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레위기 10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0: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 - 대제사장 아론과 그 아내 엘리세바 사이에는 네 아들, 곧 나답과 아비후, 및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있었다(출 6:23). 이 중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 직무를 잘못 감당하여 여호와의 불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셋째 아들인엘르아살이 후일 아론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어 레위 족속의 어른이 되었다(출6:25; 민:20:28). 향로( , 마흐타) - 이것은 성소 안에 설치된 분향단에 아침과 저녁마다새로이 향을 사를 때 사용되는 불씨를 번제단에서 향단까지 옮기는데 쓰이던 금제 그릇을 가리킨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는 '불똥 그릇'(출 25:38), '통'(출27:3;38:3)으로도 번역되고 있다.
다른 불 - 직역하면 '이상한 불'(stange fire)인데 이 불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불을 가리키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 이것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불, 즉 번제단의 제물이 타는 불이 아닌 '일반 불' 또는 다른 불"을 의미하는 듯하다(The Preacher's Homiletic Commentary). 여하튼 나답과 아비후는 분향할 불로는 오직 번제단의 불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어긴것은 여호와의 규례를 멸시하는 행위이며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죄임에 분명하다. 한편 나답과 아비후가 이러한 죄를 범하게된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날 독주를 마신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왜냐하면 이 사건 이후곧 독주 금지 규례(9절)가 주어지기 때문이다(Matthew Henty, Harrison).

============================10: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 나답과 아비후를 심판한 이 '불'은 하늘에서 직접 내린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속죄소로부터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나온 불이다. 즉 아론이 제사장 직무롤 처음 수행할 때 나타났던 '여호와의 불'(9:24)과 동일한 것이다(Lange). 한편 이 불은 일반적인 불과는 달리 옷과 몸은 태우지 않은 채(5절) 두 사람만 죽이고 말았는데, 이는 여호와의 거룩성과 아울러 블순종의 범죄가 낳는 비참한 결과를 잘 보여 준다. 이처럼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의 불은 심판의 불로범죄한 백성들을 징벌할 때 나타나는 경우가많다(민 16:35;왕하 1:10-13).
그들을 삼키매...죽은지라 - 이는 나답과 아비후가 불에 완전히 타 죽었다는 말이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심판으로 급작스럽게 죽임을 당한 것을 의미한다(MatthewHenry).

================================10:3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 이 말은 여호와께서 지금 주신 말씀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또는 계시의 본질적인 면을 모세가 아론에게 상기시킨다는 뜻이다.즉 모세는 눈앞에 벌어진 급작스럽고 슬픈 상황에 직면하여 그 대처할 방도를 주의 종의 권위로, 그리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지금 대제사장 아론에게 명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 아론과 그 자손 곧 제사장으로 기름 부음 받은 자들을가리킨다. 원래 제사장으로 세움을 입는 것은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획득하는 것이다(레 21:17-23).
내가 거룩하다 함을...영광을 얻으리라 - 본절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거룩해야할 이유 및 목적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섬기는 성도들 또한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거망동(輕擧妄動)하게 처신하여 타인의 빈축을 산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일뿐만 아니라, 그분의 거룩성을 손상시키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신 . 구약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모든 성도들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본받아 또한거룩하게 되는 것이다(20:26;벧전 1:15). 또한 우리는 여기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사이의 근본적인 관계성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무슨 공로나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과 경배를 돌릴 때, 바로 그 사실을 하나님께서 큰 영광 받으신 것으로 간주해 주시는 것이다.
아론의 잠잠하니 - 이는 갑작스럽게 두 아들을 잃은 슬픔을 억제하는 모습이며,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원망하지 않고 그분의 공의(公義)을 인정하는 아론의 겸허한 자세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 종된 자들의 겸허한 자세 및 인내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다.

