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여호와께서...가라사대 - 성경에는 '하나님께서...말씀하셨다'라는 형태의 문장이 서두에 나와 말씀의 기원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강조하는 구절이 많다(3:5;창 1:3;레 1:1;민 1:1;신 1:34). 특히 이 부분에서는 이러한 의미가 더욱 강조되고 있다.즉400여년간 노예 생활에서 막 해방되어 말로만 듣던 미지의 땅을 향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발을 내딛는 시점에서 하나님의 이러한 말씀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13:2
거룩히 구별하여 - 기본 동사 '카다쉬'( )는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특별히 따로 떼어 구분해 놓는 것'을 뜻하는 신적(神的) 용어이다. 따라서 인간은 '거룩히 구별한 것' 즉 하나님께 속한 것은 결코 침해할 수 없었다.
내게 돌리라 -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야 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이는 애굽의 초태생이 다 죽었던 유월절 밤에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초태생은 사람이나짐승 할것 없이 모두 죽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된 규례이다(민 3:13;8:17).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속자(고엘)로서의 당연한 권리로 당신께서 친히 보존하신 이스라엘의 초태생을 요구하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초태생 각 태(胎)를 대표하는기능을 한다. 따라서 초태생을 바치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구별된 하나님의 것이며, 그렇기에 그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된(바쳐진)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전적인 하님의 은혜로 구원의 반열에 서게된 신약 시대 교회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내 것이니라 - 초태생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 선언으로서, 앞 문장의 '초태생은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는 명령에 대해 그 이유가 근거를 밝히는 말이다. 이말은 모세 오경에서만 10회 이상 반복된 말이다.
====13:3
종 되었던 집 - 애굽에 대한 별칭으로 이후에도 종종 사용되었다(20:2; 신 5:6;6:12). 이 표현의 사용 목적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과거 애굽에서의 비참한 신분 및 생활을 기억케 하여 크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늘 감사케하려는 데 있다. 한편 오늘날하나님의 자녀된 성도 역시 과거에는 사단의 종된 신분이었다(엡 2:1-5).
기념하여( ,자카르) - '기억하다', '암송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역사를 배은 망덕하게 잊거나 경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경건히 삼가 기억하라는 말이다. 실로 올바른 신앙 생활의 출발점은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나를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데 있다.
유교병을 먹지 말라 - 여기서 죄의 상징인 누룩이 든 '유교병'은 부패한 옛 생활을 상징한다. 따라서 그것은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옛 애굽의 음식을 상징하므로 결코 유월절 예식에 사용할 수 없었다.
그 손의 권능 ( ,호제크 야드) - 하나님의 손(7:14;삼상 5:11),또는 하나님의 손가락(8:19;31:18;신 9:10;시 8:3)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일종의 은유적 표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구절은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기 위하여 '손'과'능력'이 함께 사용되었다. 실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수 있었던 것은 모세와아론의 능력이나 또는 백성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다.
====13:4
아빕월 이 날에 -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아빕월 15일을 가리킨다. 여기서 '아빕'( )은 '녹색', '이삭'등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브'( )에서 파생된 말로'푸른 곡식의 이삭들'이란 뜻이다. 이때는 유대 종교력으로 첫달이지만, 태양력으로는 3월말이나 4월초에 해당하는데 팔레스틴에서는 보리 추수기에 해당한다<성경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13:5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신 하나님께서는또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분명히 인도하실 것이다. 특히 이 구절에 사용된 '여호와'란 명칭은 특별히 '언약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즉 일찍이 당신의 주권적인사랑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사상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가나안 사람...여부스 사람 - 팔레스틴에 살던 족속들에 대한 언급은 둘(창 13:7)로부터 다섯(본절 및 민 13:29), 여섯(3:8;삿 3:5), 열(창 15:19-21),또는 열 둘(창 10:15-18), 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전통적으로는 7족속이 대표적인 족속으로 묘사되고 있다(신 7:1). 한편 본절은 3:8에 언급된 6족속 중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브리스' 족속이 제외된 상태이다. 또한 흔히 가나안 7족속이라 함은 본절의 5족속및 '기르가스', '브리스' 족속을 가리킨다.
