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여호와께서 ... 일러 가라사대(* , 와예다베르 예호와) -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민1-21장은 대부분 '여호와께서말씀하셨다'라는 선언으로 시작된다. 7장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선언이 빠진 11, 12,14, 16, 20, 21장이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패역한 모습을 다루고 있어 이채롭다. 그러나 그 내용 중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라는 선언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장은 하나도 없다. 그만큼 본서는 이스라엘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사 이스라엘을 친히 지휘하시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를 역설(力說)하고 있는 것이다.
===2:2
기(旗) - 성막을 중심으로한 네 방향 곧 동서남북을 대표하는 각 지파의 진(陣) 깃발을 가리킨다. '기'의 종류에 대해서는 1:52 주석을 참조하라. 그런데 이것들은 각각유다 깃발(18절), 르우벤 깃발(10절), 에브라임 깃발(18절), 단 깃발(25절). 그러므로이스라엘 군대는 이 네 깃발을 중심으로 4대(隊)를 이루어 행진했던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이 네 지파들은 모든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들로서 장차 구원 받을 모든 피조물(4는 피조물의 숫자)을 암시하기도 한다(계 4:6-11). 한편 유대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네 군단(軍團) 깃발의 문장(紋章)과 색깔은 다음과 같았다고한다. (1) 동쪽 유다 진영을 대표한 기는 웅크린 사자의 모습이 그려진 녹색기였다.여기서 사자의 모습은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라고 한 야곱의 예언을 반영한 것이고(창 49:9), 녹색기는 판결 흉패의 12색깔 중 유다 지파를 상징하는 '녹주옥'을 반영한것이다(출 28:17). (2) 남쪽 르우벤 진영의 기는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홍색기였다. 이는 르우벤이 장자로서 가족의 머리였기 때문인 것 같다(창 49:3). (3) 서쪽에브라임 진영의 기는 송아지 형상이 그려진 황색기였다. 이것은 요셉이 해몽한 바 바로의 꿈에 나타났던 소를 연상시킨다(창 41:1-4). (4) 북쪽 단 진영의 기는 독수리가새겨진 백색과 홍색이 섞인 기였다. 이는 뱀으로 묘사된 단(창 49:17)이 이를 싫어하여 뱀의 천적인 독수리를 채택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그 깃발의 색깔은 판결흉패의 '벽옥' 색깔을 반영한 것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Testament, Vol. I-iii. pp. 17-18). 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러한 그들의 전승 근거는 다음 두 가지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즉 첫재, 문장은 야곱의 임종시 예언(창49:1-27)에 기초한 것이고 둘째, 색깔은 대제사장의 판결 흉패의 색깔(출 28:15-21)에기초한 것이다. 한편 유대 랍비들은 이러한 네 군단의 문장(紋章, crest은 후일 에스겔의 환상 속에서도 분명히 확증된다고 한다(겔 1:10). 그러므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이 네 지파의 깃발은 하나님을 옹위하고 있는 모든 피조계를 대표하는 4생물들의 모습과 일치한다(겔 1:4-14; 계 4:6-11). 또한 성막과 그 사면의 깃발들, 그리고 천국의보좌와 보좌 주위의 4생물들의 관계를 유추해 보면, 실로 광야에 세워진 성막은 천국과 하나님 임재의 상징임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광야의 진(陣) 배치는 오늘날광야같이 험
종족의 기호 - 여기서 '기호'(* , 오트)란 '신호', '표', '표시', '깃발' 등을가리킨다. 이것은 네 방향을 대표하는 네 지파의 '기'(* ,데겔)와는 달라 단순히12지파 각 종족을 상징하는 깃발일 것이다(Keil). 그리고 각각의 '기호'에 배경을 이루는 색깔은 아마도 대제사장이 달았던 흉패위에 박힌 12개 보석의 색깔과 동일할 것으로 추측된다(출 28:17-21).
