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여호수아 0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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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입성(1:1-5:12)
몇개의 장면들이 겹쳐 나온다. 첫째는 정복지시(1장), 둘째는 정복확신(2장), 도강(3-5장), 재성결이다. 개별 에피소드를 병렬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장면 장면을 찍어서 나열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러한 기록은 연대기적(논리적)일관성이 아니라 설화적 일관성(narrative coherence)이다. 1장 끝에 3일 후에 요단강을 도강하라고 하는데 이 3일 기간 속에 긴 이야기가 들어있다. 3일이 훨씬 더 걸리는 내용이다. 돌출요소라고 하는데 후대의 첨가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논리적 일관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설화적 일관성을 가지고 기록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자기의 인생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에 이 사건을 이해하는데 도움을주는 이야기를 넣을 수 있다. 이런 성경적인 구조에다가 대고 연대기적 오류다,아니다라는 것은 그 자체가 오류이며, 실증주의적인 방법이다.(이상 김지찬)

1:1-9절까지의 구조

서론-1

명령:요단강 도하, 가나안 땅으로 (2) 명령:강하고 담대(땅을 주리라) (6)
약속: 땅을 주리라(3) 조건:토라를 지킴(형통,강하고
담대하라-7)
경계: (4) 조건:토라를 지킴, 형통 (8)
확신: 함께 하리라(평생) (5) 확신:함께, 강하고 담대(어디를 가든 -9) (미완결형) (명령형)
떠나지 않는다,버리지 않는다 두려워말라, 무서워 말라
(시간적 개념) (공간적 개념)

두개의 짝으로 이루어진 패널이다. "함께 하리라"는 반복되는 것으로 후렴구이다. 이것의 반복은 두번째의 것을 연결시키는 접착제역할을 한다. "함께 하리라"는 것은 첫번째 것을 끝내는 후렴구이고, 두번째도 그러하다.
첫번째 패널은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두번째 패널은 "두려워말라, 무서워말라"가 나온다. 전체 어조는 "강하고 담대하라"이다. 근거는 "함께"하기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에 강하고 담대해야 하는가? 전쟁터에서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이 아니라 토라를 지키는데 담대하라는 것이다. 토라는 율법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가르침이다. 토라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자기들의 민족이 종이었다는 것을기록하는 민족은 없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기억하게 하려 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민족적 기원이 종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의 신들은 자기들에게 거창한 신전을 지어주고 잔치를 베풀어주는 귀족의 신이다. 그러나 여호와는 역동적인 하나님이었다. 가난하게도하고 부하게도 하며 높이기도 하고..... 모세오경은 저들의 신분이 종이었고 하나님께서 해방시켜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런데 율법을
행동규범으로만 보는 경향은 문제이다. 율법은 이스라엘의 사명을 감당할 행동규칙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하명을 확실하게 안다면 행동 규칙은 자연스럽게 따르게 된다.
결국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된다는 금기사항에 매이면 유대교가된다. 특별히 가나안에 들어가면 많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사명과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다. 실제로 우리가 약속을 받았지만 완전한 안정을 얻으면사명과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쉬운 것이다.