네 조상들에게 맹세 하신 바 - 하나님께서는 족장들과의 언약시 항상 두 가지 약속 곧 후손의 번영과 가나안 땅의 소유를 언급하셨다(창 12:7;15:18;26:4; 28:13). 이처럼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로 전락하기 전에 이미 출애굽 이후의 생활을 설계하셨다.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 3:8에서 처음 사용된 후 가나안의 별칭으로 자주 사용된말이다(민 13:27;신 26:9, 15;31:20;렘11:5;32:22;겔 20:6). 여기서 젖은 '우유', '버터'를 뜻하는 '하라브'( )인데, 이는 소와 양을 많이 기를 수 있는 풍요한 목초와 물이 있는 복스러운 땅을 암시한다. 또한 꿀은 '꿀 같이 접착성이 있는 액체','당밀'등을 뜻하는 '디바쉬'( )인데, 이는 꿀을 만드는 벌들이 많이 살 수 있는곳, 즉 꽃과 화초가 많이 있는 살기 좋은 땅임을 암시한다.
====13:6
제 칠 일에는...절기를 지키라 - 7일 동안 절기를 지키되, 특별히 무교 절기 첫날과 마지막 제 칠 일째에는 거룩한 성회로 모이라는 뜻이다<12:16>.
====13:7
누룩을...보이지도 말게 하며 - 무교절을 완전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는 엄숙한 명령이다. 즉 그들은 7일 동안 무교병만 먹고 유교병을 먹지 말아야 함은물론 그들의 시야에 조차 누룩이 보이지 않도록 제거해야 했다. 성겨의 여러 곳에서누룩이 전염성 있는 죄악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된 것을 고려할 때(고전 5:8;갈 5:9;마16:6,12), 이 구절은 상징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교 절기에는 모든 종류의 죄악들을 멀리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신약 시대 사도 바울이 권면한 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란 말을 연상시킨다.
======13:8
네 아들에게 뵈어 이르기를 -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자신들이 이 절기의 규례를준수해야 할 뿐 아니라, 출애굽 사건의 의미를 후손들에게도 가르쳐 그들 역시 대대로이 무교절을 지키도록 교훈해야 할 것을 명령받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의 자녀에대한 종교 교육의 한 일면을 보여 준다. 즉 부모들은 사건이나 절기 의식을 통해서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품성과 율법을 후손들에게 가르치며, 그들 또한 그 일들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바로 섬겨야 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개인적으로, 또는 그당대에만 국한하여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그들을 전민족 중에서 구별하여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다(창 12:7;17:7, 8). 따라서 출애굽 사건을 직접 경험한 당시 사람들은 그 자녀들에게 무교절 의식을 직접 보이고 가르쳐, 하나님을 그 규례에 따라 섬기도록 교육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었다<10:2>. 이는 오늘날 먼저 영적이스라엘로 선택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교훈을 다른 사람들에게 행동해 보임으로써그들을 가르쳐야 하는 사실과 같다.