회막을 사면으로 대하여 - 직역하면 '회막 주위로 마주 보라'는 뜻이다. 한편 KJV는'회막 주위에서 멀리 멀어져'(far off about the tabernacle)로, NIV와 공동 번역은'만남의 장막에서 조금 떨어져'(the Tent of Meeting some distance)라고 해석했는데이는 수 3:4을 참조한 의역인 듯하다. 수 3:4에는 언약궤와 이스라엘 진과의 거리가2000규빗(약 912m) 정도 떨어지도록 명령되고 있다. 그런데 RSV는 원문에 충실하게'각 방면에서 회막을 보게끔'(facing the Tent of Meeting on every side)으로, 만일이것이 옳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천막 입구는 회막을 향해 배치되었을 가능성이높다. 즉 이스라엘은 항상 성막을 바라보며 그곳을 사모하고 특히 그곳에 임재해 계신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레 19:30; 단 6:10). 물론 '외인이가까이 오면 죽임을 당하는'(1:51) 규례로 보아 회막과 주거지와의 거리는 어느정도떨어져 있었을 것이다.
===2:3
동방 해 돋는 편(* , 케드마 미즈라하) - 직역하면 '해 뜨는 방향인 동쪽'이다. 이는 성막의 앞 방향 곧 행진 방향이기도 하다(3:38). 또한 이곳은성막 주위에 진 배치를 시작할 때 제일 처음 언급된 곳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영광되고아름다은 자리임을 암시한다. 이곳에 위치한 지파들은 유다의 기(旗)아래 모인 자들로서 행군할 때도 제 일 대로 진행하는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유다 지파를 향한 야곱 예언의 성취라 할 수있다(창 49:10). 이 예언은 다윗 때에 꽃을 피워(삼하 2:4-7; 5:1-3)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다. 실로 유다가 해 돋는동편을 차지한 것은 의로운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말 4:2)께서 유다의 가계를 통해나실것을 예시한다(히 7:14). 과연 예수께서는 해처럼 찬란한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우리를 생명과 진리의 길로 인도하셨다(요 8:12; 9:5;10:3,4). 한편 밧모 섬에서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바라본 바 그리스도의 얼굴이 해와 같았다는 사실은 위의 내용과 잘 부합된다(계1:16).
진 기에 속한 자라 - 즉 동쪽 방향을 대표하는 유다 진(陣) 기에 예속된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표현은 종속적인 의미라기 보다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에게 내린 지휘권에 자발적으로 순종함을 가리킨다. 실로 이스라엘은 여호와 단 한 분의 왕으로 족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지파 백성들은 각자의 인격과 지위를 인정해야 했으며 서로가유기체적인 관계를 지닌자들로서 서로를 섬기며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데 힘써야했다. 이런 점에서 출애굽 여정 중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광야 교회'라 부를 수있는 것이다(고전 12:4-31).
유다 자손의 족장은 ... 나손 - 하나님께서는 각 지파을 지도할 우두머리 한 명씩을 선출하셨다. 그런데 그 지도자들은 지난번 인구 조사 때 모세와 아론을 도와 실무를 담당했던 자들이었다. 즉 1:4-16 에 기록된 지파의 두령들이 2:3-31에서 족장으로재임명 받았던 것이다. 한편 재역 성경에서 족장이란 말로 표현될 수 있는 히브리어는'알루프'(* ), '나시'(* ), '로쉬'(* ), '사르'(* ) 등이 있다.그런데 특이하게도 창세기에는 '알루프'만이 쓰였고, 민수기에는 대부분 '각시'가 쓰였다. 본서에 자주 쓰인 '나시'는 '들어 올리다',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 올리다' 등의 뜻인 '나사'(* )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족장'(나시)이란 말은 다른누군가에 의해 우두머리(prince, chief)로 높여진 자를 가리킨다. 즉 각 지파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에 의해 들어 올려진 자'가 곧 족장이다. 이는 결국 족장의 권위가 하나남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나타낸다(롬 13:1).
===2:4,5,6,7,8주석
1:5-15 도표 및 1:20-46 도표를 참조하라.
계수함을 입은 자 - 1:45 주석 참조.
