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여호수아 0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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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싯딤(* ) - 팔레스틴의 경계를 이루는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로서, 두 줄기의 개천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진(陣)을 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본래 이름은 아벨싯딤(Abel Shittim, field of acacias)이며, 요단 동편 12km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가만히 보내며 - '가만히'의 히브리어 '헤레쉬'(* )는 '둔하게 되다', '조용히 하다'란 뜻의 '하라쉬'에서 파생된 부사어이다. 일찌기 가데스에서 열두 정탐꾼 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했던(민 13:8) 여호수아는 정탐군이 처하는 위험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두 정탐꾼을 '은밀히' 보낸 것이다. 따라서 이 임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모르게 조심히 행해졌는데, 그것은 만일 좋지 못한 보고로 인해 모세 때 처럼 백성들을 낙담시키지나 않을까(민 13:28-14:4)하는 염려 때문이었다(Keil).
여리고를 엿보라 - '엿보다'에 해당하는 '라아'(* )는 '주의깊게 보다', '조심스럽게 관찰하다'란 의미이다.
라합이라 하는 기생 - 라합을 미화하기 위하여 요세푸스(Josephus)와 탈굼(Targum), 그리고 유대 랍비들은 '기생'(* , 조나)을 '여관 주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Kroeze). 그러나 히 11:31;약 2:25은 라합을 분명히 '기생'(* , 포르네)이라고 표기하고 있기 때문에 '여관 주인'으로 볼 수는 없다(Calvin, Keil, Lange, Matthew Henry). 더군다나 개역 성경의 '기생'은 공동번역처럼 '창녀'로 번역되는 것이 더 좋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조나'는 '간음하다', '매춘하다'를 뜻하는 '자나'(* )에서 파생했기 때문이다. 한편 '기생의 집'(harlot's house, KJV)은 각양 각색의 사람이 모여 사담(私談)을 분방하게 나누는 곳이었으므로, 가나안 거민의 민심(民心)이나 정치.군사적 동태 따위를 간파하기에는 적절한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생 라합의 집은 성벽 위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15절) 여리고 성을 조망하기에도 매우 적절한 장소였다.
유숙하더니(* , 솨카브) - 기본 뜻은 '눕다'인데, 이 동사는 때로 동침을 위해 눕는 것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에, 노쓰(Noth)와 같은 학자는 여기서 두 정탐꾼과 라합이 동침을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8절을 통해 볼때, 여기서 눕는 것은 동침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잠을 자기 위해서였다.

=====2:2
여리고 왕 - 당시 중.서부 팔레스틴 지역은 명목상 애굽의 지배하게 있었으나, 실상은 애굽의 왕권이 그 지역에 대해 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Leon Wood). 따라서 당시의 가나안은 각각 그 자체의 왕들을 가진 성읍 국가(City States)구성되어 있었다(12:9; 삿 1:7). 여리고 왕은 이러한 여러 왕들 가운데 하나로 여리고를 다스렸던 통치자였다.
고하여 가로되 - 정탐꾼이 들어가자마자 여리고 왕이 이 소식을 보고받은 것을 볼 때 여리고의 병사들이 그 성을 매우 철저하게 경비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시 요단 강 가까이에 위치한 성읍으로서의 여리고 군대가 이스라엘이 조만간 요단 강을 건너 진격해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비상 경계를 폈기 때문일 것이다(Calvin).
이 밤에 - 1, 5, 7절과 관련시켜 볼때, 이 때는 정탐꾼들이 들어온 때가 아니라 왕에게 알린 보고자의 시점에 근거하여 한 말이다(Keil).

=====2:3
끌어내라(* , 야차) - '나오다', '앞으로 가다'란 의미로서, 이 말은 갇힌 존재 또는 숨겨진 존재를 밝은 곳으로 이끌어낸다는 개념이 강하다. 그런 점에서 이 동사는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신' 하나님의 출애굽 사역과 관련하여 많이 사용되었다(출 13:3;20:2; 민 23:22; 신 8:14).
온 땅을 탐지하러 - 2절에서도 나타난 바 있는 '탐지(探知)하다'의 히브리어 '하파르'(* )는 '깊이 파다', '구석구석 수색하다'를 뜻한다. 따라서 낙스(Knox)는 이 부분을 '땅의 모든 구석구석을 정탐하기 위하여'로 번역하였다(Woudstra).