======13:9
이것으로 - 하나님께서 누누이 강조하셨던 무교절과 초태생 등에 관한 규례들을가리킨다.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대대 후손에 이르기까지 무교절의 의식을 잊지 않고 지키게 하기위하여 새로운 명령을 주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손과 양 눈썹 사이(미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호로 삼아 표를 찍어 놓은것처럼 '여호와의 율법으로' 항상 그들의 입과 눈과 삶에 있게하도록 명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로 이때부터 이 명령을 문자적으로 지키기 위하여 천이나가죽에 본 성구를 써서 손에 매거나 이마에 두름으로써 경문(經文)과 경문갑(經文匣)에 대한 관습을 가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경문(Phylactery)이란 본절과 같은 명령이있는 4군데의 성구, 즉 출 13:3-10,11-16;신 6:4-9;11:13-21등을 4개의 양피지에 적어놓은 것을 말한다. 그리고 경문갑이란 이 경문을 넣은 조그마한 상자를 말하는데, 여기에 끈을 매달아 손에 매거나 이마에 두르고 다녔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경문이나 경문갑을 손에 매고 이마에 두름으로써 문자 그대로 이것을 그들의 손의 기호와 이마의 표를 삼으라는 이 명령을 문자 그대로 실행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마음 깊이 새겨(신6:6) 영원히 잊지 말라는 상징적은 뜻으로 주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후일 이 명령의 본 정신을 망각한 채, 이러한 관습이 단지 의식주의로만 흘렀을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혹독한 책망을 면치 못했다(마 23:5).
네 입에 있게 하라 -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는 말씀이 삶에서떠나지 않게 하라는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율법이 마음에 충만하게 차고 넘칠 때 자연히 그 말씀은 입을 통해 나오게 된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구속과 해방의 절기인 무교절 사건을 늘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봉독하는 가운데 그 의미를 깊이깊이 되새김질 하라는 의미이다. 나아가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데 그칠 것이아니라. 그 말씀을 생활화하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13:10
연년(年年, ,미야밈 야미마) - 어근 '욤'( )은 '날'(day) 혹은 '해' (year)를 뜻한다. 따라서 이 말은 '해마다', '매년' 어김없이 준수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지킬지니라 -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교절의 의미를 날마다 기억하며 살아야하지만, 특별히 '기한에 이르러서는' 절기 의식으로 그 의미를 또다시 생생하게 체험하여야 했다. 이처럼 집단적인 의식(儀式)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또한 이스라엘 백성 각자가 그 의식의 일원이 됨으로써, 하나님과 개인과 일체감, 역사적 사실과 현실과의 일체감, 민족과 자신과의 일체감은 새삼 확인되었을 것이다.
======13:11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 - 여호와께서는 약속하신 땅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곳으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그 땅을 그들에게 주신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초태생의 성별에 관하여 확신을 백성들에게 심어 주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 지금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가나안 정복이 성취되면 더욱 하나님을 믿고 여호와의 의식을 준수해야 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13:12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 2절 주석 참조.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 여호와께서는 처음 난 수컷에 대해서는 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그 소유권을 주장하신다. 그 근거는 애굽 안에 있는 장자를 다 죽이시는 유월절 사건 때 이스라엘의 초태생 수컷은 여호와께서 죽음으로부터 지켜주사 그것들을 따로 당신의 것으로 구별한 사건에서 찾아 볼 수 있다(12:29, 30). 그러나 이는남성 혹은 수컷의 우위성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 문화적 배경 속에서 우월한 것으로 인정되었던 초태생, 남성, 수컷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심으로써 그외 모든 것조차도 하나님의 것임을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후일 이 규례에는 '흠없는 짐승'이어야 한다는 지시가 덧붙혀졌다(신 15:21).
======13:13
나귀의 첫 새끼 -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가운데 깨끗한 짐승과 더러운 짐승을 구별하는 제사 의식이 이 구절에 처음 나온다. 나귀는 본래 말과에 속하는 동물로서 굽이갈라지지 아니하고 되새김질을 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 의식상 부정한 동물에 속했다(레 11:1-8). 특별히 여기서는 부정한 짐승의 대표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린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 따라서 나귀와 같이 부정한 동물들은 정결한 동물인어린 양으로 대속되어 바쳐져야만 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대속 사상' 발견할 수있다. 즉 도무지 하나님 앞에 정결할 수 없는 죄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량될 수있는 것은 어린 양 되신 그리스도의 피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목을 꺾을 것이며 - 이는 어린 양으로 대속하지 않은 부정한 짐승에게 내려지는 중엄한 형벌로서, 가차없이 죽이라는 명령으로 볼 수 있다. 상징적으로 이것은 대속의은총을 거부하는 자에게 돌아갈 비참한 결국을 시시한다.
