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여호와께서...가라사대 - 6장 이후 본장에 이르기 까지 모든 장은 '하나님이...말씀하셨다'라는 문장으로 서두를 장식하고 있다. 이는 출애굽 사건이 철저히 하나님의말씀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4:2
돌쳐서( ,슈브) - '뒤로 돌이키다'(turn back), '옆으로 틀다'(turn aside)는 뜻으로, 자연스런 회유가 아니라 긴박하고 급작스런 회유가 아니라 긴박하고 급작스런 방향 전환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까지 숙곳에서 에담까지 줄곧 행군해 왔던 북동쪽 방향으로부터 갑자기 돌이켜서 다른 방향 즉 남쪽이나 남동쪽 방향으로 행군하도록 하셨다. 이와같이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 이스라엘 백성을 막다른홍해 길로 인도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에담 근방에 있던 애굽의 국경 수비대와 충돌을 피하도록 하기 위함이다(J. Simons). 막다른 지역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바로로 하여금 그들을 추격하도록 유인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홍해가갈라지는 대이적 사건을 경험토록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믿음을, 바로에게는심판을, 열방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을 밝히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바다와 막돌 사이의...맞은편 바다가에 - 이 구절과 같은 내용의 민 33:7은 "에담에서 발행하여 바알스본 앞 비하히롯으로 돌아가서 믹돌 앞에 진쳤고" 라고 묘사하고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담을 떠나 바알스본 앞에 진을 쳤다<출애굽기 서론, 출애굽 여정>. 한편 믹돌과 비하히롯은 모두 애굽 비문에는 나와 있는 이름이지만 그 정확한 위치는 아직 판명되지 않았다(L.Wood).
=====14:3
아득하여( ,네부킴) - '당황하여', '혼돈하여' 라는 뜻이다. 광야에서 길을 잃고 목적없이 이리저리 방황하는 모습을 묘사한 말이다. 그러나 이는 바로가 이해한 이스라엘의 모습일 뿐, 실상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목적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시는 길로 당당하게 여행을 하고 있었다.
광야에 갇힌 바되었다 할지라 - 앞은 바다요, 양 옆은 산이며, 뒤는 사막인 그러한 사면 초가의 상황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보고 바로가 오합 지졸인 노예민족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줄로 오판하여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대를 몰고 뒤에서 추격해 올 것이라는 뜻이다.
======14:4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 이 말은 원래부터 선한 바로의 마음을 고의로 악하게 만드셨다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 강퍅해지는 그의 마음을 방임하사 멸망으로 치닫는 그의 고집을 꺽지 않으셨다는 뜻이다<9:12>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전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 후자는 하나님의 공의를 각각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편 본장에서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사, 그의 군대가 이스라엘을추격하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전능하심을 드러낼 기회를 만드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애굽인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과 열방 앞에 당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다.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 여기에서 여호와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란 뜻이다<3:14>. 즉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영원히 계시는 완전하고 무궁한 하나님 이심을 뜻한다. 또 이 이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언약 관계를 강조한 이름이다. 즉여호와인 줄 알게 하겠다는 말 속엔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그들의 어떤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언약에 따라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은혜의 결과로서,그처럼 당신께서는 약속을 필히 지키시는 하나님이란 것을 알게 하시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당시 많은 신들을섬긴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만이 천상 천하에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셨다.
=====14:5
흑이 백성의 도망한것을...고하매 - 아마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후 3일이지난뒤, 즉 4일째 되는 날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구절은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것을 이전까지 전혀 몰랐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완전히 출애굽 하지않고 전날 모세가 요구했던대로 3일간만 나가 있다가 다시 돌아와 종노룻 해주기를 은근히 바랬던 것같다(5:3;12:31). 그런데 3일이 지난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행군해 나간다는 보고롤 듣자 그의 마음이 급변했던 것이다.
마음이 변하여 -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이기심과 교만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가중된 것인지 새삼 느낄 수 있다. 즉 그들은 열 가지 재앙 끝에 도저히 견딜 수 없어이스라엘에게 행한 압제를 풀 수밖에 없었으나, 숨돌릴 만한 여유가 생기자 곧 그 하나님의 무서운 손길을 잊어버리고 또다시 이스라엘을 노예화 하고자 혈안이 되었다.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고 - 60만(부녀와 아이, 노인을 제외한 장정)의 노동력을 상실했다는 것은 애굽인들에게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그 노동력의 유익에 대한 그들의 애착과 탐욕이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놓아 보낸것을 곧 후회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놓아 보내었다'라는 말의 허구성에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지 못하여 할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압제를 풀었을 뿐이지, 자기들이 선심을 베풀어 놓아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60만 노동력에 대한 바로의 탐욕과 또한 이스라엘 의 진행로가 막다른 골목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로 인해 바로는 곧 바로 추격대를 조직하였다.
