette, Ewald, Pulpit Commentary) : 이는 갈렙과 옷니엘간의 현격한 연령 차이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옷니엘이 드빌을 정복하고서 갈렙의 딸을 아내로 맞이할때, 갈렙의 나이는 85세였다(수 14:10). 그러나 당시 옷니엘은혈기 왕성한 젊은 용사였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두 사람은 형제간이 아니라 숙부와 조카 간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3) 옷니엘과 갈렙은 다같이 그나스 집안의사람들로서 친척이라는 견해(Lange) : 이는 민32:12에 갈렙이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아들'로 나와 있으며 본절에선 옷니엘이 '그나스의 아들'인 것으로 나와 있는 점에 근거한 주장이다. 이상과 같은 세 견해 중 오늘날 대체적으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견해는 두번째 것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 5 : 17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성경에는 그나스란 이름과 관련하여 동명 이인(同名異人)으로 에돔 사람 '그나스'(창36:11)가 나온다. 따라서 이 자를 옷니엘의 아비인 '그나스'와 혼동해서는 안 될것이다.
=====1:14
악사가 출가할 때에...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 이는 이스라엘의 '모하르'(* )풍습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여기서 '모하르'란 시집가는 딸에게 아비가 주는 결혼선물, 또는 남자가 처녀를 아내로 데려갈 때 장인에게 치루는 '대가'를 가리킨다. 성경에선 대개 이 둘중 전자를 가리켜 '빙물'(聘物)이라 하고 후자를 가리켜 '빙폐'(聘弊)라 한다<1 : 1-20 강해,빙폐와 빙물>. 물론 부모가 결흔하는 딸에게 '모하르'를주는 경우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그리 흔하지 않다. 하지만 악사는 옷니엘에게로 출가하면서 이 '모하르' 관습에 따라 아비에게 밭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악사가요구한 밭이 어느 곳의 어떠한 밭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에의 언급이 없다. 그러나 대개는 여타 밭과는 다른 특정한 밭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 5:8 주석을 참조하라.

=====1:15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 KJV는 이를 '당신께서 내게 남쪽 땅을 주셨으니'(for thou hast given me a south land)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악사가 밭을요구한 데 대하여(14절) 갈렙이 '남방', 즉 '네게브'(Negeb) 땅을 준 것으로 이해하고서 행한 번역이다. 어쨌든 악사가 출가하여 옷니엘과 한 가정을 이루게 된 곳은 네게브 지역이었는데, 그곳이 '드빌'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12절).
샘물도 내게 주소서 - 남방(Negeb)은 거의 사막과 같은 곳이었다(9절 주석 참조).때문에 급수(給水)는 그곳에서 생활하는 자들에게 있어 절대 중요한 문제였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악사였기에 그녀는 현명하게 아비에게 샘물도 요구한 것이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두었더라 - 이 샘들의 위치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혹자는 헤브론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Robinson). 그곳은 아마 옷니엘이싸워 정복한 드빌 땅과 헤브론 지역의 일부였을 것이다. 이는 헤브론 남방 약 9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 베이트 미르심'(Tell Beit Mirsim))에서 두 샘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과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Wycliffe). 아무튼 재치있고 현명한악사로 말미암아 본래 가난한자였던 옷니엘은(Raschi) 넓은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고후에 이스라엘의 사사로 그 위치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같다(3 : 9) 이에 관한 보다자세한 내용은 수 15 : 19 주석을 참조하라.

=====1:16
본절은 모세의 장인이 속했던 겐 족속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들어왔음을 보여 준다. 민 10:29,30에 따르면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또는 르우엘)와 처남 호밥에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자고 요청했으나호밥은 처음에 이를 거절했었다. 그러나 본절을 통해서 볼 때 호밥은 후에 이같은 청을 수락하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것이 틀림없다.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 모세의 장인 이드로와 그의 처남 호밥은 원래 가나안원주민이 아니라 미디안 족속 중 하나인 겐 족(Kenites)이다. 이 겐 사람에 대한 최초의 성서 기록은 창 15:19에 나타나며 발람의 신탁 속에 등장하는 '가인 사람'도 역시겐 족을 가리키는 말이다(민 24:21,22). 이들은 주로 홍해 부근, 즉 엘란(Elan) 만 동부 지역인 아카바(Aqaba) 만 일대에 거주했었는데 점차 모압 경계선 북부(민 21:4),팔레스틴 남부 산악 지대에까지 북상하였다. 아무튼 모세 이후부터 이들 겐 사람은 히브리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출 2:15-22) 다윗 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다(삼상 15:6;30:29). 그리고 본절에서는 이 겐 족이 유다 지파의 지경내(地境內)에 거하므로서 이스라엘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종려나무 성읍 - 일명 '향기의 도시', '달(月)의 도시'로도 불리웠던 여리고를 가리킨다(신 34:3;대하28:15). 예루살렘 동북방 약27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인데, 종려나무의 산지로 유명하였기 때문에 '종려나무 성읍'(the City of palms)으로 불리웠다.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 최초로 정복한 성읍이기도 한 바, 이에 대하여서는 수6장을 참조하라. 한편 혹자들은 겐 족이 유다 지파와 처음부터 함께 아랏 남방의 헤브론과 드빌로 갔다고 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종려나무 성읍은 헤브론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여리고를 가리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Cundall). 그러나본절에 보면 겐 족이 처음에 머문 곳은 분명히 종려나무 성읍인 여리고이며 그 후에 유다와 시므온이 남방을 정벌할 때 아랏 남방으로 내려가 유다 백성과 함께 거주한것임을 알 수 있다(Hervey).
아랏 남방 - 아랏은 헤브론 정남쪽 25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성읍이다. 넓고 완만하게 경사진 황무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이곳은 아브라함 당시 이미 문명이 발달했었음을 알 수 있다(N.Glueck). 한편 아랏과 여리고는 약 85km 가량 떨어진 먼 거리이므로 겐 족의 이주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백성 중에 거하니라 - 혹자는 '백성'에 해당하는 원어 '암'(* )이 '아말렉'과 첫 두 자음이 일치하며, 겐 족속이 아말렉(* )과 깊은 연판이 있는 족속이라는 사실을 들어(삼상 15:6), 여기서 '그 백성'이란 아말렉을 가리키는 것이라고주장한다(Cundall). 그러나 이미 앞에서 유다가 언급되었고 '암'이라는 단어에 정관사가 덧붙어 있으므로 '그 백성'이란 유다 지파를 가리키고 있음이 틀림없다. 역사적으로도 겐 족이 다윗시대까지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처음의 주장은 분명히 옳지않다(삼상 30:29).

=====1:17
스밧...이름을 호르마라 하니라 - 스밧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는 분명치 않다그러나 오늘날의 '텔 엘 밀'(Tell-ei-Milh)이거나 '텔 에쉬세리아'(Tellesh-Sheriah)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자는 브엘세바에서 약 10km 정도, 후자는 약20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읍이다. 한편 유다와 시므온 연합군은 스밧을 진멸한 뒤'호르마'라 칭하였는데, 이는 '완전히 파괴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성읍의 파괴가 신들에게 언약의 맹세를 표하는 하나의 종교적 예식임을 암시하는 말로서 당시 고대 근동에서 널리 행해지던 것이다. 이러한 완전한 진멸은 잔인한 면도 있으나 전쟁에 뒤따르기 쉬운 것들, 즉 예를 들면 강간, 약탈 등의 추한 행위들을 미리 예방해 주는 이점도 있었다. 특히 유다 지파의 이러한 철저한 도륙은 그 땅에 뿌리박고있던 우상과이방 종교의 척결이란 점에서 오히려 의미가 깊다. 한편 호르마라고 불리우는 이 스밧은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의 지경내에서 얻은 시므온 지파의 기업이었다(수 19:4).

=====1:18
가사...아스글론...에그론 - 아스돗, 가드와 더불어 블레셋의 5대 성읍으로 꼽히던도시들이다(수 13:3). 이 중 가사(Gaza)는 예루살렘 남서쪽 80km, 지중해에서 내륙쪽으로 약 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아스글론(Ashkelon)은 가사 북쪽,아스돗 남쪽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였다. 마지막으로 에글론은 블레셋의 다섯 성읍 중가장 북쪽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유다와 시므온 연합군은 남쪽에서부터 점차 북쪽으로북상하면서 블레셋 성읍들을 정복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때 그곳의 거민들을 완전히 진멸하지 못하였는 바, 이들 성읍들은 다시금 블레셋의 장중에 들어갔으며 이후이스라엘을 고질적으로 괴롭히는 대적이 되었다(14:19;삼상 5:1,10;7:7,8).

=====1:19
본절에서는 두가지 대조적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유다 지파가 신앙적으로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을 믿음으로 산지(9절)거민들을 쫓아낼 수 있었던 사건이고다른 하나는 불신앙적으로 철병거를 두려워하여 골짜기의 거민들을 쫓아 내지 못한 사건이다.
철병거가 있으므로 - 인류가 철을 생산하여 사용한 것은 헷 족속(Hittites)에 의해서 였다(성경 총론,'구약과 고대 근동 문화' 참조). 그들 중 일부는 일찍부터 가나안땅에 이주해 온 듯하며(창 23:3 ; 26:34) 합금 기술의 개발을 통해 다른 어느 부족보다 더 막강한 무기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 철재 무기는 사울 왕 시대에 블레셋의 기술에 의존하여 사용한 것이 고작이었으므로 당시 철재 무기는 매우 구하기 힘들었다(삼상 13:22).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철병거로 무장한 가나안 족속을 두려워한 것은 한편으로는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하나님의능력으로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던 그들이 철병거를 두려워하여 골짜기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불신앙이라는 말로 설명되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전에여호수아는 가나안족들에게 철병거가 있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그들을 쫓아낼 수 있다고 요셉 지파에서 주지시켰던 적이 있었다.(수 17:16-18). 그리고 실제로 사사 시대에 드보라와 바락은 철병거 9백승을 가진 야빈 왕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둔 적도 있다(4:13-16). 따라서 유다 지파가 철병거를 가진 적에 대해 미리 겁을 집어먹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불신앙으로 인하여 정복 사업을 완수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 이에 해당하는 원어 '로 레호리쉬'(* )는능력이 없어서 쫓아내지 못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는 능력이 있으면서도쫓아내지 아니한 직무 유기 내지는 고의적 회피 행위를 의미한다. 족 유다 지파는 골짜기 거민들을 쫓아내 보려고 시도도 하지 않은 채 미리 겁을 집어 먹고 아예 이 일을포기했던 것이다(Lange).

=====1:20
모세의 명한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 일찍이 모세의 가나안 정탐꾼 파송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구절이다. 즉 과거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은 모세에게 회의적인 보고를 하였었다(민 13장).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만은 이스라엘이 능히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보고하였다(민14:6-9). 그러자 모세는 갈렙에게 축복하기롤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수14:9)고 하였다. 그같은 약속에 근거해 갈렙은 여호수아 생존 당시 헤브론을 요구,기업으로 받았었던 것이다(수14:13-15). 본절은 바로 그 사건을 다시금 얘기하고 있는것이다.
아낙의 세 아들 - 이미 10절에서 언급된 아낙 자손의 세 씨족인 세새, 아히만,달매를 가리킨다. 한편 갈렙을 대장으로한 유다 자손이 이들을 무찌른 기사는 수 15:13,14에 상세히 나와 있다. 그러므로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1:21
본절에는 베냐민 자손이 예루살렘 거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수 15:63에는 유다 자손이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따라서 이 두 기록은 서로 상치되는 것처럼 보일 수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베냐민과 유다의 경계는 벤 힌놈 골짜기와 예루살렘 남쪽 지역에서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수 15:8 ; 18:28). 그러므로 여부스 사람을 예루살렘에서 쫓아내지 못한 책임은 이 두 지파 모두에게 있었던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수15: 63주석을 참조하라.
여부스 사람 - 가나안 일곱 족속 중 한 족속으로서(창 10:16). 예루살렘 산악 지대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이다(수 서론,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 그래서 고대에는 예루살렘을 '여부스'라고도 불렀다(19:10 ; 수 15:18 ; 18:28 ; 대상 11:4 등). 한편 볘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의 이같은 공격 실패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사사 시대 동안 이스라엘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19:10-12), 그러다가 다윗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완전히 정복된다(삼하 5 : 6-10). 그러나 다윗의 정복 이후에도 부분적이나마 여부스사람의 예루살렘 거주는 계속 허용된 듯하다 (삼하 24:16).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 - 예루살렘이 완전히 정복당하고 여부스 족이 축출당한 때는 다윗 시대이다. 따라서 여기서 가리키는 '오늘날'이란 B.C.1050-1000년경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연대는 본서의 기록 연대를 추정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바, 본서의 기록 연대 역시 이 시기인 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사사기 서론참조.

=====1:22
본절은 베냐민 지파와는 달리 요셉 지파가 믿음으로 정복 사업에 나아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요셉 족속 - 여기서 '요셉 족속'이라 함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를 통틀어 칭하는 말이다(수 17:17). 그들은 유다와 시므온처럼 기업을 함께 할당받았기 때문에(수16:1-4) 연합하여 벧엘 정복에 나섰음이 틀림없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 p. 258).
벧엘 -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9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베이틴(Beitin)이다. 이곳에는 좋은 샘들이 많아 고대로부터 유목민들의 각광을 받았었다. 본래의이름은 '루스'(23절)인데, 야곱에 의해 '하나님의 집'이란 뜻의 '벧엘'로 바뀌었다(창 28:16-19). 한편 이러한 벧엘은 본래 베냐민 지파에게 분배된 땅(수 18:22)이었으나 요셉 족속의 남쪽 경계선과도 서로 맞물려 있었다(수 16:1,2). 따라서 요셉 족속도 벧엘에 거주하고 있는 가나안인들을 다 쫓아내지 아니하고는 자신의 영토를 보호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요셉 족속이 벧엘 정복에 나선 것이다.한편 벧엘 정복에 관한 기사는 성경상에 상세히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추측컨대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정복한 후(수 8장) 곧 이어 벧엘도 일시 정복했던 것같다(수12:16). 그러나 벧엘은 다시금 가나안 원주민들의 수중에 넘어갔으며 이에 본절에서요셉 족속이 재차 정복에 나선 것 같다(Goslinga). 아무튼 이러한 벧엘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하지만 '하나님의 집'이란 뜻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벧엘은 왕정 시대 당시 우상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왕상 12:26-33; 왕하 17:27-33 ; 렘 48:13).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 요셉 족속이 벧엘을 성공적으로 정복하게 된동인(動因)이 근본적으로 여호와께 있었음을 상기시켜 주는 구절이다(삼상 17:47).