장자 된 자는 다 대속할지니라 - 하나님께서는 이방 종교에서처럼 사람을 산 채로제단에 바치기를 결코 요구하시지 않으신다. 단지 장자는 모든 탄생을 대표하는 것이므로 장자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백성 전체가 몸과 마음을 거룩히 하여 하나님께하여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장자는 대속, 즉 어떤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그의 생명을 보전함과 동시에 하나님께 바친 효력도 지닌다. 이 사상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우리의 장자 되시는 그리스도, 즉 제 2의 아담되시는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상으로 발전한다. 한편 이스라엘 사상 장자 헌신 제도는 후에 레위족속으로 구별하여 드리는 규례(민 3:12;8:16)와 속전 규례(민 3:47;18:16)로 대체되었다.
======13:14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나 이런 규례의 목적 및의미 그리고 기원에 대해 자녀들에게 분명히 교육할 것을 다시 지시한다(12:26, 27).즉 절기나 규례에 대해서 자세히 교육함으로, 자녀들로 하여금 의식을 지키는 것은 하나의 법적인 규례임을 알게 해야만 했다. 히브리인들의 전통적인 유아 교육과 가정 교육 및 종교 교육과 민족주의 교육의 근거는 이와 같은 교육을 강조하는 구절에서 찾을수 있다.
종이 되었던집 - <13:3>
======13:15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낳은 것을...다 죽이신 고로 - 이 구절은 '초태생의 수컷은 다 여호와께 희생으로' 드려야 할 근거가 된다. 즉 바로가 강퍅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내지 아니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초태생을 다 죽이시고 이스라엘의 것을구별하여 살리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그 자손들에게 분명하게 교육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초태생을 요구하시는 것과 또한 그것들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드려야 하는 것의 당위성을 가르쳐 주어야 했다.
우리 장자는 다 대속하나니 - <13절>
======13:16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으라 - 9절의 주석을 참조하라.
======13:17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 -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지름길은 블레셋의 해안도시가사(Gaza)를 통하는 지중해안의 길이었다. 이 길은 약 4일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가가운 거리였다. 특히 이 길은 애굽의 18왕조가 북방 정책의 일환으로 빈번히 이용했었던 중요 도로였다. 그러나 이 길에는 당시 철기 문화를 배경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호전적인 백성, 블레셋 족속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의 정확한출애굽 경로는 불분명하다. 그들이 홍해를 건너기 전까지의 대략적 경로는 14:2에 잠깐 언급되었다<서론, 출애굽 경로>.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 생활을 바로직전에 마감한 관계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정비가 안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전쟁을 치를 군사적인 준비 뿐 아니라 마음의 준비조차도 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때 다섯 개의 큰 도시 국가들(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가드, 에그론)로 상호 공수동맹을 결성한(수 13:3) 막강한 블레셋 군대와 맞부딪치게 되면, 쉽게 낙심하고 출애굽한 것을 후회하면서 오히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소지가 충분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6배나 먼 광야 길로 그들을 인도하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블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나약함을 깊이 인식하신 까닭에 취해진 조처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이러한 조처 배후에는 모세와 언약한 시내 산 언약(3:12)을 이루시려는 당신의 크신 목적도 담겨 있었다.