=================================10:4
아론의 아자비 웃시엘 - 여기서 '아자비'( , 도드)는 '삼촌'(uncle ;KJV,NIV, RSV)을 가리킨다. 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다. 여기 아므람은 모세와 아론을 낳았으며, 웃시엘은 미사엘과 엘사반과 시드리를 낳았다(출 6:18-22). 그러므로 웃시엘은 아론에게 작은 아버지가 된다.
성소 앞에서 진 밖으로 - 제사를 드리던 중 성소 앞에서 갑자기 죽은 나답과 아비후를 이스라엘 진 밖으로 끌어낸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었기 때문이다.따라서 이처럼 그들의 시체를 진 밖으로 끌어냄으로써 그 부정이 이스라엘 공동체에옮는 것을 방지하셨다. 한편 그들은 제사장 옷을 입은 채로 죽었는데, 이 옷 역시 시체로 인해 더러워졌으므로 함께 진 밖으로 내버려져야 했다(Keil).

=================================10:5
옷 입은 채...메어 내니 - 원래 제사장은 제사장의 복장을 하고는 절대 진 밖으로나갈 수 없었다. 만약 제물의 재를 버리기 위해 진 밖으로 나갈 경우에는 반드시 제사장 제복을 벗고 나갔다가 들어와 다시 입어야 했다(6:10, 11).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의 제사장 제복은 이미 그들 자신의 주검으로 인해 부정을 입었기 때문에 시체와 함께진 밖으로 내버려져 그대로 장사되었다. 한편 시체를 진 밖으로 운반한 미사엘과 엘사반은 그 시체로 인하여 부정을 입었기 때문에 7일 동안 부정하였다(민 19:11-18). 따라서 나답과 아비후 사건이 출애굽 제2년 1월 8일경에 일어난 것으로 생각할 때, 그들은 1월 14일 저녁에 있은 두번째 유월절 식사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유월절 규례를 지키지 못한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다음 달 2월 14일 저녁 때 다시금 제2의 유월절을 지키도록 명하심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셨다(민 9:6-12).

=========================================10:6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 고대 근동 지역에서 극도의 슬픔을 나타낼 때는머리를 풀어 헤치거나 옷의 가슴 부분을 갈기갈기 찢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특별히 성별된 제사장의 경우, 인간적인 슬픔을 표시하기 위해 머리에 쓴 관을 벗음으로 머리를 헝클어 뜨리거나 세마포 제의(祭衣)를 찢는 것은 곧 제사장 직분을 중단하거나 임의로 거부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이는 제사장들에게금지되었는데, 만일 이 명령을 어기는 경우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가벼히 여기는 범죄로 여호와의 진노를 부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제사장들의 애곡을 금지시키는 본 규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은 가족 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교훈을 배울 수 있다(눅 14:26). 특별히 여기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은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죽임을 당한 것인 만큼, 더욱 근신하여 슬픔을 자제해야 했다. 만일 그렇지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일종의 불만을 터뜨리는행위가 되기 때문이다(Keil).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 제사장의 범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말로서 백성의 영적 지도자된 자들의 책임성을 분명하게 일깨워 준다. 즉 제사장이 인간적인 정리(情理)에 이끌려 하나님께서 금하신 규례를 범함으로써, 그분의 심판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다면 그것은 곧 모든 백성이 여호와를 거스리는 결과가 되어 그분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온 족속이...슬퍼할 것이니라 - 제사장과는 달리 일반 백성들에게는 애도의 표현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이 슬픔의 표현은 하나님을 원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들 사이를 연결하는 중재자를 잃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 형제들의슬픔을 억제시킨 것은 그들이 맡은 임무의 중요성 때문이지 형제애까지 끊고 맹목적인 순종 만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성경은 형제뿐만아니라 네 이웃까지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다(레 19:18;요일 4:20,21)

