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일곱 단을 쌓고...일곱을 준비하소서 - 발람은 자기 고향 메소포타미아의 풍습대로(신23:4),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동의와 협조를 구하고자 하였다.한편 제단과 제물의 '일곱'이란 숫자는 바벨론 지역의 거주민에게 신성(神性)한 수로 여겨져 왔던 것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근거하여 성경 문학적 표현으로 종종 사용되는 '완전'및 '거룩'을 상징하는 수(數), '7'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발람은 이방의 풍습을 따라 유일하신 참 신으로서가 아니라, 여러 민족 신들중의 하나로생각했던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결국 발람이 경배한 신은 진리와 윤리의식및 바른 내세와 역사에의 전망이 없는, 봉헌된 제물에 따라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유치한 이방 우상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제사 양식과는 거리가 먼, 재난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는, 순전히 기복적(祈福的)인 제사 형태였다(왕상 18:26-29).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발람의 입을 주관하신 것은 이방의 간교한 술사(術士)를 통해서도 능히 역사하실 수있는 당신의 전능성을 이방에 널리 보여 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족과지역에 국한되는 당대의 각종 우상 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살아계신 여호와의 역사였다. 심지어 하나님은 사단의 활동을 통해서도 당신의 종들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신다(욥1:6-12).
===23:2
발락과 발람이...드리니라 - 발락은 제물들과 제단을 준비했고, 발람은 제주(祭主)가 되어 제사를 집례했다.
===23:3
번제물 곁에 서소서 - 번제물은 백성의 정성을 집대성한 것으로서, 그 곁에 선다는것은 곧 백성의 심정을 대표해서 그 제사에 깊이 참례했음을 뜻한다. 이처럼 고대의왕들은 백성의 생명과 재난을 관할하는 자로서, 항상 섬기는 신(神) 앞에서 책임적 존재로 활동했다.
나는 저리로 갈지라 - 발람은 제사 장소를 떠나 이방의 술사들이 통상 그러했듯 신접(神接)하거나 점궤 및 신탁을 받으려 할 때 흔히 찾던 특정한 곳(높고 한적한 장소)을 향했다. 따라서 이는 이방 종교의 사술적(邪術的)형태이다(24:1). 한편 카일(Keil)에 따르면, 당시 고대 근동의 여러 이교(異敎)에서는 신으로부터의 확실한 예언의 메시지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 현상을 통해 신으로부터 전해지는 표징(sign)을 얻고자 했다고 한다(Hengstenberg). 이 때 술사들은 흔히 자신이 정해둔 특별한 장소에서 그 표징을 구했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지시하시는 것 - 발람은 이스라엘의 저주를 위해 그들의 신(神)인 여호와께 신탁을 의뢰했다. 아마 그는 여호와의 허락없이도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방법을알았다면 그것을 곧 시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전혀 없었으므로 여호와의지시를 고대했던 것이다. 즉 그는 여호와의 능력과 권위를 알기는 알았으나 믿고 순종치 않은 패역한 사술가였다(눅 8:26-39).
사태난 산(( ,쉐피) - '높다', '긁어서 벗기다'란 뜻의 히브리어 '쇠파'(* )에서 유래한 말로서 '메마른 곳', '고지'를 의미한다. 이는 자연재해나 채석 등으로 벌거숭이가 된 산 임을 암시한다. 한편 KJV, TEV, 공동 번역 등에는 '사태난 산'을 단순히 '꼭대기'(top of the hill)로 번역하고 있다. 여하튼 앞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이교의 술사들은 점괘(占卦)나 신접(神接)을 위해 전망이 좋고 인적이 없는 높은산 꼭대기나 벌거숭이가 된 장소를 즐겨 찾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발람이 '사태난 산'에 이른 것은 여호와의 주권적인 계시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주술(呪術)에 의해 점괘를알아보려 했음을 암시한다.
===23:4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시는지라 - 하나님께서 발람의 제사를 기뻐 받으시고 그에게 임하신 것이 아니라, 발람을 통해 역사에 대한 당신의 절대적인 주권과 당신이 친히 이스라엘을 보호, 축복하심을 세상 만방에 알리시기 위해 이번 일에 적극 개입하신 것이다. 내가...
드렸나이다 - 바람은 이방 종교 제사를 통해 드려진 자신의 제물이 하나님을 만족케 했으며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의(義)인 것처럼 착각하였다. 따라서 이는 짐승몇 마리로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무지하고 교만한 처사와 다름없다.
===23:5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어 - 하나님은 탐욕에 차 있는 발람의 마음을 강권적으로 저지하시고, 오히려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의 메시지를 그 입에 두셨다. 따라서 발람은 전 인격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다만 여호와의 뜻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된것 뿐이다. 이는 전 인격이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그 입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당당히 선포하는 이스라엘의 참 선지자들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출4:15;렘1:9;겔3:27).