===2:9
제 일대로 진행할지니라 - 즉 '첫번째로 출발해야 한다'(RSV, they shall set outfirst)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첫번째'(* , 리숀)란 말은'머리'(* , 로쉬)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의 머리, 곧행진시 선봉에 서는 영예를 누리게 된 셈이다(창 49:10). 그러나 그것은 직분상의 머리가 아니라 전투적 사명에 있어서의 머리를 가리킨다. 실로 유다 진 기에 속한자들은싸움에서 물러서기를 싫어했다. 그 단적인 예가 80세의 노년에 이르러서도 전투에 앞장 섰던 유다 지파 출신의 장군 갈렙의 용맹성에서도 잘 나타난다(민 13:6,30; 수14:13,14; 15:14). 진정 하나님은 비겁한 자를 요구하시지 않는다. 오직 강하고 담대한 자라야 그의 부르심을 따라 죄악과 싸우는 전투에 앞장 설 수 있는 것이다. H.W.롱펠로우가 그의 시[인생 예찬]에서 '말 못하고 쫓기는 짐승이 되지 말고 싸움하여 이기는 영웅이 되라'고 외친 것 처럼 지금은 영적 전쟁을 자발적으로 감당하는 성도들이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 따라서 아이작 왓츠는 '뭇 성도 피를 흘리며 큰 싸움 하는데나 어찌 편히 누워서 상 받기 바랄까?' 라는 찬송시로 성도들의 분발은 촉진했다. 실로 용맹했던 유다 지파처럼 각자에게 부과된 사단과의 영적 전쟁을 충성스럽게 수행하기 위해 '제일 대'에 편성되어 싸움터로 나가는 성도야말로 오늘날 하나님 나라 건설에 꼭 필요한 존재인것이다.
===2:10
남편 - 남편은 행진하는 방향으로 보면 오른쪽에 해당한다. 통상 히브리인들은 오른쪽을 권능과 영광의 상징으로 보았다(출 15:6,12; 시 118:15,1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본래 야곱의 장자였던 르우벤의 자손들에게 이처럼 특별한 배려를 베푸신 듯하다.
===2:11,12,13,14,15
주석 1:5-15 도표 및 1:20-46 도표를 참조하라.
계수함을 입은 자 - 1:45 주석 참조.
===2:14
르우엘(* ) - 1:14에 언급된 '드우엘'(* )의 오기인 듯하다(Keil,Pulpit Commentary). 아마 '레슈'(* )와 '달렛'(* )의 문자적 유사성으로 말미암은 사본 필사가들의 착각으로 잘못 씌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공동 번역은 이를받아들여 '드우엘'로 교정하여 표기했다.
===2:16
제 이대로 - 실제 행군에 있어서 유다 지파를 뒤따랐던 제 2행렬은 성막 물품들을운반하는 레위 지파의 게르손, 므라리 자손들이었다 (10:17-70). 그렇다면 르우벤 지파는 정확히 말해 제 3행렬에서 행진했던 것이다. 한편 레온 우드(L. Wood)같은 학자는 이들이 성막 물품을 호위하며 행진했을 것으로 본다(34절 도표).