======13:18
홍해( ,얌 수프) - '홍해'(紅海)라는 이름은 라틴어 벌겟(Vulgate)역에서 쓰기 시작한 용어로(Mare Rubrum), 그 근방 원주민들의 황색 피부 색깔에서 유래되었거나 혹은 그 바닷가의 빛나는 암속과 바다 밑에 깔린 산호 등의 각종 침전물로 인해 붉은 물빛을 띠었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한편 홍해의 원어 '얌 수프'가 문자적으로 '갈대 바다'(sea of reeds)라는 점에서 그 명칭에 관한 의견이 분분하다.즉 혹자는 '수프'라는 말을 갈대가 많은 습지란 의미로 해석하여 '홍해'가 애굽의 나일 삼각주 동북부의 파피루스 생산지인 '파트쥬프'(Pa-tijuf)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또한 14장에 나타나는 바 홍해 도하 사건의 비역사성을 주장하는 자유주의 학자들은'얌수프'가 누구나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갈대가 무성한 나일강 주변의 얕은 호수라고강력히 주장하면서 홍해 도강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에 불과할 뿐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성경의 단순하면서도 사실적인 기록을 믿는 우리는 이곳 이 사람이 맨몸으로 건널 수 없은 바다로 확신하며 오늘날 그곳을 수에즈 만 북단 지점으로 수에즈만의 연장이었던 비터(Bitter) 호수로 추정한다(Leon Wood). 그리고 '갈대'라는 명칭이 주어진 것은 홍해 주변에 자생하는 갈대(염분이 함유된 물에서도 자람) 때문에붙여진 것으로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수에즈 만 북단을 거쳐서 술 광야 또는 바란 광야를 경유하여 가나안으로 나아갔던 것 같다<서론, 출애굽경로>.
인도하시매 - 원문에는 이 말이 없으나 17절의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라는 말에서 유추하여 의역하였다. 17절에 언급된 '인도하다'는 말의 히브리어 '나함'( )은'위로하다', '동정하다'는 의미도 지닌다. 따라서 '인도하시매'란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랑레 백성을 주변 환경에 구애받지 않도록 위로하면서 인도하셨음을 나타낸다.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 군대 대열로 질서 정연하게 행진하였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 할때 도망가듯이 나온 무질서 한 피난민이 아니라, 가나안을 정복하러 가는 여호와의 군대였기 때문이다(12:17). 아마이 당시 그들은 시내 산 언약 이후 민수기에서 볼수 있듯이 지파와 가계에 다라 대열을 형성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어느 정도의 질서는 유지했을 것이다.
======13:19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 당시 요셉의 시신은 고대 애굽 귀족들의 장례법을 따라 방부 처리된 채 미이라로 보존되었던 것같다(창 50:26).
권고하시리니 - 원뜻은 '기억하다', '방문하다' 등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상들과의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친히 이스라엘에 내방하실 것을가리킨다<창 50:24>.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 약 350년 전 요셉이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던(창 15:13-16) 출애굽과 가나안 회복을 굳게 믿고 임종시 후손들에게 부탁했던 요셉의 유언이다<50:25>. 진정 요셉은 믿음으로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던 것이다(히11:22). 그리하여 마침내 가나안 정복 후 요셉의 해골은 그 믿음의 소원대로 가나안땅 세겜에 평안히 묻히게 된다(수 24:32).
=======13:20
숙곳 - 라암셋(오늘날의 Tanis) 동남쪽 약 32마일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이스라엘백성이 라암셋에서 출애굽을 시작하여 최초로 머문 곳이다<12:37>.
에담 - '요새'라는 뜻으로 이곳과 민 33:6등 두 곳에서는 '광야의 끝'으로,민 33:8에서는 '에담 광야'로 묘사되었다. 에담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르광야의 끝(15:22), 또는 그 수르 광야의 일부가 에담 광야로 불려지기도 했다(민 33:6-8). 그리고 에담은 애굽 동쪽 국경 지방을 경계하는 요새 일부이기도 했다. 따라서 카일(Keil)은 이 곳을 아라비아와 애굽 경계 선상으로 이해했다. 한편 숙곳과 에담까지의거리는 라암셋에서 숙곳까지의 거리와 마찬가지로 하루 여행길이라 한다(Keil, Delit-zsch).