=====1:1
여호와의 종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특별한 임무를 담당하는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적 명칭이다. 따라서 이는 본문의 모세 외에도 아브라함(신9:27), 이삭과 야곱(신 9:27), 갈렙(민 14:24), 삼손(삿 15:18), 사무엘(삼상3:9), 다윗(삼하 3:18), 이사야(사 20:3)를 위시한 여러 선지자들(스 9:11), 그리고 신약 시대의 바울(롬 1:1) 등에 게도 적용되었다.
모세가 죽은 후에 - 왕상 6:1의 기록에 근거하여 모세의 임종 시기를 역산하면, 대략 모세의 임종 시기는 B.C. 1405년 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모세의 죽음은 신명기의 마지막 부분인 34장에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여호수아서를 모세오경에 연결시켜줄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서가 모세 오경의 계속임을 보여준다. 이러한사실은 히브리 성경(Massoretic Test) 초두가 와우(* ) 계속법으로 시작되고 있다는점에서도 확실히 뒷받침된다(Calvin, Keil).
모세의 시종 - 여기서 '시종'(侍從)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솨레트'(* )는주로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을 뜻하나, 여기서는 개인적인 업무 보좌관을 지칭하는말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말은 여호수아가 모세의 사환(심부름꾼)이었음을 뜻하는말이 아니라, 모세의 보좌관이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Lange). 그러므로 공동 번역은이를 '부관'(副官)으로 번역함으로써 그의미를 충분히 살렸다. 사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기 전 모세의 부관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한 이스라엘의 제 2인자였다(출24:13;33:11;민 11:28; 신 1:38).
여호수아 - 여호수아가 성경 역사의 표면에 처음 나타나기는 출애굽 직후 아말렉과맞붙은 르비딤 전투(출 17:8-16)에서였다. 그때 이후 그는 시내 산 율법 수여시 모세와 동행했고(출 24:13, 14), 가나안 정탐시에는 갈렙과 더불어 신앙적 보고를 하는 등(민18:8;14:6-9)모세 곁에서 충실히 모세를 보좌하면서 이스라엘의 차기 지도자로서의수업을 쌓아갔다. 마침내 모세 말년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모세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인정하여(민 27:15-23; 신 31:3, 7, 14)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 강을 건너게 하셨던것이다. 출 17:9; 민 13:16 주석 참조.
일러 가라사대 - 가나안 정복 전쟁기라 할 수 있는 여호수아서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종종 사용되었는데(3:7;4:1, 15;5:2, 9;7:10;8:1등), 이는 하나님과 여호수아와의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며, 동시에 가나안 정복의 참 지도자는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게해 준다. 한편 구약시대에 말씀의 전달 방법은 직접적 음성, 꿈, 이상 등 다양하지만(Berkhof), 여기서는 어떤 방법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마 여호수아는모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음성을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Woudstra).

=====1: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 모세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목전에서 죽게된 직접적인 이유는 가데스에서의 비신앙적 행위 때문이었다(민 20:10-12). 그러나 그 속에는 분명 심오한 구속사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에 대하여는 민20:12;신 3:27 주석을 참조하라.
이제(* , 웨아타) - 접속사 '웨'는 대체로 '그리고'(and)로 번역되는데, 여기서는 '그러므로', '그래서'의 뜻이 강하다. 개역 성경은 이 부분의 번역을 생략함으로써 그 의미를 상실시켰지만 영역본 KJV, RSV, NIV 등은 'therefore', 'so', 'then'등으로, 또한 공동 번역은 '그러니'로 번역함으로써 그 의미를 충분히 살렸다. 한편'아타'는 '지금', '곧장', '이때에'를 뜻하는데, 따라서 '그러므로 이제'를 뜻하는'웨아타'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인도해야 할 이유 및 시점을 밝혀 준다.여기에서 그 이유는 바로 앞에 서술되어 있는 '모세의 죽음'이고 그 시점은 '곧장'이다.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 이는 요단을 건너가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대상이누구인지를 말해준다. 즉 여기서 지시어 '이'(* , 하제)는 그들이 다름아닌 '모든 이스라엘 백성'임을 강조해 준다.
일어나(* , 쿰) - 이 말은 본래 말 그대로 일어서는 신체적 행위를 뜻할 때사용되는 동사이지만, 군사적 개념으로 자주 사용되어, 전쟁을 위한 준비(삿 7:15),전쟁 수행(출 2:17), 전쟁의 승리를 뜻하기도 한다.
이 요단을 건너 - '내려가다', 급하게 '흐르다'의 뜻을 지닌 '야라드'(* )에서 파생된 '요단'(* )은 '빠르게 흐르는 강'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Lange).이강은 해발 2,852m인 헬몬 산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호수까지 28km를 흘러 내린후, 거기서 다시 해면(海面)보다 380m나 아래인 사해(死海)까지 직선 거리로 약 104km(곡선거리는 총 직선 거리의 3배에 해당)나 흘러 내려가는 팔레스틴 최장, 최대의 강이다<4:19-24 강해, 요단 강>.
내가...주는 땅 - 3절의 '내가...주었노니', 6절의 '내가...주리라 한' 의 말과더불어,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저 주신 선물임을 보여주며, 동시에 당신의 약속을 변치않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준다. 특히 여기서'주는'(* , 노텐)은 현재 분사형으로,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지금 막 주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1:3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 하나님께서는 과거 모세에게 약속하셨던 내용(신 11:24, 25)을 상기시키심으로써, 그 약속을 어김없이 지키시는 당신의 신실하심을보여주셨다(Goslinga).
내가...주었노니 - 여기서 '주었노니'(* , 네타틴)는 완료형으로서, 장차주실 가나안을 이미 주신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Soggin).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은 신실하사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성취시키실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1:4
광야와...대해까지 - 장차 이스라엘의 소유가 될 땅의 경계가 창15:18-21과 출23:31에는 개략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반면에, 민 35:1-14과 본절에는 보다 상세하게제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절에 의하면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은 남쪽으로는가나안 동남쪽에 위치한 신(Zin) 광야, 서쪽으로는 해 지는 편인 대해(大海) 곧 지중해, 동쪽으로는 큰 하수(河水) 곧 유브라데 강, 그리고 북쪽으로는 레바논 산맥이 그경계를 이루고 있다. 상세한 내용은 민 34:1-14; 신 11:24 주석 부분을 참조하라.
헷 족속 - 가나안 7족속 중의 하나로(신 1:7), 족장 시대 때부터 가나안 땅에 거주해 왔던 큰 족속이었다(창 23:3, 4;26:34;27:46). 이들 족속은 본래 가나안의 둘째 아들 헷의 후손들로서(창 10:15) B.C. 2000년 경에 이미 소아시아 전역에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발전하고 있었다. 그후 이들 족속은 가나안 땅으로까지 들어와 가나안 정복 당시 상당히 넓은 판도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 '헷 족속의 온 땅'이란 표현은 가나안 지경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 것이다(Keil). 한편 고고학적 문헌을보면, 초창기 헷 제국의 왕으로 '두달리아'(Tudhalia)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학자들은이 자를 고임 왕 '디달'(Tidal, 창 14:1)과 동일시 하기도 한다(D. Douglas,New BibleDictionary, 9. 528).
너희 지경이 되리라 - 여기 제시된 가나안 지경이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잠깐 비슷한 범위의 지경까지 차지된 적은 었으나, 한번도 그 모든 지경을 완전히 차지한 적은없었다. 따라서 이 지경은 하나님께로부터 허락된 이상적 범위이며, 이스라엘 백성의순종 여부에 따라 그 판도가 축소될 수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C. Vonk).