======14:6
병거를 갖추고 - 병거(兵車)란 말이 끄는 바퀴달린 수레를 말한다. 이 당시의 병거는 마모가 심한 부위의 청동, 철을 제외하고는 신속한 이동을 위해 나무와 가죽으로만들어졌으며 뒷 부분은 개방되어 있고, 앞면과 양면을 둘러 약 80cm 가량의 반원형보호벽이 쳐져 있었다고 한다. 주로 2인용, 4인용이 있었으며 그리이스, 앗시리아 때의 전차와 그 모습과 용도가 비슷했다고 한다. 당시 바로는 애굽 제 19왕조의 아멘호텝 2세(Amenhotep II, B.C.1448~1424)로서 그는 병거와 마병의 대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14:7
특별 병거 - 특수한 장치가 된 병거가 아니라 많은 병거 중 특별히 선발된 일종의정예화된 특공대이다. B.C.926년 유다 왕 르호보암 당시(대하 12:1-3) 애굽 통치자 시삭(Sishak)이 병거 1,200승을 거느리고 멀리 예루살렘까지 원정간 사실을 볼 때, 이때의 특별 별거 600승 정도는 쉽게 소집할 수 있었으리라 본다.
=====14:8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으므로 - <9:12>.
담대히( ,베야드 라마) - 문자적 의미는 '높은 손으로' 인데, 이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이적을 베푸시는 '여호와의 손'을 따라(사 26:11) 출애굽 했음을 뜻한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할 때에 도망하는 자들처럼 초라하거나 비겁하게 나온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의하여 담대하고도 자신만만한 태도로 나왔었다.
=====14:9
바로의 말들, 병거들 - 원문에는 '모든'( ,콜)이라는 단어가 이 말 앞에 나온다. 이것은 바로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였음을 뜻한다.
그 장막 친 데 미치리니라 - 바로와 그의 군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같이 추격해와 드디어 그들에게 미칠 수있었다. 이때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지 약 6일쯤 되는 것같다. 그 근거는 유대인의 전승에 따르면 홍해를 건넌 것이 니산(아빕)월 21일밤이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한편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지 않고 계속 가나안을 향해 나아간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4일 후였기 때문에(5절) 그가 추적하여 따라잡은 날은 불과 2일 밖에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4:10
심히 두려워하여 - 여기서 '심히'( ,메오드)란 문자적으로 '열렬한', '더이상 비교할 것이 없을 정도로 큰'이란 뜻이다. 따라서 이때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큰 공포에 빠졌는지를 짐작케 한다. 한편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한 데는 그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첫째, 비록숫자는 많지만 그들 가운데에는 싸울수 있는 장정보다 보호받아야 할 아녀자와 노인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둘째, 싸울 수 있는 장비나 전력면에서 상대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째, 한때 자기들을 부리던 애굽인들이 창, 칼, 갑옷, 투구, 방패, 전차 등 완전한 전투 장비를 갖춘 채 뽀얗게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자 오래된 노예 근성으로 말미암아 금방 사기가 저하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은 10대 재앙을 애굽 땅위에 베풀어 그들로 하여금 출애굽을 가능케 하셨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극심한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여호와께 부르짖고 - 여기서의 호소는 참 믿음에 근거한 기도가 아니라, 위경에처한 자들이 자연 발생적으로 부르짖는 외침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곧이어 모세를 원망하여 여호와의 출애굽 사역을 불평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14:11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 당시 애굽에는 각 성읍 주변에 '사자(死者)들의 처소'라하여 공동 묘지와 묘비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찌하여...이끌어 내어 - 본 구절을 필두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움에 직면할때마다 구속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불신과 원망섞인 불평 서슴없이 내뱉는다. 따라서하나님은 이 백성이 자신을 '열 번이나' 시험했다고 했다(민 14:22). 한편 애굽에서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신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므로 자신들의 믿음이 얼마나 뿌리없는 것인지를 잘 드러내었다.실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원인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14: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때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선포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고(5:21), 또 불신하였었다(6:9).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 자유를 위한 역경보다는, 안일을 위한 굴종을 쉽사리택하는 이스라엘의 노예 근성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은혜와는 상관없이 일시적인 편리나 안락을 위하여 노예 근성에 젖은 말을 서슴치 않았다. 이는 사단의 예속하에 있던 옛 성도의 모습과 같다(갈 4:8;딛 3:3;히 2:15).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강권적이요, 택한 백성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 항력적이다.
