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엘림과 시내 산 사이 신 광야 - 이곳을 가데스 바네아 부근의 신 광야(민 33:36)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말하는 신 광야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시네산까지 가던 도중에 있는 훨씬 남쪽 지역을 가리킨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이곳은 오늘날 '와디 타이베'(Wady Taiybeh)에서 동쪽으로 이르는 산악도로를 통과하여 시나이 반도의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뻗어있는 황량한 고원 지대인 것같다(서론,출애굽 여정>.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 십 오일 -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날은 1월 15일이다(민33:3). 따라서 그들은 그로부터 꼭 한달만에 이곳 신 광야에 도착하였음을 알 수있다. 한편 출애굽한 이스라엘인의 수는 장정만 60만 가량이었으니(12:37). 그들이 아무리 많은 양식을 갖고 나왔다 할지라도 이때에는 양식이 거의 다 떨어진 상태였을 것이다(Knobel).
======16:2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 일전에 모세만을 원망했던 것과는 달리(14:11;15:24)이제는 아론까지도 원망하기 시작한 것은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의도가 점점 더 가중되어 가고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출애굽하였고, 홍해를 육지와 같이건넜으며(14:21, 22), 또한 마라에서 기적을 체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15:22-25), 이처럼 어려운 일만 봉착되면 그들이 원망을 그치지않은 것은 참으로 가증스럽기 짝이없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하여 길이 참으시는 중 광야 40년동안 동행해 주신 까닭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창17:1-8)을 이행하시기 위함이었다. 실로 이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잘 증거해 준다(신 9:5).
=====16:3
고기 가마 곁에...떡을 배불리 먹던 때 - 이스라엘의 배은 망덕함이 단적으로 표현된 말로서 과거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비참했던 때(2:23;5:9)를 오히려 미화(美化)시켜 회상하고 있는 장면이다. 물론 그들은 간역자들의 혹독한 감독하에서도 고기 끓이는 일과 떡 굽는 일에 종사함으로써 약간의 고기 맛을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마치 그 시절이 화려했던 것처럼 '배불리 먹었다'라고 자랑삼아 과장함으로써 애굽의 종살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비굴한 노예 근성을 여실히 드러냈던 것이다. 여호와의 손에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 즉 '열번째 재앙 패에 애굽인들과 같이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것을'이라는 뜻이다.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기는 커녕 오히려욕을 끼치는, 구원의 자유를 누릴 가치조차 없는 백성들의 패역한 태도이다. 동시에현세적 안일만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적인 모습도 엿보인다.
======16:4참으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함은 결국 당신 자신을 원망하는 배은망덕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꾸짖기에 앞서 먼저 그들이 요구하는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자비로운 은혜를 주신 것은 순전히 그의 끝없는 긍휼과 사랑에 기인한 것이었다. 한편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 만나가 장차 오실 신령한 산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가버나움 회당에서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요 6:29-59)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일용할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 공중에 나는 새와 들판의 하찮은 풀 한포기도기르시고 입히시며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지않을리 없음을 확신시켜 주는 구절이다(마 6:25-34). 한편 이 구절은 주님이 가르치신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라는 기도문의 근거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Wycliffe). 나의 율법 -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거두어 들이는 데 있어서 지켜야 할 법도를 가리킨다. 곧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두되, 제 6일에는 갑절이되게 거두어 안식일을 예비해야 하는 것을 가리킨다(23-29절). 하나님은 이 율법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코자 하셨다. 그런데 이 '만나 시험'은 최초 에덴 동산의 '선악과 시험'을 연상시킨다(창 2:16, 17).
======16:5
제 육 일에는...갑절이 되리라 - 이 말은 제 6일에도 평일처럼 만나를 거두되,그것을 되어 보면 놀랍게도 배가 된다는 뜻이다 (Knobel, Kalisch).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둔 바 제 6일의 만나 양이 배가 되는 이유는 그 다음날이 안식일이므로 만나를 거두지 않고 쉬어야 했기 때문이다. 창조 질서(창 2:1-3) 에 근거한안식일 개념이 이 만나 사건에서 보다 뚜렷히 율법화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마침내 이는 20:8-11에서 십계명화 되었다(창 2:1-3 강해, 안식일 입법의 기원과 정통성).