=====2:4
이미 숨긴지라 - 이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6절에서 서술되어 있다.
나는 알지 못하였고 - 이 말은 분명 '라합의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이 거짓말이 소위 말하는 악의 없는 '백색 거짓말'(white lie) 또는 '직무상의 거짓말'(Mendacium officiosum)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평가는 학자들마다 각기 다르다. 이를 크게 양분하면 라합의 거짓말은 신앙과 믿음에 근거한 의로운 거짓말로서 죄로 볼 수 없다는 견해(Lange, Woudstra, Holwerda)와 라합의 거짓말은 분명 그 방법상에 있어서는 죄이지만, 그 동기상 신앙적이었으므로 용서될 수 있다는 견해(Augustine, Calvin, Keil)가 있다. 이에 대하여 신약 기자들의 평가를 살펴보면, 그들은 분명 라합의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믿음의 행위'로 규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히 11:31; 약 2:25). 그러나 동시에 그녀가 사용한 방법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우리는 라합이 사용한 방법, 곧 그 거짓말까지 의로운 행위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사실은 히브리 산파의 경우(출 1:15-21)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2:1-7 강해,라합의 거짓말> 부분을 참조하라.

=====2:5
어두워(* , 바호쉐크) - 직역하면 '어두움 속에서'이다. 이때는 뒤이어 나오는 '성문을 닫을 때쯤'과 관련시켜 볼 때 한밤 중을 가리키지 않고 해질 무렵을 가리킨다. 이 의미를 살려 NTV, Living Bible, Modern Language Bible은 'at dusk', Jerusalem Bible은 'at nightfall'로 의역하였다.
급히 따라가라...미치리라 - 이 말 속에서는 라합의 기지와 용기가 드러난다. 만일 그녀가 정탐군들을 결코 보지 못했노라고 딱잡아 뗐더라면, 아마도 가택 수색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2:6
실상은 - 문장 초두에 나오는 접속사 '웨'(* )의 번역으로 직역하면 '그러나'이다(KJV, RSV, NTV).
지붕에 올라가서 - 지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가그'(* )는 '건물의 가장 높은 곳'을 뜻하는데, 대개 고대 근동 지방의 지붕은 뽀족하지 않고 평평하였다. 따라서 이곳에서 휴식, 담소, 기도 등 여러가지 활동을 할 수 있었다(Lange).
삼대에 숨겼더라 - 여기서 '삼대'는 '목화 깍지'(cotton pods, Michaelis)도 아니고, '나무 아마'(tree flax, Thenius)도 아니다. 그것은 곧 '삼 줄기'(the stalks of flax, KJV, NTV, RSV)를 가리킨다. 한편 '삼'은 물속에서 자라는 식물로, 보통 그 줄기의 길이가 0.9-1.2m이다. 따라서 햇볕에 말리기 위해 지붕위에 널어 놓은 삼대는 정탐꾼의 은닉처로서는 매우 좋았을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II. p. 34).

=====2:7
그 사람들 - 여리고 왕의 명령을 전한 사신들로서(3절), 4, 5절의 '그 사람들' 곧 정탐꾼들과는 전혀 다른 무리들이다.
나루턱까지 - '나루터' 앞에 관사 '하'(* )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나루터는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던 여리고 근처의 나루터로 이해해야 한다(Keil & Delitzsch, Vol. II. p. 35).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 - 성문을 이렇게 민첩하게 닫은 이유는 혹시라도 정탐꾼들이 성내에 남아 있을 경우, 그들이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였다(Keil).

=====2:8
눕기 전에...지붕에 올라가서 - 당시 팔레스틴의 가옥 구조상 지붕은 평평했고, 외부 층계로부터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지붕은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했던 관계로 빨랫거리나 곡식, 그리고 삼대 등을 건조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따라서 여름철에는 흔히 이 지붕 위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였다.