===2:17
회막이 레위인의 진과 함께 - 이는 고핫 자손들이 성막 내의 성물(聖物)을 메고 행진하는 것을 가리킨다(10:21). 이와 같이 성막의 성물은 성막과 분리되어 이스라엘모든 지파 가운데서 제일 중앙에 위치했다. 즉 이스라엘의 네 편대 중 두 편대(유다,르우벤 진 기에 속한 자)는 회막 앞에 나머지 두 편대(에브라임, 단 진 기에 속한 자)는 그 뒤를 따랐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거주할 때 뿐 아니라, 행군 시에도 이스라엘백성이 당신을 중심하여 생활할 것을 묵시적으로 명하셨다. 이는 오늘날 성도들에게도그대로 적용되는 진리로서, 진정 하나님께서는 장소를 불문하고 당신을 중심한 신앙생활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중앙에(* , 베토크) - 즉 '가운데'란 뜻이다. 이말은 이스라엘 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위치를 묘사할때 종종사용되었다(왕상 6:13; 겔 37:28; 43:7; 슥 2:5;8:3). 한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은 다음 두가지 의미를 지닌다.하나는 종교적 의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면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도우신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정치적 의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12지파의 단결을이루는 구심점이요 통치의 중심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해 계실 때, 곧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가운데 있을, 이스라엘은 승승 장구(乘勝長驅)하였다. 그러나 '이가봇', 곧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을 때, 그들은 대적앞에서 무기력 하기만 했다(삼상 4:1-22).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 성도들의 삶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즉 하나님을 그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자들은 그의능력을 체험하며 승리의 삶을 살게 된다(시 118:6,7). 반면에 죄에 의해 주장받는 삶을 사는 자들은 슬프고 무기력한 나날 속에서 신음할 수 밖에 없다(시 31:10;32:3,4).그리고 한편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당신의 장막을 치셨다는 점에서 구원사(救援史)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f-revelation)를 발견하게 된다. 즉 하나님은 광야 시대이 성막 위에 머무르는 구름기둥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본체의 영광을 바라볼수는 없었다. 그런데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자신의 열광을 확실히 계시하시게 되었다. 요 1:14에 기록된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는 표현중 '우리 가운데 거 하시매'( , 에스케노센 엔 헤민)를 직역하면 '그가 우리가운데 장막을 치셨다'가 된다. 이는 성막을 통해 모형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자신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Incarmation)은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마 1:23)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계시 중의 계시'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계시는 마침내 우리들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 우리가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며 동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 아래 영원토록 머물게 될때 그완연한 실체를 드러낼 것이다(계 7:15-17; 21:3,4).
그들의 진 친 순서대로 - 비록 상대할 적이 없고 지루한 광야 행군이라 할지라도이스라엘 백성에게 절실히 요구된 것은 '질서'였다. 하나님은 바로 이 질서 의식을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께 대한 경외와 순종을 가르치기 원하셨던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혼돈과 무질서를 배격하시는 질서의 신(神)이시다(고전 14 :33).
그 위치에서 - 직역하면 '그의 손에서'란 뜻이다. 이말은 '...다음으로'라는 의미도 지닌다(느 3:2). 여기서는 두번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곧 성막 주위에 진을친 그대로 진행하라는 뜻이 아니고 진을 쳤던 자리에서 차례대로(앞선 지파 다음으로)출발하여 진행하라는 뜻이다(10:13-28).
앞으로 행할지니라(* , 잇사우) - 본장의 '진행할지니라'(9,16,17,24,31절)는 말은 모두 여기서처럼 '앞으로 전진하라'는 뜻을 지닌다. 일례로 전진하지 않는 자전거는 곧 쓰러지고 만다. 마찬가지로 전진하지 않는 신앙 역시 똑같다. 그러므로 성경은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킨다"고경고한다(잠 1 :32).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 하나님의 군대로서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또한 승리의 시온 성에 들어가기 위해순례자로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때로 우리의 앞길에 안개가 자욱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인도에 모든 것은 맡기는 자세로믿음의 행진을 계속해야 한다(히 11:8).
===2:18
서편에는(* , 얌마) - 원뜻은 '바다쪽에는'이다. 여기서 바다는 팔레스틴 서쪽에 위치한 지중해를 가리킨다. 그런데 비평적인 학자들은 이러한 표현이 팔레스틴에살았던 자에 의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본서의 모세 저작설을 부인한다. 그러나 비록 모세가 팔레스틴에 거주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야곱이 기거했던 가나안 땅을 소망 중에 바라보며 가나안 서편의 지중해를 '서쪽'이라고 지칭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지중해 동쪽 출신의 조상들이 사용했던 관용어를 그대로 썼을지도 모른다(Lange)===2:19,20,21,22,23주석
1:5-15 도표 및 1:20-46 도표를 참조하라.
계수함을 입은 자 - 1:45주석참조.
===2:24
그들은 제 삼 대로 진행 할지니라 - 진 기(陣旗) 상으로는 이들이 르우벤 진 기를 뒤따랐지만, 실제적으로 행군할 때에는 성막의 성물(聖物)을 운반하는 고핫 자손의뒤를 따랐다. 그러므로 이들은 아마 고핫 자손의 성물을 호위하는 임무도 띠었으리라추정된다(16절).