======16:6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 바로 앞의 4, 5절이 위기에 몰린 모세와 아론에게 하나님이 그 해결책을 제시해 주신 부분이라면, 이제 6-10절은 모세와아론이 백성들에게 담대하게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를 선포하는 부분이다. 이처럼 믿음의 지도자들과 하나님의 일꾼들은 자신의 무능과 부족을 뼈저리게 깨달은 다음, 오로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의 온 뜻을 맡김으로써 백성들을 지도해야 한다. 저녁이 되면 - 해질 때에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를 보내실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여호와께서...알 것이요 - 원망과 불신으로 대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도자모세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만 하는 최대의 답변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 뿐이었다. 그러므로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능력이 드러나는 저녁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것이라고 담대히 말한 것이다. 물론 모세는 아직 그 자신도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날 지 구체적 방법을 몰랐으나, 저녁 때에 하나님께서 양식을 풍족히주실것을 믿었고, 또 그렇게 되면 모든 백성들이 인간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이스라엘의 인도자가 되심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에 과감히 선포한 것이다.
======16:7
아침에는 - 만나를 내려주시는 일이 아침에 일어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여호와께서...들으셨음이라 -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원망한 것은 실제로 모세에게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적 권위를 위임받은 모세를 원망한 것은 그 권위의 근원이 되시며, 위임자가 되시는하나님 자신을 원망한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구관대...원망하는냐 - 이 구절은 바로 앞 내용의 반복이며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힐책하는 반문이다. 특별히 여기서 모세는 '우리가 누구관대'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신분, 즉 자신은 하나님에 의해 위임받은 자일 뿐 어떤 특별한 존재가아님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는 자기에게 원망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며,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꾸짖고 있는 것이다.
======16:8
저녁에는...고기를...아침에는 떡으로 - 이로 미루어 보아 만나(떡)는 아침에 먹을수 있도록 새벽녘에, 그리고 메추라기(고기)는 저녁에 먹을 수 있도록 해 질 무렵에내렸던 것같다(12절)=====16:9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 여기서 '여호와께'(* )로서 곧 '여호와의 면전에'란 뜻이다. 즉 원망과 불평을 토하는 장막에서 나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곳으로 나오라는 말이다. 이것은 (1)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의 상징인 구름 기둥의 존재를 다시 한번 상기시킴으로써 백성들의 불신앙을 각성시키기 위함이었고 (2)광야 음식인 만나와 메추라기의 공급이 오직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새겨주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때때로 우리들의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그의 은혜를 망각하는 데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할 때 우리는 매사에 원망과 불평을 감추지 않던 자신의 잘못과 수치를 깨달으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새로운 감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6:10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 더라 - 카일(Keil)은 여기에서 '여호와의 영광'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엄을 현시(顯示)한, 구름 사이로 터져나온 찬란한 '빛의 섬광'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의 명을 따라 광야를향해 구름기둥이 서 있는 쪽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 순간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 특이한 형상을 보임으로써 당신의 임재하심을 나타내셨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나타나다'로 번역된 '니르아'(* )는 '보이다'라는 뜻으로 햇빛이 구름 사이로보이듯 주의 영광의 광채가 보여 졌음을 의미한다.
======16:12
해 질 때에...아침에는.<16:8>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 '여호와께서 살아계신 나의 하나님인 줄을 알게 되는것',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위에 행하신 모든 기적 현상의목적이자,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모든 구원 사역의 결론이다.
=====16:13
메추라기 - 짧은 날개와 작고 둥근 머리, 그리고 통통한 몸집을 가진 꿩 아과(亞科)의 철새이다(민 11:31). 이 메추라기는 팔레스틴을 중심하여 봄에는 아프리카에서떼를 지어 북쪽으로 나아왔다가 가을쯤 되면 아라비아와 시리아 쪽으로 옮겨가 겨울에는 다시금 아프리카로 돌아간다(Schubert, Knobel)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이러한 계절풍을 타고 이동하는 메추라기 떼들을 마치 비 같이 이스라엘 진에 떨어지게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한편이 메추라기는 40년간 내렸던 만나(35절)와는 달리 1개월 동안만 내려 졌다(민 11:21).