=====1:23
벧엘을 정탐케 하였는데 - 여기서 '정탐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투르'(* )는'경비가 엄한 지역을 몰래 살피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모세가 가나안에 염탐꾼들을 보냈던것(민 13:1-20)과 비슷한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즉 요셉 족속의 이런 신중한 태도는 그들이 참으로 믿음 가운데 서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루스 - '벧엘'의 본명이다. '하나님의 집'이란 뜻의 '벧엘'이란 이름은 야곱이 처음 붙인 것이며(창 28:19) 가나안 족들은 그곳을 '루스'라했다. '루스'(* )란 '왜곡되다', '떠나다'라는 뜻인데 벧엘의 우상 숭배 역사와 잘 부합되는 이름이다.한편 수 16:2에는 "벧엘에서부터 루스가 나아가"라는 언급이 있다. 이는 마치 벧엘과루스는 서로 인접해 있는 다른지역인 것처럼 생각케 해준다. 때문에 혹자는 루스의남쪽을 '벧엘'로 보고 있기도 하다(Cassel).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껏 살펴보아왔듯 이 '루스'와 '벧엘'은 동일한 지역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16:2 주석을 참조하라.

 

=====1:24
 본절에 기록된 사건은 여리고 정탐시에 기생 라합에게 일어났던 사건과 유사하다(수 2장). 아무튼 이는 요셉 족속이 어떻게 견고한 요새 벧엘을 정복하게 되었는가를잘 보여준다. 그리고 또 벧엘 정복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요셉 족속과 함께 하셨음(22절)도 잘 보여 준다.
 성읍의 입구 - 이것은 성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벧엘사람들이 요셉 족속의 성문 출입을 허용 할리 만무하다. 따라서 이는 요새화된 벧엘에침입해 들어갈 수 있는 비밀 루트(root)나 방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 259).
 선대하리라 - 원문을 직역하면 '자비를 보이겠다'. '은혜를 베풀겠다'는 뜻이다.여기서 '자비', '은혜'에 해당하는 원어 '헤세드'(* )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긍휼' 또는 인간과 인간 간의 '변함없는 신뢰'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창19:19; 삼하16:17 ; 시59:17). 여기서는 정탐꾼이 벧엘 거민에게 제시한 '약속을 어기지 않고 반드시 이행하겠다'는 강조적 의미로 쓰였다.

 

=====1:25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르친지라 - 이 벧엘 사람은 요셉 족속의 정탐꾼으로말미암아 신변의 위협을 느꼈으므로 이처럼 성읍의 입구를 가르쳐 주었을 수도 있다.그러나 정탐꾼이 그에게 정중히 도움을 요청한 점으로보아(9절) 자발적인 행동이었을가능성이 더 크다. 즉 그는 여리고 성의 라합처럼(수2:8-11). 이미 하나님께서 요셉족속과 함께 하심(22절)을 감지했기 때문에 정탐꾼의 요청에 협조했을 것이다.
 그 사람과 그 가족을 놓아 보내매 - 라합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은 신실하게 약속을 지켰다(수6:17). 이와 같이 한 사람의 행동 여하에 따라 전가족의구원과 멸망이 좌우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대표 원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즉과거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오늘날 한 사람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구원받게 된 것이다(롬5:18). 물론 구원은 최종적으로 개개인과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어떤 사람이 타인의구원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쳐구원에로 인도할 수는 있으므로, 성도의 힘쓸 의무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고후 2:15, 16 ; 딤후 4:2).

 

=====1:26
 헷 사람의 땅 - 헷 족속은 인도 유로피안(Indo-European) 족이다. 이들은B.C.1800-1200년 사이에 소아시아와 시리아 지역에 거대한 왕국을 건설했었다(수 서론,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 참조). 고고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족장 시대나 모세 율법시대에 일어난 사건들과 헷 족속의 법률이나 관습들, 특히 이들의 종주권계약(suzerainty treaties)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한편 시리아 지역은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 '헷 족속의 온 땅'으로 불리워졌다(수1:4). 따라서 본절에서 벧엘 거민이 이주하였다는 '헷 사람의 땅'은 시리아의 어느 한 지역이었음이분명하다.
 그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 이 사람은 자신의 새로운 정착지에 다가 벧엘의 옛이름인 '루스'라는 칭호를 붙였다.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떠나다'라는 뜻 외에도<23절> '편도나무'(almond)라는 뜻을 지닌 '루스'라는이름에 근거해 추정해 볼 수는 있다. 즉 편도나무로 유명했던 고대 헷 족속의 땅으로는 북부시리아의 '쿠프로스'가 있으므로 이곳이 곧 루스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Cassel).

 

=====1:27
 본절은 벧엘의 운명과는 대조적으로 므낫세의 영토내에 있는 많은 가나안 인들의 성읍들이 그대로 존속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들 성읍들은 '돌'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스르엘과 에스드렐론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편 이  도시들 중 몇몇은 여호수아에 의해 정복되었으나(수12:21,23), 나머지 성읍들에 대한 정복기사는 아무 데도 없다. 아마 그들은 철병거를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쉽게 이스라엘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Goslinga). 그리고 여호수아에 의해 정복된 성읍들까지도 곧 독립하였을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로 본절의 끝 부분에 나오는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거하였더니"라는 말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저항이 막강하였음을 의미한다.
 벧스안 - 요단 계곡과 이스라엘 골짜기의 교차 지점, 곧 요단 강 서쪽 약 10km 지점에 위치한 주요 요새이다. 라암세스 3세 때(B.C.1175-1144)까지 이곳에 애굽 수비대가 상주했었으며, 그 후 블레셋이 이곳을 점령했었다.
 그 향리 - 즉 큰성읍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에 형성되었던 촌락이나 위성 도시를 가리킨다.
 다아낙 - 므깃도 남동쪽 8km 지점에 위치한 가나안의 주요 성읍이다. 역사상 이 성읍은 당시 에스드렐론 계곡에서 샤론 평야에 이르는 남서 통로를 지배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
 돌 - 가이사랴 북방 약 13km 지점의 갈멜 산 남쪽, 팔레스틴 해안에 위치한 요새화된 성읍이다. 이곳에는 그 해안을 따라 자주빛 물감의 원료가 되는 조개가 많이났기때문에 고대로부터 페니키아인들이 정착해 살았었다. 한편 솔로몬 당시 돌과 그 인근지역은 솔로몬 왕국의 제4행정 구역에 편입되었던것으로 전해진다.
 이블르암 - 샤론 평야 동쪽, 이스르엘 골짜기 남쪽에 위치한 가나안의 주요성읍이다. 오늘날에 '길벳 빌 암메'(Khirbet Billameh)와 동일시 되는데, 이는 므깃도 남동쪽 약 16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므깃도 - 하이퍼 남동쪽 약 30km 지점의 이스르엘 평원에 위치한 고대 도시이다.이곳은 B.C. 12세기 중반까지 애굽의 지배 하에 었었다. 고고학자 스트라툼(Stratum)7세는 므깃도가 갑자기 멸망당했음을 밝혀냈는데, 그것은 5 : 19에서 암시하고 있는드보라의 숭리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Albright)

 

=====1:28
 본절에서 사사기 기자는 므낫세 뿐만아니라 다른 지파까지 포함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가나안 인들을 그 땅에서다 쫓아내지 못하였음을 보여 준다.그리고 이스라엘이 강성해져 충분히 가나안 인들을 쫓아낼 수 있을 즈음에는, 가나안인들을 쫓아내기 보다는 오혀려 그들을 부려먹기 시작했음을 보여 준다. 즉 강성한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하라 보다 가나안 인들의 사역을 통하여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성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 - 정확히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물른 이스라엘의 국력이 최고로 신장(伸長)된 때는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 왕국 시기(B.C.1005-931)이다. 그러나 사사 시대 동안에도 이스라엘은 꾸준히 국력을 길러 왔던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이때는 이스라엘이 충분히 가나안 인들을 다 쫓아낼 수 있을 만큼 국력이신장된 때임에 만은 분명하다.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 이처럼 이스라엘이 가나안 인들을 사역시킨 경우는 이미 여호수아 당시에도 있었던 일이다. 즉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속여 화친 조약을 맺었던 기브온 거민들을 이스라엘의 노예로 삼았었던 것이다(수9:22-27). 또한 솔로몬은 자신의 건축 사업에 가나안 인들을 동원, 인부로 사용하기도 했었다(왕상9:19-22).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셨던 것은 가나안땅에서 모든 원주민들을 멸하고 쫓아내는 것이었지(신20:16-18) 결코 그들을 남겨, 이용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여기에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잘못이 있었는 바, 이후 이스라엘은가나안의 이방 우상 숭배 종료와 사악한 풍습에 점차 물들어 가고 말았던 것이다.

 

=====1:29
 게셀 - '쉐펠라', 즉 가나안 평지<9절>의 돌출부에 위치한 전략 도시로서 예루살렘 서쪽 30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특히 에브라임의 영토 중 최남서쪽 경계와 맞물려 있는 이곳은 지중해변에서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주요 길목이기도 하다. 한편이 게셀은 애굽의 문서들에서도 여러번 언급되고 있는데, 애굽의 바로가 솔로몬에게결혼 선물로 이 성읍을 줄때까지(왕상9:15-17) 이 성읍은 이스라엘의 지배 아래 들어오지 않았었다.

 

=====1:30
 스불론의 영토에 있는 두 성읍 기드론과 나할롤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바가 없다.
 기드론 - 예루살렘과 감람 산 사이를 흐르는 시내인 '기드론'(삼하1:23)과는 엄연히 틀린 곳이다. 하이퍼(Haifa)의 남동쪽에서 1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 엘 파르(Tell el-Far)인 듯하다.
 나할롤 - 또는 '나할랄'으로도 불리우던 성읍이다(수19:15 ; 21:35). 아크레 평원남단, 하이파 동쪽 8km 지점에 있는 오늘날의 텔 엔 나흘(Tell en-Nahl)로 추측된다(Albright).

 

=====1:31
 본절에 언급된 성읍 중에서 악고, 시돈, 알랍, 악십은 모두 갈멜 산 북쪽 해안에위치해 있었다. 이곳 거민들은 다른 지역의 가나안 인들과는 달리 커다란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후에 이곳은 중요한 해양 국가인 베니게(Phoenicia)로 발전하였고, 다윗과솔로몬 시대(삼하5:11 ; 왕상5:1-12). 그런데 레니게의 공주 이세벧이 아합과 결혼하여 이스라엘에 바알 우상을 들여옴으로써(왕상16:31-34) 이스라엘에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아셀 지파의 성읍들을 간략히 도표화하여 살펴보면 곧 다음과 같다.
┌──┬───────────────────────────────────┐
│이름│   비   고                                                   │
├──┼───────────────────────────────────┤
│악고│페니키아의 항구 도시. 갈멜 북쪽 6km 지점의 지중해 연변에 위치. 사도 │
│        │바울 당시에는 '돌레마이'(행 21:7)로 불리웠음.                                                  │
├──┼───────────────────────────────────┤
│시돈│두로 북쪽 약 35km, 베이루트 남쪽 약 35km 지점에 위치한 베니게의 중요 │
│        │항구 도시. 솔로몬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돈의 우상 신 '아스다롯'을 │
│        │숭배하였음(왕상 11:5,33).                      │
├──┼───────────────────────────────────┤
│알랍│두로 북동쪽 약 6.4km 지점에 위치한 성읍. 이름의 뜻은 '비옥함', '풍성 │
│        │함'으로서 당시 경제적으로 상당히 윤택한 도시였음을 짐작케 해줌.               │
├──┼───────────────────────────────────┤
│악십│악고에서 두로에 이르는 도로상에 위치한 지중해 연변 도시 악고 동남쪽 약│
│        │11 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 키산'(Tell Kisan)과 동일시됨.                │
├──┼───────────────────────────────────┤
│헬바│정확한 위치 불명. 일명 '알람'(Ahlab)으로도 불리운 듯함.                                │
├──┼───────────────────────────────────┤
│아빅│일명 '아벡(Aphek)으로도 불리웠음(수 19:30). 하이퍼(Heifar) 만에서 4.8 │
│        │km 정도 떨어진 악고 평원에 위치. 베니게와 애굽을 잇는 도로상의 전략적 │
│       │요충지이기도 함.                             │
├──┼───────────────────────────────────┤
│르홉│악고 평원 동남방 약 10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 엘-갈비'(Tell el │
│        │Gharbi).                        │
└──┴───────────────────────────────────┘

 

=====1:32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 증에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에브라임과 스불론 지파의 경우(29,30절)와는 대조되는 기록이다. 즉 위의 두 지파는 가나안 거민들을 완전히 쫓아내지는 못하였으나 그들이 점령한 땅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아셀 및 납달리 지파(33절)는 오히려 그들이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곧 아셀과 납달리 지파의 지경 내에서는 오히려 가나안 사람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아마 그 까닭은 가나안 사람들이 숫적으로 우세하며 아셀 지파나 납달리 지파가그들에게 대하여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수 없었기 때문인 듯하다.

 

=====1:33
 벧세메스 - '태양의 집'이란 뜻, 이것은 이곳에 태양 신을 섬기던 신전이 있었음을암시한다. 갈릴리 고원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한편 성경에는 '벧세메스'란 이름은 같으나 서로 다른 지역인 곳이몇 군데 더 나온다. 그중 하나는 법궤 사건으로 유명한 유다 지파의 북쪽 경계(수15:10)인 벧세메스이고(삼상6:10-16) 다른 하나는 잇사갈 지파의 경계지인 벧세메스이다(수19:22). 그리고 또다른 하나는 애굽의 성읍인 벧세메스이다(렘43:13) 따라서 본절에 나오는 납달리 지파의 벧세메스를 이들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벧아낫 - '아낫의 집'이란 뜻이다. 이로 보아 이곳에는 피요의 여신이며 바알의 아내인 '아낫'에게 바쳐진 신전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이 '아낫'(Anath)은 우가릿(Ugarit)의 전쟁의 여신이었다. 한편 이곳 역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다만 밸세메스 부근에 위치하였던 것으로만 추정할 수 있다.

