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 시내 산 위에서 주어진 '언약의 말씀'(20:22-23:33)에 이어 계속해서 모세에게 들려진 여호와의 음성으로 이스라엘과 공식적으로 언약을 체결하기 위한 부르심이다. 나답과 아비후 - 대제사장인 아론의 두 아들이다(6:23). 이들이 아론 및 장로 70인과 함께 산 위로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제사장 자격으로 모세와 동행하는 것이 허락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훗날 이 둘은 제사장직을 잘못 수행함으로써 여호와의 진노를 사 죽임 당하였다(레 10:1-3).
====24:2
모세만...가까이 나아오고 -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백성들을 대표하여 모세만이 여호와께서 현현하신 산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의인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백성들의 중보자로 삼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 신약 시대에는 더 이상 그 같은 인간 중보자는 필요없게 되었는데,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모든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로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그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피의공로를 힘입기만 하면 자유로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데 이를 가리켜 신학적으로 '만인 제사장주의'라 한다(벧전 2:9).
====24:3
모세가 와서 - 하나님께로부터 지시를 받는 모세(1, 2절)가 일단 시내 산에서 내려와 백성들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하는 것을 가리킨다.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 - 십계명(20:1-17)을 제외한 20:22-23:33의 모든 말씀을 가리킨다. 십계명은 백성들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들었지만, 이 말씀은 모세만이 하나님로부터 들은 것이므로 그는 이것을 백성들에게 성실히 전달해야 했다(Keil,Wycliffe). 한 소리로 응답하여 - Modern Language Bible은 이를 '만장일치로 응답하다'(unanimously replied)로 번역하였다. 이는 백성들이 한 사람도 어김없이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겠다고 다짐한 것을 가리킨다.
======24:4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 비록 백성들이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구두(口頭)로 멩세했지만 보다 확실한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이다. 한편 밤 사이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동안 하나님의 '진리의 영'(요 14:17)이 그에게초자연적으로 역사하셨을 것이기 때문에 그 기록에는 인간적인 오류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딤후 3:16;벧후 1:21). 단을 쌓고 - 구약 시대의 제단은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을 축복하기 위해 강림하는 장소로서(20:24), 곧 여호와의 현존(現存) 및 임재(臨在)를 상징한다. 한편 여기서는 피흘림이 없이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공식 체결 될 수 없으므로(8절;창8:20,21) 피흘리는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해 단을 쌓은 것이다. 열 두 기둥을 세우고 - '단'이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여기 '열 두기둥'은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 당사자인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상징한다(Keil,Lange,Pulpit Commentary) 고대에는 이처럼 쌍방간에 계약을 체결한 데 대한 기념으로 돌 기둥을 세우거나 돌 무더기를 쌓는 풍습이 있었다(창 31:44-53;수 24:26).
======24:5
청년들을 보내어 - 혹자는 이들을 아론의 아들들로 보기도 하지만(Augustin), 그런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당시는 아직 제사규례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문자 그대로 젊은이들을 의미하는데, 이들이 선택된 이유는 짐승을 잡아 다룰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제사장적 역할을 수행하던 한 집안의 장자들이었을 것이다. 번제...화목제 - 번제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봉사와 헌신을,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평화와 교제의 회복 및 유지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레위기의 제사 제도가 제정되기 전이므로, 이 같은 엄격한 의미를 지닌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아마도 이는 그 이전부터 전해져 온 보편적 제사를 총괄하는 대표적인 의미의 제사일 것이다(20:24).
======24:6
피를 취하여 - 피는 생명의 근원으로(창 9:4,5)제사나 계약 체결의 필수 요소였다(창 15:10; 히 9:22). 이 피를 단과 백성들에게 각각 반씩 뿌린 것은(6,8절)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같은 피를 나눈 유기체적인 생명체로 연합되었음을 의미한다(일반적으로 의형제를 맺을 때 피를 나누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반면 계약 체결에서의 피는 계약위반시 죽음에 의한 처벌을 뜻하기도 한다. 이같이 하나님은 언약의 책을 근거로 하여(7절) 이스라엘과 피 언약을 체결하셨던 것이다. ======24:7
언약서 - 모세가 백성들과 더불어 십계명을 받은 이후, 이어 시내 산에서 백성들을 대표하여 단독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과 율례를 가리킨다(20:22-23:33). 모세는 이를 책에 기록하였고(4절) 또한 백성들에게 낭독하였다. 이는 성경이 기록되어 전달되는 초기의 과정을 보여 준다.
