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출애굽기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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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증거하는것이며, 감사하는 마음의 자연적인 발로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신자들이 구원받은 근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찬송케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엡 1:1:6, 12).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 여기서 '높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가아'(* )는'장엄하다', '영광스럽다'는 뜻으로, 원문에는 두번 반복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한편, 70인역(LXX)은 이 구절을 '헨독소스테독사스타이'(* )즉 '그는 영광스럽고도 영광스럽다'라고 개역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높고 위대하심을 시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 애굽의 군대가 완전하고도 철저히 멸망했음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동시에 이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구원의 능력을 찬양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처럼 하나님께 바치는 찬양에 하나님이 과거에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구원 행동을 기억하면서 입으로 고백하는 것은 그 찬양을 보다생동감 있고 더욱 더 감동적이게 하는 요소이다. 즉 찬양이란 공허한 미사 여구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체험적인 고백이어야하는 것이다.

======15:2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이시며 - 본절은 1절에서 언급된 바 여호와를 찬송해야만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구절이다. 그리고 본절은 문자적으로 '나의 힘과 노래는야(jah) 이시며'이다. 여기서 '야'(* )는 여호와(* )란 말의 축어로서 시적 운율상 사용된 것인데, 이는 히스기야, 엘리야, 아하시야 등 이름의 끝말에도 종종 사용되었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 여기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객관적인 관계,즉 '그의 하나님'(his god)으로 묘사되지 않고, 주관적인 소유격, 즉 '나의 하나님'(my god)으로 묘사된 사실에 유의해야한다. 이처럼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남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하나님이어야 한다.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적이고 절대적인 은혜로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언약을 맺으셨으며, 그 언약을 오늘날까지 신실히 지켜오셨음을 강조한표현이다. 즉 이러한 표현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이스라엘 조상과 맺은 언약을잊지 않으시고, 그 언약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암시한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하신구원과 영생의 언약을 지키고 계시므로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을 '나의 신앙 선조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다.