======16:14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 - 만나의 모양을 묘사한 구절로 민 11:7-9은 이것을 갓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아 맷돌에 갈 수도 있고, 가마에 삶을 수도 있었던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의 색깔은 흰색이며 맛은 기름이나 꿀을 섞은 과자와같았다고 증거하고 있다(31절). 말하자면 이것은 굵은 모래알(약 3mm) 크기의 쌀가루같은 것이었다.
=====16:15
이것이 무엇이냐 - 이 말의 히브리어는 '만 후'(* )로서 '만나'(Manna)라는 명칭은 바로 이 단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 즉 '무엇이냐'(What)라는 뜻의 히브리어 '만'을 70인역이 헬라어로 '만나'(* )라고 번역한 데서 그 명칭이 유래하였다( Wycliffe). 여호와께서...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 성경에서 말하는 만나에 대하여 시나이반도 내륙 지방의 유목민들은 '만'이라 불리우는 연지벌레에서 나오는 분비물이 바로이 '만나'인 것으로 주장한다. 반면에 일부 아랍인들은 위성류(tamarisk)에서 나오는진액이 굳어 흰색을 띤 것이 '만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몇몇 학자들 역시 이 만나를 시내 반도 부근에서 자생하는 식물액(液)으로 이해하여 기적적 만나의 공급을 의심한다(Seetzen, Burckhardt, Ritter). 하지만 이러한 주장과 달리 분명 만나는 하나님께서 초자연적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급하신 하늘의 양식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사실은 만나가 (1) 40년동안 백성들이 행진하는 곳마다 사철 구분없이 주어졌으며 (2) 일정한 시간, 제한된 장소에서만 200만 명의 인구에 부족함 없이 충족하게 주어지고 안식일 전날은 평일의 2배가 내려졌다는 점 등에서 분명히 입증된다.
=====16:16
오멜 - 서경에서 유일하게 본장에 나오는 도량형이다. 본래 오멜(omer)은 마른 곡식의 양을 측정하던 조그만 토기 사발이다. 그런데 점차 물건의 부피를 재는 단위로그 의미가 바뀌게 되었다. 1오멜은 오늘날의 도량형으로 환산하여 대략 2,34리터에 해당된다<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16:17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 대략 눈 짐작으로 거두어 들였기 때문에 과부족(過不足) 현상이 일어났다. 따라서 고의성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Pulpit Commentary).
====16:18
남음이 없고...부족함이 없이 -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양 대로만 거두면(16절) 하루 양식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임을 가리킨다. 후일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피차간 과부족이 없었던 이 만나 기사를 인용하여(고후 8:14, 15) 성도간에 피차구제 생활을 할 것을 권면했다. 왜냐하면 이 만나 기사는 모든 물질의 원 소유권자 및공급자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16:19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 이 명령 속에 담긴 의미는 내일의 삶. 특히 의식주 문제에 대한 모든 염려는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뢰하라는 뜻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용할 양식인 만나를 다음 날 아침까지 남겨두지 않음으로써, 하루하루의 양식을 위하여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한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는 신앙(마 6:34)으로 자라갈수 있었다.
======16:20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 백성들의 탐욕과 이로 인한 불순종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식량난에 대한 과거의 체험과 또한 식량의 결핍을 맞게 될지도 모르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매일매일 양식을 내려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모세의말을 믿지 않고 만나를 축적했던 것이다.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 하나님은 백성들의 불순종에 대한 일종의 징벌로서, 만나의 축적을 저지하기 위하여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이렇게 하신 것이다.
=====16:21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 이것도 하나님의 이적적인 역사의 결과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14절> 만나는 맷돌에 갈거나 삶거나 또한 구울 수도 있는 것이었는데, 햇볕에 녹아졌다는 것은 매우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만나가 갖는특별한 영적 중요성(요 6:28-51)으로 인해 그것이 천하게 취급받지 않도록 하나님께서이적적으로 배려하셨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스러졌더라'로 번역된 '나마스'(* )는 '용해시키다', '녹다'는 뜻의 '마사스'에서 온 말로, 만나가 눈녹듯이 녹아버린 것을 뜻한다.