=====1:5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리 - '너를 능히 당할 자'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네 앞에 설 수 있는 자'(any man be able to stand before thee, KJV)란 뜻이다. 인간이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듯이, 여호수아 앞에는 어느 누구도 대적하려고설수 없다는 말이다. 여호수아에게 이처럼 특별한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은 곧전개될 가나안 정복 전쟁시 무수한 원수들과의 전투가 있을 예정이었으므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 40년 동안 모세 곁에서 직접 그와 함께 해 주셨던(출 3:12;4:12, 15) 하나님의 능력을 누구보다도 뚜렷히 목격한 여호수아이기에, 지금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이 말씀은 그에게 큰 힘과 용기를 북돋워 주었을 것이다.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 이 말은 앞서 약속한 '너를 능히 당할 자가 없으리라'는 말의 근본적인 이유가 되는 말씀이다. 일찍이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형통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창 26:24;28:15;31:3). 이러한 맥락에서 후일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시기 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최후의 말씀을 남기셨는데, 실로 하나님께서 그 택한 자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마 1:23)사상은 신구약 전체를 통해 흐르고 있는 하나의 큰 맥(脈)인 것이다.
떠나지 아니하며 - '떠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파(* )는 '기울다', '떨어뜨리다'를 뜻한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이 말은 '떨어뜨리지 아니하며'(Blair)로 번역된다.
버리지 아니하리니 - 이 말은 앞에 나오는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한편 시 37:25-33에는, 결코 하나님께서 의인을 악인의 수중에 떨어 지게함으로써 그를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되어 있다.

=====1:6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 동일한 말이 본장 7, 9, 18절에서도 계속 반복됨으로 그 의미를 더해가고 있다. 여기서 '강하게 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자크'(* )는 '손에 힘이 있는 상태'로, 직역하면 '굳건하다'이며 '담대히 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마츠'(* )는 '무릅에 힘이 있는 상태'로 직역하면 '용기를 가지다'이다(사 35:3).
너는...얻게 하리라 -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땅을 상속받도록 할 사람이 다름아닌 여호수아임이 강조되어 있다. 따라서 공동 번역은 이 의미를 충분히 살려'...나누어 줄 사람은 바로 너다'라고 번역하였다. 한편 이 사은 신 3:28;31:7에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열조 아브라함(창13:14-17;15:18-21;17:7, 8;22:16-18), 이삭(창 26:3-5), 야곱(창28:13;35:12)등에게맹세하신 사실을 가리킨다(Campbell). 이 사실은 민11:12;14:16, 23등에 나타나며, 신명기에서 집중적으로 강조되고 있다(신1:8;4:31;6:10;7:12,13;8:1;11:9,21;13:17;19:8등).