======15:3
여호와는 용사시니 - 애굽 군대를 일거에 무찌르고 승리하신 하나님을 의인화한 것이다. 여기에서 '용사'는 보편적으로 '전쟁에 능한 분'(시 24:8)임을 의미한다.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 여호와는 영원부터 자존하신 분으로서 그와 겨룰만한 자는 아무도 없는 절대 지존자(至尊者)이심을 밝힌다<3:14,15>. 특별히 이 말은 5:2의 '여호와가 누구관대'라는 바로의 비아냥거림에 대한 명쾌한 회답이다. 실로 여호와는 당신의 백성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동시에 대적을 무찌르고 괴멸시키시는 참되고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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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바다에 던지시니 - 애굽 군대의 힘에 비해 월등히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던지다'의 히브리어 '야라'(* )는 '창을 던지거나 화살을 쏘듯이 세게 내던지는 것'을 뜻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삼킬 듯이위풍 당당하게 달려온 애굽 군대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강력하나 힘으로 홍해 바다에수장(收藏)시키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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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 하나님의 크신 능력 앞에서 창졸간에 바다 밑에잠긴 무기력한 애굽 군대의 운명을 묘사하고 있다. 온갖 전투 장비를 갖춘 채 살기 등등하여 용맹 무쌍하게 달려온 애굽의 정예 군대도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힘없는 '돌'같은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 애굽의 방백들은 무거운 구리와 철로 제조된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돌보다 빨리 바다 밑바닥에 ('깊음에')깊이 가라앉고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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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오른 손 - 성경 문학적 표현에서 '손', 특히 '바른쪽 손'은 아무도 당할 수없는 막강한 힘 또는 정의로움을 상징한다. 아울러 구원(시 60:5 ; 108:6)과 위엄과영광의 자리(왕상 2:19;시 45:9) 및 그리스도의 권능과 영광(행 2:33, 35)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당시 세계최강인 애굽의 병거 부대를 집어 바다에 던지신 크신 하나님의능력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손은 선민들에게는 보호와 인도를 상징하는 사랑의 손이나, 대적자들에게는 위엄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심판의 손이다. 원수(* ,오예브).'적의가 있다','원수가 되다'란 뜻을 가진 '아야브'에서 유래된 말로,'대적','원수'를 뜻한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압제하였던 애굽을 가리킨다.
부수시니이다(* ,라아츠) - 이곳과 삿 10:8 두 곳에서만 사용된 동사로서 '산산이조각을 내다'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완전히 섬멸하셨던 사실을(14:28) 반영하고 있다. 한편 본절과 7절은 하나님의 권능과 공의로우신 행적을 개론적으로 서술한 것이며, 그 다음 절부터 홍해 사건을 구체적으로 시각화(視覺化)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Kalisch, Kno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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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거스리는 자 - 10가지 재앙을 당하고도 계속하여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애굽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거스리다'로 번역된 히브리어'쿰'(* )은 '일어나다', '서다'를 뜻한다. 이는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지 않고 하나님을 대항하였던 애굽의 교만을 보여 준다.
엎으시나이다(* , 하라스) - 일반적으로 거대한 건물을 쓰러뜨릴 때 사용되는 동사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큰 건물을 쓰러뜨리듯이, 애굽 사람들을 여지없이 쓰러뜨리신 것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 하나님의 구원이 그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인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절대적인 공의에 근거한 것이다. 한편 '진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론'(* )은 '불태우다'라는 뜻의 '하라'에 파생한 말로, 불처럼 내뿜는 하나님의 뜨거운 심판의 숨결을 의미한다(사 9: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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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콧김 - 문자적으로는 '분노에 찬 주의 바람'이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조성된 큰 동풍(14:21)을 시적으로 묘사한 표현이다(시 18:15). 즉 홍해를 가른 무시무시한 일진 광풍(一陣狂風)도 기껏 하나님의 콧바람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는 말이다.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 수 3:13, 16 및 시 33:7;78:13에서도 이 말이 인용되어 나타나고 있다. 한편 여기서 '언덕'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네드'(* )는 '쌓아올린것', '더미'를 뜻한다(KJV). 공동번역은 '둑'으로 번역하였다.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 바닷물이 그 유동성을 상실하고 마치 단단한덩어리처럼 응고되어 벽을 쌓는 것에 대한 시적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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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시의 일반적인 형식과는 달리 몇 개의 절에 아무런 연사(演士)없이 숨차도록 계속 나열된 것은, 바로의 추격대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증오와 격노의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서다. 자신들의 힘만 믿고 호언 장담하는 애굽 군대의 탐욕스런 모습과 복수심에 불타고있는 잔인스런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대적의 말이 - 애굽인들의 교만한 심정을 꿰뚫고 계셨던 하나님께서 여기 모세의찬송을 통하여 그들의 계획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셨다. 내가 - 이 구절에 3번이나 나타나는 이 표현은 애굽 사람들의 자만과 하나님께 대한 불신을 잘 보여준다. 실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는 말씀처럼(잠 16:18) 애굽군대는 바로 이 교만 때문에 바다 가운데 빠져서 멸망당하였다. 탈취물 -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나왔던 각종 짐승과 재물들 및 패물들을 가리킨다(12:35-38). 내마음을 채우리라 - 분노와 혈기로 가득찬 바로의 군대가 자신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겠다는 뜻으로, 결국 이스라엘인을 약탈하고 살륙하겠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칼을 빼리니...멸하리라 - 70인역은 이 말을 '지배하리라'란 뜻으로 보았으나, 일반적인 뜻은 '죽이리라'는 뜻이 강하다. 물론 200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전멸시키겠다는 뜻이 아니라, 출애굽의 주동자급들(모세와 아론 및 이스라엘의 장로 등)은모두 죽이겠다는 뜻이다(Rosenmuller, Kalisch).