=====2:9
여호와 -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구속주 '여호와'의 이름이 이방 여인 기생 라합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광야 여정, 그리고 요단 동편 아모리 족속 정벌 사건 등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신의 능력이 이미 가나안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Knobel).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가나안인들이 알고 있었던 '여호와'에 관한 지식은 스스로 영원토록 계시는 인격적 유일신(唯一神)으로서가 아니라 히브리인들의 민족신(民族神)으로서 그 능력이 탁월한 신이라는 정도였다. 따라서 그들 가나안인들 대부분은 여호와를 경외의 대상으로 보기 보다는 단순히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만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라합은 여호와의 전능성과 광대무변성을 알았을 뿐 아니라 믿었고(11절), 나아가 그 믿음에 근거하여 여호와께 은혜를 구할만큼 여호와의 긍휼성도 확신했던 것이다(12, 13절). 이로 인해 라합은 결국 믿음의 소유자로 후일 인정받을 수 있었다(히 11:31; 약 2:25).
너희...우리 - 두 대명사가 아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너희'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며 '우리'는 모든 가나안 거민을 의미한다(Keil).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도하(渡河)후에 부른 찬양(출 15:13-18; 신 2:25;11:25)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가나안 거민이 대조되어 나타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 라합의 고백은 '가나안 모든 거민이 낙담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생생히 대변해 주고 있다(Woudstra, Goslinga).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 과거 이스라엘이 가나안 거민을 두려워했던 것(민 13:33)과는 정반대로 이제는 가나안 거민이 이스라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고 있다. 그때, 모세 당시 가나안 거민에게 겁을 집어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지 못했듯, 이제 여호수아 당시 이스라엘에게 겁을 집어먹은 가나안 거민들은 그 땅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간담이 녹나니 - '녹다'의 히브리어 '무구'(* )는 '녹아(물갈이)흘러 내리다'(7:5)를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개역 성경의 '간담이'라는 말은 그 의미를 살리기 위하여 원문에 추가된 것이다.

=====2:10
본절에는 요단 서편에 살고 있는 가나안 거민들의 간담을 녹게 한 두 가지 큰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즉 (1)홍해 물을 마르게 한 사건(출 14:15-22), (2)요단 동편의 아모리 두 왕이 전멸당한 사건(민 21:21-35)이 그것이다.
전멸시킨 일(* , 헤헤람템) - 이것은 '저주하다', '완전히 파괴시키다'를 뜻하는 동사 '하람'(* )에서 파생되었다. 이 동사는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公義)의 속성과 관련하여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철저히 파괴하여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 때 사용되는 개념으로(Lange), 여호수아의 군대가 진멸한 거의 모든 도시들에 대해 사용되었다.(여리고, 6:21; 아이, 8:26; 막게다, 10:28; 하솔, 11:11등).

=====2:11
마음이 녹았고 - 여기서 '녹았고'의 히브리어 '마사스'(* )는 주로 어떤 큰 공포나 두려움과 관련하여 완전히 절망하는 것을 뜻한다(5:1;7:5; Carr).
정신을 잃었나니 - 직역하면 '영혼이 남아 있지 않으니'로, 곧 대항하거나 싸울 용기를 상실하는 것을 뜻한다(NTV).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 문자적으로는 '위로는 하늘에 계시고, 아래로는 땅에 계신 하나님'(KJV, RSV, NTV)으로, 신 4:39에 나타나 있는 모세의 말을 연상케 한다.

=====2:12,13
선대하였은즉...선대하여 - '선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 )는 근본적으로는 상호 체결한 언약 관계에 충실한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 말 속에는 구체적으로, 자비.친절의 개념도 내포되어 있다. KJV, RSV, NTV, ASV, JB등 거의 모든 역본들 역시 그러한 뜻으로 해석하였다. 출 15:13 주석 참조.
내 아버지의 집...모든 자 - 라합은 단순히 자기의 목숨만을 구원받으려는 이기적인 생각을 갖지않고, 믿음에 근거하여 자기의 가족 및 친척까지 구원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한편 이처럼 '아버지의 집'과 '자신'을 분리시키지 않고 동일시하는 사고는 고대 근동 지방의 사고 방식이기도 하다(Woudstra).
살려주어...죽는데서 건져 내기로 - 이를 통해 볼 때, 앞에서 '선대했듯이 선대하라'고 한 말은 구체적으로 가나안 군대의 칼로부터 당신들의 생명을 구해주었으니,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군대의 칼로부터 자신의 생명도 구해달라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여호와로 맹세하고 - 이렇게 신의 이름으로 서약을 요구한 것은 이스라엘 군대가 성읍을 맹공격하다 보면 전쟁의 열기 때문에 혹시라도 약속한 바를 잊고 지키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신의 이름으로 맹세할 경우, 신을 맹세의 보증인으로 삼는 결과가 되어 그 맹세의 신빙성과 성결성이 인침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만일 그 맹세를 어겼을 경우, 신이 친히 그 위증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기 때문이었다(Calvin). 한편, 그러한 의미에서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어떤 중요한 일을 서약하거나 확증할때 그들이 믿는 신(神)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습성이 사람들의 몸에 배어 있었다(암 8:14).
진실한 표(* , 오트 에메트) - 문자적 으로는 '진리의 증표'(a true token, KJV ; a sure sign, NTV)이다. 구체적으로 이 증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하는 맹세 자체를 가리킨다(Woudstra, Keil).