======14:13
두려워 말고 -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과 신앙을 회복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있다(요일 4:18). 왜냐하면 지금과 같은 상황하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첫 반응은 두려움이기 때문이다(10절).
가만히 서서 - 문자적으로 '너희 자리를 지키라', '그자리에 꿋꿋이 서있으라'는뜻으로 비록 현상황이 절박하다 하더라도 다급해 하거나 결코 좌절치 말고 조용히 그 상황을 맞이하라는 명령이다. 결국 이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앙하라는 준엄하나 지시이다.
구원을 보라 - 넘실대는 홍해의 바닷물이나 중무장한 애굽 군대를 바라보지 말고위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소망하라는 뜻이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이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은 장차 신자들이 죄에서 구원 받을 것을 예표한다.
======14:14
여호와 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 여기서 보듯 여호와의 종교(기독교)는 결코 죽은 우상을 섬기는 헛되고 무능한 종교가 아니라, 구체적인 성도의 삶의 정황 속에서 능동적으로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구원의 종교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타하리순) - '혀를 물다', '침묵을 지키다'는 뜻이다. 즉 더이상 불평하는 말을 하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라는 뜻이다. 이는 곧 구원에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단독 사역을 묘사한 표현이다. 최선을 다한 후 인간으로서 더이상 어찌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마지막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은 그 상황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믿음'이다.
======14:15
하다', '큰 소리로 기원하다'를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너는 어찌하여소리질러 내게 기도만 하느냐?'고 꾸짖는 말투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더이상심령안에서 부르짖는 애원으로 기도만 하지말고, 믿음의 행동을 담대히 취하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명령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 하나님은 마음의 신뢰뿐 아니라 행동을 통한 그 믿음의 실천을 요구하신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될 뿐이기 때문이다(약 2:17). 한편 여기서 '앞으로 나가게'의 히브리어 '이사우'( )는 ' 장막 말뚝을 뽑아 챙긴 후 곧장 전진해 가다'는 뜻이다. 즉 장막에 머물러 있으면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기다리지 말고, 비록 위험스러우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홍해 쪽으로 발길을 돌리라는뜻이다.
======14:16
지팡이 - 모세는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 지팡이를 잡은 후(4:20) 그 지팡이로써 무수한 이적을 행했으며(8:5 이하), 이제 홍해를 갈라지게 하는 데 그 지팡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의 이 지팡이는 실로 하나님의 의 권위와 능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4:2>. 따라서 이어지는 손을...내밀어...갈라지게 하라는 명령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실현하겠다는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바다 가운데 육지 - 바다와 육지 등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의 운행과 질서를 주관하시며 또한 필요에 따라 변화도 가하신다(롬 11:36). 이것을 가리켜우리는 '이적'이라 부른다<4:21>.
======14:17
내가...강퍅케 할 것인즉 - <9:12>.
내가...영광을 얻으리니 -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은 곧 그들에 대한 당신의 주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는 당신의 이름이더욱 높이 빛나는(영광을 얻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 홍해 사건을통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부터 큰 찬송을 받으셨다.(15:1-18, 21).
======14:18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 4절의 반복이다(따라서 자세한 내영은 그곳을 참조하라). 곧 애굽의 파멸은 여호와를 대적하는 세력의 허무함과 여호와만이 참 신이라는 사실을 온 세상에 전파하게 될 것이다.
=======14:19
하나님의 사자 -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 혹은 '하나님의 사자'란 말은 대체적으로 일반 천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제 2위의 하나님(3:2), 즉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창 16:7>.
구름 기둥도...뒤로 옮겨 - 구름 기둥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따라서 이것이옮겨다니는 것은 영이시요(요 4:24).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15:3) 가시적 상징물로써 자신을 나타내신 특별한 경우이다<13:21>. 이는 성경 계시가 완료되기 전, 특히 구약시대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이다.