======13: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 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인도하셨다. 특별히 '앞에 행하사'라는구절은 하나님께서 친히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심을 강조하는 말이다.
낮에는 구름기둥...밤에는 불 기둥 - 서로 다른 별개의 두 기둥이 아니라 한 기둥이 이중적인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14:24).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친히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신적 임재의 표상이다.즉 낮에는 서늘한 구름기둥으로 사막의 뜨거운 햇빛과 열기 및 질병으로 부터, 밤에는찬란한 불 모양(민 9:15, 16)으로 혹한이나 동물 및 사람 등 외부의 침입으로 부터 보호하신 것이다. 따라서 혹자(Koster Knobel)의 견지처럼, 이 현상을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소원한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단순한 상징적 묘사로 보거나 혹은 당시 길 없는 사막을 횡단하던 대상(隊商)이나 군인들이 길 안내를 위해 피워 놓은 향로 곧 낮에는 그 연기로, 밤에는 그 불빛으로 걸음을 인도한 고대인들의생활 기구에 불과할 뿐이라는 주장은 억측이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신적 기원과 초자연적 성격을 지닌 채 가시적(可視的) 형태로 나타난 여호와의 기둥이었다. 동시에 이기둥의 현현(顯現)은 여호와의 군대인 이스라엘 백성의 진정한 통솔권자는 오로지 여호와 뿐이심을 선포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택한백성을 인도하시는 여호와의 지팡이요, 택한 백성을 지휘하시는 여호와의 홀(笏)이었다.
======13:22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이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표적이 출애굽 대사건 직후부터 나타났다는 것과, 그리고 느9:19에 나타난 증거를 통해 40년 광야 생활 전반을 통해 나타났다는 것은 확실하지만,언제 그 임재의 표적이 떠나갔는지는 불분명하다. 한편 이스라엘이 물과 휴식처가 없는 광야를 40년동안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을 통한 하나님의 임재 때문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서의 삶 가운데 임재하셔서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신다.
고통스런 광야 여정의 길잡이(안내자) 역할을 하게 애굽에 임한 마지막 재앙과 이로 말미암은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12장에 이어 본장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무교절 규례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1-10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초태생은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모두 하나님께 대속할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11-16절). 그 다음으로는 가나안을 향한 이스라엘의 여정을 언급하고 있다(17-22절). 이에 의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가나안은 향해 곧바로 진행한 것이 아니라 홍해의 광야길로 돌아서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시는 손길을 몸소 체험케 하고 광야 생활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연단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분께서는 친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있다(21,22절). 한편 만일 인간이 목적을 향해서 전력을 다하고 그 목적이 성취된 이후에는 모든 일에 나태해지고 방종을 일삼는다면 그 목적은 처음부터 없는게 더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도 출애굽 이후 영적 나태에 빠져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등한히할까 염려하셨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사건과 관계된 규례를 주시면서 이를 지키도록 거듭 명령하신 까닭도 그 같은 잘못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규례를 지킨다는 것은 자기의 의지대로 되어지는 일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앞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거부하는 인간은 광야라는 인생 여정을 방황하며 허무하게 살아가게 될 뿐이다.