===2:25
단 군대의 진 기 - 제 4대의 진 기를 잡은 지파는 단 지파였다. 그 이유는 일찍이야곱의 예언(창 49:17)에서도 암시된 바 이들은 그 전투적 속성으로 인해 용맹한 군대로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적 속성은 극히 타락하여 후일 단지파 지역은 우상 숭배의 진원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들은 광야 행진 시의영예로운 위치에도 불구하고 그후 약화일로를 걷다가 마침내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그 이름이 사라지는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는 지파가 되고 말았다(게 7:5-8).
===2:26,27,28,29,30주석
1:5-15 도표 및 1:20-46 도표를 참조하라.
계수함을 입은 자 - 1:45 주석참조.
===2:31
후대로 진행할지니라 - 도합 157,600명으로 구성된 이 진영은 선봉에 선 유다 진영 다음으로 군인 수가 많았을 뿐 아니라, 기질상 용감하고 전투적이었기 때문에 (창49:16-21) 이스라엘 진(陣)의 제일 후미 방어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2:32,33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 명 - 1:46 주석 참조.
레위인은...계수되지 아니하였으니 - 1:47 주석 참조.
===2:34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여 -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히 순종했음을보여 준다(1:54). 이러한 순종를 통해 실로 인간은 하나님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있다(삼상 15:22). 그러나 초기의 이같은 아름다운 순종은 이후에 거듭 자행되는이스라엘의 반역 및 불순종과 확연히 대조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사실은 신앙은 결코 한순간의 일이 아니라 일평생 계속되어야 할 성도의 과제임을 알 수있다. 이에 사도 바울은"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경고하였다. 진 치기도 ...
진행하기도 - 이 단순한 행동 속에 이스라엘 백성의 나머지 38년 간의 광야 생활이 함축되어 있다. 실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설정해 주신 행동의 규범을 따라 기나긴 광야 여정을 진행해 갈수 있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 역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땅에 거하는 동안 주의 말씀과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과 필연성을 제공한다(시 119:105). 한편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스라엘의전체 진 규모 면적은 12평방 마일(약 19.308km2) 정도였다고 한다(PalestinianTargums). 그리고 아래 도표는 이스라엘이 정주할 때와 진행할 때의 진 배치도이다.
납달리 아셀 단 북
53,400 41,500 62,700 서 동
남
에브라임 유다
40,500 74,600
므낫세 잇사갈
32,200 54,400
베냐민 스불론
35,400 57,400
갓 시므온 르우벤
선임지파 45,650 59,300 46,500
정주시 이스라엘의 진영 배치
진행 방향 --->
단 에브라임 르우벤 유다
아셀 므낫세 성막 시므온 성막 잇사갈 법궤
기구 부품
납달리 베냐민 고핫 갓 게르손 스불론
므라리
행진시 이스라엘의 진영 배치
행진시 이스라엘의 진영 배치위와 같이 정주할 때의 진영 모습과 행진할 때의 진영 모습이 다른 이유는 광야의 좁은 길을 무리없이 지나가기 위함 때문이었다. 한편 학자들 중에는 정주 시에도 만일넓은 장소가 없을 경우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바 이상적인 진영 배치를 할수 없었을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Pulpit Commentary).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성막이 이스라엘진영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그만큼 성막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큰의미를지녔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스라엘의 행군 시에 언약궤가 3일 길을 앞서 간 것은특이하다(10:33). 이때, 평소 성막 위에 덮여있던 구름(출 40:34-38)은 언약궤 위에머물렀다(10:34).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친히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뜻한다.언약궤의 덮개, 즉 속죄소에 조각된 그룹 위에 뒤덮인 구름의 진행 방향이 곧 이스라엘의 진로로 결정되었다. 시 80:1은 바로 이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 언약과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표하는 십계명 돌판이 들어 있었다(신10:4). 그러므로언약궤가 이스라엘을 앞서 간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살아야할 것을 교훈해 준다. 개혁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는 곳까지 가고 하나님의 말씀이 멈추는곳에서 멈춘다'고 하는 말씀 추종의 삶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야 같은 인생여정에서 우리 발걸음을 비추는 등(燈)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시 119:105)이 우리를안내하는 대로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는 삶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시 119:32). 그리할 때 그길의 결국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될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말씀(법궤)의 인도를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간다면 무섭고 두려운 광야에서 헤메고, 허우적거리다가 마침내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죽음의 광야를 벗어나 생명의 길로 향하게 만드는 생의 나침판인 것이다.