======24:8
피를...백성에게 뿌려 - 피의 반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단에 뿌리고(6절), 나머지 반은 백성들에게 뿌려 쌍방이 계약 당사자가 되면서 상호 책임과 의무를 공유하게 되었음을 입증했다. 한편 이때 피는 붉은 양털과 우슬초에 적셔서 흩뿌렸는데(히 9:19), 사람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물건이 이런 방법을 통해 종교 의식상 깨끗해졌다(히 9:22). 이것은 장차 인간의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깨끗해짐을 상징하는 뚜렷한 예표론적인 행위이다(히 10:1;요일 1:7). 언약의 피 -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에 체결된 언약을 공식적으로 성립시키는 피란 뜻이다. 그러나 구속사적으로 볼 때 이때의 피는 짐승의 피이기 때문에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한다(히 10:3,4). 따라서 이 피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 상에서 희생시킴으로써 세우실 영원하고 온전한(히 10:12,14) 언약의 피(마 26:28;막 14:24;눅 22:20)를 상징한다. 이런 의미에서 '첫 언약'의 중보자와 희생물은 각각 모세와 짐승이었으나, '새 언약'(눅 22:20)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중보자인 동시에 희생물이 되셨던 것이다(히 9:15,28; 10:10).
=====24:9
모세와...올라가서 - 모세와는 달리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70인의 장로는 산꼭대기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고(2,12절) 시내산 기슭이나 중턱까지에만 올라갔을 것이다(Pulpit Commentary).
======24:10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때까지는 하나님을 단지 '조상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으나(3:13,15; 4:5),이제 언약 예식을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한편 성경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는 살 자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으며(33:20), 또한 실제로 아무도 본 자가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딤전 6:16). 그런데 본절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마치 하나님을 본것으로 나와 있는 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았다는 뜻이 아니라. 아마도 하나님의 형상의 영광을 보았거나 혹은 70인역의 번역처럼 하나님이 계신 장소를 보았음을 가리킬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시내 산 정상에서 하나님과 단 둘이 6일간을 체류한 모세까지도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등'을 보았다는 기록(33:23)을 보아서도 분명해진다. 아뭏든 하나님은 영이시므로(요 4:24)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 특권은 갖고 있다.
청옥을 편 듯하고 -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인간 필설(筆舌)로 묘사해 놓은 구절로 마치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여호와의 보좌의 형상(겔 1:4-28)과 유사하다. 그런데 여기 청옥, 즉 사파이어(sapphire)는 '순결'을 상징하는 보석으로서 여기서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편 듯하다'에 해당하는 '케마아세 리브나트'( )는 '예술 행위'(케마아세)와 '길'(리브나트)이 합쳐진 말로 '청옥으로 아름답게 포장한 길과 같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발 아래가 마치 이와 같다는 것은 그 분의 주변에는 그 어떠한 성스럽지 못한 것도 감히 근접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말일 것이다.
=====24:11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 - '존귀한 사람'이라고 번역된 '아칠'( ) 운 '분리시키다', '보존하다' 혹은 '선택하다' 등의 뜻을 지닌 '아찰'에서 유래한 말로 직역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선택된 자'(혹은 주요 인물)가 된다. NEB는 이를 '지도자들'(leaders)이라고 번역했다. 이들은 곧 모세와 아론, 나답과 비후 그리고 70인의 장로를 가리킨다(9절).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 로 솰라흐 야도) - 곧 죽이지 아니하셨다는 의미이다. 