===23:6
번제물 곁에 함께 섰더라 - 우두커니 서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성껏 기원의희생제물을 태우고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3절). 물론 그 기원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에 저주가 내려지기를 바라는 기원일 것이다.
===23:7
노래(* , 마솰) - 이는 문자적으로 '비유' 또는 '잠언'이란 의미이나, 그것은일반적인 노래나 시(詩)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는 '교훈적인 글귀', '지혜의 글' 등으로 이해함이 좋다. 아람에서...
동편 산에서 - 두 표현 모두 발람의 고향 '메소포타미아'를 지칭한다(신 23:4). 특별히 여기서 '아람'은 본래 셈의 아들인데(창10:22), 그 후손들이 하란을 포함한 유프라테스 강변에 정착 하였다. 따라서 메소포타미아 북서부 지역을 흔히'밧단 아람'이라 묘사한다( 24:10;25:20).
야곱을 저주하라...이스라엘을 꾸짖으라 - 여기서 '야곱'과 '이스라엘'은 선민(選民)을 가리키는 동일한 의미이다(시 78:71;79:7;135:4). 특별히 여기서 발람이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시적 용어로 '야곱'을 사용했다는 점은 그가 이스라엘의 족장사(族長史)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Pulpit Commentary). 그리고 '꾸짖으라'(* , 조아마)란 말은 격노하며 분개하고 협박하라는 뜻으로서, 감정이 극에 달한 자가 상대를 위협하고 격멸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23:8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어찌 저주하며 -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거나 축복 하는 것이 순전히 그들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소관에 달린 것이며, 자신은 거기에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따라서 이는 당대의 유명한 복술가발람을 믿었던 모압왕 발락의 계획을 여지없이 깨뜨리는 선언이었다(Keil). 한편, 발람의 이 말은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성과 초월성을강조한 말이다(신 30:15;애 3:38). 그리고 여기서 환기해야 할 사실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은 것은 '원하지 않아서'(does not want)가 아니라, '할 수 없어서'(cannot do)라는 점이다.즉 발람 자신으로서는 모압 왕의 의도를 따라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일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모압 왕 발락이 제시한 부와 명예(22:37)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후일 그에 대한 성경의 평가가 '뇌물을 밝히는 자'(느 13:2), '불의의 삯을 사랑한 자'(벧후 2:15), '삯을 위하여 어그러진 길로 몰려간 자'(유 1:11) 등으로 묘사되고 있는 점을 보아 분명해 진다.
===23:9
홀로 처할 것이라 - 이스라엘이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고립될 것이라는, 혹은 심리적으로 조용하게 거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거룩한 민족으로서 열방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다른 영광과 특권을 가졌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곧이어 뒤따르는 동의적(同意的)인 표현, 곧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 라는 말에 의해 확실히 뒷받침 된다. 그런데 발람은 이러한 시상(詩想)을 모압 평지에 고고하게 따로 진(陣)을 치고 있는 이스라엘의 독존적(獨尊的)인 모습에서 외견적으로 발견한 것 같다(Baumgarten).여하튼 발람의 이 예언은 역사의 흐름속에서 그 진가 발휘되는 바, 곧 헹스텐베르그(Hengstenberg)가 지적한 대로, '고대 세계의 위대한 제국들 곧 애굽, 앗수르, 바밸론등은 역사 속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져 갔으나, 이스라엘은 온갖 멸망의 위협으로부터벗어나서 오늘날에도 여전히(영적으로는) 신약 교회 속에서 번성하고 있으며, 그리고(실제적으로는) 비록 지금은 거부된 상태이나, 언젠가는 회복될 운명으로서 그 존재를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1-iii. p. 180).
===23:10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 여기서 '야곱의 티끌' 이란 일찍이 하나님께서야곱에게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창 28:14)라고하신 약속에서 기인한 표현으로서, 곧 티끌처럼 많아진 이스라엘 백성을 일컫는다. 그리고 '야곱의 티끌'이란 단순히 숫자적인 의미에서의 팽창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권위와 능력과 모습 등이 탁월한 것에 대한 묘사로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사분지 일 - 시내산 계시 이후 이스라엘은 행진시나 정주시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눠 진영(陣營)을 형성하고 있었다<2장>. 발람은 그중 가장 잘 보이는 한 진영을 바라보면서 그 1/4만으로도 충분히 위압적인데, 하물며 다 모이면 얼마나 그 위세가 높겠는가라는 의미로 위의 말을 했던 것이다.
의인의 죽음...같기를 바라도다 - 발람은 하나님이 엄위하시는 영광스럽고도 축복된 이스라엘 진영을 목격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감동되어 지신도 악한 길에서 떠나 의인 처럼 살다가 죽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한편 그가 여기서 그토록 열망한 '의인의죽음'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생(生)의 완성이자 영생으로 들어가는 통로로서(고전15:31;고후 4:11), 궁극적 의미의 축복이라 할 수 있다(잠 14:32).