=====1:7
오직...극히 - '오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크'(* )는 '확실히', '분명히'를뜻하며, '극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오드'(* )는 '매우', '아주'라는 뜻의부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수식어를 사용하여 이스라엘 군대의 지휘자인 여호수아의 마음 자세를 더욱 가다듬게 하고 있다.
모세가...명한 율법 - 이 구절은 본서에서 율법(모세 오경)을 모세의 저작으로 언급한 몇몇 구절들(8:31-35;20:1, 2;21:1-3)가운데 첫 구절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 개역 성경에는 '그것으로부터'를 뜻하는 '밈멘누'(* )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원어 성경(MT)에는 이 말이 나타나 있는데, 여기서 '그것'은 율법을 가리킨다. 그리고 '치우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수르'(* )는 '빗나가다', '방향을 돌이키다'를 뜻하는 말소서, 이는 하나님의 뜻을 엄격히 따르는 정도(正道)로부터 이탈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성경상 이 말은 '좌','우'라는 말과 결합되어 자주 묘사된다(신 2:27;5:32; 왕하 22:2).
그리하면...형통하리니 - 이미 주어진 약속을 통해 볼 때(신 8:1;11:8,22-25;28:1, 2, 14;29:9), 이스라엘의 '형통함'은 율법의 준수와 관련하여 조건적인것으로 묘사되었다. 이처럼 구약에서는 신약에서보다 형통함과 말씀 준수가 더욱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한편 '형통하다'의 히브리어 '사칼'(* )은 '번영하다', '성공하다'를 뜻한다. 신 29:9 주석 참조.

=====1:8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 율법을 특별히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고 한 것은 '잊지 않도록 항상 외우라'는 의미의 문학적 표현이다. 또한 여기서 '떠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무쉬'(* )는 '어기다', '벗어나다'라는 뜻으로서, 앞으로도 계속 떠나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미완료 시제를 사용했다.
묵상하여(* , 하가) - 이 말은 단순히 율법에 대한 이론적 사색이나 명상을뜻하지 않고, 실제 생활에서의 적용 및 실천을 위해 율법을 깊이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Keil & Delitzsch, Vol. II. p. 30). 따라서 시편 기자는 시 1:2에서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복있는 자라고 하였다.

=====1:9
명한 것이 아니냐 - 의문문의 형태를 사용하여 강한 긍정의 뜻을 전달하고자 한 수사학적 표현이다(민 23:19).
강하게 하고...놀라지 말라 - 신 31:6 주석 참조.

=====1:10
유사들(* , 쇼테림) - 동사 '솨타르'에서 유래한 말로서, 문자적으로는 '글쓰는 사람' 또는 '서기'(書記)를 뜻한다. 따라서 이들은 아마 군사 지도자들이라기 보다는 고지(告知), 회집(會集), 기록(記錄)등 이스라엘의 제반 행정 업무를 담당한 관리들(officers)을 가리키는 듯하다(Craigie, de Vaux). 신 20:5 주석 참조.

=====1:11
진중에 두루 다니며 - '진'(Camp)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하는 곳'을 뜻하며, '두루 다니며의 히브리어 '아바르'(* )는 '지나지 않는 곳이 없도록 돌아다니다'를뜻한다.
양식을 예비하라 - 여기서 '양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체다'(* )는 일반 '여행용 양식'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유대 학자들의 주장처럼 '만나'를 가리키지 않는다. 즉 이 양식은 일종의 군량미(軍糧米)로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에 있어꼭 필요한 것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의 소산(所産)을 먹기 전까지 만나를 계속 공급하셨다(5: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식을 준비하게 하신 것은 (1)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사람 사는 땅'(출 16:35)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2)전쟁의 소란 중에 준비된 양식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들어갈 것임이니라(* , 라보) - 동사에 목적을 나타내는 전치사 라멧(* )이연결되어 있으므로, 직역하면 '들어가기 위하여'로 해석된다.