====16:22
제 육 일에는...두 오멜씩 거둔지라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리 알고 그렇게했던 것이 아니다. 즉 의도적으로 2배씩 취한것이 아니라 평소대로 거두어 들여 보니,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1인당 각각 2오멜씩의 분량이 되었던 것이다(Kalish). 회중의 모든 두목이...고하매 - 평소와는 다른 2오멜의 분량을 가지고 백성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그 행할 바를 몰라 하자, 두령되는 자들 역시 놀라 모세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면서 백성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던 것이다.
====16:2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 하셨느니라 - 모세가 두령들에게 제 6일에 거두어진 2오멜분의 만나에 담긴 비밀 곧 하나님께서 뜻하셨던 바(5절)와 그에 따른 취급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 장면이다. 내일은...거룩한 안식일이라 - 안식일은 하나님의 최초 창조 사역을 기념하는 기쁨과 휴식의 날이다(창 2:1-3). 즉 하나님께서 6일간에 걸친 천지 창조 사역을 마치신후 7일째 되는 날 그 창조의 기쁨을 누리신 성별된 날이다. 이 하나님의 안식에 피조물된 인간 역시 기쁨으로 휴식하면서 찬양과 경배로 함께 동참해야 된다는 것이 바로안식일 제정의 이유이자 목적인 것이다(창 2:1-3 강해, 안식일 입법의 기원과 정통성).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 이 말은 만나가 완제품으로 주어진 것이아니라, 백성들의 취향에 따라 요리해 먹을 수 있도록 원재료로서 주어진 것을 보여준다.
======16:24
냄새도 나지...아니한지라 - 만나가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에 의하여 주어졌음을 더욱 명료하게 입증해준다. 즉 평일에는 만나를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두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도 났으나(20절). 안식일에는 벌레도 냄새도 생기지 아니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정하신 법도와 규례 안에서 능력을 나타내사,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안식일에 양식으로 인해 염려치 아니하도록 배려하셨음을 알 수 있다.
======16:25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 이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안식일에는 들에 나가 일할 필요없이 집에서 만나를 먹기만 하도록 특별히 배려하신 목적은 단순히육체적인 휴식만을 보장하려는 데 있지 않았다. 대신 그 날에는 인생의 보다 궁극적인문제들을 고요한 마음으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친교를 맺고 영혼의 안식을 취하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창 2:1-3 강해, 안식일 제정 목적>. 들에서 얻지 못하리라 - 여기서 '얻다'로 번역된 '마차'(* )는 '발견하다','만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얻지 못한다'는 말을 직역하면 '발견하지 못한다'로서(KJV). 이 말은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을 것음을 암시하고 있다.
=====16:27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 앞에서(20절) 백성들 가운데 일부는 만나를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었다. 그런데 백성들이 여기서 다시 한번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두러 들에 나가지 말라고 한 모세의 말에 불순종하는 것을 발견할 수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애타는 심정으로 또다시 안식일 준수를 권면, 훈계하셨다(28, 29절). 한편 여기서 하나님이 안식일을 범한 자들에 대해 단지 훈계와 책망으로끝내고마는 이유는 이 당시는 아직 성문화(成文化)된 율법이 주어지기 전으로 이스라엘의 신앙 정도가 당시 '젖 먹는 신앙 상태'(고전 3:2)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 수여 후에 안식일을 범한 자는 사형에 처해졌다(민 15:32-36).
======16:28
어느 때까지(* , 아드 아나) - 일곱번째 재앙을 당하고도 회개하지 않던강퍅한 바로에게 하나님은 '네가 어느 때까지 내앞에 겸비치 않겠느냐'고 경책하신 적이 있는데(10:3). 여기서도 이 '어느 때까지'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은 당신의말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시고 있다.