=====15:10
흉융한(* ,아디르) - '강력한' '위엄있는'의 뜻으로, 애굽인들을 홍해에 몰사시킨 바람과 파도의 강력함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조성된 것임을 보여 준다. 납 같이 잠겼나이다 - 여호와의 바람과 여호와의 파도로 인해 홍해의 심연 깊숙히가라앉고 만 원수들의 비참한 모습을 시적 형태로 묘사한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표현은 실제 애굽 군사들이 철제로 만든 외투를 입었으므로, 이들이 물에 빠졌을 때는납과 같이 가라앉았을 것임을 시사한다. 5절에서는 이와 동일한 내용을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라고 표현하였다.

======15:11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 여호와 유일 사상을 강한 설의법 형식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는 출애굽의 기적을 성취하신 하나님께서 목적한 바였다(7:5;14:4, 18). 특별히 이 표현은 출애굽 과정에서 힘없이 깨뜨려진 애굽의 많은 신들, 즉 우상들의 덧없음과 비교하여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더욱 드러내준다. 본절은 헛된 우상신과하나님과의 현격한 차이를 삼중으로 강조하고 있는데 즉 종교, 도덕적인 거룩성 모든인격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적 위엄성 초월적인 권능성 등이다. 거룩함(* ,카도쉬) - 유한한 피조물의 불완전과 오점들과는 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뜻한다.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노라 테힐로트) - 문자적으로 '찬송하기에도 두려운' 이란 뜻이다. 실로 능력의 하나님은 인간이 찬송하기에도 황송한분이시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놀라운 기적을 베푸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경건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5:12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 6절 주석 참조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 민 16:31에는 땅이 갈라져 고라와 그 일행을 삼킨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바다가 애굽 군대를 삼킨 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히브리인들은 바다를 육지의 끝으로 생각했기에 '땅이 삼켰다'는 표현이 가능했던것 같다.

======15:13
주께서...은혜로 인도하시되 - 여기서 '은혜'(* ,헤세드)란 '충성', '자비',' 진실'등의 뜻을 '사랑'이란 의미와 결합시킨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적 용어이다. 따라서 '헤세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시고,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는 이유이자, 근거가 된다. 주의 성결한 처소 - 가나안 땅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Keil). 가나안 땅을 이렇게부른 이유는 첫째,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특별히 택하신 곳이고(신 12:5;16:6;26:2) 둘째, 택하신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이 거할 땅이며, 세째, 하나님께서임재하실 거룩한 성전이 세워질 땅이기 때문이다.

======15:14
열방이 듣고 떨며 -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강력한 애굽 군대를 무찌르고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넌 사실은 가나안과 그 주변에 살고 있는 여러 종족들에게 곧 들러졌을 것이다. 그때 그들은 그 소식에 놀랐을것이 분명하다(민 20:18;22:2;신 2:3, 8:수 2:9,10;9:9). 이것은 훗날 가나안 전쟁의 대상이 될 팔레스틴 주변국가들이 사기를 급격히 저하시키는 심리적 요인이 되기도 했다(수 2:9-11). 잡히며 - 문자적으로 '단단히 매다', '놀라다'는 뜻으로 꼼짝 못할 만큼 큰 두려움과 놀람에 짓눌려 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 선 죄인들의 보편적 심리 상태를 묘사할 때도 종종 사용되고 있다(사 6:5;히 2:15).