=====1:12,13
모세가...이르기를 - 르우벤 지파,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와 모세 사이에 이루어진 약속을 가리킨다. 곧 요단 동편 땅을 이들 지파가 다른 지파에 앞서 먼저 차지하는 대신 요단강 서쪽 지역의 가나안 본토 정복 사업에 이들 지파가 선봉에 서서 참전하다는 계약(민 32:16-32; 신 3:18-20)을 가리킨다.
안식(* , 메누하) - '쉬다'를 뜻하는 '누아흐'(* )에서 유래한 말로,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모든 대적들을 패배시키고 얻는 평화의 상태를 의미한다(신 12:10;25:19). 그러나 이 안식은 영원한 안식이 아니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될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에 불과했다(Hughs, 시 95:11).
이 땅 - 14절에서 '요단 이편 땅', 15절에서 '요단 이편 해 돋는 편'이란 말로 더 정확히 표현되고 있다.

=====1:14
요단 이편 땅 - 민 32:19 주석 참조. 용사들(* , 콜 깁보레 하일). '모든 용감한 전사(戰士)'를 듯한다(6:2;8:3;10:7). 한편 4:13에 의하면 요단을 건너 전쟁에 참여한 두 지파 반의 수는 4만명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민 26:7, 18, 34에 의하면 이들 지파 중 20세 이상으로서 싸움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총 11만명이었다. 따라서 7만명은 아마 처자와 가축을 보호하고 그들이 분배받은 요단 동편 땅을 지키기 위해 뒤에 남아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Keil & Delitzsch, op. cit. p. 32; Woudstra).
무장하고(* , 하무쉼) - '다섯'(* ,하메쉬)이라는 숫자를 뜻하는 어근에서 파생된 말로 '임전 태세를 갖추다'란 의미이다. 그런데 어근상 유추하건데, 이것은 아마 다섯열로 부대를 편성한 것이거나, 아니면 다섯 명이 한 조(組)가 되는 전투 대형을 갖춘 것으로 짐작된다(de Vaux).

=====1:15
안식 - 기본 동사 '누아흐'(* )는 '쉬다'란 기본 뜻 외에도 '차지하다', '머무르다', '정착하다'란 의미도 지니고 있다(왕하 2:15).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그것을 온전히 차지하여 그곳에 정착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요단 이편 - 민 32:19 주석 참조.

=====1:16
명하신 것은...보내시는 곳에는 - 개역 성경에는 원문에 두번이나 나오는 '모든'( * , 콜)이란 말이 모두 번역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원문에 따라 직역하면 '명하신 모든 것은... 보내시는 모든 곳에는'이다. 이것은 르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자기들이 세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인 자세로 그 약속을 수행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1:17
범사에 모세를 청종한 것 같이 -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잘 순종치 않은 경우가 많았다(신 9:24;31:27). 따라서 이 말은 그들이 모세에게 그러한 불순종의 행동을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세를 마땅히 순종했어야 할 지도자로 늘 인식하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당신을 청종 하려니와 - 여호수아를 모세와 연관시킴으로써, 백성들은 여호수아를 모세의 합법적 후계자로 인정하고 있다(Calvin).

=====1:18
명령을 거역하며 - 직역하면 '당신의 입에 반항하며'라는 의미이다. 특별히 여기서 '거역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라'(* )는 신 1:26, 43;9:23; 삼상 12:14등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과 관련되어 사용되었으나, 이곳에서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그의 대표자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과 연관되어 사용되었다(Keil & Delitzsch, Vol. ?. p. 33). 이러한 사실은 곧 하나님의 대표자를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죽임을 당하리니 - 신 17:12에 따르면,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고 하였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가나안 정복 전쟁의 지휘자 여호수아의 말을 거역한 자는 신정 정치의 법에 따라 처형될 것이었다. 실례로 여리고 성의 물건을 모두 진멸시키라는 여호수아의 명을 거역한 아간 일족은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7:20-26).
마음을 강하게...담대히 하소서 - 6절; 신 31:6 주석 참조.