너희가...아니하려느냐 -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자들은 이스라엘 민족 중 일부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책망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대하실 때는 한 개개인으로 상대하신 것이 아니라. 민족 전체를 한 공동체단위로 간주하여 취급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들로 하여금 광야 생활중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데 있어서 상호 유대성을 갖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지키는 과정에서 서로 권면하고 위로하여 한 사람도 낙오됨이없이 민족 전체가 말씀을 준행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16:29
볼지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사랑으로 책망하시고 직접적인 징벌은 보류하셨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율법이 완전한 상태로 주어진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이때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처음으로 신정국가를 이루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랑으로 다시 한번 용서하시고 더욱 자세히 안식일의 법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16:30
제 칠 일에 안식하니라 - 안식일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출 20:8-11에 나타난 주석을 참조하라. 그리고 안식과 노동에 대한 내용은 창 2:1-3 강해, '창조 기사에 나타난 노동과 휴식'을 참조하라.
=====16:31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 16:15 주석 참조. 깟씨 - 미나리과에 속하는 '고수풀'(coriander)의 씨를 가리킨다. 이 씨는 회백색에 직경 3mm 정도 되는데 소화제나 향료 또는 조미료로 쓰인다(민 11:7).
=====16:32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 하나님께서는 종종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념물을 간직하게 하거나(수 4:4-8), 혹은 기념 의식을 준수토록 명령하셨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기념물과 기념 의식을 보고 지킬 때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항상 기억케 하기 위함이다. (2) 당대 뿐만 아니라 그들의 후손들에게까지도 같은 은혜를 체험시켜 그들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16:33
항아리를 가져다가...담아...대대로 간수하라 - 이때로부터 만나 1오멜을 담은 항아리는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 및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함께 언약궤 안에 넣어져서(민 17:10; 히 9:4), 광야 생활 동안 보존되어 후대까지 전해졌다. 그러나 역사서에의하면 후일 솔로몬 성전 완공 후 언약궤가 안치될 무렵에는 두 돌판 외의 모든 것은소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왕상 8:9). 한편 혹자는 여기 '항아리'를 '바구나'로 보나(Gesenius), 70인역에 의하면 그의미는 분명 흙으로 만든 항아리 내지는 포도주를 담는데 사용되는 단지(an earthen jar)를 가리킨다(히 9:4).
======16:34
증거판 앞에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리프네 하에두트'(* )는 '그 증거 앞에'란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증거란 율법을 새긴 두 판, 즉 하나님의말씀의 증거를 기록한 판을 뜻하므로, 증거판이라고 불리워졌다(31:18;34:29). 그런데이 일 후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증거판을 받았고(32:15,16;34:1-4), 그때 아론은 만나가 담긴 항아리를 증거판과 함께 법궤 안에 두었다. 즉 만나가 담긴 항아리를증거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함께 법궤 안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히 9:4).
======16:35
사람 사는 땅 - 이어 언급되는 '가나안 지경'을 가리키는 말로, 곧 가나안 땅의 여리고 평지를 가리킨다.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그 땅의 소산을 먹자 그 다음날 부터 만나가 그쳤다(수 5:10-12). 이 때가 출애굽 41년 1월 16일이었다. 따라서 만나를 처음으로 먹은 날이 출애굽 원년 제 2월 15일이었으므로(1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은 정확한 기간은 만 39년 11개월이 된다.
=====16:36
오멜은 에바 십분의 일이더라 - 여기서 1오멜은 2.3리터이고, 1에바는 23리터이다.한편보다 자세한 히브리 도량 단위에 대해서는 제 1권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화폐 및 월력'을 참조하라.
전장에서부터의 이스라엘 광야 역사는 서서히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얼룩지기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본장 역시 백성들이 신 광야에 이르러서(1절) 먹을 양식이 없자 불평하는 장면이다(2,3절).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 추라기로써 저들을 먹여 주시고 있다. 즉 본 장에서 하나님은 불평하는 백성들에 게 하늘로부터의 양식인 만나와 메추라기에 대해 약속하신다(4-12절). 그리고 그 약속을 실제로 수행하신다(13-20절). 그 뿐 아니라 이러한 만나와 관련하여 안식일 규례도 제정하시고(21-30절) 만나 한 오멜을 항아리에 담아 보관함으로써 후손들에게까지도 교훈을 삼으라고 명하신다(31-36절). 이상에서 하늘로부터 임한 만나는 영적으로 볼 때 신령한 하늘 음식, 즉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늘 만나를 먹고 살아간 사건은 신약의 성도들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될 것을 상징한다.