======15:15
에돔 방백이 놀라고 - 이 찬양은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을 통과하고자 할 때사실적으로 드러났다. 즉 에돔인들은 이스라엘의 접근을 맹렬히 거부함으로써 자신들의 두려움을 간접 시사하였던 것이다(민 20:14, 20, 21). 모압 영웅이 떨림 - 모압은 발락과 발람사건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이스라엘을 경계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민 22-24장). 한편 여기서 '영웅'은 특정한 인물을 지칭하기보다 용맹스러운 모압인들의 기질과 전력을 나타낸 말이라 할 수 있다. 다 낙담하나이다 - 고대인들은 각 국가간의 싸움은 곧 그 국가를 지키는 수호신들간의 싸움이라는 전쟁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가 막강한애굽의 신들을 깨뜨리고 그 백성을 구출해 내었다는 소식은 가나안 거민과 가나안으로향하는 길목에 있었던 모든 열방 종족들을 낙담케 하기에 충분했다.

=======15:16
그들이 돌 같이 고요하였사오되 -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송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사실들을 마치 이전에 일어난 사건인 양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미래의 사건들을 마음속으로 예견하여 마치 그런 사건들을 이미 일어나 확실한 사건들처럼 완료형으로 표현함으로써 그들의 강한 믿음을 나타낸 것이다. 통과하기(* ,아바르) - '건너가다'는 뜻이다.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열방곁을 지나서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까지 열방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이스라엘 앞에서 꼼짝하지 못할 것을 말한다. 주의 사신 백성 - 유월절 사건으로 이스라엘은 공식적인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즉 어린 양의 대속의 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죽음과 죄악의 세력에서 구출하셔서당신의 호적에 공식 입적시키신 것이다.

======15:17
주의 기업의 산 - 카일(Keil)은 이것을 성소를 위해 준비되었고 일찍이 이삭의 제단이 세워졌던 모리아 산을(시 78:54), 랑게(Lange)는 외부 세력이 침범할수 없는 안전하고 견고한 가나안을 묘사하는 말로 이해하였다. 여하튼 포괄적으로 이것은 족장때로부터 언약으로 물려주신(창 13:15;26:4;28:13), 약속의 땅 가나안을 가르킨다. 특별히 여기서 '산'으로 표기된 것은 가나안 땅의 대부분이 산악지대로 형성되어 있기때문이다.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 모세는 장차 '주의 성결한, 처소'(15:13)인 가나안 땅에 세워질 하나님의 성소 곧 성전을 믿음의 눈으로 미리 바라보고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장차 하나님은 이곳을 중심으로 당신의 백성과 가나안 땅에서 친교를 누리게 될 것이다.

======15:18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 무궁하시도다 -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는 곧 당신의통치의 영원성을 나타내 주는 전조(前兆)이다. 한편 본절은 2-18절까지 진행된 찬양의종결부이다. 하나님의 세계 통치가 영원할 것으로 찬양이 종결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15:19
본절은 하나님의 능력을 찬앙한 모세의 노래가 불려지게 된 동인(動因)을 재론한 부분이다. 그리고 본절은 다음에 이어지는 미리암의 찬양을 모세의 노래에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주는 삽입부적인 역할도 한다.

======15:21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가로되 - 미리암과 여인들은 앞의 모세가 이끈 남성들의 합창(1-18절)에 대하여 후렴으로 복창하며 화답하였다. 즉 이들은 각 단락의 끝이나 혹은 찬송이 끝나는 부분(아마 5, 10, 12, 18절이나 끝나는 부분)에서 화답하는후렴으로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를 부름으로써 찬양에 화답한 것이다.

=====15:22
수르 광야 - 주로 '술(Shur)' 광야로 불려지며(창16:7;20:1;25:18 삼상15:7;27:8),때로 '에담 광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민 33:8). 애굽의 동편 국경 지역의 광야를 가리킨다.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섭리 속에서 계속 3일 동안이나 건조한 사막 지역을 경유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시내산에서 당신을 섬기도록 미리 예정하여 인도하신 방향이다(13:17, 18). 그러나 이 지역의 특성 때문에 마시기에 필요할물을 얻지 못하였으며, 동물 가죽 등에 담아왔던 물은 고갈 상태에 이르렀고, 이어 서서히 고통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15:23
마라 -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 최초로 장막을 친 지역이다(민 33:8). 이곳 지명의 뜻은 '쓰다', '괴롭다'라는 뜻이다. 이는 이 지역의 물맛이 짜서 마실 수 없었기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이스라엘이 건넌 홍해의 남동쪽 약 75Km, 수에즈 만(Suez 灣)으로부터 동쪽 약 11Km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오늘날의 '아인 하와라'(Ain Hawarah)로 추정된다. 당시 이곳의 물은 악취가 나고 맛이 짜서 마실 수 없었으므로, 아랍 사람들은 '이 물이 이 근방의 모든 지역에서 가장 나쁜 물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Robinson).