이스라엘을 가나안 정복을 위한 군대 조직으로 재편할 목적에 따라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던 전장(戰章)에 이어 본장에는 각 지파별 성막을 중심한 진(陣) 배치도와,행군시에 배열하게 될 행군 모형도가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성막 중심의 배치가 끝난 다음인 3장에서는 성막 호위와 봉사의 직무를 맡은 레위 지파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러한 순서는 그 내용상 지극히 자연스럽다.
한편 본장에 기재된 내용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먼저 여호와께서 성막 중심의 진 배치를 명하신 사실(1,2절)과 각 방향을 대표하고 행군시 주축을 이루게 될 유다(3-9절), 르우벤(10-16절)및 에브라임(18-24절), 단(25-31절) 진기(陣旗)에 소속된 지파들의 위치와 명단과 장정 수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회막과 더불어 있게 될 레위인의 진(17절)이 거론된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장정의 총수와 레위 지파가 인구 조사에서 빠지게 된 이유 및 본장의 결론 등으로(32-34절) 엮어져 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행진할 때에 불편함 없도록 질서를 잡아 주셨으며 광야에서의 거주와 전쟁 및 가나안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조직력 있는 막강한 군대로 편성해 주셨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보면 이러한 본장은 지루할 정도로 1장의 내용을 반복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본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1:52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이 어떻게 철저히 시행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즉 이스라엘 군대의 진용(陣容)은 무계획하게 짜여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 면밀하신 계획과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절대적인 순종으로 질서 있게 편성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성취하시는 능력으로 건설됨을 확신할 수 있다. 더불어 하나님 나라 건설에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름 받은 천국 시민에게 요청되는 것은 그분의 명령에 대한 온전한 순종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본장에서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성막 중심의 진 배치와 행군 대형은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중심하여 살아갈 때에만이 그들의 생존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이는 과학과 물질 만능주의가 횡행하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진리이다. 더욱이 이러한 진 배열은 장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 세상에 임마누엘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 사건을 예시한다(요 1:14).
1. 성막 중심의 진 배치 명령(2:1-2)
각 지파의 배진(配陣) 명령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1절) 이스라엘의 배진을 회막을 중심하여 명령하셨다(2절). 여기서 회막은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이며 진은 백성의 일상 생활을 위한 장소이다. 따라서 본문의 배치 명령은 결국 이스라엘의 일상 생활 전체가 하나님을 중심한 것이어야 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묵시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고 할 것이다.
한편 이밖에도 이스라엘이 성막 주위에 정방형으로 진을 친 것은 하늘나라 새 예루살렘 성의 네모 반듯한 모습(계 21:16)을 연상시킨다.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바라본 그 성은 사면에 문을 3개씩 갖고 있어서 모두 12문으로 되어 있었으며 각 문마다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하나씩 기록되어 있었다(계 21:12,13). 그러니까 광야에 세워진 성막과 그 주위에 잘 정렬된 진들은 천국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점술가인 발람은 이를 보고 "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24:5)라며 예찬하기까지 했다.
2. 진영 편성에 대한 세부 지침(2:3-31)
성막 중심의 진 배치 명령은 1:53에 이미 제시되었으나 본문에는 좀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각 진기를 중심한 세부 지침이 계시되었다.
즉 본문은 유다 진기에 속해 동편에 위치할 선발대(3-9절), 르우벤 진기에 속
해 남편에 위치할 제 2대(10-16절), 회막을 중심한 레위인의 진(17절), 에브라
임 진기 아래 있어 서편에 위치할 제 3대(18-24절). 단 진기에 속해 북편에 위치할
제 4대(25-31절) 등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군대를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조직 편성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12지파 공동체의 내면적 문제와 지파별 인원수를 감안하여 4군단을 편성하셨던 것이다.