한편, 주지하다시피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旅程)은 인내를 요구하는 고난의 길이었다. 고난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만드는 좋은 약이며,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렛대의 구실을 담당한다. 고난에 능숙한 인간은 그 만큼 자기 부족함을 절실히 깨달으며,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내적 의지가 강하다. 하지만 때때로 고난은 성도들을 좌절의 함정으로 이끄는 끄나풀이기도 하다.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역시 인간의 나약하고 간교한 심성을 보여 주는 좋은 본보기로 그들의 불신앙을 여실히 드러내 준다. 동시에 고 통 중에 있는 자가 그 고난을 인내하지 못할 때는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는 악한 사단의 세력에 동조하게 된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즉 그들은 자 신의 난관을 하나님께 아뢰고 진실한 자세로 도움을 간구하기보다는 막무가내 (莫無可奈)의 불평과 원망을 일삼았던 것이다.
이처럼 본 장은 고난에 못 견뎌 아우성치는 백성들의 소리와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모세의 간구가 한데 어우러져 여호와의 귀를 열었고, 마침내 "너희가 해 질 때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12절)라는 구원의 소식을 전 해 준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즉 만나와 메추라기에 얽힌 이야기는 이렇게 이스라엘의 고난스런 광야 여정과 밀접히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1.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과 하나님의 응답(16:1-12)
본 장의 핵심인 만나와 메추라기의 이적적 사건을 설명키 위한 도입 부분으로 식량 문제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1-3절)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 주실 것에 대한 예고(4-12절)이다. 여기서 성경 기자는 이스라엘의 체류지와 날짜에 관해 상세히 기술함으로써, 시간상으로, 장소적으로 식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음을 역설한다(1절). 즉 이러한 보도는 이스라엘이 확실한 난관에 부딪쳤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앞서 마라에서의 기갈(飢渴)(15: 23,24)이 당장 갈급한 문제에 대한 시험이었다면, 이번 식량 문제는 오랜 광야 여정을 생각할 때 장기적인 골칫거리로 작용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두 문제의 해답은 동일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출애굽을 인도하신 여호와께 전폭적으로 의지하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안고 있는 가장 시급한 문제는 홍해 도하 사건에서도 나타났듯 언제든지 이 백성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한 점이었다. 성경은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한 어조(語調)로 밝힌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애굽에서의 재앙과 홍해에서의 위기를 모면케 하신 주께서 당신의 백성을 굶주림의 불안에 맡기실 리는 없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이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불신의 문제는 현대인 역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의 은총이 놀라운 것은 그래도 이 미욱한 백성을 위해 서 아침과 저녁으로 손을 내밀어 축복하신다는 점이다(4-12절). 이것은 쓴 물, 단물 다 마시고도 쓴 물만 기억하는 인간들에게 끝까지 단물로 채워 주시려 하나님의 은혜이다.
* 과거 지향적인 삶.
성도는 고거의 일에 얽매이기보다는 앞을 향해 나아가 는 자이며 위엣 것을 바라보며 영원한 미래 속에서 삶의 참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는 소망형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이러한 면을 지적하여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14)고 선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에는 이와는 달리 아름다운 것이든, 못난 일이든 지나간 역사를 미화시키려는 부류의 인간이 있다. 이들은 사실을 객관 화시켜 역사적 교훈으로 삼기보다는 부끄러운 과거를 미화시켜 현재의 어두움 마저 위장하려든다. 또한 현재의 비관적 생활에서 도피하여 과거의 삶을 미화시켜 그곳에 안주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전자든, 후자든 과거의 사실을 왜곡시킨다는 점에서는 대동 소이하며 모두 다 불신앙적 처사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치욕적인 노예로서의 삶을 마치 풍요로운 낙원 인 것처럼 미화함으로써 현재의 광야 생활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정당시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3절). 성경은 죄로부터 돌이켜 나온 자가 다시 타락하는 것은 "개는 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다"(공동번역, 벧후 2:22)라며 격렬한 어조로 경고하고 있다. 죄악 세계에 대한 그리움은 현재의 삶을 도탄에 빠드리면, 성도들의 신앙 공동체를 분열과 원망으로 얼룩지게 만든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 에서 삶을 누리는 성도를 악으로 유혹하는 제일의 난제가 바로 그릇된 과거에 의 향수(鄕愁)이다. 이런 견지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과거 지향적인 인간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단호히 배격되어야 할 것이다.