=====14:20
저편은...광명하므로 - 분리되어질 수 없는 하나의 실체로서 2중성을 지닌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능력을 이중적으로 나타내었다. 즉 그 기둥은 애굽 군대에게는 심판을 상징하는 흑암을,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을 상징하는 광명을 동시에 드러내었다. 이는 흑암 재앙시 애굽 땅과 고센 땅을 가른 빛과 어두움을 연상시킨다(10:23).
=====14:21
손을 내어민대 - 순종과 믿음으로 내민 모세의 손에는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4:17)가 잡혀져 있었다. 결국 이번의 이적도 하나님의 지시와 더불어 그분의 능력에 의해성취될 것이었다.
큰 동풍으로...물러가게 하시니 - 70인역(LXX)에는 '큰 남풍'으로 보고있으나 히브리 원문에는 '루아흐 카딤 아즈'( )곧 '맹렬한(강한) 동풍'으로 분명히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정방향에서 불어오는 것이라기 보다 동쪽 모든 방향(남동, 북동쪽)을 가리키며 특히 건조한 사막의 바람을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 여기서 '마른 땅' 이란 '하라바'( )로 사막과같이 건조한 땅을 가리킨다. 수많은 남녀 노소 및 짐승까지 별 어려움 없이 건너가기위해서는 갈라진 바다밑이 건조한 땅이 되어야만 했다(시 106:9). 이러한 사실은 애굽의 병거까지 그 가운데로 진입한 사실로 보아 분명해진다.
======14:22
바다 가운데 육지 - 여기서 '육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바솨'( ) 역시 완전히'마른 땅'(NIV, dry ground)을 가리킨다.
좌우에 벽이 되니 - 여기서 '벽'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호마'( )는 '담이나 뚝'을 가리킨다. 이것은 보호나 방어를 의미하는 말로서 곧 바닷물의 좌우 벽은 이스라엘이 지나갈 수 있도록 그들의 보호 벽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처럼 흉융한 파도가 오히려 이스라엘을 감싸주는 보호벽이 되었다는 사실은 사나운 물결도(시 78:13), 그리고 맹력하나 불꽃도(단 3:19-27)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택한 자의 머리털 하나 침범할 수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마 10:29-31).
=====14:23
바다 가운데로 들어 오는지라 - 히브리서 저자는 이 사실에 대하여 "애굽 사람들은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히 11:29)라고 기록하였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바다를 통과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명령)이며 또한 그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이 바다 속에 뛰어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그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없는 그야말로 무모한 행동이었다. 이런 과욕에 찬 무모한 행동은 하나님의 능력을시험하는 것이었으며, 그 결과 그들에게는 파멸이 따랐다.
=====14:24
새벽에 - 구약 시대의 히브리식 시간 계산법에 의하면 새벽이란 삼경에 해당되는시간으로서 오늘날의 오전 2시에 동틀 무렵까지를 말한다<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화폐 및 월력>,
여호와께서...보시고 - 영(靈)이신 하나님(요 4:24)의 초자연적 행위를 인간의 신체행위에 비교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와같이 성경에는 종종 하나님의 비가시적이며 추상적인 실체를 인간의 눈이나 손, 귀 등과 같은 가시적인 실체로 형상화시켜 그 의미를 강조하고 실제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신인 동형론(神人同形論)적 관점에서 나온 표현이라고 볼수 있다.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 군대 진영을 교란시켜 바로의 병사들을 공포에 떨게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게 정신을 빼놓았다는 뜻이다. 특별히 여기서 '어지럽게'( ,야함)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 대적들을 물리쳐 주실 때 종종 사용되는 독특한 어법이다(삼상 7:10).
======14:25
그 병거 바퀴를 벗겨서 - 여기서 '벗기다'는 '야살'( )로서 (손으로) '징계하다', '벌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께서 애굽 군대를 벌하사(친히 당신의 손으로) 전차 바퀴를 훼손하거나 빼놓음으로써 기동력을 완전히 제거하셨음을 가리킨다.
극난하게( ,비크베두트) - '무겁다'란 뜻의 '카바드'에서 온 말로서 병거가 무거운 짐을 실은 듯 힘겹게 움직이는 것을 묘사한 말이다.
여호와가...치는도다 - 4절 말씀의 성취이다. 즉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을 극난하게 하시니 그때야 애굽 사람들이 비로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전능하신 여호와임을알게 되었다. 따라서 바로의 병사들은 그들 자신의 입으로 '여호와'란 말을 발설하게되었다.