한편 손(야드)은 성경에서 종종 관용적으로 사용되는데 몇 가지 경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사람을 대표할 때(삼상 22:17) (2) 정의를 표현할 때(21:24) (3) 심판의 표현으로(사 10:32) (4) 의무를 가리킬 때(수 10:6) 곧 이와 같은 '손'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본문에서처럼 '죽인다'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창 22:12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본절에서 '솰라'는 '뻗치다', '보내다'는 뜻인데 힘이나 권세를 나타내는 '손'(야드)과 결합하여 '죽인다' 혹은 '상하게 한다'는 강조적 의미를 띤다. 먹고 마셨더라 - 계약 체결 후의 공동 식사는 대개 계약을 체결한 데 대한 상호 신뢰와 교제(창 24:32-54)를 나타내는 증거이다(오늘날도 계약 체결 후에는 일반적으로 식사를 함께 한다). 여기서도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공동 식사를 한 것은 피로 맺은 계약으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교제가 회복되고 실제적인 관계가 확립되었음을 나타내준다(Calvin).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성도와 하나님 간의 교제가 영원히 회복되었음을 뜻하는 신약 시대 성만찬 예식의 예표가 된다. 한편 이때의 식사는 앞서 드린 화목제의 고기였는데(번제는 모두 태워없앴기 때문에 화목제물만 사용됐을 것이다)율법에 규정된 것과 같은 엄격한 제사 제도가 정해지기 전에는, 하나님께 바쳤던 이러한 남은 희생 제물은 예배자들이 함께 먹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24:12
율법과 계명( , 하토라 웨하미츠와) - 여기서 '율법'으로 번역된 '토라'의 원뜻은 '지시' 또는 '지침'이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적 개념에 근거하여 '토라'는 구약에서 몇 가지 의미로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즉 (1) 일정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제사장 혹은 선지자를 통해서 내리신 방향 제시나 깨우침(학 2:10-13) (2)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충고나 깨우침(잠 1:8이하) (3) 단일한 법적규례나 가르침(레 6:9) (4)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가르침 전체 등이다. 특히 이 경우에는 정관사나 한정적인 고유 명사와 함께 쓰였는데 본문의 경우도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토라는 그 후 점차 의미가 확대되어 오경(五經)을 비롯한 구약 전부분을 포괄하기에 이른다(마 22:40;요 12:34). 한편 이 밖에도 율법을 가리키는 다른 명칭들이 있는데 곧 십계명을 지칭하는 '드바림', 법령 또는 법규를 의미하는 '호크',판례를 뜻하는 '미슈파팀', 명령을 가리키는 '미츠와'등이 있다. 그렇지만 본문에 나타난 '율법과 계명'은 정확히 십계명 전문을 가리킨다(34:1,28). 돌판 - 이 돌판은 두 개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 앞뒤로 글이 새겨져 있었다(32:15). 그 내용의 성격상 종종 증거판(31:18), 혹은 언약의 돌판(신 9:9)이라고도 하는데 첫번째 돌판은 이스라엘 백성의 금송아지 숭배사건 때문에 깨뜨려졌고(32:19), 후일 법궤안에 보관된 십계명 돌판은 하나님께서 다시 만들어 주신 두번째 돌판이다(34:1,28) 그러나 두번째의 돌판은 처음 것과는 달리 모세에 의해 판이 만들어졌고, 하나님께서는 그 만들어진 판에다 글을 새겨주신 것이다(34:1,4). 한편 이러한 두 돌판과 관련된 십계명 구분법에 대하여서는 신 5:22 주석을 참조하라.
======24:13
여호수아 - 17:9 주석 참조. 하나님의 산 - 호렙 산, 즉 시내 산을 가리킨다(3:1). 성경에는 호렙 산을 '하나님의 산'이라고 부르는데(18:5;왕상 19:8) 원어로는 '하르하엘로힘'이라고 하여 '산'(하르)이 아닌 '하나님'에 정관사가 붙어서, 산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산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실로 하나님은 아산에서 모세를 부르시고(3:1-4:17) 율법을 주셨으며(19:20-31:18), 또한 엘리야를 만나서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셨던 것이다(왕상 19:8-18). 그런데 이스라엘의 율법과 예언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의 활동이 모두 이 산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24:14
훌 - 17:10 주석 참조 일( , 다바르) - (하나님의)'말' 또는 '말씀'으로 번역되는 '다바르'에는 '사정', '문제'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데 주로 '언어에 관한 사건'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때의 일이란 다툼, 논쟁을 뜻한다. KJV는 이를 사건, 일(matters)로 번역한 데 비해 NEB와 NIV는 논쟁(dispute)으로 번역하여 보다 구체적인 뜻을 전달하고 있다.
=====24:15
구름 - 성경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방법으로 구름이 자주 등장한다(19:9,16; 34:5; 민 11:25; 시 97:2; 사44:22). 그런 맥락에서 이스라엘을 백성들 앞에서 인도한 구름 기둥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일종의 표시였다(13:21; 40:35,36,38; 민 9:17-23; 신 1:33).