==============================10:7
여호와의 관유가...있은즉 - 아론과 남은 두 아들(엘르아살과 이다말)은 여호와의관유로 기름부음을 받아 특별히 제사장으로 성별된 자들이다(관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출 30:22-23 부분의 주석 내용을 참조하라). 이처럼 제사장들에게 거룩한 관유를부은 것은 그들로 하여금 전적으로 여호와만 섬기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여호와를 향한 절대적 헌신에서 돌이킬 수 없음을 확증하는 표이다. 신약 시대에이르러 이 사상은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하나, 먼저 부친의 장사를 지낸 후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는 자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 곧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마 8:22)고 하신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회막 문에 나가지 말아서 - 죽은 자들의 시체에 접촉함으로써 부정하게 되거나 그들의 장례를 위해서 무덤까지 가는 것을 금하신 말씀이다. 이처럼 제사장들은 어떠한상황 가운데서도 여호와를 섬기는 신성한 목적에서 떠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 말이제사장들은 죽을 때까지 성막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들은 결혼을 해서 자기 생활을 영위하였으며, 제사 의식의 집행외에도 백성의 종교 교육과 국가및 개인의 대사(大事)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따라서 여기 회막 문을 나오지 말라는명령은 제사장의 직무수행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회막 문 밖으로 절대 나오지 말라는뜻이다.

=====================================10:8,9.10,11
본문은 제사장이 제사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 성막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술을 금할것을 강조한 규례이다.

======================================10:9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 여기서 '포도주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인'( )은 포도를 주원료로 하여 발효시킨 술을 가리키며, '독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카르'( )는 '취하다', '자극하다 는 뜻의 '솨칼'에서 파생된 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빨리 취하게 만드는 '독한 술'(strong drink, KJV)을 의미한다. 한편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봉사의 직무를 수행할 때는 절대로 술을 마실 수 없었다. 이것은제사장들이 바른 마음가짐으로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제사 절차 및 방법을 따라 맡겨진 제사 직무를 거룩히 수행토록 하기 위함이며, 또한 맑은 정신으로 사태를 잘 분별하여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백성들을 잘 가르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술은 사람의 정신을 혼미케 하여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방해할 뿐만아니라, 추악한 육적 본성을 드러내게 하여 범죄를 초래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술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엡 5:18). 한편 역사적으로 볼 때 아론 당시에는 아론과 그의 두 아들이 거의 매일 성소에서 직무에 임했기 때문에 음주가 금지되었으나, 후에 제사장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성소에서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을 때에는 술을 적당히 마시는 것이 허용되었다.

===================================10:10
속된 것 - '속되다'(profane)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홀 ( )은 '꿰뚫다', '상처내다', '파괴하다'는 뜻의 '할랄'( )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의 거룩성을 더럽히는 것, 곧 하나님의 거룩성을 파괴하거나 신적 권위에 상처를 주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반면 '거룩한 것'은 '속된 것'의 반대 개념으로 그러한 속된것들로부터 구별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성에 합치되는 것을 말한다. 부정하고 정한 것 - 여기서 '부정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페"( )는'더럽히다', 모독하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하나님의 거룩성 또는 신성을 모독하는제반의 것을 지칭한다. 일반적으로 속된 것은 부정한 것보다 더 깊고 포괄적인 개념이며, 또한 거룩하다는 개념도 정하다는 개념보다 더 깊고 포괄적인 개념이다. 따라서아무리 정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룩성에 합치(合致)되지 않는 것은 속(俗)된것이라 할 수 있다.

==================================10:11
모든 규례를...가르치리라 - 제사장들에게는 제사 의식을 집행하는 일 외에도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부분이다. 실로 제사장들에게 있어서 백성을 가르치는 일은 제사 의식을 집행하는 직무와다름없이 필수적이고 거룩한 봉사이다. 한편 성경은 선생 또는 지도자된 자들의 솔선수범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데, 입으로는 가르치면서 자신은 행하지 않는다면 이는하나님께서 가중히 여기시는 위선이 되고 말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위선자의 대표적인 실례로는 예수의 책망을 많이 받은 바리새인들을 들 수 있다(마 23:2,3;약 3:1-3).