======14:26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 하나님의 능력은 다시 한번 모세의 순종의 손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반드시 인간의 순종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14:27
바다의 그 세력이 회복된지라 - 모세가 바닷물을 갈랐던 그 지팡이를 든 손을 다시 내어밀 때 바닷물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즉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바닷물을 갈라놓았던 동풍(14:21)이 그치고 이제는 북쪽과 남쪽으로 벽을 이루며 갈라졌던바닷물이 재위치를 찾아 힘차게 흘러들었다. 그러므로 카일(Keil)은 '바람이 이제는서쪽에서 불어 바닷 물결로 도망가는 애굽의 정면을 덮치게 하였다'고 말한다.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 하나님께서 여덟번째 재앙을 거두실 때 강렬한 서풍을 불게 하여 메뚜기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홍해에 수장시키셨듯이(10:19),이제 그 서풍으로 애굽 사람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홍해 속에 집어 넣으셨다. 한편이 홍해 사건에 대한 역사적 근거로서 우리는 기독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가 아르타파누스(Artapanus)의 책에서 인용한 바, 다음과 같은 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즉 홍해 사건 후 애굽 멤피스(Memphis)의 제사장들이 모세를 가리켜 '그는 간조(干潮)와 만조(滿潮)에 대하여 능통한 자'라 했다 한다.(Eusebius, preparatio evabgelica).
======14:28
병거들과 기병들 - 여기서 병거들과 기병들은 각각의 전투 기능을 구분한 것이 아니다. '기병들', '병거들'을 모는 자들을 가리킨다(9절).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 이스라엘 자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죽었다. 이것은 애굽에 대한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인 동시에 애굽 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승리였다.
======14:29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였고 - '바다 가운데 육지'는 걷기에 아무런 불편이 없는건조한 상태였다(22절). 그런데 이곳을 약 200만 가량의 남녀 노소 및 각종 짐승들이무사히 밤 사이에 건너가기 위해서는 갈라진 통로의 폭이 적어도 1마일(1,609m) 정도는 족히 되었을 것이다(L. Wood).
======14:30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 -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hpus)는 이스라엘 진영이 모두 바다를 건넌 후 서쪽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와 애굽인들의 군장과 시신이 홍해 동쪽 해변으로 수없이 밀려 떠내려 왔다고 한다. 한편, 그러나 이 당시 애굽 왕 바로(아멘호텝2세, B.C. 1448-1424)는 같이 죽은 것같지 않다. 왜냐하면 출애굽(B.C. 1446) 후의 애굽 역사에 그의 사적이 20년 가량 더 기록되어 있고, 그리고 A.D 1898년 성서 고고학자 로렛(Loret)에 의하여 그의 미이라가 애굽의 '왕묘 골짜기'(The Valley of the Tombs of the Kings)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Leon Wood, N.J. Westwood, F,H. Revell).
======14:31
여호와께서...베푸신 큰 일 - 이것은 홍해 사건을 가리킨다. 홍해 사건과 출애굽의10대 재앙 사건들을 비롯하여 신 구약에 나타난 모든 이적 사건들은 단순히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이적(miracle)은 일종의 표적(sign)으로서 믿는 자들의 신앙을 확고히 하고, 하나님의 신성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들의 권위를 보증하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의 기적과 홍해 기적을 보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세를 믿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목적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종 모세 - 이 표현은 민 12:7, 8;신 34:5;수 1:1, 2, 7, 13, 15 ; 8:31, 33 등에서도 나타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여호수아(수 24:29), 사무엘(삼상 3:9), 다윗(삼하 3:8;7:5), 엘리야(왕상 17:1), 욥(욥 1:8), 이사야(사 20:3), 다니엘(단 9:17),스룹바벨(학 2:23) 등도 하나님의 종으로 지칭되었다. 한편, 히 3:5에는 모세가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종)으로 충성하였다고 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집은 구약 시대의성도 곧 이스라엘 백성을 뜻하는데, 진정 모세는 이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종으로서 충실하게 일한 인물이었다.