===23:11
온전히 축복하였도다(* ,베라크다 바레크) - '축복하다'를 뜻하는 동사'바라크'(* )가 중복된 형태로서, 곧 '복스러운 복의 말만을 계속 하였다'는 의미이다. 더군다나 이 말 앞에 놀라움을 나타내는 감탄사 '힌네'(* , 세상에, 저런)가 있어 발락이 발람의 이 축복의 말에 대해 그 놀라움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23:12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 , 에쉐모르 레다베르) - 원뜻은 '말하는데 어찌 주의하고 경계하며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이다.이는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강권적으로 주신 말씀을 그가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모압인들에게 그대로 전달했다는 뜻이다.
===23:13
그 끝만 보리니 - 발락은 발람이 위용에 찬 이스라엘의 진영을 모두 바라봄으로써,기가 질려 그들을 저주할 수 없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 진영의 끝 부분만을 보게하여, 이스라엘이 미약한 민족에 불과하다고 인식시키고, 그로 인해 마음껏 저주하게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발락은 이스라엘 진의 끝만 보이는 장소로 위치를 옮겼다.
===23:14
소빔 들 - '소빔'(* , 초빔)은 '파숫꾼들의 들'이란 뜻으로서, 사해 북동쪽비스가 산을 접하고 있는 고원지대를 가리킨다. 그리고 '비스가 산'은 아바림 산맥의한 봉우리로서 여러 봉우리로 둘러 쌓여 있었다<21:20>. 그러므로 이곳에서 당시 이스라엘 진영이 머물고 있는 모압 평지(22:1)를 보면 산 봉우리들로 가려지기 때문에 이스라엘 진영 전체를 볼수 없게 된다.
===23:15
저기서(* , 코) - 이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라기 보다, 방법과 방식을 의미하는말로서 '그와 같이'란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키 위한 첫번째 시도(1-3절)와 같은 방법대로, 두번째로 이스라엘의 저주를 꾀하였다.
만날 동안에 - 여기서 '만나다'(* , 콰라)란 말은 무엇을 얻기위해 만난다는뜻으로써, 곧 복술가들에 있어서는 신탁(神託) 혹은 점괘(占卦)등을 구하기 위해 접신(接神)을 한다는 의미의 제의(提議) 전문 용어이다(Keil).
===23:16
그 입에 말씀을 -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사악한 일을 동조하는 발람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하신 바를 추진해 가셨다<5절>. 그러나 끝내 이러한 하나님의오묘하신 뜻을 저버리는 발람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된다(31:8).
===23:17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 황급히 묻는 발락의 이 질문은 여호와께 대한 그의 신앙이 반영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그의 강렬한 의지를 대변하는 질문이다. 따라서 그의 이 질문 속에는 역사의 대 주재이신 불변의 여호와를 제물에 놀아나는 일종의 하급 신(神)으로 취급한 독신(瀆神)의 흔적이 있다.
===23:18
일어나...자세히 들으라 - 이 예언은 이스라엘 위에 저주의 선언이 내려질 것을 고대하는 발락에게 어리석고 사악한 생각에서 깨어나 주의 깊게 진리의 메시지를 들으라고 깨우친 책망과 훈계의 말이다.그런 의미에서 여기 '일어나라'(* , 쿰)란 말은영적으로 각성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특히 '자세히 들으라'(* , 하아지나 아다이)는 말은 문자적으로 '나에게 귀를 달라'로서 '오직 내가 하는 말에만신경을 쓰라'는 뜻으로 이해된다(욥 32:11).
===23:19
하나님은 인생이...인자가 아니시니 - 하나님의 불변하심과 진실하심을 소개하기에앞서, 그 서론으로 하나님과 피조된 인간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제시하고 있다. 흔히인간과 본질적 차이를 지닌 하나님의 속성을 일컬어 본체적 속성, 비공유적 속성 또는절대적 속성이라 지칭하는데 이에는 네 가지가 있다. (1) 존재 근거를 자신 안에 가지시는 독립성(자존성)이다(출 3:4;시 33:11;사 40:18;요 5:26;롬 11:33, 34). (2) 그분의 사상.의지.목적.작정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존재와 본체에 있어서 결코 변함이 없으신 불변성이다(말 3:6;히 6:17;약 1:17). (3) (본질, 시간, 공간 등)모든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우시다는 점에서 무한성이다(시 90:2;145:3;렘 23:24;행 17:27) (4)절대 자존하시며, 불변하시며, 무한하신 하나의 영이시라는 점에서 유일성이다(신 4:35).