=====2:14
누설치 아니하면 - 정탐꾼들이 맹세에 앞서 붙인 조건으로, 곧 '이 정탐 사건을 침공시까지 누구에게든지 발설하지 아니하면' 이란 뜻이다. 다시 말하면 '네가 마음이 변하여 우리를 배반하지 아니하면'이란 뜻이다(Keil).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이라도 할 것이요 - 13절에서 라합이 요구한 바 맹세는 이 말로 이루어졌다. 구약 성경에서는 맹세를 할 때 흔히 "만일 네가...하면(아니하면), 내가...하리라(아니하리라)" 등의 조건식 표현으로이루어졌고, 그 맹세의 보증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했다. 따라서 맹세자가 맹세시 내건 조건을 만일 상대방이 어겼을 경우, 그 맹세자는 그 맹세를 준수할 의무에서 해방되었고, 반대로 상대방의 조건 준수에도 불구하고 맹세자가 자신의 맹세를 어겼을 경우에는 여호와의 징벌을 면치 못했다. 그러한 맥락에서 여기 정탐꾼들은 '누설치 않을 경우'를 조건으로 '자신의 생명'을 걸고 여호와 앞에 맹세하고 있는 것이다.
인자하고 진실하게(* , 헤세드 웨에메트) - 앞절(13절)에 이미 나타난 '선대', '진실한'이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이다. 따라서 라합은 라합대로, 정탐꾼은 정탐꾼대로 '인자와 진실'이라는 개념 아래서 서로 믿는 마음으로 약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성경에서 이 '인자와 진실'은 언약 관계와 관련하여 나타나는 대표적 표현이다(창 24:27, 49;32:10).

=====2:15
줄(* , 헤벨) - '묶다'를 뜻하는 '하발'에서 파생한 말로서, '끈'(cord), 혹은 '밧줄'(rope)을 듯한다. 영역본 KJV는 '끈'으로, RSV, NTV, Living Bible, JB 등은 '밧줄'로 번역하였다.
그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 성서 고고학자 가스탕(J. Garstang)의 여리고 성 발굴(1930-1936) 결과에 의하면, 여호수아 당시의 여리고 성은 4.5m 간격의 두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두 성벽 사이에 큰 대들보를 올려 놓고 그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라합의 집도 분명 이러한 집들 중의 하나로서, 아마 그 집 들창이 외곡 성벽 쪽으로 나 있었던 것같다. 따라서 바깥 벽쪽으로 나있는 집의 창문을 통해 정탐꾼들이 여리고 성(城)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용이한 일이었다(J.P. Free Archaeology and Bible History).

=====2:16
따르는 사람들 - 정탐꾼들을 쫓는 여리고 성의 추격대를 가리킨다.
만날까 하노니( * , 펜 이프게우) - '만나다'의 히브리어 '파가'는 '마주치다', '습격하다'의 뜻도 내포하고 있다. 또한 '펜'은 '...하지 않도'(lest)의 뜻이므로, 이 말을 직역하면 '마주치지 않도록'(lest...meet,KJV)이다.
산으로 가서...숨었다가 - 혹자(Lange)는 이곳을 동굴이 많은 여리고 북쪽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여리고 성의 남과 북 및 동쪽은 산이 없는 평원 지대로 밝혀졌다. 그런데 북서쪽 지역에는 해발 450m가량의 산이 있을 뿐 아니라, 그곳에는 또한 많은 바위 및 동굴이 있어 은신처로서는 적격 이었다(Woudstra, J.P. Free). 따라서 라합은 정탐꾼들을 이곳으로 도피시킨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오늘날 일대 지역은 '예벨 콰란탈'(Jebel Qarantal)로 불리우는데, 흔히 예수께서 시험받으신 장소로 추정되기도 한다.

=====2:17
맹세에 대하여...허물이 없게 하리니 - 정탐꾼들은 18-20절에서 3가지 조건 < (1)창에 붉은 줄을 매어 달것 (2)온 가족이 다함께 모여있을 것 (3)정탐 사실을 누설치 말것>을 붙임으로써, 라합에게 서약한 자신들의 맹세를 아무런 하자 없이 지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구절은 만일 이러한 조건이 라합에 의해 이행되지 못할 경우, 그들은 자신들의 맹세에 대해 책임이 없음을 뜻하기도 한다(Keil).