 

 

 

   여호수아서의 기록 목적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통치하시는, 택한 민족인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보여 주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여호수아서는 모세 오경에 나타나 있는 역사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도록 연결시켜 주며 여호수아 통치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보이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호수아서의 기록 목적에 맞게 여호수아서의 시작 부분은 신명기의  마지막부분과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모세 오경은 모세의 죽음에 대한  기록으로 종결되는데(신 34:5), 여호수아서는 모세의 죽음을 언급함으로 시작한다(1:1). 이  사실은 여호수아서 저자가 본서를 모세 오경에 기초하여 기록하였음을 보여 주고,  본서의 사상을 모세 오경과 연결시키려고 했음을 나타내 준다. 사실 모세의 장례식이 끝나자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여호수아를 부르셨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에게  순종할 것을 맹세하므로서(신 34:9) 그는 하나님과 백성들에게 모세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음을 인정받았었다. 이러한 사실은 모세의 후계자로 세워진 여호수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1 - 9절), 여호수아의 통치 시작(10 - 15절),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에게 순종할 것을 맹세함(16 - 18절)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본장에 잘 나타난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서처럼 이제 본서는 새로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본서를 읽으면서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될 사실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곧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많은 사역을 감당하다가 가데스에서의 범죄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로 눈앞에 두고 죽고 말았다. 그러나 이 가나안 정복이라는  대업은 모세의 죽음으로 중단되지 않고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로 이어져 계속되고 결국에 가서는 성취되어진다. 즉 당신의 종 모세는 죽었을지라도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므로 또 다른 종 여호수아를 세워 당신의 영원한 계획과 약속을  성취시키신 것이다. 따라서 모세의 죽음은 가나안 정복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결코  변화시키거나 중단시킬 수가 없었다. 바로 여기에 본서를 대하는 우리의 초점이  여호수아가 아닌 하나님께로 향해야 하는 아유가 있는 것이다.

         1.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1:1-9)
   모세 사후(死後)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세움 받는 장면이다.  즉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셔서 가나안을 전복할 것을  명령하셨다(1-5절).  그리고 이러한 대임(大任)을 맡게 된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약속을 주셨다. (1) 그를 당할 자를 아무도 없을 것이며(5절), (2) 당신이 모세와 함께 계셨던 것처럼 그에게도 함께 계실 것이다(5, 9절).  (3) 가나안을  반드시 주신다는 것 등이다.(6절).  그리고 이와 아울러 (1) 마음을 강하게 대하고 담대히 하라(6, 7, 8절).  (2) 율법을 떠나지 말고 주야로 묵상하며, 다 지켜 행하라(7, 8절)는 권면의 말씀을 주심으로 그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주셨다.
 가나안 정복이라는 대업(大業)을 앞둔 여호수아에겐 이러한 약속과 권면의 말이 분명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그로서는 가나인 정복  사업을  수행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기 떠문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하나님과 백성들의 공적인 인정을 받긴 했지만, 이제 막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에 백성들 전체를 일사 불란하게 통솔한다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고, 게다가 앞으로 공략해야 할  가나안 족속들의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때 모세와 함께  하사  큰 권능과 기적으로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도 여전히 함께  해주시겠다고  한 것은 분명 백만 대군을 얻은 것보다 더 큰 용기와 위로를 불어 넣어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었다.

   여호수아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 -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5절)라고 약속하셨다.  이러한 약속은 비단 여호수아에게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주는 의미는 크다.  이제  이에  대하여 살펴보면 곧 다음과 같다.
 (1)이 약속은 여호수아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가나안 정복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인간적인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러한 약속은 어떤 인간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그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만 함께 하신다면 그에겐 아무런 두려움과 어려움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도 삶의 힘과 용기가 부족할  때 이러한 말씀을 붙들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생애 중 힘이 빠지게 될 때  일반적인 데서 힘을 보강하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힘을 제공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영적인 힘이 빠질 수 밖에 없고, 이 영적인 힘이 빠지면  아무리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것이 많이 있어도 그 삶은 무기력해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누구든 어려움에 봉착하였을 때에는 그 무엇보다 먼저 절대적 능력자이신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 하심을 간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시 121편).
 (2)이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용하다.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에게만 그런 약속이 주어졌고, 또 여호수아는 그러한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가나안 정복 전쟁을 능히 수행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잊어서는 안될 사실은 이 약속이 여호수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과거 여호수아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와도 함께 하시는 것이다(마 28:20). 야고보는 이르기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 5:17, 18)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여호수아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특별히 여호수아에게만 함께 하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나 우리에게나 동일하게 약속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갈때 우리 역시 여호수아와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결단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히 11장).