=================================10:12
화제 중 소제의 남은 것 - 일반적으로 '화제'는 속죄제, 번제 등과 같은 제사의한 종류가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방법의 하나로 희생 제물을 제단에서 불로 태워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총칭한 것이다. 여기서의 '화제'는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의 직무를 처음 수행하던 날 여호와께 드리기 위해 준비했던 번제 제물을 가리킨다.이 번제 제물을 불에 태워 바칠 때 소제로 바쳐진 기름섞인 고운 밀가루의 일부를 번제물과 함께 태워 드리고, 그 남은 부분은 제사장의몫으로 돌려졌는데 본절의 내용은 바로 이것을 지칭한 것이다. 지극히 거룩하니 - 2:3 주석 참조. 누룩을 넣지 말고 단 곁에서 먹되 - 소제물로 바쳐진 제물 중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진 것을 먹을 때는 단 곁의 거룩한 장소, 곧 회막 뜰에서 누룩을 넣지 않은 상태로먹으라는 말이다. 이처럼 누룩(leaven, KJV;yeast, NIV)이 금지된것은 누룩 그 자체가부정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빨리 퍼지는 속성으로 인해 누룩은 죄의 오염또는 죄악 그 자체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죄와는 근본적으로 분리된 하나님의 절대 순결하신 모습을 보는 동시에 죄는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함을 깨달을 수있다(살전 5:22).

=================================10:13
응식(應食)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크'( )는 '지정하다'(appoint)란뜻의 '하카크"( )에서 파생된 말로 곧 '지정된 몫'(portion)을 가리킨다. 다시말하면, 여호와께서 제사장의 생계를 위해 희생 제물로 바쳐진 제물 중 일부를 그들의몫으로 돌려 양식으로 삼을 수 있도록 지정해 준 것을 가리킨다(민18:11,19).

============================10:14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 -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 등으로 바쳐진 희생 동물의 고기중에서 '요제로 드린 가슴 부분'(흔든 가슴)의 고기와 '거제로 드린 오른쪽 뒷다리 부분'(든뒷다리)의 고기는 제사장들과 그 가족의 양식으로 돌려졌다(7:31,34;출29:24-27). 보다 자세한 내용은 7:34 주석을 참조하라.

===========================10:15
본절의 내용은 앞절(14절) 내용의 반복으로 여호와께 요제나 거제로 흔들어 바친제물은 제사장의 생계를 위한 양식이라는 사실을 재삼 강조한 것이다. 화졔의 기름과 함께 - 본 구절은 (1)기름도 함께 요제로 삼아 제사장의 몫으로 돌리라는 것인지 아니면 (2) 기름을 여호와께 화제로 불태워 바칠 때에 가슴과 우편뒷다리도 함께 요제 및 거제로 바치라는 말인지, 개역 성경 자체로는 해석상 난점이있다. 그러나 원어적으로 볼 때나 짐승의 기름(fat)은 항상 여호와께만 불태워 바치라는 여타 성경의 규례(9:15-20)를 고려할 때 후자의 해석이 옳다고 할 수 있다.

==============================10:16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은즉 - 곧 모세가 제사장 임직시 회중의 죄사함을 위해 속죄제로 드린(9:15-21)제물의 고기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몫으로 돌려 그들의 양식을삼도록 하기 위해 찾은 것을 가리킨다. 제사 규례상 회중의 '범죄'를 속하기 위해 드리는 일반 속죄제의 경우, 제사장이 그 희생 제물의 피를 성소까지 가지고 들어가 단주위에 뿌리므로 그 고기는 먹을 수 없었다(6:30). 반면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으로서 첫 직무에 임하는 날, 이스라엘 전 회중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드린 속죄 제물은그 희생 제물의 피를 성소에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이 속죄제의 고기는 아론과그 아들들이 거룩한 곳에서 먹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지금 바로 그 속죄제의고기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미 불살랐는지라 - 여기서'불사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라프 ( )는'완전히 불태워 없애 버리다', '소각하다' 는 뜻으로 제단위에서 불태워 드린 것이아니라(1:9),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태워버린 것을 의미한다(4:13).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하여 - 대제사장 아론에게는 본래 4명의 아들이 있었다.그러나 그 중 장남 나답과 차남 아비후는 제사 규례를 어긴 죄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10:1, 2). 그러므로 대제사장 아론에게는 두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 밖에 남지 않았는데, 바로 이들이 일반 제사장이 되어 아론을 도와 제사 업무를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모세가 속죄제 고기를 찾다가 그것이 없자, 이들에게화를 낸것은 아마 이 고기를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태워버리는 일에 이들이 직접 간여했기 때문일 것이다(Lange, Keil). 한편 여기서 '노하다'란 뜻의 '카차프'( )는 '틈이 생기다', '쪼개지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곧 분노로 인해 쪼개지고 금이 간 심성(心性)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는 말이다.