======15:24
백성이...원망하여 가로되 - 이들의 원망 시점이 홍해 바다의 기적으로 인한 찬양의 감격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이들은 홍해 사건을 체험한 큰 기쁨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세를 믿었던 3일 전의 태도와는 달리 환경이 조금 변하여 갈증이 나고 육체가 피로해지자 곧 불평과 불만을 터뜨렸던 것이다. 한편 '원망'을 뜻하는 히브리어 '룬'(* )은 '고집세다','중얼거리다', '밤새워 머물다' 등의 뜻을 지니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밤을 세워가며 감정을 다해 불평했음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자손이 터뜨린 첫번째 원망으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능력을 경험하면서도 조그마한 역경에 부딪칠 때마다 불평과 원망을 쉽게 터뜨리고마는 간교하고 변덕스러운 인간의 속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 지도자로서 모세는 백성들의 원망을 일축하여 꾸짖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해서 백성들과 같이 동조하여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다만 그는 중재자로서 문제 해결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다. 한 나무를...던지매 물이 달아 졌더라 - 혹자는 시내 반도 부근에 자생하는 어떤나무의 열매, 예를 들면 '구르쿠드'(Ghurkud)란 나무의 열매가 쓴 물을 달게 만들었을것이라고 주장한다 (Burckhardt). 그러나 비록 나무 자체에 물을 맑게 하는 어떤 성분이 소량 함유되어 있는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효력이 갈증에 목이탄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충족히 먹게끔 하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 나무는 단지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의 도구로 사용됐을 뿐이다. 왕하 2:19-22에서도 이와유사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영적으로 이 나무는 만국을 치료하며 죽은 것을 소생시키는 하늘 나라의 생명 나무를 예표한다(계 22:2).
법도와 율례 - 여기서는 아직 성문화된 율법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단지 각 상황속에서 하나님이 명하시는 준수 사항, 즉 따라야 할 말씀들을 의미한다. 시험하실새 - 이 부분은 어떤 구체적 사건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셨다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순종하는지 안하는지를 언제나 감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지적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의 백성들을 시험하여 순종의 여부, 곧 신앙의 진위를 드러내신다. 그리고 이 시험으로 인한 시련을 통하여 인내와 순종, 자기 부인의힘을 기르도록 하신다(약 1:2-4). 이 부분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법도와 율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여 그들로 하여금 인내와 순종과 믿음등을 배우게 하셨다. 이러한 적절한 시험의 연단으로 인하여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적합한 군대로서 가나안을정복할 수 있는 자질을 구비하게 되었다.

======15:26
너희가...규례를 지키면 - 이 구절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며 순종에의 촉구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의 언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법도와 율례'는 그의 백성에게 '계명과 규례'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는 그의 백성들에게 의(義)의 행위를 요구한다. 즉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육신적 편안함을 원하시는것이 아니라, 당신이 정하신 법을 따라 사는 의로운 사람을 요구하신 것이다. 질병으로부터의 보호 약속에 앞서 요구하신 이 요구는 곧 오늘 우리의 신앙의 표준이기도 하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 문자적으로 '여호와',와 '너희의 치료자'란 동격의단어가 합성을 이뤄 만들어진 것으로, 직역하면 '나 여호와는 너희의 치료자'가 된다.이는 하나님께서 절대자이신 동시에 우리의 모든 질병과 아픔을 치료해 주시는 친근한분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치료하는'의 히브리어 '라파'(* )는 '의사' 또는 '의원'을 가리킨다. 곧 우리의 의원되시는 여호와는 실로 모든 질병으로 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실 뿐만 아니라, 죽음과 죄 등 인생의 모든 문제점까지도 깨끗이 해결해 주시는 진정한 우리의 치료자이시다(마 9:12).