=====24:16
여호와의 영광( , 케보드 예호와) - '영광', '존귀'라는 뜻을 지닌 '케보드'는 '풍부함', '장관'(壯觀)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따라서 구름, 불, 뇌성 등 백성이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했던 장엄한 광경(17절;19:16,18)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머무르고 - 기본 동사 '솨칸'( )은 '거주하다', '정착하다'는 뜻이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케노오'( ) 라는 말은 '텐트를 치다', '거주하다'라는 뜻으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인간 가운데 거하심을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되었다(요 1:14). 이처럼 하나님께서 땅에 강림하시거나 머무시는 것을 초자연적인 어휘를 써서 설명하지 않고 이같이 평범한 말로 기술하고 있음은 인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이다. 제 칠 일에...모세를 부르시니라 - 아마 엿새 동안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하고 산의 중턱에서 계속 대기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실로 하나님의 세부적인 지시와 계명을 새긴 돌판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이런 준비기간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신자들도 하나님과 보다 밀접한 관련을 맺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영광을 바라보고(사 6:1-7) 자신을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Luther).
======24:17
맹렬한( , 오켈레트) - 기본형 '아칼'( )은 '먹다', '먹어 치우다', '삼키다' 등의 뜻을 갖는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종종 이같이 '사르는 '로 상징하고 있다(왕상 19:12;시 50:3; 97:3;사 66:15; 말 3:2). 불 같이 보였고 - 이는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도 그것을 뚫고 내비친(19:16)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실로 어떠하다는 것을 가히 짐작케 한다.
======24:18
산 위에 올랐으며 -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내 산 정상 혹은 중턱까지 오르내린 모든 기록에 대해서는 출 19:16-25 강해, '시내 산과 모세'를 참조하라. 사십 일 사십 야 - 성경에서 40이란 숫자는 특별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모세가 두번째로 십계명을 받을 때도 40일을 머물렀고(34:18;신 9:18), 엘리야가 호렙 산까지 여행한 기간도 40일이며(왕상 19:8), 예수께서 광야에서 금식하며 시험받은 기간역시 40일이다(마 4:1;눅 4:2). 또 이스라엘백성은 출애굽 후 광야에서 40년간 유랑했다. 이렇게 볼 때 40이란 수는 '시험과 시련의 기간' 혹은 '새로운 힘을 얻는 기간'을 의미함을 알수 있다. 한편 태초 천지 창조가 6일만에 이루어졌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여기서 장막의 양식에 관한 계시가 40일이나 걸렸다는 것은 의미 심장하다. 즉그것은 '장막'이란 개념 속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20:22에서부터 지금가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서의 내용을 계시받고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본장에서 모세는 일단 하나님의 1,2절 말씀까지를 듣고 시내 산에서 하산하여 기념 제사를 드리고 전백성들에게 언약서를 낭독하여 모두 순종하겠다는 맹세를 받고 있다(3-8절). 그 다음 모세는 백성의 대표로 장로 70인을 데리고 시내 산에 올라가서 함께 식사한 후에 다시 하산하고 있다(9-11절). 그리고 시간이 조금 경과한 후에 십계명을 돌판에 새겨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재차 산에 올라가(12-18절) 거기서 언약 관계 유지에 필수적인 성막 건축, 제사장 위임 등에 대한 명령을 받고 있다(25장 이하).
본장은 이러한 제2차 시내 산 계시의 서론을 이루는 부분으로서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은 백성들의 전의지적 결단이 피의 희생으로 표현되는 역사적 장면이 제시되어 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명실 상부(名實相符)한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9-11절). 그들이 앞으로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한다면(3절) 이러한 아름다운 관계는 지속될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받은 우리도 주의 말씀 순종 여부에 따라 하나님과 친밀하고도 기쁨에 넘치는 교제를 계속 이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지속하지 못하는 근본 이유는 하나님의 무관심이 아니라 우리의 불순종과 불성실 때문이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죄'라 한다.
1. 언약서 낭독과 백성의 순종 서약(24:1-11)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신정 국가로서의 언약이 공식적으로 비준(比準)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1) 언약 체결을 위한 준비 작업(3-6절)에 이어 (2) 모세가 언약서(20:22-23:33)를 백성 앞에서 낭독하였다(7a절). (3) 그리고 그 언약서에 대한 백성들의 준행 서약(7b절)이 있자 곧 (4) 언약의 피를 뿌림으로써 언약 체결에 대해 확인 작업을 하였다(8절). (5) 그 후 70인의 장로가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서 체결 완료와 앞으로의 관계 지속을 다짐하는 의미로 공동 식사를 나눔으로써 언약 체결이 최종 완료되었다(9-11절).
이로써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군주로 하는 신정(神政) 국가 체제를 확립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하는 신성한 의무가 생겨났다. 동시에 여호와의 절대적인 보호와 사랑을 힘입을 수 있는 그분의 백성이요 항상 그분과 더불어 살게 되는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피로 맺은 시내 산 언약은 신약 시대 그리스도와 교회 간에 피로 맺은 성만찬 언약(마 26:26-28)의 예표라 할 수 있다.