 

=====1:34
 본절에서는 단 지파가 아셀 지파나 납달리 지파와는 달리(31-33절) 가나안인 가운데 거하지도 못하고 아모리 족속에 의해 산지로 쫓겨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이때 단지파의 일부는 아모리 족속을 피해 유다의 영역이나 팔레스틴 최북단 지역의 라이스(Laish)로 이주해야만 했다(18:1-31).
 아모리 사람 -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이전까지 그곳에 거주하던 모든 가나안 족속들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창15:16). 그러나 엄격히 구분하면 주로 팔레스틴 계곡이나 해안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가나안인'이라 일컬은 데 반해 팔레스틴 산지에 주로 거주하던 자들을 '아모리인'이라했다. 이들은 본래 팔레스틴, 시리아, 바벨론등지에 널리 흩어져 살았었다. 그러나 팔레스틴 내에서는 당시 에게 해 연안출신으로서, 가나안 남서부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 오던 블레셋에게 쫓겨 골짜기나 산지로 밀려나고 말았다. 따라서 단지파가 산지로 쫓겨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때문이다.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들이고 - 단 지파가 본래 기업으로 받은 땅은 가나안의 서부지역 산간과 해변에 이르는 비옥한 땅이었다(수19:40-46). 그러나 이들은 아모리사람들에게 밀려 산지로 쫓겨났고 급기야는 그곳에서조차 정착치 못하고 결국 '라이스'에로까지 이주해야만 했다(수 18장).

 

=====1:35
 헤레스 산 - '태양의 산'이란 뜻으로서, 이곳 역시 우상 신전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암시해 준다. 이곳은 수19:41에 나오는 '이르세메스'(태양의 성읍)와 동일한 곳으로 추정되는데 오늘날 '아인 세메스'(Ain Shemes)라 불리우고 있다(Keil, Goslinga등). 한편 이스라엘이 정복하는 데 실패한 도시들의 이름이 대부분 우상과 관련된 것으로 볼 때<33절>. 이스라엘의 실패는 단지 세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신앙적인 차원에서 설명이되어야 할 것 같다.
 아얄론 - 여리고와 지중해 사이의 고지에 위치한 성읍. 오늘날의 '얄로'(Yalo)인것으로 추정된다. 여호수아가 아모리족을 격퇴할 당시 야얄론 골짜기에 달이 머문사건으로 유명하다(수10:12).
 사알빔 - 예루살렘 서쪽 약 24km 지점, 아얄론 부근에 위치한 성읍이다. 오늘날의'셀비트'(Selbit)로 추정된다. 솔로몬 당시 이곳은 식량 공급을 위한 행정중심지였다(왕상4:9).
 요셉 족속이 강성하매 아모리 사람이...사역을 하였으며 - 단 자손들은 대부분 평야로 이루어져 있는 자신들의 영토에서 쫓겨나고 산지에서 조차 아모리인들의 공격으로 고난을 받았었다. 그러나 훗날 요셉 족속, 엄밀히 말하면 에브라임 지파는 단 지파의 영토에까지 새력을 확장, 아모리인들로 하여금 사역케 했던 것이다. 이것은 아모리인들이 비록 단 지파의 지경에서 단 지파를 쫓아 내긴 했으나 그 지역이 결국에는다시금 이스라엘의 영토로 회복되었음을 보여 준다.

 

=====1:36
 아모리 족속이 단 지파의 영토를 차지한 것(34,35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도 팔레스틴 전역에 널리 잔존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즉 이를 위해 본절은 당시 아모리 족속이 거주하던 땅의 남쪽 경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곧 유다 족속이 기업으로 분배받은 가나안 땅의 최남단 경계와 일치한다(수15:1-4).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그 위였더라 - '아그랍빔'이란 '전갈'이란 뜻이다.아마도 이 지역에 전갈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Pulpit Commentary).이 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혀진 바가 없으나 민34:4과 수15:3에 의거하면 사해 남쪽지역에서부터 브엘세바, 즉 유다 남부 구릉 지역의 평지까지 이르는 가파른 절벽 지대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바위'에 해당하는 원어 '하쎌라'(* )는 헬라어로'페트라'(Petra)에 해당된다. 민34:3과 수15:1에 의거할 때 이는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에돔 지경(地境)의 산악 지대를 가리키는 듯하다(Lange, Wycliffe). 그러나 혹자는 '하쎌라'를 에돔 지경의 산악지대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가 아닌 그냥 바위가 많은지역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로 이해하기도한다(Keil). 마지막으로 여기서 '그 위'란 서쪽지중해변을 가리키는 바, 이는 민 34:5 ; 수 15:4에 의거할 때 지중해로 흘러드는 '애굽 시내'부근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본장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1절) 이스라엘 각 지파가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는 점
진적 과정을 보여 준다.    물론 가나안 정복은 여호수아에 의해서 이미 완수되었고  각
지파별로 토지도 분배된 상태이긴 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을  완전히
장악하고 정착하는 데는 물리적인 군사력에 있어서나 아직까지 미성숙한 상태에  있었
다.  즉 가나안 땅에는 이스라엘이 정복치 못한 강력한 원주민들과 미정복자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수 13:2-7).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몫으로  할당된  기업(수
14-19장)을 온전히 취하기 위해서는 한시 바삐 가나안인들을 축출해 내고 그곳에 이스
라엘의 통치 체제를 구축해야 했었다.  본장은 이에 제일 먼저 유다 지파가 시므온 지
파와 더불어 행한 정복사업을 소개한다(1-21절).  그리고는 이어서 요셉 족속의  성공
적인 정복 사업(22-26절) 및 다른 지파의 실패담을 차례로 소개한다(27-36절).   결국
본장에 기록된 이러한 각 지파의 정복 사업은 다음 두 가지 성격으로 분류될 수 있다.
 (1) 긍정적인 면 : 이 정복 사업에 성공한 지파는 유다 지파의 요셉 족속이다.  이중
유다 지파는 믿음의 사람 갈렙과 옷니엘의 활약(11-15절), 시므온 지파와  겐  족속의
도움(16, 17절)에 힘입어 가나안 남부 지역을 성공적으로 징벌하였다.   그리고  요셉
족속은 여호와에 대한 투철한 믿음으로 굳건한 요새인 벧엘을  성공적으로  탈취했다.
즉 이들의 성공의 원인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12, 22절) 때문인데 특히 갈렙과 옷
니엘 그리고 벧엘을 정탐한 자들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가나안인들을 여전히 잔존 세력으로 남겨  두게  되는데(19
절),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훗날에 큰 화근을 당하게 된다.
 (2) 부정적인 면 : 위에 언급한 지파들 이외에 다른 지파들은 모두 가나안 정복 사업
에 실패하고 만다.  본서 기자는 이들 각 지파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는
신학적 주석을 가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이들 지파의 실패 원인이 군사력이나  어떠
한 외부적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요호와께 대한 신앙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임을
보여 준다.  특히 이들이 장악하지 못한 성읍의 대부분은 우상과 깊은 연관이  있어서
이스라엘 후기 역사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우상 숭배 죄의 근원이 된다. 아무튼 저들의
행위는 결국 '가나안 주민들을 철저히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신
7:2)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불순종으로 시작된 가나안 정착의 역사는 온갖  죄악으
로 얼룩지게 되므로써 종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도래케 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
장은 여호수아서와 본서를 이어주는 다리 역학을 할 뿐만 아니라 본서 전체의  배경이
될 상황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1. 유다 지파의 승리(1:1-20)
   하나님의 신탁에 의거(1, 2절), 제일 먼저 유다 지파가 시므온 지파와 더불어 가나
안 땅으로 올라가 가나안인들을 쳐부수고(3-7절) 유다와 시므온에게 주어진 분깃을 차
지하는 장면이다(8-20절).  여기서 본서 기자는 유다 지파를 승리로 이끈  두  인물을
강조하고 있는데 곧 믿음의 용사 갈렙과 옷니엘이다(11-15절).  그들의  활약은  특히
헤브론과 드빌 정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유다  지파가
정복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몇 가지 요인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  이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유다 지파의 정복 사업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신탁에
의하여 이들이 맨 먼저 가나안 징벌에 나서게 된 점부터 시작하여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들을 그들의 손에 붙이시며(4절) 모든 전투에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꼐  하셨다(19
절)는 점 등은 모두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이것은 역으로 말하면 유다 지파
는 단지 자신의 분깃을 차지하기 위한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그들의 정복 사역을 곧
성전(聖戰)으로 간주하고 철저한 믿음과 사명감으로 정복 사업을 수행했다는 뜻이  된
다.
 (2) 유다 지파는 철저한 순종으로 성전(聖戰)을 치루었다는 점이다.  성전에  있어서
승리의 관건(關鍵)은 여호와께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으며(출 14:14 ; 삼상 18:17)
병력의 수효나 무기의 우열에 구애되지 않는다(삿 7장 ; 삼상 14:6).  아마 유다 지파
는 분명히 이를 확신하였기 때문에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전적
순종하였을 것이다(2절).
 (3) 유다 지파는 지혜로왔을 뿐만 아니라 겸손하였다는 점이다.  첫째는 자기 지파보
다 훨씬 열세(劣勢)한 시므온 지파와 협력을 구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고(3,  17절),
둘째는 겐 족속의 유입을 그대로 잘 수용했다는 점(16절)에서 그러하다.
 (4) 유다 지파에는 갈렙과 같은 우수항 지도자가 있었다는 점이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 각 지파 간에 있던 가장 큰 문제는 여호수아를 대신할    강력한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다 지파에는 다행이 갈렙이 있어서 그 빈자리를 메꿀  수
있었다(12절).  특히 탁월한 신앙심을 발휘했던 갈렙은 이미 85세 이상의  노장이었으
나(수 14:10-12) 지도자 역할을 훌륭히 했던 것이다.  온 무리가 모세의 명대로  갈렙
에게 헤브론을 주는 것에 마음이 일치할 수 있엇던 것도 바로 이  때문임이    분명하다
(20절).  이처럼 신앙을 유지 성장시키고 민족 공동체나 신안 공동체를 하나로 집결시
키는 데 있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위임을 받은 '지도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한편 본문 후반부에는 단 한번 유다 지파의 실패가 언급되고 있다(19절).  그것은 곧
저들이 철병거를 보유하고 있던 골짜기 거민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
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산지 거민들을 다 쫓아내었던 유다 지파가  이
처럼 유독 철병거만을 두려워하였다는 것은 결국 불신앙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즉 저들은 가나안족의 막강한 무기를 보는 순간, 일시적이나마 하나님의 능력을 망각,
인간적인 두려움에 사로 잡혔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뜻아니한 어려움에    직면하면
곧잘 절망하고 낙심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성도는 더욱더 권능자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분은 당신을 의지하는 자를 결단코 내치지 않으신다.  "내가  사
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
이라"(시 23:4)고 노래한 시편 기자의 신앙 !  바로 이것이야 말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견지해야 할 우리의 마땅한 자세이다.

   본장에 기록된 가나안 정복 사건의 발생 시기 문제 - 본장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
에'라는 서문구로 시작된다(1절).  이것은 여호수아서가 '모세가 죽은 후에'(수  1:1)
로 시작하여 모세 사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사기가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의 역사를 다룬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2:6-9은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의 역사를 다룬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2:6-9은 여호수아의 죽음에  대
하여 다시 언급하고 있어서 그 이전의 가나안 정복 사건이 여호수아 때에 일어난 일을
회고하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래서 학자들 간에는 본장에 기록된 가나안 정복  사
건이 여호수아 죽음 이후에 일어난 것인가 아니면 그 이전에 일어난 것인가에  대하여
서로 엇갈린 견해들을 보이고 있다.  이제 그 견해들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여호수아의 죽음 이전의 사건으로 보는 견해(A.C. Hervey) : 이는 본서  1:1-2:5
에 기록된 정복 기사의 내용이 여호수아 15장 등에 기록된 정복 기사와 매우 유사하다
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참고로 본장의 기사와 여호수아서의 내용을 서로  비교하
여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정복  기사  내용

   헤드본과 드빌의 정복 기사         1:10 - 15, 20          15:13 - 19

  베냐민의 예루살렘 정복 실패         1:21              15:63

므낫세의 블레셋 지역 정복 실패         1:27              17:11 - 13

에브라임의 게셀 정복 실패         1:29              16:10


 위의 도표를 통해서 볼 때 1절에서 '여호수아는 죽은 후에'라는 서론구는 그 다음 내
용(1:1-2:5)과는 일견 아무 관계가 없는 듯이 보인다.  때문에 본 견해를 표방하는 자
들은 주장하기를 이는 다만 사사기 전체의 상황과 배경에 대한 총괄적인 서론으로  후
대에 편집자가 첨가한 표현이라 한다.
 (2)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의 사건으로 보는 견해(Keil,  Goslinga,  Matthew  Henry,
J.P. Millar : 카일(Keil)은 많은 학자들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점을 들어 본
장의 정복 기사가 여호수아 죽음 이후의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까)여호수아 10:3,
18-26에서는 여호수아가 예루살렘을 불사르는 장면이 나타나 있다는 점.   (다)헤브론
과 드빌을 여호수아가 정복하긴 했으나 조직적인 통치 기구가 없는 이스라엘은 여호수
아가 죽은 후에 이 성읍들을 곧 재탈환 당했다는 점.  (따)당시에 가나안들이  철병거
를 가지고 있어서(19절) 쉽게 그 지역을 장악할 수 없다는 점.  (마)여호수아  13:1-7
에서 미정복 상태로 남아 있던 성읍들이 본장에서는 정복했다는 점 등이다.
 이상의 두 가지 견해 중에서 오늘날 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후자이다.  왜냐하면 본장의 1절은 '그리고'라는 뜻의 히브리어 접속사 '와우'(*  )로
계속하여 연결되어 있어서 1절의 기록과 이후의 사건들이 서로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
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위의 도표에 나타난 것처럼 여호수아서와  사
사기의    기록은 내용에 있어서는 유사하지만 여호수아서는 한 지도자 아래 각  지파가
연합하여 정복 사업을 실시하였으나 사사기는 각 지파별로 따로 시행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 점에서 엄연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참작,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의 가나안 정복 사업을 정리
해 보면 다음 몇 가지 점에서 크게 대조된다.  첫째로 여호수아서의 정복은    원칙상의
정복, 또는 표면상의 정복이나 사사기의 것은 구체적이고 세부적이다.  둘째,  여호수
아서의 정복은 강력한 지도자 아래서 수행되고 있지만 사사기의 것은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셋째, 여호수아서의 정복은 이스라엘 전체에 의해 수행되고 있
으나 사사기의 그것은 뚜렷한 구심점이나 응집력이 없이 각 지파별로  따로    시행되었
다.  넷째, 여호수아서의 정복은 승리로 장식되고 있으나 사사기에서는  패배로  끝난
다.  이로 볼 때 사사기 1:1-2:5의 기사는 분명히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의    사건임이
분명하다.