=====2:18
이 붉은 줄 - 이 줄은 15절에 나타난바 정탐꾼들을 달아내리운 그 '줄'을 가리킨다(Luther, Keil). 정탐꾼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고 또한 라합과 그 권속을 구하게 될 이 붉은 줄에 특별한 생명적 의미를 부여하여 그렇게 지시한 것 같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이 붉은 줄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예표한다고 해석하였다(Clement, Justinus, Origen, Luther). 그리고 이 붉은 줄의 의미를 출애굽 직전 문설주에 뿌려진 유월절 어린 양의 피와 같은 맥락에서 보고 있다(Matthew Henry). 실로 성경 전체의 사상을 통해 볼 때 '붉은 색'은 생명과 구원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와 밀접히 연관된다(C. Vonk).
네 집에 모으라 - 초대 교회의 교부 오리겐(Origen, 185? - 254?)은 라합의 가족들이 오직 집 안에 있을 때에만 구원이 약속된 사실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구원은 오직 교회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2:19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갈 것이요'(레 20:9)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서, 곧 이 말은 '죽음에 대한 책임은 네가 져야 한다'. 또는 '너의 잘못(죄) 때문에 네가 죽는 것이다'란 뜻이다.

=====2:20
허물이 없으리라 - 이 말에 해당하는 기본 동사 '나카'(* )는 '짐을 벗다', ' -로부터 자유케 되다', '무죄하다'등의 의미이다. 즉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제시한 세 가지 조건중 하나라도 지켜지지 않을 경우, 정탐꾼들은 하나님 앞에서 서약함으로써 자신들을 얽어맨 그 '맹세'로부터 자유케 될 것이라는 뜻이다.

=====2:21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 이스라엘 정탐꾼들에 대한 라합의 전적 순종의 모습이 돋보인다. 즉 라합은 자신과 자신의 권속이 멸망으로부터 구원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이스라엘에 대한 전적 순종 뿐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라합의 이러한 순종은 물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으로 인해 라합은 결국 그리스도의 족보로 편입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마 1:5). 한편 라합의 구체적인 순종의 행동은 이스라엘 군대의 여리고 성 진격에 맞춰 필요할 때 행해졌을 것이다(Keil).

=====2:22
사흘을 거기 유하매 - 두 정탐꾼이 라합의 충고(16절)를 충실히 따랐음을 알 수 있다.
길에서 두루 찾다가 - 직역하면 '모든 길을 수색하다'이다. 여리고 성에서 요단 강까지의 거리는 불과 13km이며, 도보로는 3시간 남짓 소요되는 거리이다. 이 일대를 삼 일 동안이나 샅샅이 뒤졌다는 사실은 정탐꾼들을 체포하기 위해 여리고 성의 군사들이 안간힘을 썼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큰 실수는 정탐꾼들이 숨어 있는 '산'이 아닌 '길'만 뒤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사흘 동안 산 속에서 꼼짝말고 숨어 있으라는 라합의 충고(16절)가 주효했음을 알게 해 준다. 왜냐하면 만알 정탐꾼들이 혹시라도 돌아가는 상황이 궁금하여 산에서 내려와 길로 들어섰다면 틀림없이 발각되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2:23
고하고(* , 사파르) - '조사하다', '쓰다', '수를 세다'를 뜻하는 말로, 곧 보고 겪은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여 샅샅이 보고했다는 뜻이 된다. 한편 이 두 정탐꾼의 보고의 핵심은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다'는 내용인데, 이는 오래 전 가데스에서 모세가 열 두 정탐꾼을 보내었다가 그들의 귀환후 벌어졌던 부정적(否定的)인 상황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임을 알 수 있다(민 13:25-33).

=====2:24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 '붙이다'의 히브리어 '나탄'(* )은 번역상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이나, 대체적으로 '주다', '양도하다', '위임하다' 등을 뜻한다. 따라서 이말은 '우리의 손 안에 넘겨 주셨으므로'라고 해석할 수 있다.
간담이 녹더이다 - 두 정탐꾼이 이처럼 여호수아에게 자신있게 보고할 수 있었던 데에는 분명 라합의 정보(9, 11절)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표현은 매우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자포자기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히브리 특유의 표현 방법이다. 이처럼 히브리인들은 어떤 상황을 묘사함에 있어 추상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대신, 심지어 심적(心的) 상황까지도 구체적인 신체 부위를 예로 들어 마치 눈에 보이듯이 생생하게 표현하는 수사학적 특징을 띠고 있다.