식언치 않으시고(* ... , 로이카제브) - 직역하면 '결단코 거짓말 하지않으신다'로서, 진리되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반영한 말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들처럼 때를 따라 그 약속하신 바를 지키지 않고 그 뜻을 시시각각으로 변경하시는 분이 아니라, 말씀하신 바를 온전히 지킴으로써 당신의 영광과 명예를 보존하시는 분이다(딤후 2:13;히 6:18). 그러므로 이같은 발람의 말은 앞서 선포되었던 축복(9, 10절)이 결코 변개될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후회가 없으시도다 - 여기서 '후회하다'(* , 이트네함)란 '한숨쉬다','동정하다'는 뜻의 '나함'에서 파생된 말로 자신의 말과 행위에 대해 전의지적으로 깊이 뉘우치는 상태를 가르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와 경륜에 있어서 털끝만큼의 후회도 없으신 분이시다(롬 3:4). 이는 하나님의 진실하신 성품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당신이 계시하신 것과 언약하신 것 등에서도 이러한 진실성은 그대로 적용된다(민 23:19; 고전 1:9; 딤후 2:13). 한편, 그러나 여기서 후회가 없으시다는 말은 당신의 피조물이 당신을 저버린 채 멸망으로 치닫고 있을 때 당신의 사랑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고통으로써의 후회까지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시95:10). 이때의 후회는 결코 원망과 자책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순수하고 깊은 사랑의 또다른 감정이다(창 6:6;출 32:14).
===23:20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초월적인 섭리 앞에 자신의 사특한 의지를 접어 두어야 하는 연약한 인간의 진실한 고백이다. 사실 하나님의 뜻을 파괴하려는 사단과 그 무리들은 날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축복을 손상 시키기 위해 힘쓰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축복이 당신의 백성에게 온전히 전달되도록 역사 하신다(롬 11:29). 한편 이 말은 후일 범죄한 사울에 대하여 사무엘이 한 말에서도 같은 의미로 나타낸다(삼상 15:26-29).
===23:21
야곱의 허물을...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 여기서 '허물' (* , 아웬)이란'헛됨', '거짓', '부정', '우상'등의 뜻으로서 곧 죄악에 대한 총체적 용어로 볼 수있다. 그리고 '패역'(* , 아말)이란 '진저리나는 고역', '슬픔', '비참함' 등의의미로서 곧 앞의 '허물'이 가져다 주는 필연적인 결과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보지 않으사 그 죄악의 결과가 빚어내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간과치 않으시기 때문에 그들을 책할 이유를 도저히 발견할 수 없다'는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Keil , Delitzsch). 결국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범한수많은 죄악(민 14:22;시 95:10)을 영영히 진노하실 심판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신다는뜻이다. 즉 이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죄의 은총을 강조한 말이다(사 1:18). 그런고로더나아가 이 말은 신약 성도들이 비록 허물 많은 존재이나,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다는사실 하나로 의롭게 되는 대속의 원리를 예시한다(롬 3:28,30;갈 2:16). 이처럼 죄로인해 절망의 심연에서 불행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던 자가 구원 얻어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이다(엡 2:6-8). 한편 칠십인역(LXX)과 탈굼역(Targums)은 본절의 주어가 명확치 않다는 점을 들어 본절을 "야곱의 허물을...이스라엘의 패역을 보는 자가 없으며..."란 뜻으로 번역 했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그 의미는 위의 해석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결코 죄 있는 상태의 인간과는교제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계신다'란 말은 앞서 언급되었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허물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더불어 계심은 곧 이스라엘이 특별히 축복받은 존재이자,특별히 하나님과 언약 관계가 형성된 민족임을 강력히 시사하는 말이기도 하다(삼상17:46).
왕을 부르는 소리 - '부르는 소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루아트'(* )는 '귀먹을 정도로 소리치다', '즐거운 소리를 발하다'란 뜻의 '루아'에서 파생된 말로서, 일종의 '환호'라 할 수 있다(삼상 4:5). 따라서 이 말은 '왕을 송축하는 환호'로 해석 된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신민(臣民)으로서 그들 중에 늘 함께 거하시는왕이신 하나님께 기쁨의 소리를 발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 본다. 사실 하나님께서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 것은 그들을 당신의 백성 삼으시고, 그의 왕으로서 환호(영광)받기 위함이었다(창 17:8;출 6:6,7).