1. 새 땅에서 지켜야 할 규례(13:1-16)
본문은 본장의 서론이자 도입부로 전장의 내용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본문의 내용은 무교절에 관한 규례(1-10절)와 이스라엘의 모든 초태생에 관한 규례(11-16절)로 세분된다. 유목민이었던 족장 시대의 이스라엘 생활 양식과 달리 애굽에서의 종살이는 그들의 전통적 생활로부터 많은 단절을 가져 왔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은 타성에 젖은 노예의 삶을 지양하고 새롭게 변신해야 할 시기를 맞고 있다. 즉 가나안이라고 하는 약속의 땅에서 지내게 될 새로운 삶을 예비해야만 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새 삶의 터전에서 매년 무교병 축제를 시행하라고 명하신다. 그리고 무릇 사람이든 짐승이든 초태생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니 이를 위하여 대속(代贖)의식을 행하라고 명하신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단순히 그 의식 자체에 무슨 신령한 힘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대신 그 기념제의 시행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를 기억하고 이를 현재화, 영속화 하라는 기념적 성격의 당부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를 더욱더 잘, 그리고 항상 기억하기 위하여 '미간에 달고 다니는 기념물'과 '손의 기호'까지 부착하였는데(16절) 이를 일명 경문이라 부른다(신 6:8;마 23:5). 이러한 경문은 후에 외식 종교의 형상으로 비치긴 하였으나 그 근본은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는 의미의 장식품이었다. 아뭏든 이상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인간에게 규례를 주시는 분도 여호와시며, 그것을 실천하는 인간의 의지를 돋구어 주는 분도 여호와라는 사실이다. 즉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는 분은 여호와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은 누리는 성도들 역시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고 있는 것이다.
* 초태생의 헌납.
장자와 짐승의 초태생을 하나님께 바치는 규례(2,11-16절)는 애굽에 내린 장자 사망 재앙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사실 창세기에는 가인과 아벧이 땅의 첫 소산과 가축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드린 기록이 있다(창 4:3,4). 이는 아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결실을 베풀어 준 데 대한 감사의 예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소유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은 모든 초태생을 하나님의 소유에 귀착시키고 있는 본문의 초태생 규례를 통해 더욱 명확히 백성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 아뭏든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장자 재앙 중에서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사실을 들어 초태생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치도록 명하셨다. 이에는 다른 모든 생축의 첫 소산과 같이 인간의 맏아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다만 인간에게 요구된 초태생 헌납은 가축으로 대치되었다. 한편 나귀의 첫 소산을 다른 생축으로 대속한(13절) 이유는 나귀가 사람처럼 귀한 존재이거나, 이용 가치가 큰 짐승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질 수 없는 부정한 짐승이었기 때문이다(레 11:1;신 14:4).
이와 같이 맏아들과 생축의 첫 소산에 대한 대속과 헌납 규정은 애굽의 장자 사망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온전한 소유가 된 기념비적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재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근본 이유도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실을 감사하는 것이어야 한다. 특히 현재의 소유물들은 주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그분의 소유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 가나안 땅의 참 주인.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누누이 약속해 왔던 땅 가나안(3:8;창 12:1-3;28:13)은 주인없는 빈 들이 아니었다. 비록 이 땅에는 먼 과거 이스라엘 선조들의 숨결이 서려 있다고 하나, 족장 아브라함과 야곱은 팔레스틴 전 지경 중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곳에 머물렀을 뿐이다(창 12:5-9;33:18-20). 즉 이 지역에는 이스라엘 선조들보다 더욱 넓은 대지(大地)를 밟은 자들이 있었으며, 더 오래 전부터 그곳을 거점으로 삶을 누려 왔던 그 땅의 거민들이 있었다(창 10:16-20). 대흉년으로 살기 어려워 이스라엘이 이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피난했을 때(창 45,46장)에도 이들 가나안 거민들은 그 땅에 남아 자기의 삶을 지키고 있었다. 따라서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이스라엘보다는 가나안 토착민들이 그 땅의 기득권을 갖고 있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적인 세속의 기준과 달리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은 가나안 땅 뿐 아니라 온 세계의 주인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명백히 밝힌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받은 거룩한 백성이어야 함을 밝힌다. 따라서 이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허락없이 거주한 가나안 백성은 불법 체류자인 셈이었다. 더욱이 이들 이방 거민들은 여호와의 목전에서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는 범죄를 지음으로써 그 땅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주인과 계약을 맺지 못한 자가 입주하지 못하듯, 하나님의 나라에는 신앙없는 자가 체류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가나안 정복을 두고 향후 전개될 가나안 거민들과 이스라엘 사이의 싸움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펼쳐진 영적 싸움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게서 내려주신 믿음의 영역을 확고히 자신의 영역으로 구축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 건설을 방해하는 사단의 세력에 대해 철저한 대응책으로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2. 이스라엘을 새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13:17-22)