======15:27
엘림 - '상수리 나무' 또는 '참나무'란 뜻으로 수에즈 동남쪽 약 100Km, 마라 남쪽10여Km 지점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오늘날의 '와디 구룬델'(Wadi Ghurundel)인 듯하다(West-minster Historical Atlas to the Bibble). 당시 '엘림'은 비가 자주 왔고 개울과 샘이 상당히 많았다. 특히 이곳은 물샘 12개와 종려 70주가 있었는데, 이는 완전수인 12와 70(7x10)이 상징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완전한 휴식처와 안식처를 의미했다(Keil). 그리고 몇몇 학자는 물샘 12개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종려 70주는 이스라엘 70장로를 각각 위한 것이고, 또한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Kurtz, Baumgarten). 따라서 이곳은 우연히 이스라엘이 도달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섭리하심에따라 인도된 곳이라 본다. 한편 출애굽 후 이곳까지의 여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즉 애굽 고센 땅 라암셋(21:37)->숙곳(12:37)->에담(13:20)->바알스본(14:2)->홍해(14:22)->수르 광야(15:22)->말(15:23)->엘림(15:27)이다.

 

 

이스라엘 홍해 도하 사건과 애굽 군대가 섬멸된 사건이 언급된 전장에 이어 홍해 사건을 직접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이기지 못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1-21절)이다. 그리고 그 감격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마라에서 물을 얻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다시 모세를 원망하는 장면이다(22-27절). 이러한 본장에서 우리는 이제 출애굽기 전반부를 장식한 바로가 마침내 완전히 멸망하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을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구속사의 여정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애굽의 노예라는 악몽에 시달렸던 이스라엘은 이제 완전한 자유민이자 선민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출발을 찬양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건너 온 홍해 바닷가에 서서 그토록 자신들을 핍박하던 애굽 군대의 시체가 즐비하게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14:30). 물론 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한 것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바로 눈 앞에서 잠깐 사이에 벌어진 절망과 승리의 놀라운 극적 대비는 그들로 하여금 경이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족하였다. 즉 그들은 이 기막힌 구원 체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찬양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한 인간의 가장 순수한 감정 표현이다. 따라서 오늘날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자라면 이러한 감사의 찬양을 부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현재의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부조리하더라도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확신하는 자는 찬양의 입술을 쉬지 않는다.
 그런데 불행히도 본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 홍해 사건의 감격을 미래화하여 항상 기쁨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불편한 현실 생활에 굴복하여 불평을 토하고 마는 사건이 함께 기술되어 있다(22-24절). 이러한 사건은 인간이 환경에 얼마나 쉽게 지배되며 얼마나 자기 중심의 이기주의적인 삶을추구하는 존재인가를 여실히 보여 준다. 따라서 성도들은 삶의 준거를 자신에게 두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의의 추구에 두어야 하는데, 삶의 초점을 오직 하나님께 두는 자의 삶은 끊임없는 감사와 찬양으로 아로새겨질 것이다.