===23:22
하나님이...들소와 같도다 - 여기서 '하나님'(* ,엘)은 '엘로힘'(* )의시적(詩的) 축약어로서 '강한 능력의 소유자' 혹은 '전능하신 신'을 가리킨다. 또한'인도하여'의 원어 '모치암'(* )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분사형으로서 하나님이 지금도 인도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계속 인도하실 것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Keil). 이처럼 이스라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지속적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들소'와 같은 힘으로 전진해 갈 수 있었다. 한편, 그리고 여기서 '들소'(* ,레엠)는 강력한 두 뿔과 튼튼한 어깨를 가진 짐승으로 가축으로 길들여질 수 없는 야생 동물로 묘사 되었다(신 33:17;욥 39:9-11;시 22:22). 따라서 '들소'는 이스라엘의'용맹', 능력', '위용', '독립성' 등을 비유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3:23
사술이 없고...복술이 없도다 - '사술'(邪術)과 '복술'(卜術)은 고대 근동의 이교도들이 장래를 점치거나 신탁(oracle)을 구할 때 사용했던 주요 방편이다. 먼저 '사술'(* ,나하쉬)은 자연계의 변화나 인간과 동물의 세계에서 발견되는 비일상적 사건들을 통해 미래를 예측했던 방법이다(레 19:26에는 '복술'로 번역되고 있음). 그리고 '복술'(* , 케셈)은 점술가의 심령에 인식되어진 '가상적'(Pretended)신의 계시를 통해 예언하는 방법이다. 결국 이 두 방법은 이방 우상 숭배자들의 능력, 특히발람 자신이 지닌 능력을 대표하는 기능들인 바지금 발람은 이것들로는 선민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이때에...어찌 그리 크뇨 하리로다 - 여기서 '이때(* ,카에트)란 '지금'(now)이 아니라 '적당한 때'(Modern Language Bible, a proper time)란 뜻으로 봄이 더좋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누구나 이스라엘의 대한 말할 때에 언제나 하나님의 크신일로 인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까닭은 하나님이 친히 그들 가운데 역사하시고 섭리하시며 한없는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이방의국가들이 사술이나 복술 등으로 국가의 미래를 점(占)쳐 보려 애쓰나, 이스라엘은 그들의 신 여호와의 명백하고도 공개적인 계시(啓示)에 의하여 그들의 과거와 현재 및미래가 분명하다는 사실을 언급한 말이기도 하다. 이에 헹스텐베르그(Hengstenberg)의 다음과 같은 해석은 유효 적절하다. 즉 "이러한 원리는 모든 시대의 교회 공동체와성도 개인에게도 적용되니, 곧 세상의 지혜는 마치 파멸로 이끄는 징조 및 점과 같으나 하나님의 교회 및 성도는 하나님의 분명한 계시로 말미암아 그 뜻을 받았고, 또한 분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Keil & Delitzsch, Ibid., pp. 184, 185).
===23:24
이 백성이 암사자 같이...일어나서 - 야곱은 임종시 유다에 관한 예언으로 "유다는...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창 49:9)라 했다. 이는 유다의 후손 중에 탁월한 권능의 왕이 날것에 대한 암시엿다. 그런데 발람이 이 예언을 이스라엘 전체에 적용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이 타민족을 훨씬 초월하는 힘과 영광과 위엄을 지닌 것을 강조하였다.
===23:25
저주하지도...축복하지도 말라 - 모압왕 발락은 두번째 신탁에도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메시지가 언급되자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그 결과 그는 발람에게 차라리 침묵할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 요구에는 자신의 두번째 계획조차 수포로 돌아간데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와 절망이 짙게 깔려 있다. 이처럼 악인의 계획은 궁극적 의미에서 처참한 실패로 끝이 난다(잠 24:19, 20).
===23:26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수 없다고 - 이것은 발람의 예언 속에서도 언급된 바대로(23절), 자신의 그 탁월하다던 사술 및 복술도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서는 도저히 무용지물(無用之物) 밖에는 되지 않는 것을 발람이 고백한 말이다. 즉 자신의 입술은 이미 하나님의 장중 안에 사로잡힌바 된 사실을 인정하는 말이다.
===23:27
다른 곳으로 인도 하리니 - 고대 이교도들의 특징은 자신의 끈질긴 노력 여하에 따라서 신(神)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신념이었다. 발락 역시 그러한 신념에 따라 하나님의 분명한 계시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신의 사악한 의지를 꺽지 않고있다.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시리라 - 직역하면 '하나님의 눈에 옳게 보여질 지 모르는 일이다'로서 이는 곧 신(神)의 비위를 맞춤으로써 자신이 계획한 바를 이뤄보고자 하는발락의 샤머니즘(shamanism)적 발상이다.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탁월케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기사를 여러번 고지 받고서도, 이처럼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보려한 발락은 곧 멸망을 눈앞에 두고서도 계속 자신의 고집을 실행함으로써 하나님을거듭 반역하는 멸망당할 악인들의 전형(典型)이라 할 수 있다.
===23:28
브올산 - '브올'은 '공지'(空地)라는 뜻으로서, 느보 산과 비스가 산이 속해 있는 아바림 산맥(27:12;33:47,48;신 32:49)의 한 봉우리였다. 발람은 모압 평지와 보다 가까운 이곳에서 이스라엘 진영을 뚜렷이 내려다 볼 수 있었다(24:2).