* 갈등 소지의 제거. 본문의 이스라엘 진영 편성 내용을 살펴보면 성막 주위의 4군단은 아들들인 유다, 잇사갈, 스불론의 후손들이 진을 쳤고 남쪽에는 레아와 그의 몸종 실바에게서 난 르우벤, 시므온, 갓의 후손들이 진을 쳤다. 서쪽에는 라헬의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의 후손들이, 북쪽에는 레아와 라헬의 몸종인 실바와 빌하가 낳은 단, 아셀, 납달리의 후손들이 진을 쳤다.
이러한 조처는 지파간에 발생할 수 있는 갈등과 반목의 소지를 없앤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사사 시대에 지파 상호간의 대립이 심각했음을 감안할 때(삿 12:1-6;19:1-20:48) 비교적 친숙한 지파끼리 모이게 한 것은 현명한 처사였다. 이로써 진영별 단결도 잘 되었을 것이다.
이는 파당과 분열로 상처를 입기 쉬운 교회가 관심을 가져볼 만한 문제이다. 교회는 다양한 성도들이 모일 뿐 아니라 취향이 비슷한 자들끼리 어울리기 때문에 파당적 구성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를 무시하고 획일적인 단합만을 강요하기 보다는 성도들의 성격이나 은사들을 고려하여 적재 적소(適材適所)의 기구 구성과 그에 따른 인원 배치를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롬 12:6-8).
* 진영별 군사력의 균형. 본문의 각 진을 중심한 군대 계수(軍隊計數)현황에 의거하면 그 수는 동쪽 진영 186,400명, 남쪽 진영 151,450명, 서쪽 진영 108,100명, 북쪽 진영 157,600명으로서 각 진영의 군사력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전위 부대인 동쪽 진영의 군사 수가 제일 많고 후위 부대인 서쪽 진영 군사 수가 적다는 점은 군사력 배치가 합리적임을 보여 준다. 더욱이 서쪽 진영 군사수는 가나안 침공 직전의 계수에 의하면 130,800명으로 증가되었으니 특별히 약한 진영은 없다고 할 수 있겠다(26:28-41). 그런데 이러한 균형은 숫자적으로 많은 지파와 적은 지파가 적절히 연합됨으로써 이루어졌다. 또한 행군 시에는 북쪽 진영의 강력한 부대가 맨 뒤에 따라가며 서쪽 진영의 약한 군대를 보호하게 되어 있었다. 이같은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롬 15:1)라는 교회 내의 협력 관계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은 교회를 구성하는 각 개인과 기관들이 고르게 성장하기를 원하신다(고전 12:24). 그러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숙한 성도들을 항하여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권면했다(살전 5:14).
* 선두에 선 유다 지파. 이스라엘 진영 배치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면 진의
최전방에 나서야 할 지파는 유다 지파였다. 그런데 서열상으로만 보면 이 영광의 자리는 본래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이 차지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서모(庶母) 빌하와 통간한 까닭에(창 35:22) 야곱으로부터 견책을 받고(창 49:4) 결국 장자의 명분을 상실했다(대상 5:1). 그리고 차남과 3남인 시므온과 레위 역시 디나 사건(창 34:1-31)으로 인해 책망을 받았다(창 49:4-7). 그러므로 4남인 유다의 후손들이 야곱의 축복대로 원수의 목을 잡는 선봉장으로 선택된 것이다(창 49:8).
한편 성경에 의하면 르우벤이 상실한 장자권은 요셉이 대신 차지하였으며(대상 5:1, 2) 그로 인해 장자가 다른 아들보다 두 몫을 차지한다는 율법(신 21:17)과 같이 그의 후손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이스라엘 12지파 중 두 지파를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이와는 관계없이 르무벤의 장자권을 대신한 이스라엘 백성의 영도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해 유다가 소유하게 되었다(창 49:9,10). 이러한 야곱의 축복은 유다 지파 출신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登極)함으로써 부분 실현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다의 가계를 통해 나심으로써 최종적으로 성취되었다(히 7:14).