   빙폐 (聘幣)와 빙물(聘物) - 고대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 중에는 '모하르'(*     )
라는 풍습이 있다.  '모하르'란 말은 '결혼 지참금'을 뜻하는 말로서 '아내를 얻기 위
해 흥정하다'또는 '결혼하다'라는 동사 '마하르'(*     )에서 파생되었다.개역 성경에
서는 이 모하르가 '입물'(창 34:12), '빙폐'(출 22:16), 또는 '폐백'(삼상 18:25)  등
으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이 모하르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다.  하나는 아버지가  시
집가는 딸에게 주는 결혼 예물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처녀를 아내로 데려올 때 그 장
인에게 남자가 치루는 지불 대금(代金)이다.   개역 성경에서는 전자를 빙물이라고 하
고 후자를 빙폐라고 번역했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신부인 딸에게 빙물로서 여종을  주었으며(창  16:1  ;    24:61  ;
29:24, 29) 이 여종에 대하여 남편들은 아무런 지배권도 없었다.  라반의 딸들이 아버
지가 자신들에게 줄 돈을 다 써버렸다고 해서 불평했는데 이것은 '빙물'에 관한  것이
다(창 31:15).  이외에 샘물이나 성읍을 빙물로 주기로 했다(수  15:18,  19  ;  왕상
9:16).
 한편 결혼을 앞둔 남자는 돈 대신에 노동의 봉사로서 '빙폐'를 대신하는 예도 있었다
(창 29:15-30).    그러나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데려올 때에는 빙폐의 일례로 예물을
그 가족들에게 주었다(창 24:59).  한편 옷니엘의 경우에는 드빌 전투의 업적으로 '빙
폐'를 삼았고(11-13절), 악사는 '샘'으로 '빙물'을 삼았다(14, 15절).  이것은 다윗과
미갈의 관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삼상 18:25-27).

     2. 다른 지파들의 실패(1:21-36)
   앞서 유다, 시므온 지파가 가나안 정벌에 성공한 것과는 달리 베냐민, 므낫세,  에
브라임, 스블론, 아셀, 납달리, 단 지파 등이 가나안 정복에 실패한 것과 그로 말미암
은 가나안 원주민들과의 혼합 경위를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본문  중에는
요셉 족속이 믿음으로 벧엘 정복에 성공한 기사도 포함되어 있다(22-26절).    이  벧엘
정복 기사는 유다 지파와 같이 믿음으로 가나안 정복 사업에 나섰더라면 다른  지파들
도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정벌에 성공하였을 것임을 시사해 준다.  그러
나 단 한번의 벧엘 정복 이외의 본문에 나타나는 지파들은 모두 자신의 분깃을 차지하
는 데 실패하고 만다.
 한편 이러한 실패의 결과 저들은 중요한 양상을 초래하고 마는데 이를  정리해  보면
곧 다음과 같다.
 (1) 전반적인 가나안 정벌에는 실패했으나 부분별로 각 지역의 주도권을 잡은 지파들
이 있는데 요셉 족속, 즉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 그리고 스불론 지파이다(22-30절).
게다가 요셉 족속은 점차 강성하여짐에 따라서 자신들의 영토 내에 있는 가나안인들을
종으로 사역시키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단 지역에 있는 가나안인들까지도 사역을 시키
게 된다(35절).    그러나 요셉 족속의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하고 좀더 현명하였다면 그
들을 사역 시켜서 얻는 이익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가나안인들을 철저히 진멸하여야'
(신 7:2)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남긴 가나안인들은 그들 가운데 떨어진  죄악의
씨앗이 되고 이러한 죄악의 번식력은 막강하여 장차 그들을 잠식(蠶食)시켜 버릴 것이
기 때문이다.
 (2) 가나안 정벌에 실패하므로서 가나안인들과 타협하여 그들 가운데 거해야 했던 지
파들에는 아셀과 납달리 지파가 있다.  이들 지파는 가나인들을 종으로  부리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숫적인 열세 때문에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
다.
 (3) 단 지파의 경우는 오히려 가나안인들에게 쫓겨 북쪽으로 이주하거나 산지로 피하
지 않으면 안 되었다(34절).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 족속의  강성함으로  그
지역의 주도권은 이스라엘이 여전히 갖고 있었다(35, 36절).
 이와 같이 각 지파들이 실패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음 위에 굳건하게
서지 않을 때 오히려 사단의 세력이 득세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세우지  못하도
록 방배하게 됨을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성도들을 각종 죄악으로    잠식시키
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파수꾼이 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뜬눈으로
밤을 밝히듯 성도들은 자신의 믿음을 수호하기 위하여 항상 영적으로 각성해 있지  않
으면 안 될 것이다.

   약속의 땅에 참여 한 이방인 - 본장에는 이방 종족의 출신이거나 이방인들로서  이
스라엘 지파에 소속하여 약속의 땅에 정착한 사람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자들이  모
세 장자의 자손인 겐 족속으로서 그들은 유다 백성들과 함께 아랏 남방에서 살게 되었
을 뿐만 아니라(16절) 이후 이스라엘 사회의 중요한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다(4:11).
그 다음에는 특정한 인물로 밝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벧엘 정탐꾼을 도와 준  연유로
그 가족과 함께 구원을 받은 벧엘 거민을 들 수 있다(22-26절).  이 이방인은  가나안
정탐시의 기생 라합과 동일하게 진멸속에서 구원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라  하겠다(수
2:8-11).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방인들이 약속의 땅에 참여한 거나 구원받은  점
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 몇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구별은 인종적인 구별이 아니라 여호와께 대한 신앙의 여
부에 따른 구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
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설교했던
것이다.
 (2)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여부를 시험받아야 한다는 것이
다.  구약 시대에는 '할례'라는 외형적인 의식을 이방인들에게 요구했었다(창 17:12).
그 대표적인 예로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의 누이 디나를 범한 세겜족들에게 할례를  요
구한 사건을 들 수 있다(창 34:14-7).  그러나 여자의 경우에는 기생 라합과 같이  믿
음의 여부를 보이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며 그분의 복을 누릴 수 있
었다(갈 3:14).    즉, 그 믿음만으로 '새 이스라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갈 3:7).
 (3) 따라서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 체제는 폐쇄 체제가 아니라 어느 정도 개방 체제였
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강한  자부심이    있었으나
이방인들도 일정 조건을 갖추게 되면 히브리인과 동일한 특권과 의무, 그리고  봉사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가나안 정복의 실패와 그 교훈 -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이
정복에 실패한 가나안 도성들은 모두 전략, 교통, 경제, 문화 등의 중심지일 뿐만  아
니라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 성읍들의 지병에서 알 수 있다.  예
를 들면 벧세메스는 '태양의 집', 벧아낫은 '아낫 여신의 집', 헤레스  산은  '태양의
산' 등의 뜻이다(33, 35절).  따라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실패는 단순히 그  땅을
점령하는 데 실패한 것이 아니라 우상을 타파하는 성전(聖戰)에 실패한  것이라  하겠
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하는 가나안 땅에  제사장  나라를
건설하는 데 실패함으로서, 장차 이 땅을 본거지로 하여 온 인류에게 참 종교를  전파하려던 하나님의 계획(출 19:6)은 중대차한 차질을 빚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가나안땅에 남아 있던 우상 숭배 죄악의 뿌리가 급기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타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어 버렸기 때문이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인들을 진멸하고 그들의 흔적을 호리(毫釐)라도 남김없이 제거하도록 명령하셨던 것(출 23:33 ; 신 7:2)은 바로 이러한  사태를 우려해서였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명심하여야 할 점은 이와 같은  명령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란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모두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는 철저한 믿음의 반석 위에 굳게 서야 할  것이다.(골 3:5, 6 ; 살전 5:22).

 

 

사사기 연구           < 총신대원 김의원 교수 강의 >

A.역사적인 배경과 문학적인 구도

  1.문학적 구도
사사기 전체의 구도는 서론이 두 개를 가지고있고, 부록이 두 개 존재하고 있다. 그 사이에 큰 (  )이 있다.
사사기 1장1절을 지나고 곧 바로 나오는 것이 누가 먼저 정복하러 올라가느냐하는 질문이 나온다. 그런데 유다가 올라가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이 출발점이고 맨 마지막을 보면 누가 베냐민을 치러 먼저 올라가야 됩니까? 유다가 가라는 말이 나온다. 성경전체구도
속에서는 전통적인 역사이해 속에 아브라함,모세,야곱과 연걸되는 큰 흐름 가운데 특별히 창세기 마지막에 보면 야곱의 예언 속에 유다의 위치가 잘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전체의 사사기 구도는 그 다음에 나오는 사무엘서부터 나오는 다윗왕조에 대한 연결된 부분
이다. 그 때문에 사사기가 일종에 다윗왕조를 합법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선전에 대한 해석인가? 아니면 역사의 흐름인가에 대한 많은 신학자들간의 논란이 있다. 그러나 사사기 전체에 주어진 이야기 속에서는 유다가 굉장히 독립적인 위치 속에서 확대되어 있는 것만
은 사실이다.
사사기는 크게 세개로 나누어 진다. A파타와, B파트와, C파트이다.
위 부분은 1:1 - 2:5까지이다. 첫번ㅉ 서론부분에서 거론되는 이야기는 두가지이다. 이스라엘이 정복을 실ㅍ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여호와가 가나안을 쫒아내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한 이유로서 설명되어 있다.
2:6 - 3:6까지 두번째 서론이다. 첫번째 나타난 결과는 이스라엘이 배교했다 라고 한다. 그 배교의 결과로 여호와가 쫒아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첫번째는 배교문제이고 두번째는 그 결과로 정복실패이다. 둘 다 2번의 이야기와 같은 문제이다. 여호와께서 가나
안족을 쫒아내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로 가나안 족속과 이스라엘이 공존했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다음 부록의 이야기를 보자. 부록은 17:1 - 18:31까지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종교적 타락이고 여기서 제거되는 지파는 단지파이다. 종교적 혼란을 거치면서 단지파가 제거되고 600명의 군사가 남겨진다.
이와 반면에 19: - 21:까지의 두번ㅉ 부록에서는 윤리적 타락을 가지고 있고 여기서 제거되는 것은 베냐민 지파이다. 베냐민 지파도 마지막에 600명의 군사가 남았다. 그리고 이 부록을 다시 한번 면밀히 보면 양쪽이 서로 바란스를 가지고 있다. 천번째 부록의 작
은 두번ㅉ에서는 레위인이 유다땅에서 단과 베냐민의 경계를 넘어와서 에브라임으로 지나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이와 반면에 두번째 부록에서는 레위인이 에브라임땅에서 단과 베냐민경계를 넘어서 유다로 오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맺고 있다.
학자에 따라서 논란이 되어 있으나 상당히 재미난 이야기로서는 여기 부록이 1.2가 있지만 옛날 마소라의 분류법에 의하면 마소라성경에 따라 유대인의 전통 특별히 요세프스의 전통에 따르면 욥기가 사사기의 부록으로 나온다. 결과적으로 사사기 속에 있는 부록
이 일종에 세계영역 속에서 전부 다 나중에 들어오는 다윗 왕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중에 요부분을 다루면서 확대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거론되는 큰 윤곽은 일종의 문학적인 분석이다. 그 문장의 배열과 단어의 사용들을 보았을 때 면밀하게 대칭관계를 이
루고 있다.
감히 우리의 고민은 중간 부분에서 3:7에서부터 16:36절까지 이다. 이 세 부분으로 나눈 것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공감하고 있다. 단락을 나누는데 있엉서는 논란을 좀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공부하는 그 속에서는 여기 7개의 칸을 만들어 놓았다.
3:7-11까지, 여기서 거론된 것은 옷니엘이다. 사사기의 처음 사사는 옷니엘이고 마지막은 사무엘이다. 이 옷니엘은 앞으로 주어지는 일종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이쪽에서 주어지는 모델은 계속 4개의 사이클이 계속 반복된다. 죄를 짖고 징계를 당하고 간구를하면
구원함에 이르는 4개의 이야기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 일종의 이 4개의 이야기 ,옷니엘 이야기를 모델로 보는 것에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왜나하면 이 옷니엘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여호수아서에 있는 기록을 다시 확대하고 있다. 그럼 여호수아에 있는 기록하고 사
사기에 있는 기록하고 같다. 그럼 왜 성경 저자가 그것을 픽업햇는가? 그것은 신학적문제가 뒤따르고 있다. 그다음 나오는 이야기속에서는 조금 혹대해서 그린 그림이다.
첫번째 나오는 것이 옷니엘이다. 3:12-30까지 맨처음 거론된 사람이 애옷이다. 두번째는 4:1-5:31까지는 드보라, 6:1-8:32까지는 기드온, 8:33-9:57은 아비멜렉, 10:6-12:7까지 입다, 13:1-16:31은 삼손,이것은 모두 메이저의 책에서 인용된 것이다. 대사사들만 6
개 단락으로  나온다. 6개의 부분들은 굉장히 확대된 것들이다.
 이 에웃의 이야기와 삼손의 이야기 사이에는 상당한 부분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에웃은 혼자 일을 지탱하고 있다. 혼자 적군에 들어가서 일을 진행하고 있고 삼손도 혼자 일을 진행한다. 일종의 민족에 영웅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 다음에 이 에웃은 동편에서 오는 원수들과 싸운다. 삼손은 서편의 원수들과 싸운다.
그리고 에웃은 베냐민지파 사람으로 되어 있고, 삼손은 단지파이다. 어느면에서 보면 서로 대칭관계를 가지고 있다.
드보라의 경우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여자에게 의존하고 있다. 드보라의 이야기를 죽 따라가보면 거기 시스라와 바락의 전투가 있고 많은 이야기가 나오지만 결국은 여자의 손에 의하여 전쟁이 끝난다.
입다의 경우는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던 첩의 아들이고,현재 우리 사회로 본다면 사회에 끼지 못한 밖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당시 문화권으로 보면 여자나 입다의 위치는 어떻게 보면 같은 사회적인 신분을 가지고 있다. 이미 기존사회권 속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다. 기득권 밖에 있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그다음 중간의 두 개, 기드온과 아비멜렉은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기드온은 바알을 공격하고 나오고, 즉 바알을 ㄲ뜨림으로 일이 시작되어 있고, 그 다음 여기서는 여호와 만이 왕이라 하는데 반하여, 아비멜렉은 자기 자신이 왕이라 한다. 지금 여기서 거
론되는 기드온과 아비멜렉 속에서 공통점은 바알 숭배와 여호와 종교 사이에 대결이다. 바알과 여호와의 왕권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기드온의 같은 경우는 전쟁에 승리한 이후에 여호와 만이 왕이라 하고 아비멜렉은 아버지의 여운 속에서 자기가 왕으로 세워진 기록
이 나온다. 요 부분이 대칭된다.
성경전체 앞에서 모델을 제시하고 그 모델을 따라서 양쪽의  문학적인 큰 구도 속에서 중심부로 축약해 놓고 보니까 사사기 전체가 왕권에 관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 가나안 땅에 바알 왕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하여 여호와의 왕권이 사사기 이전의 시
대부터 암시되어 나오고 그리고 사사기가 끝맺고 나서 그 다음에 다윗으로 연결이 되는 큰 왕권의 흐름 속에서 성경저자의 구도를 읽을 수 있다.
물론 이 방법을 취하지 않는 여러가지의 학자들의 이야기도 있다. 여기 7개의 구도를 전부 전부 독립적 영역으로 놓고 보아버리면 결과적으로 중심은 기드온의 이야기가 나온다. 또 다시 어떤 학자는 기드온의 이야기 속에 들어가서 다시 대칭관계를 또 만들엉가직
다시 그 안에서 끄집어 나오는데 사사기 전체로 그 핵심ㅁ을 이해하기는 좀 어럽다. 그러나 우리가 사사기 전체를 이해할 때는 온니엘의 경우를 하나의 모델로 ㅏ해서 전체의 구조를 본다면 여호와의 왕권으로 밀접하게 연결된 사실들을 읽을 수 있다.