   여호수아와 율법 -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율법책을  입에서  떠나지 말게하며 주야로 묵상하고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할 때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교훈하시는 장면이 나온다(7 - 9절). 여호수아가  담당한  사명의 성공 여부는 율법의 준수 여부에 달려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처럼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개념은 신명기 27:15 - 28:14에  근거를 둔 것으로, 이 개념은 본서 8 장에도 나타나고 있다.
 즉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의 전초 기지에 해당하는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정복한 후 제단을 쌓고 축복과 저주의 율법을 선포하게 된다(8:34, 35). 이러한 일을  행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했을 때는 여리고 성을 정복했지만 아간의 죄로  말미암아 아이 성전투에서는 실패하고 말았으며, 그러나 다시 그들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자 그 전투에서 승리하게 된 것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동시에 과연 율법을 지킬 때는  축복과 형통함이 주어지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저주와 심판이 주어진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느꼈을 것이다.
 한편 이밖에도 여호수아가 율법을 철두 철미하게 지키려고 한 사실은 여호수아서  도처에 잘 나타난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의 가족들을 요단 동편에 남고  용사들은 요단서편의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나머지 지파를 도운 일(1:13, 14), 에발 산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고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곳에 새긴 일(8:30 - 32), 가나안의  모든 족속들을 철저하게 진멸하고 온 땅을 취한 일(11:10 -23), 가나안 땅을 제비로  분배한 일(14:2), 두 지파반에게는 요단 동편 땅을 기업으로 준 일(14:3), 레위  지파는 기업을 받지 못한 일(14:3)등의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따른  것이었다.  여호수아는 임종을 앞두고 백성들에게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23:6)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움 받은 여호수아에게 처음 주신 말씀과 동일한  것이다(7절).  지도자로서의 생애 동안 여호수아는 이 말씀이 과연 진리임을 체험하였을 터이니 백성들에게 다른 모든 말보다도 이 말을 유언으로 남겨 주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신앙 고백적 당부가 아닐 수 없다.

         2. 여호수아의 사역 시작(1:10-15)
   가나안을 전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2절)가 유사(有司)들에게  이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도록 지시하는 장면이다(10, 11절).  그리고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가족들은 요단 동편에 남겨두고 용사들은 요단 서편의 가나안  정복에 동참할 것을 지시하면서 그 정복이 종결되면 다시 돌아와서 요단 동편의 땅에 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는 장면이다(12-15).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두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1)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자마자 즉시 실행에 옮겼다.  여호수아가  이처럼 즉시 일에 착수한 것은 결코 자신의 지위나 야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가 어떤  주저함이나 반감없이 이처럼 그 자리에서 즉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우리 역시 즉시 실천에 옮길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곧바로  순종하는  것은  신자의  본분이다(삼상 15:22).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과 뜻을 보여 주시면 그대로 따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값있는 일인 것이다.
 (2)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나머지 지파를 기꺼이 도우려 하였다.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이들 두 지파 반에게 일찍이 모세와 그들 사이에 맺어진 약속, 곧 요단 동편의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는 대신에, 요단 서편의 가나안 정복 사업에 이들도  참전한다는 계약(민 32:16-32 ; 신 3:18-20)을 상기시키고  이를  실행하도록  명령한다(12-15절).  그러나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두 지파 반이 이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약속을 했다 하더라도,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점, 가나안 정복 전투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약속의 한쪽 당사자인 모세가 죽었기 때문에 그 약속은 효력이 상실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점 등의 이유로 약속을 깨뜨리려 마음먹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꺼이 이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하였다(16-18절).  즉 이들 두 지파 반은 비록 요단 동편에 남게 될 사람들이나 모두 의리있는 사람들로서, 하나님과의 수직선 관계 뿐만 아니라 나머지 지파 형제들과의 관계 역시 무시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라 할 수 있는 모든 성도들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비단 자신의 안일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다른 사람의 복리 증진에도 이바지할 수 있어야 함을 배울 수 있다(마 5:13-16).