모세를 믿었더라 - 뒤쫓아 온 애굽 군대를 보고 겁에 질려 모세를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홍해 사건을 경험하고 난 후에는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전폭 신뢰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신뢰는 얼마가지 않았다. 그것은 곧이어 또 다른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한 사실에 알 수 있다(15:24;16:2).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으로 애굽의 마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홍해 도하 사건이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진치게 되었다(1-4절). 그러자 이스라엘이 막다른 골목길에 이른 것으로 착각한 바로는 군대를 동원하여 저들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한다(5-9절). 이에 불안에 휩싸인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나(10-14절)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위로하신다(15-20절). 그리고 홍해를 갈라 길을 내어 주심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21-25절) 대신 그뒤를 쫓는 애굽 군대는 홍해 가운데 수장(水葬)시켜 버리신다. 이러한 홍해 도하 사건과 관련하여 만일 우리가 출애굽 사건을 잘 자여진 한편의 드라마로 가정한다면 애굽에 내린 그간의 재앙들은 사건의 절정이 아니라 전개 과정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이 드라마는 본문의 홍해 도하라는 극적 상황에서 그 최절정을 맞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연출자이신 전능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구출해 내셨으나 그들을 순조롭게 인도하지 않으시고 홍해 사건이라는 위기의 순간으로 몰고 가셨다. 이는 교만한 바로와 애굽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맛보게 함으로써 다시는 선민을 추격하지 못하게 하려는 조처였다. 또한 이스라엘에게는 출애굽이 자신의 힘으로 얻은 해방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에 기인한 것임을 기억하게 하여 앞으로 들어갈 새 땅에 이르기까지 닥쳐 올 고난을 믿음의 힘으로 극복할 것을 당부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이상과 같은 점에서 출애굽 사건의 절정인 홍해 도하 사건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한 구원의 능력이 각 개인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보여 준다. 또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까지 성도들에게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할 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교훈해 준다.
1. 바로의 추격(14:1-9)
본장의 서론이자 도입부로서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홍해 바닷가로 인도하심으로써(1-4절) 바로의 군대를 유인하는 장면이 현장감 넘치게 서술되어 있는 부분이다(5-9절). 그런데 이때 이스라엘 백성이 정확하게 어느쪽 방향으로 행진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이스라엘의 행진로를 가나안 땅과 거리가 먼 방향으로 전환시켜 막다른 바닷가로 인도하셨다는 점이다. 아마 바로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탈출 경로를 파악하고 있다가 그들이 궁지에 몰려 있음을 보자 추격할 욕심이 생겼을 것이다. 물론 이 같은 행동을 유발시킨 것은 하나님이셨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할 목적이 아니라 교만한 바로를 유인하여 섬멸하려고 추격을 추동하셨다. 동시에 지금껏 하나님의 은덕으로 살아 온 선민들에게 그들의 삶이 얼마만큼 신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를 시험하려 하셨다.
한편 이 사건은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즉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대한 위기와 전화기를 맞기 마련이다. 그리고 종종 그 위기와 전화기는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은 나의 방법이 되어서는 안 되며 주께서 지시하시는 방법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그 방법은 위태롭거나 무모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방법은 우리 육신의 안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안식과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임을 확증하는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위경에 처하든지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일시적으로는 실패하고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종국적으로는 참 기쁨과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호 12:6).
* 바로의 추격대(追擊隊).
바로가 200만에 이르는 히브리 노예들을 부릴 수 있었던 거은 노예들의 힘을 강제할 수 있는 정치 체제와 강력한 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막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그는 하나님께서 내리신 열 재앙(7:14-10:29;11:19,30) 앞에서 손 한번 못쓰고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바로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당한 이러한 패배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이제 탈출로가 차단된 이스라엘과 일전을 벌일 목적으로 군대를 동원하고 있다. 그것도 고대 세계 최고의 병기(兵器)인 전차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는 군대를! 그런데 이러한 바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사단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구원받은 성도를 그대로 두지 못하고 틈만 있으면 괴롭히려고 안달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전쟁에서 이미 패배했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치 않으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은 어느 상황에서든지 가장 무서운 힘을 지닌 최고의 무기로 무장하고 그리스도인과 영적인 대결을 벌이려 한다. 그 무기는 혈족이 될 수 있으며, 돈과 세상의 모든 권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고 있는 사단(요 16:33)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단지 우리는 악한 세력이 우리를 미혹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무장하고 늘 경계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벧전 5:8).