이제 이것을 가지고 역사적인 배경을 먼저 논한 다음에 본문 자체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현재 "네온디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잘 설명되어 있다.  그기에 몇개의 사실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사기를 이해하는데 여러가지 해석들이 가능하다. 여기 성경의 안목을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사람들과 보수주의 사람들과 굉장한 차이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잠깐 언급하고 넘어갈 것은 많은 성경학자들이 사사기 속에 있는 주제를 신명기적인, 신명기관점에 의한 하나의 기사라고 하는 점에서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사사기 내용을 보면 여호와꼐 순종했을 때 안정과 평안이 있었고 불순종했을 때 거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부분들이 많이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 언급되는 죄, 징계, 간구, 구원이라는  모델이 반복되는 이런 신명기에 주어져있는 언약적인 표현들이다.
 문제는 자유주의자와의 차이는 신명기 연대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 자유주의 자들은 요시아 ㄸ 621년 성전을 수축하다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서 그 당대문헌으로 해석하는 것이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그러나 최근에 와서구전이 있다가 나중에 기록
된 것으로 보는 학설이 우세하다.
그러나 우리 복음주의 쪽에서는 여기서 거론되는 신명기적 이야기는 이미 모세 ㄸ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주어졌고 그 말씀의 관점 속에서 이미 거론된 역사적인 사실을 신명기가 애기하는 관점 위에서 기록된다고 하는 점에서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기록했던 사람들은 백성들이 당하는 환란은 하나님과의 맺은 언약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 온 이후로 고통을 당한다고 하는 점이 가르치는 중요한 내용들이다.
다음에 사사기의 역사적인 하나의 흐름은 신명기적인 관점을 이해할 수 있고, 두번ㅉ로는 여기서 주된 이야기는 사사들이다. 사사의 기능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군사 지도자이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군대 사령관들로 보는 것은 적합한 것이다.
또 하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사사들은 전 국가를 다스리지 않았다. 왕권에 과 한 개념이 신명기 17장에 언급되어 있는데 거기에 주어진 왕권은 세습 왕권이다. 이미 신명기이ㅔ 예언된 부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스스로 왕이라고 했지만 세습왕권은 주어지지 않
았다. 그리고 여기에 왕권은 백성 전체를 다스리지 않은 지역 단위의 사사들이다. 그 때문에 사사들이 사사들이 있는 기간들 즉 치리한 기간들을 전부 모아놓고 보면 굉장히 긴 시간들이다. 그러나 사사들이 각 다른 지역에서 동일한 시간에 일했기 때문에 상당한 연
대 결정에 장점ㅁ도 있지만 또 어려움을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다. 예를 들면 삼손과 사무엘은 동 시기의 사람이다.
사사기를 둘러쌓고 있는 여러가지 견해 중에 먼저 정복에 관한 견해가 3개 있다.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 온 설에는 정복설이 있고, 이주설이 있고, 혁명설이 있다. 왜 이런 학설들이 나오게 되었는가하면 구약에서 제일 어려운 분야가 여리고 정복이다. 복음주의는 성경자체에 내증을 인정하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기 때문에 성경자
체에서 말해 준 15세기 출애급을 증명은 되지 안는다 하더라도 성경 자체가 말하므로 그대로 따른다. 자유주의자는 성경을 하나의 책으로 보기 때문에 일종의 외적인 검증을 통해야 된다 . 문제는 외적인 검증을 하다보니 고고학이 성경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데 고고학에서 여리고의 정복에 관한 이야기는 검증되지 안는다. 자세한 것은 '네온디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라.읽어 볼 필요가 있다. 제일 어려운 점은 여리고의 불탄 흔적이 두 개가 있는데, 19세기 이전에 불탄 흔적이 있고 12세게에 불탄 흔적이 있다
(BC). 문제는 전통적인 연대를 15세기를 취하던 13세기를 취하던 결과적응로 여리고의 불탄 흔적에서는 연결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많은 학자들의 출발점은 정복기사는 없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을 발전시키다보니 출애급도 역사적인 사건이 아닌 것으로 이야기
하게 된다. 그 때문에 성경에 말한 기록은 후대에 자유로운 산학자들은 후대 신학화 된 과정 속에서 편집된 기록오로 보기 ㄸ문에 성경 속에 있는 많은 역사적인 데이타를 말할 때다른 학설이 나오게 되어있다.
첫번째 정복설은 성경 자체에서 말하는 것을 그대로 따른는 것이다. 이스라엘 ㅏ백성들이 일련의 군사적인 공격으로 가나안의 주요 도시를 점령했고 점령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주변의 땅을 점령했다고 본다. 성겨에 따르면 7년간의 전투이다. 이같은 견해는
라기스나 벧엘 하솔과 같은 도시가 정복된다는 점에서  많은 입증이 된다. 여기서 파괴된 흔적도 15세기를 취하지 않고 13세기에 굉장히 연결되어 있다. 복음주의 중 일부 키친 같은 사람은 13세기 고고학 연대를 가져와서 13세기를 취하는 겅우도 있다. 13세기를 취
했던 이는 고고학적인 결과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사기를 다루는 데는 이 정복설에 근거해서 성경 자체가 말하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거기 나타난 배경과 신학적인 메세지를 함께 읽어나가는 방법이다.
그러나 앞으로 두 개의 견해는 으리가 위하지 않는 견해에 속한다. 그중에 첫번째 견해가 이주설이다. 특별히 알트와 노트의 견해이다.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지금 이스라엘로 알려진 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안ㄴㅎ았다고 한다. 다시말하면 12지파로 언급된
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이스라엘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견해를 취한다. 굉장히 작은 그룹 내지는 씨족 즉 작은 단위들이 목축을 이끌고 서서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학설의 추종자들은 이스라엘로 알려진 12지파의 동맹도부족 동맹
또는 지파동맹으로 번역한다. 동맹도 1200년 겅에 형성 된 것으로 본다. 즉 그들에게는 공통된 신학, 즉그들의 말에 의하면 요셉지파가 따로 있다 하고 모세의 이야기 또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여러개의 이야기를 가진 이런 그룸들이 평화롭게 목초지를 따라서 가나
안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들이 나중에 공통적인 종교로 말미암아서 지파가 연합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세번ㅉ의 학설을 혁명설이다. 일종의 사회변혁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으로 말한다. ㅏ백성들은 주로 농민들이었고 가나안 족속의 배경을 가졌지만 그땅에 사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거러므로 없는 자들이 구룹으로 뭉쳐서 나중에 자기들을
다스리는 군주들을 무너뜨리고 혁명함으로 말미암아서 권력으로 쥔 것으로 본다. 대표적인 학자가 갇 월드이다. 일종의 사회학적인 모델을 구성할려고 헀다. 일종의 이스랑넬의 농민과 가나안의 귀족성과의 개급투쟁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최근에 많은 공격을 당하
게 되고 신빙성이 없다.
이렇게 이주설이나 혁명설로 바라보게 되면 종교의 발달사 속에 여화와의 종교가 ㅏ생겨나는 것으로 외곡되게 된다.

2.다음은 그당시 역사적인 배후에 대하여 알아 보자.
출애급을 1446년으로 본다면 왕상6:1에 보면 솔로몬 제위 4년째 되든 해  성전건축이 시작 ㄷ다고 언급한다. 그년도가 996이다(BC). 거기에 출애급한지 480년 되던 해라 말한다. 그러면 1446년이 된다. 1446년을 출발점으로 삼고 여기에 40년 광야생활이 있고 정복
이 시작되었던 1406년경이 된다. 곧 바로 정복시대가 주어지고 그다음 사사기로 이어지기 ㄸ문에 일종의 14세기에서 13세기에는 그 당대 지역적인 주변에 역사적인 배경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지금 가나안땅에 많은 지역은 불레셋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불레셋에 대하여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일종의 해양민족으로 보고있다(See Piples). 15세기 안팍에 에이게 바다에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이주를한다. 일부가 타키로 넘어가서 15세기에 터키 남부에 있었던 우갓이란 동네를 멸망시켰고 그 멸망된 우갓 동네가 발굴되어서 많은 자료를 알려주고 잇다. 15세기 문헌인데 이미 알파벧을 가지고 있고 성경의 시편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많은 것들이 언급되어 있다. 이미 15세기에 일부는 애급으로 넘어가서 18왕조가 출애급 왕조가 되고 그 다음 19왕조 ㄸ  해양민족에 공경을 받아서 빠른시간에 멸망되었다. 그러나 이 해양민족을 쫒겨냈던 쫒겨낸 일부가 이 불레셋 가나안 쪽에 점령된 것으로 보고 또 일부는 터키쪽에서 넘어오서 이쪽에 같이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 불레셋은 가나
안의 본래 족속이 아니다. 외부족속이다. 이들이 살고 있는 주변에 여기 아랍 의 터키 쪽에서는 키타잇 족속(햇족속)이 있었고 티그리스 후편에  미카인 왕국이 있다.성경은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다음에 애급제국이 있다. 13세기에 애급과 햇족속이 큰전투를 이룬다. 양쪽 다 승리했다고 비문에 서로 써놓았다.
당시에는 주변에 역사들을 가지고 있다. 부분적으로 다룬다면 첫번ㅉ로 메소포다미아 지방이다. 비벨론제국은 고 바벨론제국의 멸망이 1595년(주전)이다. 고 바벨론제국이 16세기에 들어 오면서 캇족에 의하여 멸망된 이후에 1150년까지 칵족이 중부와 하부 메소포
다미아를 점령하고 있엇다. 바벨론 문화로 봐서는 일종의 암흑기로 본다. 독자적ㄷ인 문화가 있지 않고 바벨론 문화를 가지고 있는 암흑기였다. 그다음 캇족 위에는 앗수르를 중심으로 해서 앗시리아가 스스히 일어나 제국의 깃틀을 만들고 있었다. 특별히 앗시라아가
세계무대에 얼굴을 내놓게 될 때는 앗수르 발릿트라는 왕에서 부터 시작이 되었다. 1365-1330년 사이에 제위했떤 앗수르 우발리티에서부터 앗시리아는 세계무대에 얼굴을 나타내게 된다.
이 시기는 여호수아가 정복을 끝내고 사사 시대가 막 시작할 무렵이였다. 그리고 남쪽에는 캇족속이 있었고 서편에 니타니왕국이 존재하는 중간에 앗시리아가 서서히 깃틀을 마련하게 된다. 그때문에 남쪽의 캇족속과 왼쪽의 니타니의어려움 때문에 가나안 땅에 대
하여는 일체 관심을 갖지 못한 상태에 잇었다. 그다음에 햇쪽은 강대세계의 두번째 강대국이었다. 애급과 비등하게 큰 왕국이고 햇족이 세계제국 세게 무대에서 큰 영향력을 나타날 때는 수페루리이우마스 년대는 1380년-1346년이다. 스펠루리우마스 ㄸ는 시리아를 공
격하고 비불로스에 이를 정도의 북쪽 시리아와 그다음에 북쪽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된다. 그는 애급의 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쪽 가나안 땅까지는 내려가지 않고 계속해서 동쪽으로는 미타이와 앗시리아 때문에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애급에서는 사사시대은 19왕조와 20왕조에 의하여 다스려 진 것으로 알고 있다.아마르나 서신에 보면 가나안 애급의 통치령이였지만 애급왕조는 이 가나안 도시에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문헌에서 읽을 수 있다. 특별히 가나안 땅을 크게 점령했던 사람으
로서는 19왕조 ㅅ티1세이다. 그가 가나안 22성을 점령하고 많은 비문에 많은 도시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의 비문 속에는 이스르엘 북쪽 갈릴리 지방까지 점령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다음 중요한 사람으로는 메레네타 13세기 사람이다. 1236년 - 1223년 팔레스틴에 한번 원정했다. 제위5년째 팔레스틴에 한번 원정하고 이스라엘을 격퇴햇다고 기록하고 그의 비문 속에 점령한 이야기가 언급되는데  성경 이외에 이스라엘이란 글자가 처음 나온
부분이다.  자기가 점령해서 이스라엘이 황페하게 되었다고 되어있다. 이 비문을 가지고 해석에 따라서 13세기 또는 15세기 출애급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메레네타 비문은 15세기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할 때 가장 중요한 흔적으로 본다.왜냐하면 13세기에 메레
네타가 이스라엘을 점령했을 때에 이스라엘은 그 때 가나안에 정착했었고 정착된 그 민족을 침입함으로 승리했다는 기사이다. 그러나 13세기에 출애급을 따지면 13세기 정착하자마자 아직 나라도 형성되지 않았는데 메레네타가 가서 정복했다는 말은 조금 앞뒤가 않맞
는다. 그래서 이 메레네타 비문을 중심해서 많은 논란들을 가지고 있다.
그다음에 마지막으로는 시리아와 팔레스틴지역에 이 부분을 잠간 살필 펼요가 있다.
온니엘이 사사로 일한 사기에 햇왕국은 북쪽 시리아와 심지어는 렐바논까지 자기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이러한 이야기는 시리야왕국이 있는 많은 작은 도시들이 이런 ㄴ히타이티의 공격에 박아 애급왕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많이 언급이 되어있다. 그때
시리아의 많은 왕국들은 그런 정복 앞에서 애급을 따르던지 아니면 마카이 왕국 속에서 군사적인 도움을 받아서 햇왕국과 대결하려던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다음에 팔레스틴 땅에서 많은 세력을 떨쳤던 민족으로서는 불레셋이 있다. 불레셋은 특별히 해안지역에 특별히 5개 도시에 특별히 에스글로 또는 가사를 중심하여 해안지방과 일부는 북쪽 갈릴리 지방에 모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속에 사사기와 여호수아
를 읽을 때에 많은 배경을 이해하지 못할 경우에 굉장히 혼란을 자초하는 것 중에 어떤 부분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점령했다라는 기사가 나와 있고 어떤 부분에 보면 아직 가나안 족을 다 밀어내지 못했다라고 하는 서로 상반된 이야기로 종종 바라보게 된
다. 어떤 사람들은 두개의 다른 전승과 편집 여러가지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그 당대에 지리적인 배경을 이해하면 상당히 많은 점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으 현재 땅을 가보면 지중해에서 굉장히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서보면 성경ㅇ에 골짜기라고 번역하는 지점
들이 있다. 성ㅇ경 영어번역에 보면 로 랜드라고 되어 있는데 일종의 작은 산들이다.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고지대 사람이 사는 이런 도시들을 중심적으로해서 집중적으로 공략을 한다.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 여기에 있는 유다산지로 해서 북쪽 높은 지대를 거의
다 점령한 것으로 본다.  많은 도시들이 이런 고산지에 있는 종종 전략적 도시라고 한다. 그래서 해안 평야쪽에 있는 것은 거의 점령하지 않았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도시 단면도를 바라보면 불레셋민족은 여기에 주로 있었고 이스라엘은 여기에 있는 것으로 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바로 뒤로 넘어가면 여리고가 있고 사해 수면은 지중해보다 400m나 낮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가면 다시 높은 산지 1200m이상되는 요단 동편에 현재 요르단에 상당히 많은 고지대가 나와 있다.
불레셋과 이스라엘이 같은땅에 공존할 수 있었고 서로 먹히고 먹히지 않았던 가장 큰 동기는 요 중간에  스펠라 산지로 보고 있다. 이 불레셋은 히타이족으로 말미암아 철기문화를 상당히 빨리 받아들인 것으로본다. 철기문화를 가진 철병거를 가지고 자기들의 무
기 시스탬을 ㅏ가지고는 이 스텔라 산지를 넘어가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청동기 문화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쉽게 철기문화를 대적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셩경에 보면 사울과 요나단만 킬이 있다는 표현이 나온다. 그래서 사사기나 사무엘의 글을 읽어면 양쪽의 군대가 와래동안 전쟁을 하지 못하고 대치되어
있는 상황이상당히 많이 나온다. 예를들면 골리앗이 사울의 군대를 칠 때도 며칠동안 계속 머물러 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이것은 스펠라가 아니고 건너갈 수 없는 깊은 골짜기로 본다.
성경저자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일단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약속대로 전략적인 모든 거점이 점령된 관점 속에서 성경 저자가 약속이 이미 성취되었다고 하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서 점령했다라고 하는 표현이 나오게 된다.그와 반면에 아직
많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거민들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완전히 점령된 상태는 아니다. 실재 그 점령은 다윗 때 가서야 완전히 점령이 된다. 그러므로 성경 기록 그 부분 속에서 기록하는 의도 속에서 정복했다라는 말과 아직 다 쫒아내지 목했다는
것과 반복되는 상황이지 서로 다른 어떤 소쓰가 모여져 있는 부분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3. 또 하나 살피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 땅의 주민들이다.
성경은 이스라엘 정복 이전에 종종 가나안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ㄸ에 따라서는 아모리 사람이라고도 표현한다. 아모리족도 가나안 땅에 살던 일부의 족속으로 되어있다. 특별히 많은 가나안 사람들은 이 해안지대와 요단계곡에 흩어 살았다고 본다. 특히 아
모리 사람들은 산악지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로 정복 전쟁에 싸웠던 민족은 아모리 족으로 전쟁에 많이 멸절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해안이나 평야지대에 살던 많은 가나안 족에 대해서는 그대로 남아있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팔레시타인은
가나안족과 아모리족 이외에도 인도계통의 아라아인들 또는 후리족들, 후리족들은 바벨론 북쪽지역에서 내려 온 사람들이다. 일종의 키가 큰 사람들인데  성경에는 거인들이 많이 나오는데 아마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리안 계통의 사람들이나 아
모리 또는 가나안과 비슷 전부 가나안화 문화권으로 형성되어 가는 것을 읽을 수가 있다.