   가나안 땅 정복 명령 - 본문에는 가나안 땅 정복을 위하여 여호수아가 재차 백성들을 독려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11, 13, 15절).  그런데 이러한 가나안 땅 정복 명령은 어떤 인간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명령이다(2-4절).  이제  이러한 명령이 갖는 제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1) 가나안 땅 정복은 여호수아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복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창 13:14, 15 ; 출 3:17 ; 신 7:1, 2). 그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 정복을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수행하였을 뿐이다.  가나안 정복은 그들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 때문이었다.
 (2) 이 명령은 의로운 것이다.   흔히 불신자들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는 이 하나님의 명령을 대할 때 하나님은 불의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남의 땅을 짓밟을 수 있는가 하고 의아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가나안이  심판을 받아야 마땅할 정도로 죄로 가득차 있었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는  전혀 부당한 명령이 아님을 알 수 있다(창 15:16).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정의와 도의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죄악을 범하고 있었던  그들을 심판하셨던 것이다)욥 8:3).  즉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많은 가나안  족속들을 잔인하게 진멸했지만 이 전쟁은 결코 불의한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구현하는 의롭고 거룩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3) 이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러부터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가나안 땅은 그들이 몸소 정복해야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물론  하나님께로부터 가나안 땅을 약속받은 것은 사실상 그들이 가나안 땅을 소유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당사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이었다.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은 받았지만,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결국은 땅을 소유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4) 이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명령이었다.  사실 오합 지졸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막강한 군사력을 소유하고 있는 가나안을 정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어려운 일을 하도록 명령하신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감당하기 쉬운 일만 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명령도 주신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십자가와  고난의  길이다(마 16:24).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듯이 영적인 싸움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엡 6:10-20).

         3. 백성들의 맹세와 기원(1:16-18)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그러했듯이 여호수아에게도 전적(全的)이고  무조건적으로 순종할 것을 맹세하면서(16절)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여호수아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바라는 동시에(17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 것을 기원하고 있는 장면이다(18절).  이와 같이 백성들이 과거 모세에게 순종했던 것처럼 여호수아에게 순종하겠다고 서약한 주된 이유는 분명 하나님께서 함께 계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의 기반 없이는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이러한 서약을 할  리 만무이다.  즉 그들에게는 모세의 명령이 곧 하나님의 명령이었듯이 이제  여호수아의 명령은 곧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이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죽음까지 당할  각오가 되어있음을 밝혔던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말한 "다잇다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18절)라는 기원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한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하 하라"(6절)는 권면과 표현은 동일하지만 의미상 다소 차이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당신이 그와 함께 할 것이므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하셨지만, 백성들은 그에게 절대 복종할 것이므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사실 아무리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도 백성들의 절대 순종이 없으면  여호수아가 인간적으로 강하고도 담대해지기 힘든 법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호수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든지, 혹은 그를 추종하는 자들과 추종하지 않는 자들과의  분열이 일어나 다툰다든지 하면 가나안 정복의 대업은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분열하지 않고 일치하여 여호수아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원했던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아뭏든 그들의 맹세와 기원의 내용은 그들 스스로  여호수아를 그들이 새로운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음을 충분히 입증해 주고 있다.

   여호수아의 새 지도자로서의 정통성 - 여호수아는 아밀렉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장군으로 처음 나타나며(출 17:8-16), 그 후 그는 모세의 부관으로서 회막 안에서  수종을 든다(출 33:11).  이러한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이전의 주된 공적은  에브라임 지파의 대표자로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갔던 일이다(민 13:8).  갈렙과  함께  그는 그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14:6), 그리하여 그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입성하는 것이 허락되었다(민 14:30, 38 ; 26:65 ; 32:12).
 한편 40년 광야 생활이 끝난 후 모세는 이러한 여호수아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앞에서 자신의 후계자로 세운다(민 27:18-23  ;  신  31:7-29).  이 사실은 여호수아가 모세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음을  하나님과 백성들로부터 공적으로 인정받았음을 보여 준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지도자로 임명됨에 대하여 아무런 불만도 갖지 않고 그에게 순종하기를 맹세했는데(신 34:9 ; 수 1:17), 이는 그들의 여호수아의 지도권이 결코 인간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부여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같은 여호수아가 명실 상부한 지도자로 인정받게 된 결정적인  때는  그를 통해 요단 강 도하의 기적이 일어났을 때이다.  즉 모세가 홍해 도하의 기적으로 지도자로서의 확고한 기반을 삼은 것과 마찬가지로 여호수아 역시 요단 강 도하의  기적으로 지도자로서의 확고한 기반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3:7 ; 4:14).  왜냐하면 이 가적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계셨던 것처럼 여호수아에게도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실례적인 증거로 제시한 가장 명증(明證)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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