* 단명(短命)으로 끝난 단 지파의 영화(榮華). 광야 시절, 유다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군사수를 자랑하며 북쪽 진영 군대를 주도한 단 지파(25-31절)는 가나안에 들어간 후 아모리 사람들에 의해 거주할 곳을 빼앗기고(삿 1:34) 팔레스틴 북쪽에서 살다가 소멸되었다. 성경은 그들이 역사에서 사라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로 그들의 가증한 우상 숭배를 고발하고 있다(삿 18:1-31). 당시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소극적이었으나 단 지파의 우상 숭배는 매우 적극적인 양상을 띤 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이스라엘 12지파 목록에서 제외되는 화(禍)를 자초했던 것이다. 계 7:4-8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 각 지파 중 인(印) 맞은 자들에 대한 환상이 나온다. 단 지파는 거기서 제외되어 있다.
여기서 2가지 중대한 교훈이 드러난다. 첫째, 우리는 아무리 탁월한 위치에 있어도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영광이나 권세는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단 지파가 취했던 바 혼합 종교 신앙을 조심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겼다(삿 18:5,30). 그런데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 자처하면서 하나님을 우상화하고 기복 신앙(祈福信仰)으로 기독교를 왜곡하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단호히 배격한다(고전 10:20,21;고후 6:15,16).
* 행진하는 군대. 본문에는 이스라엘의 진대(陣隊)와 관련하여 '진행할지니라'
(9,16,17,24,31절)는 말이 거듭 나온다. 사실 전투에는 공격과 방어가 있다. 전자는
적극적이고 후자는 소극적이다. 군대의 행동 역시 공격과 방어로 구분된다. 적극적이고 초전적인 군대라면 방어보다 공격을 선호할 것이다. 그러한 군대는 공격할 대상을 향해 줄기차게 행군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러했다. 그들에게는 가나안 정복에의 명령이 그들의 대장(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으며 점령해야 할 땅이 있었으므로 광야에서 안주(安住)할 수 없었다. 그들은 40년 동안 혹심한 훈련을 받으면서도 가나안 정복을 꿈꾸며 행진했다.
여기서 행진하는 군대가 주는 두 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가나안 땅처럼 천국도 침노하는 자에게 열린다는 사실이다.(마 11:12).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로 침입한 세리와 창기들은 천국을 차지했다(눅 15:1;16:16). 반면에 '거룩'을 외치면서도 천국 복음을 배척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천국 밖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마 23:14).
둘째는 모든 성도와 교회가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복음의 확장과 영적 성장에 주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흐르지 않는 물이 썩듯 정체된 성도나 교회는 부패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복음의 진보'와 '믿음의 진보'가 나타나도록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해야 한다(빌 1:12,25;딤전 4:15). 그러기에 바울은 우리에게 자기 만족과 안일 무사주의(安逸無事主義)에 빠지지 말고 힘써 신앙의 행진을 계속하라고 권면하고 있다(빌 3:12-16).
3. 하나님께 순종한 이스라엘(2:32-34)
레위인을 제외한(33절) 이스라엘 군사의 총계가 603,550명(32절)이었음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성막 중심의 진 배치를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했음을 강조하고 있다(34절). 그들은 어떤 이유로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최대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사실 출애굽기와 민수기, 신명기에는 이스라엘의 불평 기사가 여러번 언급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군대 조직 문제를 둘러싼 잡음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레위 지파가 병역 면제 혜택을 받은 것에 대한 질투도 없다. 오늘날 '전투적 교회'에 몸 담고 있는 성도들은 이를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어떤 직분을 맡든지 불평없이 봉사해야 한다. 또한 다른 성도가 중요한 직책과 사명을 받게 되면 질투할 것이 아니라 그를 격려하며 협조해야 한다. 레위인들을 따로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모든 성도들의 신앙과 역량을 헤아리시고 일꾼으로 따로 세우신다(행 13:2). 여기에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따르는 순종만이 요구될 뿐이다(딤전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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