4. 그들의 종교는 다음과 같다.
사사기 내에서 계속 문제점으로 백성들에 굉장히 큰 문제점으로 나오는데 가나안의 종교는 사사시대 때부터 바벨론 포로기까지 이스라엘 전체 삶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특별히 가나안족의 종교에 대하여는 최근에 발견된 우가리 언어토판  속에 굉장히 많은
것을 읽을 수 가 있다. 한ㄴ마디로 요약한다면 가나안 종교는 자연에 힘을 신적인 힘재와 행동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이다. 자연과 곧 신의 모습을 같이 보았다. 자연의 힘을 신적인 임재와 행동의 표현으로 보앗기 때문에 인간이 살아남고 번셩할려면 그 일을 감당하는
정확한 키를 찾아내서 적절한 제의로 그를 기뻐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일종의 다신교적 개념이다. 그들의 신화를 명백하게 알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리빙스톤이 쓴 {모세오경의 배경연구}라는 글에 보면 중간 부분에 상당히 많은 분량이 기록
되어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간단하게 묘사할 수 있다. 그들의 가장 큰 신은 '엘'신이다. '엘'은 가나안의 만신전의 주요한 신이고 엘신은 인간셰계에는 그렇게 관심이 없는 인격을 가지지 않는 어떤 어떤 초월된 신으로 말한다. 우리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적개념
이 아니고 어떤 자연의 능력 자체를 신격화한 개념들이다. '엘'신은 북쪽의 산지에 근원한 것으로 본다. 그 '엘'신의 아내는 '아세라'이고 그래서 성경의 '아세라'를 주로 목상으로 주로 표현하고 잇다. 나무로 깍아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 목상 아세라를 상징하고
제사가 행해지는 많은 산당에서 보인다. 이런 신들의 모습이 많으나 그중에 성경에 가장 많이 언급되고 그 당시에 가장 유명한 신으로 '바알'을 들 수 있다. '바알'이란 ㅏ말은 본래 주인이란 말이다. 즉 땅의 주인으로서 '바알'을 애기한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 바알
은 마리문헌이나 메소포타미아에 언급되고 있는 다간의 아들 '하닷'으로 보고 있다. 바벨론 신인 다간 신의 아들 곧 '하닷'과 같은 사람으로 같은 신으로 발전되어서 나중에 '다곤'이라 하엿다. 그래서 이 가나안 땅에 바벨론의 새로운 신이 소개됨으로 말미암아토착
적인 신의 개념과 어울러져서 더 확대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이 '바알'신화 속에다가 바벨론의 많은 신화 개념들이 어울러져서 크게 확대된 것으로 보게 된다. 그래서 이 '바알' 또는 ''타갓'으로 일컬어지는 비, 천둥, 번개를 농해서 자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묘사한
다. 그 이유는 특별히 농경문화 속에서 가나안의 농업이 전적으로 비에 의존했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하게 나타나 있다. 특별히 유목민족이었던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경문화권 속으로 들어가면서 그 단계로서는 간계가 잘 안되고 비가 옴으로써 농사가
되는 그런 구조 속에서 비를 내린다고 보는 '바알'에 대한 많은 유혹의 대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바알'이 있고 '바알'이 나중에는 신화가 발전되면서 '엘'신의 아내 '아세라'를 자기의 첩으로 삼는 예가 나온다. 거기서 '바아'과'아세라'가 함꼐 어울러져서 이야기가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특별히 '바알'이 '엘'신의 아내를 자기 찹으로 삼음으로 말미암아 '얌무'(물)과 싸워다가 마지막에 모투(죽음)에 의해서 '바알'이 죽게 된다. '바알'이 죽었다가 다시 여동생인 '아낫'에 의해서 살아나서 다시 성적 개념으로 확대가 된다. '바
알'로 여겨지는 '바알'이 비인데 비방울이 땅에 떨어지는 그 자체를 일종의 남자 신의 정액으로 간주해서 이 땅에 수정되어서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그런 종교적인 제의로 발전하게 된다. 그래서 가나안 종교는 이런 바알 신을 숭배하는 애기 속에서 남녀의 제의 즉
창남 창녀들이 종교제단에 많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주어진 여호와 종교와 가나안 종교의 큰 차이점은 중앙 성소의 개념이 나타나지 않는다. 바알은 필요한 곳에서 마다 다 섬김을 받는다. 이와 반면에 이스라엘은 장막을 중심으로 모든 일이 진행되고
그기에 몇가지 예외적인 것으로 여러개의 다른 제사장소들이 나오지만 주로 장막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처소가 이야기 되면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가나안신들은  중앙 성소개념이 없기 때문에 전부 특정한 골짜기나 또는 특정한 언덕마다 전부 산당들이 마련되어 있
다. 그래서 이 바알을 이야기 할ㄸ는 여러 개의 지역에 따라서 바알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성경에서는 바알을 복수로 쓴다. 우리 말들로 하면 '바알들'인데 예를들면 부올 지역에 있었던 바알제단을 '바알부올'이라 한다. 또는 '바알세붑' 많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다시말하면 바알이 하나가 아니고 많은 지역에서 각기 다른 바알과 연결되 신들을 섬겼던 이야기들을 보면서 가나안 땅에 신들을 바알들을 '바알신들'이라고 바라볼 수 있는 많은 배경들을 고고학적인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많은 신화와 제의 속에서 이스라엘 배경을 이해하기는 굉장히 많은 점을 가리켜 주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번성과 번영의 참된 신 여호와를 떠나서 주변의 가나안 신에게서 같은 축복을 비는 결과가 나온다. 특별히 아모스나 호세아서에 가면 복은 하나님
이 주시는데 그 복을 주시는 신이 바알인줄 알고 거기에 절하는 많은 내용이 나오는 것도 그들 머리 속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관정한다는 이야기를 하나님의 이름을 바알 속에서 찾는 그런 많은 이야기를 읽을 수가 있다. 이같은 사실은 신명기적인 안목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과의 언약이 깨뜨려졌고 결과적으로 배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게 되고 성경은 자주 건론된 이야기가 다른 신들을 음란하게 섬겼다는 관점 속에서 특별히 이 언약의 주변 관점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맺은 관게로서 종종 {메카포}로 즉 결혼관계로 묘사되어 있다. 언약도(메캐포-결혼관계) 하나님이 "내가 너희에게 남편이 된다"라고 하는 말을 통해서 이미 너희는 나에게만 충성을 요구하는데 실제로 백성들은 하나님이 아닌 바알들을 찾아감으로 말미암아서 언약이 파기되었던 그 모습들을 사사기에서 면밀
하게 읽어볼 수 있다. 이렇게 죄를 짖고 다음에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그들을 징게하게 되고 징계의 결과 속에서 다시 하나님께 돌아와서 다시 간구하게 되면 그들을 다시 사사를 내세워서 구원해 나가시는 많은 부분들을 밣혀 볼 수가 있다.
다음시간에는 본론으로 들어가서 1:1-3:6까지 하곘다.특별히 그 부분과 여호수아서 22: 이후와 비교해서 읽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후에 보면 여호수아의 죽음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두개의 다른 관점들이 언급되어 있다. 여호수아가 결과적으로 두 개의 결론을 맺고 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대로 받아서 사사기가 두 개의 서론으로 시작된 것을 구도상에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정복실패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죽음으로부터 사무엘시기까지 약속의 땅에 거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이 시기는 배교의 시기이며 주변 민족들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징계로서 여호와로 인하여 엄청난 구원이 주어진 시기이며, 여호와의 보내주신 구원자들을 오랫동안 기억하던 시기였다.
 문학적 구도에서 볼때 사사기는 11개의 주된 구획으로 나누어지는데,단지 배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모티브에 의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다.사사시대는 이스라엘의 계속된 불성실로 인하여 민족의 존립이 엄격한 징계와 여호와의 그칠줄 모르는 자비에 의존되어 있음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1.서론
 사사기 1:1-2:5을 면밀히 살피면 다음과 같은 동심원적 구조로 단락이 형성되어 있다.

 A1 1:1-2 회집된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누가 먼저 올라가 싸워야 되는가 묻다
  B1 1:3-21 유다 자손이 먼저 올라가 가나안 사람과 싸웠다.
  B2 1:22-36 요셉자손도 올라가 가나안 사람과 싸웠다.
 A2 2:1-5 여호와의 사자가 올라와서 회집된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다.

 온 이스라엘의 회집(A1)에서 B1/B2의 행위가 예견되었고,다시 끝부분에서 이스라엘의 회집(A2)을 통해 B1/B2의 행위가 재론되고 평가되었다.

2.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2.1.A1 1:1-2 회집된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누가 먼저 올라가 싸워야 되는가 묻다
01:0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01:0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사사기 초두는 매우 의미심장하다.1절은 3부분으로 세분할 수 있는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1)민족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었고
 2)남은 땅을 평정하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에게 있었다.
 이 두개의 상황 묘사에,
 3)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이 나타난다:"이스라엘이 문의하였다"
 이같이 1절은 백성들에게 주어진 합당한 행동지침이었다:주어진 상황(여호수아의 죽음)과 맡겨진 책임(그 땅에 거하는 가나안 족의 멸절) 사이에서 여호와의 뜻에 순복하는 일이 중심이다.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 시대의 새로운 지도자를 필요로 하였다.여호수아 사후 열조들은 전쟁 수행을 위해 새 시대의 새 지도자의 선정-'누가 먼저 올라가야 합니까?'-을 물었고 여호와로부터 직접 지침을 받았다.여호와는 그 명예를 개인이 아닌 유다지파에게 주었다.이 대화 속에서 몇가지 사항을 알 수 있다.
 1)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대화는 여호수아 기사에 언급된 남은 족속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 사후에 그들을 쫓아 내시겠다는 약속(수23:4-5의 고별설교)을 전제하고 있어 아직까지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약속 속에서 가나안 정복의 열정을 갖고 있었다.
 2)또 질의 응답에서 백성 속에 아직도 통합된 이스라엘 개념이 남아있음을 보여준다.누구든지 먼저 올라가는 자는 '우리를 위해' 곧 '이스라엘'을 위해 올라가야 한다.
 3)이책 전체 구조에서 보면 이 질의응답은 책 서두와 말미(20:18)에 위치하여 가운데 들어있는 사사들의 기사를 포괄하고 있다.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는 명령 속에서 유다지파의 위치가 명시되지만,주어진 총 12명의 사사들 가운데 유다지파에 속한 자는 옷니엘 한명 밖에 없어,성경저자는 '당시에 왕이 없었다'고 요약하고 있다.