2. 만나와 메추라기(16:13-20)
광야 생활에서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한 전단락에 이어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굶주림을 해결키 위해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먹이시는 장면이 언급되고 있다. 그중 13-15절은 백성들 이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하늘 양식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16-18절은 만나를 취하되 한 사람이 한 오멜씩 취하라는 하나님의 지시이다. 마지막으로 19,20절은 그 같은 만나는 다음날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됨을 보여 주는 부분이 다. 이처럼 절망 중에도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배고픔을 해 결하시겠다는 약속(4-12절)을 마침내 실천하셨다. 한편 출애굽기는 민수기의 병행 기사(민 11:4-35)와는 달리 메추라기에 대해서는 간단히 소개하고 만나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마도 본서 저자가 만나를 둘러싼 후손들의 의혹을 풀어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자세히 알리려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처럼 성경에 나타난 많은 이적 중 만나에 대해 인 간들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결국 이것이 인간의 생사 문제와 직결된 양식(糧食)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인 듯하다. 사마리아 여인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원하였듯이(요 4:11-42) 모든 인간은 유사 이래로 굶주림에서 벗어날 방도를 끊임없이 강구해 왔다. 그런데 여기에 언급된 만나 사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인간의 육신적인 배고픔만을 해결하기 위해 주어진 것 은 아니다. 즉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신 것은 그들의 빵문제만 해결하기 위 한 것이 아니라 매일 내리는 만나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보호하심의 손길을 순간 순간마다 새롭게 체험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순종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만나 사건은 약속에 대한 성취 와 선민은 하나님의 자녀로 결코 버림받지 않는다는 강한 확신을 불어넣었다 는 데에서 그 의미가 깊다.
* 그리스도의 예표인 만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로부터 내린 만나를 보고 서 '이것이 무엇이냐'(15절)고 물었었다. 우리는 이러한 신비에의 물음 속에서 생명의 만나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깨닫게 된다. 즉 본문의 만나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바(요 6:31-35), 메마른 광야 길을 행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나를 먹고 생명을 유지한 것처럼 오늘날 모든 인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참된 구원과 영생의 비밀을 소유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만나가 당시 이스라엘의 기근을 면하게 하는 육 신의 떡이었듯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으로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 을 주는 신령한 떡인 것이다(요 6:48-51). 또한 만나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계속 내렸듯이,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은 신자가 약속의 나라에 가기까지 계속해서 취하도록 주어진 영의 양식이다. 더욱이 만나가 전(全)이스라엘 사람에게 공평히 분배되었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는 만인에게 공평하게 개방되어 있음을 시사해 준다.
* 만나의 분배와 현대 산업 사회의 문제.
인간의 사회 집단 어디에서나 욕심은 제거하기 힘든 것이었다. 본문은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조차 하나님의 은혜 의 소산인 만나를 서로 많이 거두겠다고 욕심 부리는 사람이 있었음을 보여 준 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어느 한 개인에게 축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놀라웁게도 적게 거둔 자나 많이 거둔 자나 자신 이 만족할 만큼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여실히 증명된다(17,18 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다음날까지 남겨 놓은 자의 만나를 썩게 하심으로써 내일의 삶을 하나님께 전적을 의지하지 않는 자를 단호히 배척하셨음을 보여 준다(19,20절). 이상과 같은 하나님의 교훈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대단히 가치 있는 교훈을 던져 준다.