무교절과 초태생 규례에 이어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가나안을 향한 출발 여정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 17,18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홍해 광야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리고 19절은 이때 이스라엘이 요셉의 유골을 취하여 갖고 나왔음을 보여 준다. 이는 요셉의 유언이 성취된 사건이라는 의의를 지닌다(창 50:25). 마지막으로 20-22절은 이스라엘이 행군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고 계심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의 출발 경로를 볼때 인간적인 견지에서만 판단한다면, 쉽고 빠른 길을 두고 멀고 험한 길로 돌아가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지휘하시는 하나님의 지휘봉은 조금의 실수도 없다. 인간의 역사(歷史)는 지도자의 실수에 의해 큰 파국을 맞게 된 사건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잘 짜여져 한 점의 오차도 없었으며 놀라운 은혜로 이어져 왔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 가는 행로는 여러방향이 있었다. 그중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손쉽고 편한 해안 길을 택하지 않고 오랜 시일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광야 여정길을 선택하였다. 현대 경영학은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지만,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경영은 무한의 투자와, 이윤을 고려치 않는 특출난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산적인 인간의 사고로는 하나님의 깊으신 경륜을 이해할 수 없을뿐 더러, 하나님의 방법에 반발하기 일쑤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간의 투정에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그 일을 추진해 나가신다. 또한 일에 확신을 주기 위해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목격한 구름 기둥과 불 기둥 역시 바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표정이었다.
* 초신자(初信者)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17절)은 가나안에 이르는 최단거리의 길이다. 그와 동시에 당시 근동의 최강적이 버티고 서 있는 난공 불락(難攻不落)의 길이다. 따라서 미처 대열도 정비하지 못한 이스라엘이 욕심만을 좇아 그 길로 들어섰다면 대패하고 말았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처럼 단시일 내에 성공을 바라는 인간의 욕심은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기 쉽다. 그리고 닥쳐온 실패의 결과에 좌절하기도 쉽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실패를 맛보는 이유도 연약한 자신의 믿음을 성장시키기 보다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무모한 시도를 하기 때문이다. 지킬 수 없는 서약, 행할 수 없는 일들을 자행하는 일, 갑자기 달아오른 쇠가 일찍 식는다는 속담처럼 확고한 믿음 없는 이러한 신앙의 자만(自慢) 행위는 위험한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정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가나안의 진군 길에 있어 영적 초신자와 다름없는 유약한 이스라엘을 후퇴할 길로 인도하시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사실은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시험도 인간이 모두 감당할 수 있는 것이란 점이다(고전 10:13). 그리고 그것 역시 우리들에게 더욱 강한 믿음을 주기 위한 것이란 점이다.
*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의미.
성경에서 불과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인도한 하나님의 두 기둥 중 구름 기둥은 이스라엘이 낮에 번제물을 태우는 연기였으며 불 기둥은 밤에도 꺼지지 않은 번제단의 불이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두 기둥은 성막 제도가 이스라엘에 정착되기 이전부터 이미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들은 분명 그와 같은 성격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 표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혹자는 성경 기자가 하나님의 임재를 매우 단순하고 직설적을 표현했다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에서 중요하게 부각시켜야 할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 기둥이 인간의 삶을 인도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 이적적인 하나님의 자기 표현은 세상에 대해 당신의 존엄하고 신성 불가침한 영광을 나타내며, 이 통치 아래서만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란 점이다. 그러기에 이 두 기둥이 존재하는 동안, 이스라엘 내에서 벌어진 수많은 범죄 행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를 부인할 수 없었다. 이처럼 이 기둥은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는 동시에 인간의 양심을 일깨우는 역할을 담당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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