 

 

   본장은 가나안 정복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1:1-4)가 여리고를 점령,  전진  기지를 삼기 위하여 싯딤에서 여리고 정탐꾼을 파송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본장은 그 내용상 크게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김(1-7절), 라합의 슬기(8-21절),  정탐꾼들의  보고(22-24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전체적인 개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여호수아가 두 탐정꾼을 파송(1절), (2) 라합이 이들을  영접하고  보호해 주며 거짓말을 함으로써 그들을 잡으러 온 사람들로부터 무사하게  해줌(2-7절),  (3) 라합이 여리고 성의 상황과 이스라가마로 말미암아 거민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려 줌(8-11절), (4) 라합은 여리고 성이 멸말하게 될 것을 예견하고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 계약을 맺음(12-21절), (5) 정탐꾼들이 무사히 돌아와 여리고 성을  정복할 수 있다는 긍정적 보고를 함(22-24절) 등이다.
 이상과 같은 본장에서 중심되는 주인공은 두 정탐꾼들과 라합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라합은 신약에서 위대한 신앙의 소유자(히 11:31) 그리고 믿음의 선한 행위를  보여준자(약 2:25)로 언급될 정도의 인물이므로 그의 행위에 대해 주의할 필요가 있다.   여리고 성에 들어간 정탐꾼들이 무사히 정탐 활동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라합의 도움 덕택이었다.  라합은 이방의 천한 기생이었는데도 놀라웁게 이미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구원받음으로 이방인도 신앙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 주었으며, 더구나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직계  조상이 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마 1:4 - 6).
 한편 본장이 중시하는 하나의 사실은 이스라엘이 땅을 얻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1:2 - 6)이 실체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여호수아를 통해 두 정탐꾼이  가나안땅에 파견되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여호수아는 1장에서 가나안 정복에 따를  하나님의 전능하신 도우심을 약속받았지만 그의 편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았고, 그 결과 정탐꾼을 파견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은 인간의  행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전제하는 법이다. 즉 여호수아는 물론 가나안 정복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질 것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로서 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세밀한 일들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1. 정탐꾼들을 숨겨 주는 라합(2:1-7)
   여호수아에 의해 여리고 성에 파송된 두 정탐꾼들은 라합의 집에 유숙하게  된다(1절).  그런데 이 사실은 곧 발각되어 여리고 왕에게 보고되고 왕은  사람들을  보내어 라합에게 그 정탐꾼들을 내어놓을 것을 명한다(2, 3절). 그러나 라합은 그들이 들어오긴 했지만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그들을 구원해 준다(4 - 7절).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는 본문에서 우리가 중시할 수 있는 것은 여호수아가 매우  사려깊게 행동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만  믿고 무턱대고 가나안을 공격하려고 하지 않고 두 정탐꾼을 파견하여 그 거민들의  동정을 살핀 다음, 그들의 보고에 따라 공격의 방법을 강구하려고 했다.
 그리고 정탐의 방법에 있어서도 과거 모세가 택한 정탐 방법과 다르게 하였다.  모세는 과거에 가나안 12 정탐꾼들을 보낸 적이 있는데(민 13, 14장), 여호수아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당시 그와 갈렙이 가나안 정복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나머지 10 정탐꾼들의 반대 의견을 받아들였다가 결국 가나안  정복은  포기되고 40년동안 방황하게 되는 비운을 맛보았었다. 이런 쓰라린 과거의 경험을 갖고 있는 여호수아는 이전에 정탐꾼들이 파견될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소수인 두  명의  정탐꾼만 파견하였다. 그리고 온 백성 앞에서 그들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혼자만  알도록 은밀하게 보내고 있다(1절). 이러한 사실은 여호수아가 얼마나 가나안 정복에  세심한 주의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라합의 거짓말 - 본문에는 기생 라합이 여리고 정탐꾼들을 오호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4-6절).  여기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달리  평가하는데  크게 다음과 같은 2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즉 라합의 행위는 믿음의  행위로서  죄악이 아니라는 견해(Lange, Woudstra, Holwerda)와 라합의 행위는 분명한 죄악이지만, 그러나 그  동기가  신앙적이므로  용서되고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견해(Keil,  Calvin, Augustine, Matthew Henry)가 그것이다.  홀베르다(Holwerda)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진실'(truth)이란 '사실과의 일치'를 뜻하지 않고  '이웃이나  하나님께 대한 충실'(Loyalty toward the neighbor and the Lord)을 뜻하기 때문에 라합의 행위
는 거짓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로티우스(Grotius)는 '복음이  전파되기 이전인 구약 시대에는 선한 목적을 가진 거짓말은 죄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정당한 주장이라고 볼 수 없다.  신약 시대나 구약 시대나 거짓은 죄며 아무리 정당화해도 옳지 못한 행위임에는 틀림이 없다.  소위 직무상의  거짓을 정당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칼빈(Calvin)이 지적한대로 진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비록 우리의 의도가 다른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안전을 도모하며 그들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거짓말이 합법적일 수 없음은 진실하신 하나님의 속성에 어긋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합의 행위가 전체적으로 잘못되었다고만 몰아붙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비록 라합의 거짓이 자신과 그의 가족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욕심에서 행한  일이었다 할지라도 그녀가 행한 그 동기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그녀의 믿음에  뿌리
를 박고 있었기 때문이다(히 11:31).  또한 그녀가 정탐꾼을 위해서 한 일은 대의  명분(大義名分)을 위한 일이었기에 그녀에게 의로 인정되었다(약 2:25).  즉 그녀가  사용한 거짓이 죄가 된다고 할지라도 이 죄는 그녀의 믿음적 행위였기에 용서받을 수 있었다.  이는 차차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으려 했던 거짓과 상통하고 있다.   리브가가 에서 대신 야곱을 대치시킴으로써 잘못을 범한 것은 틀림이 없다(창27장).  그렇지만 이 한가지 실수때문에 그녀의 거룩한 열심의 공로마저 인정받지  못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이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 그 실수를 묵인하고 용서하셨던 것니다. 라합 역시 정탐꾼들이 가고 없다는 거짓말을 할 때 잘못을 범하였지만 그녀의 공로로 말미암아 이 잘못은 용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서처럼  결과가
이와 같이 좋게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며 거짓을 미워하고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롬 3:8)을 기본적으로 견지해야 한다.  우리는 이 라합의 경우를 전례로 삼아서 우리의 거짓말을 합법화하고 정당화해서는 결코 안 된다.  정탐꾼들이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이 구원이 거짓에 의해서 되어졌다는  것 자체는 옳지 못한 사상이다<창 34:13-24, 거짓말에 대한 성경적 이해>.