 더 나아가 여호와는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2하)고 약속하심으로 이스라엘에게 올라가라는 명령(2중)을 통해 구체적으로 할 바를 가르친다.이같은 간단한 대화-구체적인 승리 언명-는 가나안 땅 정복이 이제 종반에 들어섰으며 곧 성공적인 결론을 맺게 되었다고 예견하게 해 준다.

2.2.B1 1:3-21 유다지파의 정복과정
 큰 단락(1:3-36)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처음에 성공한 듯 보이나 끝내는 실패하였고,그 결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였음을 시사한다.이 단락은 크게 두개로 다시 나뉜다:남쪽지역을 할당받은 유다,시므온,베냐민의 전쟁 수
행과 북쪽 지역을 할당받은 요셉과 기타 지파들의 전쟁수행.
 이들의 전쟁기록을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그릴 수 있다:

         유다(남쪽)                             요셉(북쪽)

      3-유다와 시므온의 협약                 22-요셉족속
     유다지파의 전쟁(갈렙과 겐족이 포함)    요셉족속의 전쟁(므낫세,에브라임포함)
                                             스불론,아셀,납달리,단
     17-유다와 시므온의 협약                35-요셉족속
     18-21 부록                             36-부록

 유다의 정복과정(1:2-21)은 다시 다음과 같이 세분할 수 있다.
 2하의 하나님의 유다에게 주신 승리의 약속이 19상의 여호와께서 과거에 베푸신 행위에 대한 언급('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고로')과 상응되고,3절에 언급된 유다-시므온 협약관계가 17절에 반복되어,유다가 가나안 정복에 대한 묘사(4-16)를 중심으로
하여 동심원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A 예견된 승리:여호와는 유다의 승리를 약속하다(2)
 B 유다-시므온 협약(3)
  X 유다의 성공적인 전쟁(4-16)
 B 유다-시므온 협약(17)
A 회상: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셨다(19상)

2.2-1 유다-시므온 협약(1:3,17참조)
01:03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 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A (이제)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B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X (우리가)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B'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A'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상기의 면밀하게 구성된 단락은 2하반절의 언명(유다가 올라갈지니라)과 4상반절의 보고(유다가 올라가매)사이를 조정한다. 3절은 동심원적 구조를 보여"(우리가)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가 중심임을 보여준다.
 2절에서 여호와는 유다에게 구체적으로 해야할 바("내가 이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를 말씀하나 유다는 여호와의 명령을 일부만 순종하여 즉 시므온과 협약을 맺는다. 이같이 유다는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인간적 계산을 더 신뢰하게 된다. 1-3절은 이 책 전체의 풍자적인 성격 곧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이해의 차이와 이스라엘이 계속하여 인간적인 계산에 의해 행동하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동족 간에 맺은 협약으로 여호와가 하신 사역과 인간이 하고자 한 것과는 깊은 괴리가 발견되는데,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정복에 실패한 첫번째 원인이 암시된다.
 그러나 시므온이 유다와 함께 올라간 것 같지는 않다(3e). 3A는 "시므온이 그(유다)와 함께 올라갔다"고 분명하게 언급하지만, 곧 이어 저자는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다"(1:4)고 말할 뿐이다. 계속된 전쟁에서 도시와 거민을 점령하고 승리할 때 유다 이름만 언븍된다:예루살렘(1:18), 가사,아스글론,에그론(1:18), 산지(1:19), 적어도 시므온은 단 하나의 전쟁, 곧 스밧(호르마)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과 싸웠던 전쟁(17)을 제외하고는 언급되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유다의 전쟁과 유다-시므온 연합군이 치른 전쟁의 차이에서 어느 정도 답을 찾을 수 있다:"가나안 사람을 쳐서.....진멸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묘사는 유다지파 홀로 싸울 때와는 다르다:유다는 예루살렘과 가사등을 "취하였고"(1:9,18), 산지 거민을 "쫓아 내었다"(1:19). 여기서 몇개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1) 유다사람들은 도시들과 땅? 을 '취하였다.'  그러나 연합군은 스밧을 '파괴'한 뒤에 그 도시를 '취하지 않았다.'  2) 여호와의 의지(행동)와 인간의 의도 사이의 차이 점은 l:19에서강조된다 : 유다가 산지를 점령할 때 "여호와는 유다와 함께 하셨으나", 연합군에
는 이 어구가 나타나지 않음으로 협약이 잘못되었음을 시사한다.

2.2-2 유다의 원정(1:4 참고. 21절)
        A '올라가다' 4-8
          A1 베섹공략 4
             아도니베섹 기사 5-7
          A2 예루살렘 공략 8
        B '내려가다'  9-16
          B1 헤브론 공략 10
          B2 드빌 공략(옷니엘/악사) 11,12
             악사와 옷니엘 기사 13-15

 4-16절의 유다의 원정은 두부분으로 나뉘는데, 동심원적 구조를 취하고 있다: 먼저 "유다가 올라갔다(4a)" 는 언급과 이에 따를 설명(4 b-8 )이 뒤따르고 ; 둘째로 "그후에 유다자손이 내려갔다(9)"는 언급과 이에 따른 설명(9b-17)이 뒤따른다. 다시 '내려가다'부분 은 9b에서 3단계로 세분된다. 산지와 네겝과 낮은 지대, 전쟁지역은 '올라가다'부분에서 베섹과 예루살렘, '내려가다'부분에서는 헤브론, 드빌의 전쟁이 기록된다. 그 기록 속에 동심원적 구조가 또 나타난다 : Al/B2 는 간략한 승리의 묘사가 있는 반면에 Al/B2는 확장된 개인(아도니베섹 / 악사)의 기사가 주어진다.

 18f에서 "평야"(개역-골짜기)의 언급은3-17절에서 주어진 윤곽과 9b에서 언급된 3중의 '내려가다' 부분(여기에서는 다만 낮은 지대까지 언급된다)밖 에 있다. 그러므로 18-21 절은 유다가 성취한 한계와 범위를 요약하는 부록으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다른 단락은 22절에서 시작한다 : "요셉족속도 ... 올라가니."

 (1) "올라간" 전쟁(1:4-8)
 1) 베섹 공략(1:4-7) : 베섹과의 전쟁기사에서 사사를 세우기전에 일련의 첫 기사가 주어 진다 : 아도니베섹 이야기.
 아도니베섹을 절단함으로 그를 짐승으로 격하시켜 개같은 죽음으로 비하시킨다. 아도니베섹의 이런 삶을 설명한 것은 일종의 풍자이다 : 그가 다른 이들에게 행한대로 하나님이 이를 보응한 것이다. 자신이 당하는 고통은 마땅히 받아야 할 부분임을 시인하는데 주어진다. 여기에 저자의 의도를 몇가지 찾을 수 있다 : 1) 이 모든 언급들은 전쟁의 승리는 여호와의 도움에서만 가능하였음을 보여준다 : 2) 또 이 기사는 뒤에 주어진 악사와 옷니엘기사와 연결되어 우상숭배자의 종말과 여호와 추종자의 풍성함을 대조시킨다(뒤에서 다룬다); 3) 또 아도니베섹의 죽음은 요셉족속이 벧엘을 공략할 때 등장하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정보 제공자와 대조되어 나타난다(뒤에서 다룬다).

 2) 예루살렘 공략(1:8) : 아도니베섹이 죽자 유다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모든 것을 파괴한다 : "유다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성을 불살랐으며," 요약하면 이같은 묘사와 단어 배열을 통해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여리고, 아이, 하솔을 점령한 것과 같은 정신으로 일격에 승리하였음을 묘사한다(참고. 같은 묘사가 수6:42;8:8,19, ll:l0-ll에 나온다). 이 부분은 에브론 공략과 함께 동심원적 구조의 내부대칭을 이루어 유다가 하나님께 순복하였을 때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했을 때와 같이 승리할 수 있었다고 암시한다.

 (2) "내려간" 전쟁(1:9-16)
 1) 헤브론 공략락(1:l0) : 유다원정의 '내려가다'에 관한 단락은 10절 의 또 다른 승리 언급에서 시작된다. 10c의 3개의 이름은 독자들이 이미 친숙한 헤브론 전쟁기사 속에 나타난 승리와 연결되어 있다. 10b행의 언급은 10a행의 일반적인 언급(유다가 헤브론에 거주하는 가나안족과 싸우러 갔다)과 lOc행의 구체적인 언급(그들이 세새등과 싸웠다)을 연결한다. lOc행의 유일한 동사인 '나카'는 유다가 적을 '멸절'하였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를 다시 20절의 '부록'에서 덧붙이고 있다.

 2) 드빌 공략(1:ll-15) : 일련의 가나안 원정이 성공하자 유다는 드빌(11a. 세벨)을 치러 갔고 그 와중에 옷니엘에 관한 언급이 확장된다. 갈렙은 그 도시를 치고 빼앗는 자에게 자기 딸을 주겠다고 약속하였고 친척인 옷니엘이 이 조건을 성취하여 결혼을 하게 되나 기사는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 악사가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비에게 밭을 구하였다.

 드빌공략 기사(11-15)는 실제로 자체 등장 인물과 플롯을 가진 완전한 소단위의 사건 기록체로 기록되어, 3-19절을 하나로 보았을 때 유다와 가나안족 사이에 주어진 기록과는 다른 차원을 묘사한다. 전체 구도에서 그렇게 중시되었던 성공적인 군사적 원정은 일종의 배경처럼 여기서는 간결하게 보고되었다 : "옷니엘이 그것(드빌)을 취한고로"(13a). ll-15절 안에서 드빌의 점령은 갈렙, 옷니엘, 악사의 관계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 갈렙, 옷니엘, 악사.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행동과 언명을 통해 자신의 성격과 본문의 위치를 밝히고 있다.

 이 짧은 단락은, 여호수아 15장 13-19절에서 거의 병행구로 가져왔으나, 다른점은 언급 대상과 선물을 준 자의 이름을 밝힌 데 있다 : "그녀가 '그에게' 가로되 복을 주소서 당신이 내게 네게브에 있는 밭을 내게 주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녀에게 주었더라"(1:15). 이런 차이점은 땅과 샘을 주는 자로서의 갈렙의 이름을 밝힌 데 있다. 갈렙은 윗샘과 아랫샘을 자비롭게 줄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 권위를 가진 갈렙이 명시한 것을 성취한 자에게 약속된 신부, 땅, 물까지 모두 준 것이다. 갈렙,악사, 옷니엘의 기사는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언약을 성취하기만 하면 땅을 요청하고 그것을 받을 수 있고 번성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가능성을 모범으로 나타낸다.

 이 기사의 의의는 아도니베섹 기사와 병행시키면 잘 드러난다. 1) 전쟁과 정복의 아도니베섹 기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과 가나안 사람들의 생활, 특히 각 백성들과 신들의 관계가 대조되어 있다: 옷니엘 기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보상을 받으며 어떤 약속을 얻을 것인가 잘 보여준다. 이 두개의 극화된 기사를 병렐시킴으로 성경 저자는 다음 두개의 파라다임을 대조시킨다 : 우상 추종자와 여호와 추종자. 전자는 예루살렘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으나, 후자는 아내를 얻었고 또 땅과 물까지 얻어내어 풍성한 삶을 보장받았다.

2.2-3 겐족(1:16)
 산지로부터 유다지파는 이제 네게브로 내려간다. 이러한 진행은 이미 9c('산지와 네게브')에 주어진 프로그램과 15c의 갈렙이 네게브의 땅을 악사에게 주었다는 언급에서 예견되어 유다의 정복계획이 계속하여 확장되어감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제 유다지파들이 계속하여 네게브로 진격하면서 기사의 초점은 겐족(16절)으로 바뀐다. l장 16절과 함께 땅의 점령은 새로운 국면을 초래한다 : 유다족과 겐사람들은 그 땅의 거민을 점령하는 대신 그들 사이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는 여호수아를 통해 주신 말씀에서 퇴보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 "너희가 안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 피차 왕래하면 ... 너희가... 멸절하리라"(수23:12). 여기에 가나안 정복 둘째 이유가 밝혀져 있다 : 정복하여 몰아내기보다는 함께 동거하여 정착하였다. 정복하라는 여호와 말씀의 윤곽이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말씀을 성취하려는 의지보다는 타협하면서 살아가려는 인간의 욕망이 두드러 진다.

2.2-4 유다 전쟁기록 가운데 주어진 부록(l:18-21)
 (1) 1:18-19 : 유다정복 기사의 첫번째 부기사항은 그들이 평야(개역. 골짜기.18+19cd)를 정령하려던 노력에 관하여 언급한다. 처음에 그들이 산지에서 성공한 사실(19ab)을 나열하다가 19cd에서 계획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공식적으로 나타낸다 :
유다가 산지에 사는 가사, 아스글록, 에그론과 그 주변을 '취하였으나', "그러나 평야지대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몰아내지 못하였다"(19cd). 이 본문에서 우리는 여호와가 실제로 유다와 함께 하였다면(19a) 왜 철병거가 그토록 그 지역을 점령하는 데 그렇게도 주요한 역할(19d)을 하였는지 잘 알 수 없다. 다만 저자는 19ab와 19cd를 병렬하여 이같은 일은 일종의 파라독스임을 밝히는데, 같은 어조가 계속하여 l장 후반부와 이 책 전체에 나타난다. 여호수아의 군대는 철옹벽과 같은 여리고와 하솔을 점령하였으나,
이스라엘은 단지 적군이 철병거를 가졌다는 이유로 점령하지 못함을 밝힘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하고자 하는 열정이 상당히 약화되었음을 암시하여 종국에서 정복이 실패로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언급한다.