2. 불안에 휩싸인 이스라엘의 한탄(14:10-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홍해 가로 인도하는 장면에 이어 본문은 바로의 추격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는 장면(10-12절)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모세가 애굽의 군대를 섬멸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하는 장면(13,14절)이 교차되고 있는 부분이다. 이스라엘은 애굽인들의 추격 소식을 듣자 큰 혼란에 빠졌다. 자축과 아이들을 거느린 이스라엘의 탈출은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고, 이에 반해 병거로 무장한 바로의 군대는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급속히 추격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불안한 심정을 누를 길이 없었다. 이처럼 상황이 변화할 때마다 변모하는 사고력을 지닌 인간은 자신의 앞날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보다 자신들을 질곡에 빠뜨린 주변 환경과 과거를 더듬기 바빴다. 즉 출애굽 직전 가중되었던 노역을 순전히 모세의 개입에 의한 것으로 오해했던 백성들(5:15-21)은 그때의 원망을 여기서 또 한번 재현시킨다. 이처런 환난에 빠진 인간은 자기의 본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는 환난에 직면하여 당황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모세는 위기 상황에서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지켜보라고 담대하게 선포한다(13,14절). 이것은 곧 곤경 속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와 명령을 기다리라는 확신에 찬 말이다.
한편 위기 상황을 믿음으로 극복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에 대한 인내와 더불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간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이 인내하고 당신을 갈구하는 자에게 역사하신다. 모세가 처음 백성들의 항의에 부딪쳤을 때와 달리 이번 위기에 담대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당신의 백성을 위해 일하심을 믿는 자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초연할 수 있는 강한 힘이 위로부터 주어진다(요 16:33).
* 그리스도인의 인내.
그리스도인들은 인내의 모범을 예수의 삶에서 찾아야 한다. 십자가의 역경도, 백성과 제사장들의 수모도 하나님 뜻을 실행하는 즐거움으로 감내하신 그분의 삶, 그것은 믿는 사람의 유일한 지침서이다. 예수께서는 현실의 고뇌에 방황하는 우리를 향해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성경은 모든 신자들에게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엡 4:1,2'골 1:11;3:12)고 권고함으로 인내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한편 신자들이 겪는 시련 중 하나는 죄악된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그들이 악함에도 불구하고 번영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시 37:1;잠 3:31;24:31). 이것은 불의한 바로의 압제하에서 신음해야만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통된 고민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섣부른 원망과 악인의 번영에 대한 질투심은 도리어 자기의 신앙을 파멸싶키기 쉽다. 악인들의 형통함은 진정한 의미에서 복이라 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은 죄요 그 죄의 결실일 뿐이다(잠 21:4). 그러므로 신자들은 그러한 자들의 형통을 부러워하거나 자신의 불운한 처지를 비관해서는 안 된다. 대신 장차 임할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 중에 바라보며 현실의 고난에 대해 인내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물론 신자들의 인내는 자신의 의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곧 성령 충만한 생활의 결과로서만 가능하다(갈 5:22;롬 8:3,4). 따라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늘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림 받도록 하나님께 온전히 내맡겨야만 한다.
3. 홍해 도하 명령(14:15-20)
애굽 군대의 추격 장면에 이어 이스라엘의 홍해 도하를 위해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준비를 하고 계시는 장면이다. 먼저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홍해 위로 내밀어 바다를 가르도록 명하신다(15,16절). 그리고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려는 자신의 계획을 일러주신다(17,18절). 마지막으로 구름 기둥으로 이스라엘 진영과 애굽 군대 사이를 갈라놓음으로써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동안 애굽인들이 이르지 못하도록 조처하신다(19,20절). 이상과 같이 제반 준비를 마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백성들에게 결단을 요구한다. 즉 그분은 애굽 군대의 추격이란 절대 위기에 처한 백성들에게 홍해로 들어서라고 명하신 것이다. 이는 수장의 위험을 불사하고 하나님을 따르라는 헌신에의 요구인 동시에 지금까지의 존재 기반을 완전히 포기하고 새로운 가치관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으라는 주의 명령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불확실한 세계에 들어가라는 명령은 사실 심약한 인간에게 있어선 실천하기 어려운 요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구원은 자신의 결단이 선행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뒤를 쫓고 있는 바로의 군대만큼 앞의 검푸른 홍해도 두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복할 때 그들 앞에는 홍해가 갈라지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 이처럼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결단을 통해서 인간은 구원을 얻는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생명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믿음' 뿐이다.
* 홍해 도하의 제 견해.