* 언약 인준으로서의 피. 성경에서 피는 생명을 상징하며(창 9:4,5) 희생 제사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되었다. 더욱이 이 '피'는 계약시 언약의 당사자간에 그것을 공고히 하기 위한 증표로 사용되었다. 즉 언약 체결시 '언약의 피'를 흘림으로써 만약 그 약속을 파기하는 자는 생명의 근원인 피를 기필코 흘려야 한다고 맹세하였던 것이다.
이 언약의 인준으로서의 피는 성경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그 첫번재 암시는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짐승의 피를 흘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사건에서 보여진다(창 3:21). 노아도 희생의 피를 통해 하나님의 영영한 언약을 체결했다(창 8:20-22). 아브라함의 횃불 언약시에도 마찬가지였다(창 15:7-21). 또한 유월절 때 어린 양의 피는 오고오는 세대에 대속을 통한 생명의 기적과 하나님의 영영한 언약의 성취를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본문의 사건도 언약의 제정에 있어서 피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한 한 예이다. 한편 본문의 피 제사에 있어서 모세가 제단과 백성들(열두 기둥)을 향하여 피를 반씩 나누어 뿌린 것(6-8절)은 (1) 같은 희생의 피를 나누어 가짐으로써 두 언약(하나님과 백성) 상대자들은 이제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로 연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또한 그 피는 동일한 피이지만 두 개념 곧 죽음과 생명, 공의와 사랑이라는 이중적 속성을 지님을 뜻한다.
그러므로 모세가 언약의 인준으로서 피를 뿌린 이 사건은 언약의 완성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이 되어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역을 예표한다(마 26:28). 이처럼 모세 시대 피뿌림의 의식은 오늘날 인간의 죄를 성결케 하시고 새 생명을 허락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승화되었다. 즉 그분은 단 한번의 피뿌림으로 영원한 효력을 발생케 하셨다. 따라서 언약의 피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완전히 충족되었기에 주를 믿기만 하면 그 보혈의 공로를 힘입게 되므로 또다시 짐승을 희생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언약의 피를 믿는 것은 하나의 예식으로서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생명의 절차로 인식되어야 마땅하다.
2. 모세의 시내 산 재등정(24:12-18)
언약 체결 후(3-11절) 하나님이 특별히 모세만을 다시 시내 산으로 부르시는 장면이다. 그 이유는 (1) 언약의 구체화의 일환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핵이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만남의 장소인 성막에 관한 모형 및 그에 따르는 각종의 제도에 대해 설명하시기 위해서이었다(25-31장) (2)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한 십계명의 두 돌판을 모세에게 주시기 위함이었다(12절).
이에 모세는 시내 산상에서 40일간 금식하면서(신 9:9) 하나님과 신비스런 교제를 하다가(15-18절) 백성들의 금송아지 우상 숭배로 인해(32:1-6) 급히 산을 내려오게 된다.
* 하나님과의 대언자(代言者) 모세. 출애굽의 영웅 모세는 거칠고 불평 많은 히브리 백성을 노예의 현장에서 자유의 땅으로 인도했던 능력있는 사역자였을 뿐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대언자였다.
하나님께서는 각인에게 당신의 뜻을 전달하기도 하시지만 특별히 이처럼 당신이 선택한 지도자를 통해 당신의 뜻을 계시하신 경우가 많다. 이러한 대언자의 필요성은 하나님의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통치의 한 방법으로서 채택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성문화(成文化)된 '말씀'이 없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지도자에게 당신의 신적 권위를 부여하시고 그를 통해 말씀하심으로모든 백성에게 계명을 지키게 하셨다.
하지만 이러한 형태의 계시 전달 방법은 오늘에 이르러까지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객관적인, 그리고 그 자체가 능력을 지닌 당신의 말씀을(히 4:12) 주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완전하며 각개인과 공동체의 영적.도덕적 욕구와 구원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딤후 3:16). 종교 개혁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성경의 충족성(充足性)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은 또 다른 힘(하나님 이외의)을 필요로 하는 불완전한 계시가 아니다.
한편 당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이 대언자였다면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말씀의 해석자라 할 수 있다. 현존하는 이 세상에 말씀의 권위보다 더 큰 권위, 동등한 권위를 지닌 자는 없다. 충족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무한한 능력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능력과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데는 인간의 지혜와 권위가 아닌 성령의 내적 조명이 필요할 뿐이다(시 1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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