현대 서구 자본주의 사회는 풍족한 물질 문명을 향유(享有)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체제가 이룩한 풍요는 모든 인류가 공유해야 할 가치를 구조 적인 모순을 통해 한 곳으로 이동시킨 것에 불과하다. 즉 나누어 먹어야 할 양 식을 독식(獨食)하는 모순을 합리화한 것이다. 이처럼 현대 자본주의는 한 사람의 포만감을 위해 몇 사람을 기아선상에 놓이게 한 불완전한 모델(Model)의 이념이다. 물론 그렇다고 사회주의(Socialism)가 완전한 분배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창출한 어떠한 이념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사회를 능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따른 결단의 방법 이외에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어떠한 길도 없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3. 만나와 안식일 규례(16:21-30)
만나의 공급 사건을 통해 안식일 규례가 주어지고 있는 장면이다. 즉 만나가 내리기 시작한 지 6일째 되던 날 백성들이 만나를 거두어 보니 평소의 두 배나 되는 양이 거두어졌다(21,22절). 이에 놀란 백성의 두령들은 모세에게 사실을 보고하였는데 이때 모세는 그와 관련된 하나님의 안식일 규례를 일러준다(23- 26절). 그리고 이와 아울러 안식일 준수를 엄명한다(27-30절). 그런데 본래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6일간의 천지 창조 사역을 마치고 쉬시면서 창조의 기쁨을 누린 날이다. 그리고 십계명에 성문화된 안식일 규례는 어디까지나 이를 재확인 한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여기서 만나와 관련하여 안식일 규례를 주시 고 있는 까닭은 훗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이 규례를 지켜야 할 때를 대비, 미리 훈련을 시키기 위함이다. 아무튼 이러한 규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먹고사는 일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한 날을 구별하여 기쁨으로 휴식하면서 하나님께 경배와 영 광 돌리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임을 일깨워 준다. 또한 매일 매일을 살아감에 있어서 하늘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는 사실 을 기억토록 해준다. 바로 여기에 본문에 안식일 규례가 주어진 의미가 있는 것이다.
* 안식일과 휴식의 의미.
구약에서 '안식일'이란 낱말이 처음 언급된 곳은 본 장 23절이다. 여호와께서는 '내일은 휴식이니 거룩한 안식일'이라고 말씀하시며, 안식일과 휴식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안식일이 하나님께서 6일간에 걸친 천지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 7일째 되는 날 쉬시면서 이 날을 특별히 구별하신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에 나타난 안식일 규정은 비교적 간단하다. 안식일은 제 7일에 지키는 것이며, 모든 노동을 중지하라는 것이다(29,30절). 이처럼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서 안식일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로운 휴식일이었으며 하나님의 성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구별된 날 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대로 이해하며 그 의미보다는 형식을 중요시하는 인간의 편협한 교조주의(敎條主義)는 점차 안식일의 참된 의미보다 는 외적 준수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었다. 그리하여 여러 부대 규례들을 제정함으로써 안식일이 휴식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간과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예수 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막 2:27)이라고 말씀함으로써, 내적 능력 을 상실한 채 안식일의 형식적 준수에만 얽매이는 율법주의를 비난하고 안식일 준수의 본래 목적을 밝히셨다<31:12-17, 강해, 안식일 성수의 영적 의미>. 한편 후에 와서 이 안식일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및 부활 사건 이후 '주일'의 개념으로 보다 승화, 발전되었다.
4. 기념으로 간직되는 만나(16:31-36)
만나를 통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겪은 구원 사건은 홍해 도하의 이적(14장) 과 마찬가지로 후손들이 영원히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대대 후손이 기억할 수 있도록 항아리에 만나를 간직하라고 명하신다(31-32절). 그리고 그 기념물을 간직해야 할 곳은 언약궤 안 여호와의 증거판 앞임을 일러주신다(34-36절). 이러한 사실은 만나를 통해 이스라엘과 하나님 간에 다져진 우의와 결속력은 그 누구도 끊을 수 없이 공고한 것임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만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구원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딤전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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