바다가 갈라진 초자연적 사건인 홍해 도하는 지금까지 수많은 문학의 소재가 되어 왔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으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합리적 해석들이 가해져 왔다. 오늘날에도 상당히 많은 학자들은 바닷물이 실제적으로 갈라졌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제각기 합리적인 해석을 가하는데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지 않고 대신 안전하게 홍해 물가를 통과했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강력한 견해로 '갈대 바다'설이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갈대 숲이 무성한 무릎 이하의 늪지대를 건넜다는 학설이다. 즉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곳이 사람이 걸어서 건널 수는 있으나 바퀴를 단 병거가 건너려면 큰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밖에 또 다른 견해로는 시로코(sirocco)란 열풍이 바닷물을 급격히 증발시켰다는 설(設)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성경이 주장하는 바와 다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는 주장들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홍해를 제어하여 이스라엘을 안전히 도하시키셨으며 그들을 추격하던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셨다. 물론 그 홍해의 물을 어떠한 방법으로 조정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해 가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그러한 기적적 사건을 능히 이뤄질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아뭏든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적 활동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잊혀질 수 없는 은혜의 체험이다. 또한 후손들에게 여호와 신앙의 위대함을 설명할 수 있는 표본적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홍해 사건은 박물관에 전시된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항상 일어날 수 있는 현재의 사건으로 늘 우리 앞에 제시되어야 한다.
* 홍해 도하와 하나님의 사자의 활동.
본문에는 마치 하나님의 작전 명령을 수행하듯 여호와의 사자가 활동한 활약상이 기술되어 있다. 사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결단을 촉구하도록 도우는 한편, 애굽 군대의 침입을 억제하는 등 당신의 백성을 보존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수행해 나갔다(19,20절).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선택된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보낸 사자의 활동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으로서 오늘 신자의 삶과 가슴 속에 역사히시는 성령의 활동을 예표한다. 신자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망설일 때, 사단은 끊임 없이 내습을 가해 온다. 이때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앞에서 사라진 구름 기둥을 보고 자신들에게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아주 떠나신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가 그들의 배후로 옮겨 간 하나님의 사자는 구름 기둥으로 애굽 군대의 내습을 막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절박하고 암담한 현실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오해이며 실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쉬지 않고 항상 함께 역사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암울한 현실 가운데서도 절망치 않고 소망할 수 있는 근거이다.
4. 홍해 도하 사건(14:21-31)
마침내 이스라엘이 홍해를 도하(渡河)하고(21,22절) 그 뒤를 쫓아 홍해에 뛰어들었던 애굽 군대는 모조리 수장되고 마는 광경이다(23-28절). 짙은 어둠이 걷히면 숨겨졌던 것들이 속속 드러나 보이듯이 이제 위경을 모면한 이스라엘 백성의 눈 앞에는 애굽 군대의 참혹스러운 시신과 주인 잃은 무기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다(29,30절). 결국 홍해를 사이에 두고 명확히 드러난 것은 애굽의 완전하 패배와 이스라엘의 선명한 승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그 종 모세를 온전히 믿기 시작한다(31절).
한편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준행한 것은 단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걷는 일이었다. 즉 애굽 군대를 멸망시키는 일에 있어서 그들이 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모든 승리는 하나님게서 주도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며 감사하는 일이었다. 반면에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은 성급한 바로의 군대에게 심판을 내리셨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선민을 자신들의 수중에 두려는 죄악을 범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에는 하나님께 소속된 성도를 끝까지 유혹하고 파멸시키려는 죄악의 세력이 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날 하나님은 당신의 권능으로 그 세력을 완전히 멸망시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현재의 고통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종국적인 승리를 향해 전진을 해야 할 것이다.
* 홍해 도하 사건의 의미.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말미암은 홍해 도하 사건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였다(요1:4;12:46).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죽음의 물을 극복하게 하신 것같이 오늘날에도 죄악 세상 가운데 사는 우리들을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구원을 완성해 가신다. 한편 홍해 도하 사건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보호라는 측면과 더불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영적 생명의 탄생 고정을 상징한다. 즉 노예로 일관했던 애굽에서의 생활은 사람의 후패함을 홍해를 건너면서 새롭게 변화된 삶은 완전한 자유와 영생을 얻은 자의 신선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새로운 삶을 허락하시기 위해 악의 세력에 대해 단호한 응징을 가하신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홍해 사건은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심판인 동시에 당신 백성의 새 삶을 주도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역사였음을 알 수 있다(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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