===23:29,30
발람이...나를 위하여 - 이전 두 번의 경우와 준비물 및 제사 방법은 동일하다(1-2, 14). 그러나 몇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거듭 시도되는 이 악한 계획은 물질의노예로 전락한 추악한 종교인의 끈덕진 노력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멸망 으로 치닫는인간의 끝없는 욕망(약 1:15)의 실체를 제시함과 더불어 앞의 두 예언 (7, 18절)이 발람의 확고한 신앙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격파하고 파죽 지세(破竹之勢)로 전진해 오고 있다는
소문을 접한 발락은 위기를 느낀 나머지 브돌의 복술가 발람을 초청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한다(22장). 본장은 발락의 초청에 응한 발람이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의
메시지를 전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장면은 다음 장(24장)까지 계속되는데 그의 예언의
주내용은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번영과 축복에 관한 것들이었
다. 그야말로 발람은 예언하는 순간만은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본장의 내용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발락과 발람이 메
소포타미아의 풍습(신 23:4)에 따라 일곱 제단을 쌓는 장면(1-6절). 이스라엘을 저
주치 못한다는 내용의 발람의 첫번째 예언과 그에 대해 발락이 불평하는 장면(7-12
절). 두번째로 일곱 제단을 쌓는 장면(13-17절).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
라엘의 위용을 그 내용으로 하는 발람의 두번째 예언과 그 예언에 극히 분노하는 발락
의 모습(18-26절). 발락이 브올 산 꼭대기에 다시 제단을 쌓는 장면(27-30절) 등이
다.
이와 같이 발락이 계속적으로 복술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한 것은 그 당
시 가나안 원주민들의 신관을 그대로 반영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즉 그들은 각 지방
마다에 신(神)들을 모시고 있었으며 다른 지역의 신들의 존재도 인정하는, 이른바 다
신교(多神敎)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각 신들의 능력에 따라 신의 우
열을 가렸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것이다(삼상 5:1-6). 이러한 생
각으로 발락은 발람의 복술을 이용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저주의 메시지는 번번히
차단되었고 오히려 발람의 입술에는 이스라엘을 위한 복되고 선한 메시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이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신 위에 뛰어난 신이시며, 모든 존재들을
친히 다스려가시는 만유의 주(主)이심을 보여주기에 넉넉한 사건들이었다(엡 4:6). 이
러한 본장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결단코 당신의 백성의 위기 상황을 그대로 방관
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모든 사건과 인격을 지배하셔서 평안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 된 자의 행복이다(롬 8:31-39).
1. 발람의 첫번째 예언(23:1-12)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을 신(神)의 저주로 멸망시키기 위해 발람을 바알의 산당으
로 인도하였다(22:41). 본문은 바로 그 산당에서 진행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즉 이곳에서 복술가 발람은 자신의 고향 메소포타미아의 풍습에 따라 단을 쌓고 제
사를 드림으로써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의 동의를
구하고자 하였다(1-6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발락과 발람의 의사와는 반대로 이스라
엘을 결단코 저주할 수 없는 이유들을 발람의 예언하는 입술에 두셨다(7-10절). 이에
발락이 심히 불평했으나(11절), 발람은 여호와의 강권적인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피력하였다(12절).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것은 발락이 제시한 물질에 눈이 어두워진 발람은 하나님께
묻기도 전에 이미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계획을 그 마음에 굳히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결정은 자기가 하고 하나님께는 눈먼 노예처럼 힘만을 빌려달라는 식이었다. 이는
분명 하나님의 주권을 모독하고 침해한 월권 행위였다. 이런 행동은 발람이 하나님을
유일신 여호와로 믿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그에게는 '여호와'가 고유 명사가 아닌 보
통 명사 중 하나였던 것이다. 즉 그는 여호와를 유일하신 참 신으로 알지 않고 여러
잡신들 중 하나로 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종종 발견되는데, 우
리들은 흔히 자신의 욕심을 추구해가면서 신관을 확립하지 못하고, 또 그분을 온전히
신앙하지 못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 주술(呪術)에 대한 성경적 고찰.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절대 권위서인 성경에는 현
대적 안목(眼目)으로 볼 때 미신으로 규정할 수 밖에 없는 많은 현상들이 기록되어 있
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복술(卜術)', '점(占)', '마술(魔術)'등으로서 성경은 이
들을 모두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우상 숭배로 단정하고 있다(레 19:31;20:6,27;신
18:11;왕하 23:24).
I. 복술과 점: 성경에서 말하는 복술과 점의 의미 및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
과 같다.