 (2)1:20-21 : 둘째 부기사항에서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두개의 짝을 이루어 대조시킨다 : 두개의 지역과 두명의 주인공, 둘 다 유다의 전쟁기사(3-17)에서 '올라가는' 원정의 예루살렘(8), '내려가는' 원정의 헤브론(10)을 선택하여 뒤바뀐 순서로 기록되고 전쟁의 주인공을 밝힌다 : 헤브론(20)-예루살렘(21); 갈렙(유다지파)- 베냐민지파. 히브리구문으로 보면 '쫓아내다'라는 동사를 중심하여 동심원적 구조를 이룬다 :

 20c {A}그(갈렙)가  {B} 거기서 <헤브론>을 쫓아내었고 {C}아낙의 세 아들을

 21a {C'}(그러나)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B'} 그들이 쫓아내지 못하였다 {A'} 베냐민 자손은

 갈렙이 유다의 성공적인 공략에 뒤이어 헤브론(10)에서 아낙자손들을 쫓아내어 점령한 반면에, 베냐민은 예루살렘에서 똑같은 일에 실패하였다(22절). 두개의 기록을 병렬시킴으로 성경저자는 다음 사항들을 대조시킨다 : 1 ) 베냐민의 실패가 가나안 정복의 어두운 빛을 드리운다고 암시한다 : 2 ) 부록의 앞부분에서 보이는 부정적인 언급과 연결하면, 심지어는 유다지파까지도 평야지대의 거민을 '좋아낼 수 없었으며'(19c) 베냐민지파는 예루살렘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다.'(21a) :3). 더욱더 어려운 면은 여부스족속이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서 베냐민지파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다(21b). l장의 마지막 부분(27-33절)에 주어질 일반적인 상황묘사의 전조가 드리워진 셈이다.

 

 지난 호에서는 사사기 l장 l절부터 2장 5절에 나타난 동심원적 구조 [A1(1:1-2), B1(1:3-21), B2(1:22-36), A2(2:1-5)] 가운데 Al, Bl을 다루었는데 이번에는 B2, A2 를 다루면서 l장 1절부터 2장 5잘의 전체구도에 나타난 저자의 의도를 찾으려 한다.

 

2.3 B2 1:22-31 요셉족속의 전쟁
 22a에서 '요셉족속'이란 어구를 사용함으로 이제 '유다단락'(3-21)을 넘어 다른 새로운 구조적 단락으로 넘어간다. 이 어구가 두번씩(22a, 23a)이나 사용되었다가 35절에서 다시 반복된다. 이러한 윤곽은 북쪽 지파의 전쟁을 다루면서 승리의 개가를 이룬 요셉족속을 도입하여 앞선 유다와 대칭을 이룬다. 36절은 이 윤곽 밖에 존재하게 되어 일종의 부록으로 볼 수 있다.
 22a의 '그들 또한'이란 어구가 '올라가다'란동사와 함께 요셉단락의 가장 바깥 구조에서 병행문맥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 또한(개역. '요셉 족속도')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그러나 만약 22a가 새로운 구조적 단락의 시작이라면 이것 또한 사건기사에서 새로운 전개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들 또한'(22a)이란 언급으로 요셉기사는 분명하게 이 단락을 앞선 좀더 큰 기사체와 연결한다.
 곧 유다와 요셉단락들은 구조적으로 연결된 연대기로 대칭 된다:'먼저' (lC)유다가 그리고 다음에 요셉이다. 여기에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로 남쪽의 유다, 북쪽의 요셉을 언급하여 서서히 다른 지파를 누르고 부각되는 모습을 살필 수 있다. 만약 유다단락이 하나의 '전개'로 볼 때 전쟁은 계속 승리하였으나 '부록'(18-21)에서 약간 비틀거리다가 아예 중단되어버렸다. 같은 어조가 22절 이하에 언급된 요셉족속을 위시한 북쪽 지파들에게도 나타난다.

 22절에서 요셉족속도 처음 전쟁을 치루어갈 때 여호와께서 유다와 동행하셨던 것처럼 같은 묘사가 주어진다 :"요셉 족속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처음에 요셉족속도 여호와의 인도로 출발하였으나 정복의 과정에서 벧엘공략에 문제가 나타나고 곧이어 북쪽지파들의 실패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남쪽지파들과 꼭같이 가나안 정복에 실패하고 만다. 요셉족속과 북쪽지파들의 정복실패를 다음 같은 구도로 그릴수 있 다 :

 

2.31 요셉족속의 벧엘 공략 :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을 물리쳤다(1:22-26)
 1) 본문구도 : 22f에서 약간의 변화가 일면서 스타일도 변한다. 요약된 보고(16-21)는 다시 한번 더 확장된 기사를 싣고 있다. 전통적 모티프-곧 정탐꾼을 보내고 정보제공자에 대한 자비, 도시로 진입하는 비밀통로 등-는 직접적 언명(24cd)과 같은 구성과 함께 나온다. 그러므로 구성의 관점에서 보면 22절부터 26절의 벧엘의 기사는 단순하지만 하나의 완전한 독립된 소단위 사건기록체에 속한다.

 22ab에 비추어 우리는 벧엘 파괴가 이 '벧엘기사'의 절정임을 예견한다. 그러나 이 절정에 도달하기 전에 복잡한 구성이 소각되면서 이 기사가 예견된 승리를 이루지 못했음을 았리고 있다 :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가르치라"(24c) ;"그리하면 너를 선대하리라"(24d). 구성은 두단계를 거쳐 해결되어야 한다. 첫 가닥은 벧엘파괴(25b)에서 해결되나 둘째 가닥은 '의무'(25c)를 배풂으로 '새로운 루스'가 건설되었다고 한다(26).
 요셉 기사의 절정은 앞선 유다기사의 승리보고와는 달라 독자들에게 예측을 불허하는 둘째 가닥에 의해서 주어진 문제 해결(25c)과 놀라운 결과(26)로 주어진다고 본다. 이것은 가나안사람과 타협하여 맺은 협약의 결과임과 동시에 본질적으로 가나안 도시 정복에 관한 기사이다. 구성상 이 기사는 여호수아 군대가 멸절시켰던 여리고 기사와 유사한 하나님 명령대로 멸절시키기보다는 타협의 결과로 정보 제공자를 살려주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여준다.
 풀려난 정보제공자는 자신이 배반하였던 도시의 이름을 따라 일종의 기념비로서 새로운 루스를 일으켜 세웠다. 본문은 많은 것을 말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정보제공자가 이스라엘 백성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하여 '루스인' 곧 가나안족으로 남았다. 그는 망각의 세계로 가버린 것은 아니고 이스라엘의 경계 밖에 안전할 만큼 떨어져 살았다. 그는 후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 수 있는 어떤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그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날까지 그곳의 이름이더라"(26c,d). 이러한 표현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다시 살아남아 번성케 된 자가 이들 가족(25c)만이 아니고 가나안 문화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멸절되기보다는 타협의 결과 눈에 보이는 형태인 도시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점령이 하나님의 명령에서 빗나간다고 암시한다.

 (2) 본문의 의미: 이제 다시 23절부터 26절이 1장에 어떤 기능을 하고 있나를 살펴보자. 22a는 특히 '올라가다'와 '그들 또한'을 통하여 우리에게 암시를 준다. 본문은 4절부터 7절의 베섹전투와 더불어 22절부터 26절의 벧엘진투를 비교하도록 구조되어 있다. 둘 다 승리하였다. 4b에서 승리는 직접적인 여호와의 간섭으로 이루어짐을 알린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분이신지라!"

 이에 상응하는 22b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는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예견하나 4b에서처럼 여호와와 승리를 직접적으로 연결시켜주지 못한다. 베섹전투와 비교하여볼 때 22절부터 26절에서 관심의 초점은 벧엘을 점령할 때 구사하였던 전략에 있다:정탐군,정보제공자 활용, 합의, 비밀통로.

 두 기사 모두 특정한 한 가나안 사람이 구분되어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베섹의 추장'[개역성경에서는 아도니베섹이라는 고유명사로 번역하였으나 전체문맥에서 볼 때, 벧엘공략에서 정보를 제공한 자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것과 대칭된 것으로 보여지기에 베섹의 사람, 혹은 베섹의 추장으로 번역하는 것이 다탕할 것이다](4-7)과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정보제공자(22-26). 베섹의 추장은 전적으로 유다사람의 장중에 있었다 : 그들이 그를 발견하고(5a), 싸웠고(5b), 추격하여(6b), 그의 팔다리 일부를 자르고(6d), 예루살렘으로 끌고왔다(7e). 그는 베섹이 공격당한 이후에 살아남았지만 그는 정복자들의 손에 붙잡혀 자신이 고통당하는 '공의'를 알고(7a-d) 끝내는 죽임을 당한다(7f).
 그러나 22절부터 26절에는 요셉족속과 정보제공자 사이에 전혀 다른 관계가 조성되는 것을 보여준다 : 그들은 그를 보았고(24a), 말을 걸고(24bb), 협약을 맺고(24cd), 그의 도움을 받아(25a), 승리한 후에 그와 가족을 맺어주었으며(25c);그 결과 그는 새로운 루스를 건설하였다(26).
거명된 북쪽지파들 가운데 오직 요셉족속만이 하나님의 언약에 충성되어 루스를 점령하지만, 도움을 주었던 사람을 살려 보내줌으로 멸절시키라는 하나님의 가나안 정복 명령을 충실히 따르지 않고 그 백성들과 협약함으로 퇴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가 도사리고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의 윤곽(정복과 가나안족 멸절)은 지니고 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말씀의 내용이 삶의 현장 속에서 굴절되어 해석된 것이다.

 

2.32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을 소유하지 못하였다(1:27-33)
 벧엘전투 기사 뒤에 북쪽 각 지파들의 전투상황을 보고하고 있다:먼저 두 요셉지파 곧 므낫세(27-28)와 에브라임(29), 다음에 길르앗 지파들, 곧 스불론, 아셀,납달리(30-33),그리고 마지막으로 단(34-35)을 언급함으로 발전적 언급이 깔려 있다. 여기에 주어진 '발전'은 연대기적 측면이 아니다. 이는 순전히 주제별로 구성되어 있어 가나안 족속의 압박으로 북쪽 지파들이 쉽게 동화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

 22절부터 26절에서 다시 주어진 승리의 순간은 즉시 사라져버린다. 더이상 도시를 점령하거나 가나안족을 쫓아내거나 죽이는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과 가나안족이 공존하는 것을 본다. 27-28절의 므낫세에 관한 언급은 같은 어구로 시작하고 끝난다:"므낫세가 .... 의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매"(27). 28c에서 이런 상황은 부정사를 사용하여 강조되고 있다:"이스라엘이 ...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27b의 설명은 매우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한다:"가나안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여기서 암시하여 주는 것은 가나안 사람이 머물러 살기로 결정할 수 있었으며 이는 공격자들이 그들을 쫓아낼 능력이나 의지가 없는 상황을 암시한다(참고. 35절에서 같은 동사를 사용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족과 언약하여 타협한 것이 분명하다 : 가나안족은 자기 도시에 거하면서 다만 이스라엘에게 공물을 주기로 하다(28ab). 가나안족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갈수록 변절됨을 보여준다.

 "쫓아내지 않았다"는 공식은 에브라임(29a), 스불론(30a), 아셀(31a), 납달리(33a)와 연관되어 반복된다. 문단의 절정에서 단을 언급하면서 반
복되는 공식이 끊기고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누르고(개역. 쫓아들이고)"가 삽입되어 단지파를 산지로 쫓아내었고 다시 평원에 내려오지 못하게 하였다(34ab.참.19cd). '누르고'란 동사가 도입된 것은 심상치 않다. 실제로 앞으로 주어질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참고 2:18;4:3; 6:9;10:12).
 에브라임을 언급하면서 에브라임과 가나안족이 함께 같은 장소에서 '거주한다'는 두번째 표현과 '쫓아내지 않았다'가 짝을 이루고 있다:"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들(에브라임)중에 거하였더라"(29b). 이 표현은 약간 변형되면서 계속하여 반복된다 :


 30b 가나안 사람이 그들(스불론)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더라
 32a 아셀이 ...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33b 납달리가...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가운데 거하였으나
 1장 27절에서 소위 '정복의 부정적 설명'이 주어진 뒤 새롭고 심각한 타협책이 도입된다. 먼저는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않고 타협하여 자기들 안에 거하게 하였으나, 종래에는 이스라엘이 그 땅 거민 사람들 가운데 거하는 신세가되고 만다.
그렇게 된 연유를고 8절에서 밝히고 있다:므낫세 족속은 공격해야 할 동네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않았으나 '이스라엘이 강하게 될 때' 가나안족을 섬멸하는 대신 그들을 종으로 삼았다. 이같은 암시는 이스라엘이 거민들을 쫓아낼 수있음을 말하는 데 이는 가나안족을 노예로 삼을 수 있을만큼 강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같은 일은 종국에 영적 의미에서 자신들 스스로 '영적노예'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끝내는 가나안 신들을 섬기게 된다.
28a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28b (이스라엘이 ) 가나안 사람에게 부역(개. 사역)을 시켰고
30c 가나안 사람이 그들 증에 거부하여 부역을 하였더라
33c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들이 그들(납달리)에게 부역을 하였더라
35b 요셉족속이 강성하매
35c 아모리 사람이 부역을 하였으며
28c에서 므낫세 영토에 부역을 삽입한 것은 이를 므낫세에게 돌리지 않고 이를 '이스라엘'에게 돌려 상당한 기간이 흐른 뒤(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에 일어난 것으로 말한다. 이와 비슷한 과정이 35bc에 나와 단의 할당된 영토 내에서 실패하여 쫓겨난
단을 대신하여 아모리족을 복종시킨 것(35a)은 '요셉족속'이었다고 말함으로써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과정이 암시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이방종교 관습이 보급된 것은 비정상적이나 분명한 것은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다음과 같이 단계적으로 구분된다. 배교의 과정은 구체적인 지파이름과 동일시되고 지파의 집합적 개념으로 이스라엘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이런 점진성은 3장 11절까지 계속되면서 다른  요소를 지닌다:온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말씀대로 순복하였으나 차차 말씀에서 벗어나 가나안족들과 타협하여 쫓아내지 않고 함께 동거하도록 놓아두었고, 시간이 경과되면서 이방민족과 더 깊은 관계를 갖게 되면서 종국에는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게 된다. 다시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족을 축출하든지 숙청을 하라는 것이지 더불어 공존하라는 것은 아니며, 더구나 그 족속들과 혼인관계를 맺어 민족을 혼탁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정상단계:여호와께 순복하다-유다(1-2),요셉(25중)
단계1:여호와께 불순종하다-유다,시므온(3,17),요셉(25하)
단계2:가나안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다-겐족(16),므낫세(27),에브라임(20),스불론(30),아셀(31),납달리(33)
단계3: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사람을 사역시키다-베냐민(21),므낫세(28),스불론(30),납달리(33),요셉족속(35)
단계4:아들을 이방족속과 결혼시키다-납달리(33),요셉족속(35)
단계5:바알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다-이스라엘 백성(2:11-13)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