         2. 라합의 슬기(2:8-21)
   여리고 정탐꾼을 구원해 준 라합의 재치가 빛나고 있는 부분이다.  즉 거짓말로 정탐꾼들을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 준 라합은 이제 그들에게 가나안 거민들이 이스라엘로 인하여 공포에 떨고 있음을 알려 준다(8-10절).  이어서 라합은 먼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후 여리고의 파멸의 날에 대비하여 자신의 가정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한다)11-13절).  이에 대해 두 정탐꾼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걸고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맹세한다(14절).  이맹세를 들은 라합은 정탐꾼들을 창문으로  탈출시키고 다시 그들이 안전하게 도망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15, 16절).  이렇게  하여 정탐꾼들은 여리고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 이전에 다음과 같은 3가지 조건을  제시하게 된다.
 즉 (1) 자신들을 성밖으로 달아 내리는 데 사용한 붉은 끈을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 성으로 쳐들어 올 때 그녀의 집을 표시하기 위해 매달아 둘 것(18절 상반절), (2)  라합과 그녀의 모든 가족은 여리고 성이 점령당할 때 아무도 밖으로 나오지 말고 집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28절 후반절, 19절),  (3) 라합이 정탐꾼들과 맺었던 약속에 대하여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20절).
 정탐꾼들이 라합으로 하여금 이렇게 하도록 한 것은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 군대가 쳐들어 왔을때 그녀의 집을 분간할 수 없게 되어 그녀가 살해될 것이기 때믄이었다.  또한 그녀가 비밀을 누설하면 이스라엘 군대가 오기도 전에 먼저 여리고  왕에게 처형당할 것이 분명하므로 그녀의 안전을 위해 매우 세심한 조언을  해주었던  것이다(Calvin).