1. 복술과 점의 의미-복술은 어떤 일의 결과나 미래를 알기 위한 목적으로 사물을
관찰하거나 특수한 초자연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행위이며, 점 역시 어떤 일의 결과(미
래)를 알기 위해 그 일의 자연적인 진행을 방해하지 않는 한도내에서 특수한 방법을
통하여 사술을 시행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은 장래 일을 알기 위한 목적
으로 시행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동일한 부류로 취급할 수 있다.
특히 이 두 개념을 표현하는 히브리어는 혼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에스겔
13:6의 '점'이나 민수기 22:7의 '복술'은 모두 히브리어로 '점치다'는 뜻을 가진 '카
삼'()의 번역이다. 그리고 창세기 44:5의 '점'이라는 말과 레위기 19:26의 '복술'이라
는 말도 히브리어로 '관찰하다','점치다'는 뜻을 지닌 '나하쉬'()의 번역이다. 이는
성경에서 '복술'과 '점'을 동일한 의미로 이해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신 18:10;
사 44:25;렘 14:14;미 3:6).
2. 복술(점)의 방법-복술은 그 방법상 인격적인 것과 비인격적인 것(주를 이룸)으
로 구분할 수 있지만 어떤 신적 존재가 어떤 사실에 대해 정보를 제공해 준다는 의미
에서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예언: 거짓 예언자들과 신탁자(神託者)들이 악령이나 사단의 세력에 의하여 어
느 한도내에서 장래의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을 말한다(왕상 22:5-23;왕하 3:13). 이
는 거룩한 백성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하나님의 뜻으로서 계시되는 선지자의 예언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꿈과 해몽: 성경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따라 꿈을 꾸고 또한 해석하는
일도 있으나(창 31:11;37:5;40:8;단 1:17), 사악한 자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에 의
해 꿈꾸기를 소원했으며 또한 꿈 해석을 사사로이 풀이하는 등 하나님의 정보 전달 수
단과는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였다(신 13:1-5;렘 29:8). 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도의 의
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는 꿈을 통해 인간과 의사 소통을 한
다고 알려졌다. 이는 일종의 꿈을 도구로 하는 복술로 이해할 수 있다.
점성술(占星術): 어떤 일이나 사건의 진행 과정을 미리 알기 위해 해, 달, 항
성(恒星), 별 등을 관찰하는 방법을 말한다(레 19:26;신 18:9-14;왕하 17:16;사
8:19;14:20;47:13;65:11;렘 10:2;암 5:25-27;행 7:42). 이는 고대 세계에서 학문으로
서의 가치까지 인정될 정도로 그 권위를 지닌 방법이었다. 그런데 예수님 탄생 고지
(告知)를 담당했던 '한 별' 사건(마 2:7-10)은 사술의 일종인 점성술에 의해 해석되?
서는 안되며 단지 하나님께서 별을 연구하는 자들에게 메시야의 탄생을 계시한 단 일
회적 사건이었다.
초혼술(招魂術): 사악한 악령을 통하여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냄으로 장래의
일을 알려는 방법이다. 성경에서는 이에 대해 엄중한 정죄와 책망을 하고 있다(레
19:31;20:6;신 18:10;삼상 28:9-19;대하 33:6;사 8:9).
동물 내장 점술: 동물의 창자와 간에 그 동물의 생명이 있다고 여겨 그것의 형
세를 보고 신(神)의 뜻을 점쳤던 복술이다.
기계적인 방법: 물로 점을 치는 방식(hydromancy)과 불로 점을 치는 방식
(pyromancy), 제비봅기, 주사위 던지기, 작은 판이나 막대기의 모양을 보고 점을 치는
방법 등이 있다.
기타, 동물의 동작, 자연의 갑작스런 변화 등을 이용해 점을 치기도 했다.
II. 마술: 복술(점)이 초자연적인 힘을 빌어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 범위내에
서 장래 일이나 사건을 지식적인 정보 차원에서 알려고 하는 것에 비해 마술은 귀신의
힘이나 자연 질서에 반(反)하는 힘을 빌어 초자연적인 능력을 실제적인 차원에서 발취
하며, 어떤 결과를 알아내려고 하는 비정상적 행위이다. 구약 성경에서 마술사는 귀신
의 힘을 빌어 가족, 종족, 민족의 정상적인 생활까지 파괴할 위험성을 지녔을 뿐 아니
라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할 위험 또한 높았기 때문에 철저히 배척되었다(레
20:27;신 18:10).
성경 문화사적으로 볼 때 '마술'은 주로 애굽에서 맹위를 떨쳤고(출 7:8-13;8:7,18;
겔 21:21), '점'은 바벧론에서 흥행한 것으로 여겨진다(22-24장). 신약에서는 마술에
관련된 사건이 자주 나타나는데 그들은 주문 등을 통해 사람에게서 귀신을 좇아내려
했다(마 12:17;행 19:13). 특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귀신의 총수 바알세불의 힘으
로 귀신을 쫓아낸다는 괴변을 늘어놓기도 했다(마 12:24). 여하튼 성경에서는 마술을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악령에 의해 행해지느 것으로 정죄하여(레 20:27), 이 일을 행
하는 술객들은 영원己히 타는 지옥 불못에 떨어질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계
21:8;22:15).