=============================10:17
지극히 거룩하거늘 - 2:3 주석 참조.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 제사장이 그 고리를 먹어야 할 이유가 분명하게 제시되어있다. 즉 그 이유 및 목적은 제사장이 여호와 앞에서 중재자의 자격으로 이스라엘 회중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속죄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제사장은 제단에 피를 뿌려 속죄할 뿐만 아니라, 희생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먹는 행위를 통하여 백성의 속죄 사역에상징적으로 동참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한편 이처럼 제사장들이 제물을 먹는 것은신약 시대의 성만찬을 예표한다. 즉 성도들이 주의 몸인 떡을 먹음으로 예수와 하나되어 그분의 고난과 이스라엘 회중의 대속 사역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 앞에 속하게 하려고 - 이 말은 제사장의 중재 사역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완전하고 연약한 인간에 불과한 제사장이 실제로 백성의 죄를 제거해 줄 수는 없다.단지 그들은 신약 시대에 와서 최종 성취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상징적으로예표할 뿐이다.

================================10:18
피를 성소에 들여오지 아니하였으니 - 제사장, 곧 아론과 그 아들들이 속죄 제물로바쳐진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이유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즉 아론과 그 아들들이제사장 직무를 시작하던 날 드린 속죄 제물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특정한 범죄를 했기 때문에 드린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정결을 위해 드린 것으로써, 그 속죄 제물의피를 성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서 먹을수 있었다. 거룩한 곳에서 먹었어야 - 여기서 거룩한 곳은 회막 내 뜰을 가리킨다. 한편 이처럼 제사장이 거룩한 회막 뜰에서 희생 제물의 고기를 먹는 행위 자체도 전체 제사 내용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10:19
오늘...임하였거늘 - 아론과 그 아들들이 모세로부터 속죄 제물을 먹지 않은 것에대해 책망을 듣고, 아론이 겸손한 마음으로 진솔하게 변명하고 있는 내용이다. 한편아론이 속죄 제물을 먹지 않았던 이유로서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1) 두 아들(나답과 아비후)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도 엄중하고 생생하여 자신들이 그 제물을 먹음으로써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에는 자신의 성결이 너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서 먹지 않았다(Keil). (2) 갑작스런 두 아들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고 마음의 평정을 잃은 비통한 상태에서 감히 성물을 먹을 수없다는 겸손한 마음에서 먹지 않았다(Calvin). 여하튼 아론이 그 속죄 제육(祭肉)을먹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고의로 어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이 인정되었으므로 그는 이 문제로 인해 징계를 받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가리켜 랑게(Lange)는 율법의 자구적(字句的)적용을 뛰어 넘은 영적 마음의 승리라고 묘사하였다. 이처럼 율법시대 초기로부터 성경은 율법의 근본 사상은 '문자(文字)가 아니라 마음'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은 후일 "순종이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라는 사무엘의 말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사 1:13-16)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 그리고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는 호세야 선지자의 말 속에서 보다분명히 나타난다.

============================10:20
모세가...좋게 여겼더라 - 모세가 아론의 진솔한 변명을 듣고 아론의 행위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나온 것임을 깨달아 그의 처신을 묵인해 준 것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는 제차 직무에 있어서 율법 조항을 보다 승화시키는 제사장의 독립적인 권리및 그 책임성을 깨달을 수 있다.