   붉은 줄의 의의(義義) - 라합의 가정을구원하기 위한 표식으로 사용된 붉은  줄(21절)은 초대 교회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속죄의 피를 예표하는 것으로 가르쳐졌다(Clemens, Justinus, Origenes, Luther, Vonk).  이와 같은 사실은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 근거한 것으로 일찍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될 때에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름으로 그 집 장자는 구원받았었다(출 12:1-13).   이때에 그 가자의 붉은 피는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이 붉은 줄도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우드스트라(Woudstra)는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즉 구약과 신약 사이의 모형과 원형 관계는 색깔이나 혹은 외적인 것들의 관점으로 고찰되어서는 안 되고 내적인 의미의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붉은 줄의 붉은 색깔을 그리스도의 붉은 피의 색깔과 연관시켜 이 붉은 줄이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한다고 하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학자인(Campbell) 역시 붉은 줄과 그리스도의 피는 '구원'의 의미를 동일하게 갖고 있으므로 이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러나 붉은 줄의 붉은 색깔은 그리스도의 붉은  피의 색깔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상의 양 견해에 대하여 우리가 어느 한편을 맞다고 단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 제각기 어느 정도, 또한 어느 측면에선 맞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붉은 줄이 궁극적으로는 라합과 그 가족을 구원하게 된다다는 것만은  잊지 말자.  그리고 그와 아울러 오늘날 우리 인류를 영적 죽음에서 구원해 낸 유일한 방도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사엥서 흘리신 보혈이라는 사실도 또한 잊지 말자(요일  1:7).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 모두는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라고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시혼의 진멸에 대한 언급들 - 모세의 시혼 진멸 사건(민 21:23, 24)은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계속 반복되면서 그 중요성이 강조된다.  본장 10절에 기록되어 있는  라합의 말에도 이 사실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제 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모세는 신명기를 시작하면서 이 사실을 언급하였으며(신 1:4) 바산 왕  옥과  대적할 때에도 이 사건이 얼마나 큰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상기시켰다(신 3:1-11).  또한 요단 서편의 가나안 땅과 관련하여 신앙을 불러 일으키기 위하여서도 이 사실을 다시  언급했다(신 29:7).
 이상과 같은 시혼 진멸 사건은 사실 요단 서편의 가나안 주민들에게 큰 두려움을  일으켜씌며(10절 ; 9:10), 여호수아 역시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의 중요한 사실로서 되새겼다(12:2, 5 ; 13:10, 21, 27).  입다도 호전적인 암몬 사람들의 주장에 맞서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서 시혼과 싸움을 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해서 그들을 패배시켰는지를 설명한 적이 있다(삿 11:12-28).  또한 에스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 이틀 후에 공적으로 죄를 회개하는 자리에서 시혼의 진멸 사건을 포함한 이스라엘  과거  역사의 위대한 사건에 관해 이야기했다(느 9:22).  그밖에 시편 작가들도 과거의 일들을 되살펴 보면서 하나님께서 시혼에 대한 승리를 주신  것에  대해  노래했다(시  135:11  ; 136:19).  그리고 예레미야는 모압의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파멸의  불이 '시혼의 속'에서 나와서 모압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예언했다(렘 48:45). 결국 이 모든 언급들은 이스라엘이 시혼을 진멸한 사건의 중요도를 강조해 주는 것이다.  그 까닭은 이 사건이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앞으로도 계속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확신을 준 전초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신 1:4, 주석>.  즉 승리의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한 어떠한 강력한 대적도 능히  훼파할 수 있다는 진리를 보여 준 것이 바로 이 사건이었기에 성경 기자들은 두고두고  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삼상 17:47).

         3. 정탐꾼들의 보고(2:22-24)
   정탐꾼들이 3일 후 무사히 사명을 완수하고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모든 것을 보고하는 장면이다(22, 23절)  이때 보고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온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으므로 가나안의 모든 거민은 간담이 녹을 정도로 크게  놀라고 두려워한다는 것이었다(24절).  이 사실에서 우리는 탐정꾼들이 얼마나 신앙적이었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여러 인간적인 측면에서보다는 하나님 관점에서 가나안에서 보고 느낀 것만을 간략하게 보고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모든 일상사에 있어서 조차 인간적 관점에서가 아닌  신앙적 안목으로 보고, 판단하는 기본 자세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는 진리에도 불구하고 이를 간과, 인간적 안목으로 매사를 대하면 조그마한 어려움에 봉착해도 쉬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이 인간의 일반 생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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