III. 결론: 예수님께서는 성육신하셨을 때 마귀와 귀신과 온갖 더러운 것, 악한 사
단의 모든 세력을 물리치시고 십자가에서 승리하셨다. 따라서 그분의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마귀와 귀신의 힘으로 행해지는 점, 복술, 마술 등은 참으로 무가치
하다. 성도가 이러한 주술적인 방법으로 어떤 일의 결과나 사정을 알려고 한다면, 이
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에게 도움을 구하는 행위가 되고 만다. 오직 우리의 장래는
하나님의 장중에 놓인 것이니 그분의 말씀과 뜻에 따라 우리의 앞날을 조망해 보는 것
이 진정 신앙적인 방법일 것이다.
2. 발람의 두번째 예언(23:13-30)
결코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노라는 발람의 예상 밖의 예언을(1-12절) 접했던 발락
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하여 두번재는 사술 의식(24:1)을 결행했다.
즉 발락은 이제 발람을 비스가 산 꼭대기로 인도하였고(13, 14절), 발람은 이곳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동의를 구하기 위해 '바알의 산당'에서 했던 것처럼(1-12절) 동일한
이방 종교 제사 의식을 집행했다(15-17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발락의 간
악한 기대와 발람의 탐욕에 빠진 마음과는 달리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말씀을 발람의
입에 두셨다(18-24절). 즉 그 예언의 주내용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을 끝까지 지
키시는 분이시며, 그렇기에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성공리에 끝날 것이라는 사실이
었다. 이 예언을 접한 발락은 또다시 화를 내었으나(25절) 발람은 그 예언이 전혀 자
신의 의사와는 무관한 것이었음을 변명한다(26절). 이렇게 하여 두번째의 이스라엘 저
주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발락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저주의 주술을 위한 새
로운 장소로 발람을 다시 인도하며 거기서 또다시 제단을 쌓는다(27-30절).
이처럼 하나님과 그 나라 백성을 해하려는 어리석은 악인의 계획은 끈질기게 감행되
지만 모든 역사와 인격을 친히 다스려 가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같이 좌
절되고 만다. 따라서 성도가 악인의 도전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역사의 주관
자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만 한다(요 16:33).
*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
하였음에도 불고하고 광야 40년 동안 수없이 많은 부끄러운 범죄를 저질렀었다(14:22;
시 95:10).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범한 수많은 불의를 당신이 영
영히 진노하실 심판의 대상으로 보지 않으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수많은
오류와 허물에 대해 순간순간 응징하기는 하셨지만(히 3:7-11), 그들을 영영히 벌하지
않으시고 다른 열방들과는 달리 흠없고 의로운 민족으로 간주하셨던 것이다.
물론 이같은 사실은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허물이 많고 연약하지만 그
인생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죄
와 허물을 보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의롭다 선언하시는 것<출 11:4-8 강해, 하나님의
선민과 세상의 차이>과 같은 이치이다(롬 3:28,30; 갈 2:16).
그런데 한 가지 명심해 둘 사실은 하나님께서 예외적으로 열방 앞에서 이스라엘 민
족을 대하실 때에 흠과 허물이 없는 의로운 민족으로 보신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이
스라엘 민족을 자체적(自體的)으로 대하실 때 그 민족 개개인의 험과 죄를 덮어두신다
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즉 이스라엘은 선민의 자격으로 하나님과 이러한
특수적인 관계에 놓였다는 것이지 개인의 모든 죄까지도 무더기로 사면 받은 것이 아
니었다. 그들은 개개인이 하나님께 대하여 속죄의 은총을 덧입기 위한 각종 제사와 경
건한 의식에 참여해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공동체의 일원이 된 우리들은 그 은혜를 빌미로
개인의 죄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물론 한번 성도로 부름 받은 우리는 영원히 구
원의 반열에서 제외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같은 구원의 약속이 곧 우리의 불법한 행
위를 정당화 해주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실로 성도가 범하는 불법은 어떤 상황이나
어떤 여건에서도 죄악이다. 그러나 이 죄악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범한 죄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거나(고전 11:32) 주의 백성으
로서 하나님께 그 보응을 받는 것이지(롬 14:10;고후 5:10) 세상과 함께 영원한 심판
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니다(고전 11:32).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영영히 수여 받은 우리들은 그 놀라운 은혜에 항
상 감사, 찬송해야 할 것이며, 더불어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그 크
신 사랑의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진솔한 참회의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요일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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