 

 

 

  제사장으로 위임받은 아론의 첫 제사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언급하고  있는 전장(9장)과는 대조적으로 본장에서는 아론의 두 아들, 곧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가 제사 첫날 저녁 여호와를 섬기는 도중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다가 성막에서 죽임당한 형벌의 사건(1-7절)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제사장의  음주(飮酒)에 관한 훈계(8-11절), 제사장의 몫으로 돌릴 소제와  화목제에  관한  규정(12-15절), 제사장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범과(犯過)에 대한 모세의 견책(16-20절)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본장의 규례는 단순히 정결 의식법의 문제로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주의 사역자들에게도 절실하고 중차대한 교훈을  주는데 그것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되 특히 실천을 통해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즉 말씀을 선포해야 할 위치에 있는 자들은 인위적인 방법을 철저히 배격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과 규정에 준해서만 사역해야 하는 것이다(1,2절), (2) 사역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혈통이나 인간적인 정리에 얽매여 하나님의 뜻을 그르친다면 그는 주님의 종으로써 합당치 않다(6절/눅 9:59-62). (3) 구약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술 마시는 것이 금지 되었는데 그 이유는 제사장들이 신령한 일과  진리를  바르게 분별하여 백성들을 잘 가르치게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진리는 오늘날의 영적  지도자
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며 희생을 감수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교훈해 준다. 목회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자세를  견지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더 큰 사랑과 축복으로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것이다(9,10절).

  1.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10:1-7)
  본문은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함으로써(1절) 그분의 직접적인 형벌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다(2절). 그리고 이에 시체를 진  밖으로 메어 낸 후(3-5절), 모세가 아론의 나머지 두 아들에게 주의를 주고 있는 부분이다(6,7절). 한편 여기서 나답과 아비후가 범한 불순종의 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1)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 명하지 아니한 다른 불, 곧 보통 불로 여호와의 성소에 분향하였다. 아론과 그 아들들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성소의 등불을 끄고 켤때 향을 살라 바쳐야 했다. 이때 향을 태우는 불은 반드시 번제단의 불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16:12/출 27:3).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이라는 특권 의식에 빠져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한 채 자기 마음대로 번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불로 향을 살랐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 (2) 나답과 아비후는 조급하고 경솔하게 분향을 드렸다.  그들은  제사장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례히 갖추어야 할 경외심과 진지함도 없이, 모세나 아론에게  구체적인 상의도 하지 않은 채 저들 마음대로 분향하였다. 이것은 그들 직무의 중요성을 인식치 못한 무지의 소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친히 교제할 수 있는 제사장이라는 특권 의식과 우월 의식에 빠져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거룩성과 위엄을 경멸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3) 나답과 아비후는 독주를 마셔 취한 상태로 여호와의 성막에 분향하러  들어왔다. 이러한 추론이 가능한 이유는 본장 9-11절에서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성막에 들어가는 제사장에게는 특별히 독주를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나답과 아비후의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을 가장 경외해야 할 제사장이 오히려 하나님의 신성과 거룩성을 모독한 것일 뿐만 아니라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을  변질, 부패 시키는 죄악으로 하나님의 징벌을 부를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그가 지시하신 방법, 곧 그분의 계시(啓示)에 전적으로 순종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지혜, 능력, 성품 등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며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전 3:4,5/요 3:6). 둘째,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의  불성실과 불경건이 얼마나 무서운 범죄이며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얼마나  거룩한  것인지를 알게 해준다. 즉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거룩하게 드려야 하는데 하나님은 외적인 격식보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순수한 예배를 더욱
기뻐하신다(요 4:24). 세째, 지위의 고하, 경제적 빈부,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신성과 거룩성을 훼손한 자는 반드시 징벌을 당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공의가 명백히 드러난 것으로써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리는 가운데 근신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 두 아들의 죽음에 대한 아론의 침묵 -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갑작스럽게 두 아들을 잃은 아론은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잠잠하였음을 알 수 있다(3절). 이것은 자식을 잃은 슬픔을 홀로 억제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주권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자신을 쳐서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참된 신앙 자세에서 연유된 것이다(19,20절). 여기서 우리는 주의 종된 자들의 겸허한 신앙 자세 및  성도의 인내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즉 성도들에게도 혼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시련과 고난이 임할 때가 있다. 그러나 성도는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그 시련 속에 내포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겸손한 신앙 자세를 취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참으로 바라시는 성숙한 신앙이다. 대개 성도에게 임하는 시련은 인내를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된 것으로 결과적으로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더욱 확고히 다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오늘날의 성도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키고 그분의 능(能)하신 손길 아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겸손한 자세를 견지해야만 한다(시 39:9).