 1.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합창(15:1-18)
 전장의 홍해 도하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으로서 홍해 사건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크신 은혜를 찬양하여 부른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일명 '모세의 노래'라고도 불려지는데 하나님을 향한 억제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의 정념을 시적(詩的) 감수성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오늘날도 히브리 시문학에 있어서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노래는 히브리 민족의 하나님 여호와의 절대적 능력을찬양한 것이며 그분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된 자녀들의 민족적 고유성, 탁월성 등을 읊은 것이므로 '그 노래'(The Song)라는 고유 명사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다. 한편 이상과 같은 성격의 이 노래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1-5절은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격과 여호와의 놀라운 승리의 희열을 찬양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6-10절은 과거의 은혜를 회상함으로써, 현재의 감격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11-18절은 미래에 펼쳐질 사건을 예언적 시각으로 신앙 고백한 것이다. 이처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양은 강한 역사성을 띠고 있다. 어제와 오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은 내일을 향한 힘찬 출발의 원동력이 된다.

 * 모세의 노래 이해.
 상당수의 학자들은 이 노래가 후대에 본문 중에 삽입된 것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이 노래가 홍해 도하 직후 불려졌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사실 '모세의 노래'라 불리우는 본 찬양은 그 이미지와 표현에 있어 다른 어떤 노래도 따를 수 없는 시적인 감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특히 성경의 다른 시들에 비해 고도의 시적 기교와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분에 대한 인간의 경외심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노래는 성경 문학의 화려한 표본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처럼 너무도 잘 짜여진 시적 문체와 문학성 때문에 오히려 많은 학자들은 본 노래가 미리암의 노래(21절)보다도 훨씬 후대에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과 홍해 도하가 가져다 주는 감흥과 영적 생명력 및 모세의 40년 동안의 왕궁 교육을 생각한다면 본 찬양이 모세의 저작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한편 성경은 이 노래의 문학성과 연대기 문제보다는 이 찬양의 의미에 그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 노래는 선민 이스라엘의 새로운 탄생을 기념하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이 홍해라는 영적인 세례수를 통과하여 새로운 언약의 백성이 된 데 대한 찬양인 것이다. 또한 이 노래는 자유의 노래이다. 즉 이스라엘이 억압과 속박으로 점철된 노예 생활을 걷어 치우고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만끽하게 된 데 대한 해방의 노래인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의미는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노래라는 점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기리고 높이는 것이 이 노래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동기이다. 이처럼 모세의 노래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슴속에 출애굽의 영광과 하나님에 대한 감사라는 대주제를 언제나 인식시켜준 국가(國歌)와 같은 노래였다.

 2. 미리암과 이스라엘 여인의 화답(15:19-21)
 '모세의 노래'에 이어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모든 여인들이 소고를 치며(19,20절) 하나님을 찬양하는(21절) 장면이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즉 홍해 도하 사건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백성의 축제는 모세와 아론의 누이인 미리암과 온 이스라엘 여인들이 소고(小鼓)를 들고 나와 열광적인 춤을 추며 노래를 부름으로써 그 절정에 이른다. 고대의 종교적인 예식에서 춤과 노래는 신께 대한 최대의 감사제였다. 그러므로 여인들의 춤은 홍해 도하의 구원 사건을 감사하는 최대의 표현 방식이라 할 것이다.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21절). 일명 '미리암의 노래'라고 지칭된 본문의 이행 시(二行時)는 구약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단편 시로 여겨진다. 앞절에 언급된 모세의 노래가 후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민족정신의 뿌리인 출애굽 사건의 의미를 고취시켜 주는 효과를 지닌다면 본 시는 체험의 객관성, 이적의 사실성을 증거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할 것이다. 즉 이 시는 당시의 기적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이며 모세의 노래 속에서 느껴지는 신화적 기법(역사적인 이야기에 신화적 요소를 사용하여 사건의 경이로움을 강조하려는 표현)이 절제되어 있는 담백한 시이다. 이처럼 문학적 기교(技巧)보다 사건의 진실성을 강조함으로써, 모세의 노래와는 다른 감동을 전해 주고 있는 이 시를 통해 우리는 홍해 도하 사건의 역사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는 언제나 인간에게 경이로움과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유익을 주며, 참된 찬양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 참된 찬양의 자세.
 홍해 바닷가에서 불리워진 이스라엘 백성의 찬양을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진정한 찬양의 자세 및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육신적 축복이나 형통 때문에 찬양을 드린 것이 아니라 애굽의 압제하에서 한편생을 노예로 지낼 수밖에 없던 그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찬양을 드린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섬기는 믿음의 자녀라면, 그분을 찬양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찬양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동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피할 수 없는 위험이 있었고, 수많은 범죄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지만, 단 한명의 예외도 없이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해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홍해 바닷가를 둘러 싸고 기쁨의 감사 찬양에 목메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성도들은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구원받은 감격을 늘 찬양해야 한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진정한 동기는 무엇보다도 범죄한 우리의 생명을 살리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것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말자.