  2. 제사장의 음주에 관한 규례 (10:8-11)
  하나님의 징벌에 의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과 그 장례 규례를 명시한 앞절에  이어 본문에서는 제사장이 여호와를 섬기기위해서 성막에 나아갈 때는 절대로 술을 마실 수 없다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다(8,9절). 이는 그들로 하여금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분별케 하기 위한 조처였다(10,11절).
  한편 일반적으로 제사장에게는 크게 두 가지 기본 임무가 부여된다. 그것은 곧 제사의 직무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율법 교육의 의무이다. 구약 시대때  제사는  범죄한 이스라엘의 죄악을 속하고 하나님과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사이에 친교 관계를 유지키 위해 동물의 희생을 잡아 여호와께 예물로 바치는 지극히 거룩하고  중차대한  행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한다. 따라서 이 제사는 지극히 거룩하고 정결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절차 및 방법을 따라 행해져야만 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의 언약의 백성인 표는 결국 율법에 대한 순종 여부에 의해  결정되었다.  따라서 이 율법은 제사 제도와 함께 이스라엘의 선민됨을 결정짓는 분기점으로, 이 율법에 대한 교육 또한 하나님을 향한 제사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며 절대 필요 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런데 만약 제사장이 제사 들릴 때나 백성을 가르칠 때 술을 마시고 혼미한 가운데서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훼손하고 그분의 계명을 범하는 죄악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통일성 및 동질감을  파괴하고 여호와 신앙을 변질, 왜곡시키는 경거 망동(輕擧妄動)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주의 일에 종사하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성별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항상 맑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해야 한다. (2) 본문의 독주는 단지 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세속적이며 심적인 요소를 총칭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육적 성품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늘 성령의 충만함을 받도록 노력해야만 한다(엡 5:18).

  * 분별력을 흐리게 하는 술 -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색깔을 달리하며 새롭게 보인다는 사실이야 말로 한 잔의 술이 가져다 주는 영원한 마력이자, 애주가(愛酒家)들이 술을 즐겨 차는 주된 이유이다. 만일 술을 마셔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구태여 비싼 돈 주어 가면서까지 술을 마실 하등의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찬미받을 장점을 지녔으면서도 자고 이래(自古以來) 술과 음주에 대한 세간의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 그것은 반대 급부적으로 술이 가져다 주는 해독(害毒) 때문이다. 사람이 일단 술을 마시면 인간의 뇌와 혈액 속에 알코올이 급속히 퍼지게 된다. 그리고 그 알코올은 자극성이 강한 성분으로써 인간의 정신을 일시에 마비시킨다. 때문에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이 그 기능을 잃어버리고  자기  감정을 절제할 수 없게 된다. 그와 아울러 신체 기능도 급속히 저하되므로 몸과 마음이  제각
기 따로 노는 현상이 뒤따르게 된다. 바로 여기에 술과 음주의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성경은 공직(公職)에 있는 자의 음주를 엄히 금하고 있다(잠 31:4,5).  본문에서 제사장의 음주를 금하고 있는 까닭도 같은 이유에서이다(9절). 우리는 일전에 미국의 상.하의원들이 부시 미대통령이 지명한 타워 국방장관 후보의 인준을 거부한  사건을 들어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인권 거부 이유 중의 하나는 중재한  공직을  감당할 사람으로는 지나치게 음주가 심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써 살아갈 중재한 책무를 지니고 있는 성도와 음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 성도라고해서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절대 원칙을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자제와 절제의 정신이 그 누구보다도 더 요구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 일찍이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있어선 고기를 먹든 안 먹든 모든 것이 가능하나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13)고 다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음주는 타인에 앞서 먼저 스스로를  실족케 하기 쉬운 것이라는 점을 어느 때라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엡 5:18).

  3. 제사장의 몫으로 돌릴 희생 제물의 규례 (10:12-15).
  성막에서 봉사하는 제사장의 음주를 금하는 앞절에 이어 본문에서는 하나님께  바쳐진 희생 제물, 곧 화목제와 소제의 제물 중에서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지는 부분에  대해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즉 제사장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할당된 기업이나  일정한 수입원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제사의 제물 가운데 일부를 그들의 몫으로 허락하신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 언급된 화목제 제물의 경우에는 제사장들  뿐만 아니라 여자를 포함하여 제사장 가문에 속한 모든 식솔이 다 먹을 수 있었다(14,15절). 반면 속죄제, 속건제, 소제의 경우에는 제사장과 남자 아이들만  응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12,13절). 이처럼 화목제의 경우 다른 제사와 달리 남여가 모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화목제가 하나님과 인간의 친교와 화목의 회복을 상징하며, 자기 백성 모두를 배려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애정과 자비의 정신이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을 적절히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과 성도들이 현시점에서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바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義)임을 깨달을 수 있다.
 
  4. 제사장들의 범과(犯過)에 대한 아론의 견책(10:16-20)
  본문은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지는 희생 제물과 관련하여,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바친 속죄제 제물의 고기 중 그들의 몫으로 돌려진 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않고 모두 불태워버린 것에 대해 모세가 견책하는 내용이다(16-18절). 그러나 그 행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아론의 말을 듣고서는 모세가 화를 누구러뜨리는 장면이다(19,20절).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온 회중이 범죄했을 때 그것을 속하기 위해  드리는  속죄제의 경우에는 피를 성소에 가지고 들어가 단 주위에 뿌리기 때문에 그 희생 제물의 고기는 먹을 수 없었다(4:13-21). 그러나 본문의 속죄제는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위임받고 제사 직무에 처음 임하는 날 이스라엘 온 회중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드린  제사로써 그 속죄제 희생의 피를 성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희생 제물의 고기는 아론과 그 아들들이 거룩한 곳에서 먹을 수 있었다. 이 경우  제사장이 속죄제 희생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고기를 먹음으로써 제사장이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를 대신 지고 여호와 앞에서 속죄한다는 영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따라서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 희생 제물의 피를 뿌려 속죄할 뿐만 아니라 그 희생 제물의 고기를 먹는 행위를 통하여 백성의 죄를  속하는 대속 사역에 참여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제사장의 중재자적인 성격을 분명히 볼 수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한다. 또한 모세가 그들이 속죄제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을  책망한 것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교훈받을 수 있다. 첫째, 주의 사역에  임하는  자는 우선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파악키 위해 노력해야 하며 둘째, 범죄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또는 징계는 사람의 지위 고하나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동일하게 적용된다.

  * 통회하는 마음 - 본문에는 온 회중의 죄를 대신 담당한다는 상징적 의미로 속죄제의 희생 고기를 먹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17절) 이를 먹지 아니한 아론과 그 두 아들을 모세가 꾸짖는 장면이 나온다. 얼마 전에도 나답과 아비후의 불미한 사건이 있는터라 이때 모세의 노함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1,2절). 그런데 이러한  질책에  대하여 아론이 자기 변호적인 답변을 한 것은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케 해준다. 아론의 대답의 요지는 한마디로 경건한 마음으로 먹어야 되는 음식을 아들이  죽은  사건으로 인해 도저히 경건한 마음으로 먹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만일  그처럼  준비되지 못한 마음으로 제육(祭肉)을 먹었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죄를 하나님  앞에  추가하는 행위였을 것이라는 뜻이다(19절).
  여기에 대한 모세의 반응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20절)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하나님의 징벌 역시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여자적(如字的)조항에 얽매이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신 상황에 따라 용서와 긍휼을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라는 점이다(시 86:15). 하나님 앞에서는 죄를 지은 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대신 그 죄를 회개하고 진심으로 자복하는 것이 가장 크고 중요한 문제이다(시 51:17).  그러기에 아론이 보여준 겸허한 심령은 비록 그가 율법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모세의 마음을 누구러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Articles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