 3. 마라의 쓴 물 사건(15:22-27)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 중 발생한 유명한 마라 사건이다. 홍해에서의 구원과 위대한 승리의 감격을 맛본 이스라엘은 이제 계속 가나안을 향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런데 사흘 길을 걸어도 물을 얻지 못하자 백성들의 불평은 서서히 싹트기 시작한다. 그리고 첫 체류지인 마라(Marah)에 이르러서는 쓴 물밖에 발견치 못하자 마침내 그들은 모세를 원망한다(22-24절). 이처럼 인간에게는 미래의 희망보다 현재의 욕구 충족이 더 시급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멘슬로우의 욕구 충족 5단계의 이론에도 나와 있듯이 가장 저급한 식욕이나 성욕에 의해서 인간의 의지가 꺽여진다면, 이러한 삶은 동물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원망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간절한 중보 기도에 응답하셨다(25절). 그리하여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변화시켜 주셨다. 이런 점에서 마라의 쓴 물은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하나님의 시험(Test)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를 믿음과 인내로 견디지 못한 이스라엘은 이 시험에 합격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 안에서의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일정한 법도(法度)와 율례(律例) 아래서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25절).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율례에 다라 이스라엘이 행동하는 삶을 살기만 하여도 구원의 은혜를 풍성히 내려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26절). 그리고서 그러한 약속의 증거로써 이스라엘이 엘림에 이르렀을 때 물이 가득한 샘과 그 아래서 쉴 수 있는 종려나무까지 발견할 수 있게 해주셨다(27절). 그러한 엘림의 축복은 분명 이스라엘의 원망을 완전히 해소시키고도 남는 풍족한 것이었을 것이다. 아뭏든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시험하는 목적은 그들은 연단케 하려는 데 있지 실족케 하려는 데 있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기에 그분께선 설령 우리가 한 번 넘어질지라도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금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시는 것이다.

 * 책임적 존재인 인간.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사회 생활에 지친 인간은 그 소속감을 떨쳐버리려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인즉 한 집단에서 좌절한 인간은 새로운 집단으로 이주하여 새 삶을 찾으려고 하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주는 자칫 도피와 다를 바 없다. 사회에 대해 책임적 존재인 인간이 그 사회를 벗어나려는 것은 그 사회에서 자신이 담당해야 할 일에서 도피하는 것이다. 그런데 광야 생활을 함께 꾸려나가야 할 공동체 이스라엘 내에도 단순히 육체적 욕구를 이기지 못하여 더불어 사는 삶을 포기한 자들이 생겨나 불협화음이 발생했다(24절). 이는 비록 육신적으로 고달픈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 가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생활 양식을 포기하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행하려는 사회적 도피였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지 못하는 불안을 불평과 원망으로 표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유사하게 현대 사회는 개인의 안녕과 물적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이기주의의 범람으로 사회 속에서 지켜져야 할 도덕적, 인륜적 질서가 파괴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 문제를 해겨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즉 자신의 육적 욕심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의 책임 의식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몸소 인간들에게 차고 넘치는 풍성한 사랑을 베풀어 주심으로써 본을 보이셨다. 그리고선 우리들에게 너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나를 따라오라고 명령하고 계신다(마
5:13-16;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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