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완강케 함 - 바로를 비롯한 애굽의 권력자들이 7가지 재앙을 당하고도 계속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실을 꼬집는 말이다. 그런데 이처럼 미련할 정도로바로 일당들이 자신들의 아집을 꺾지 않은 근본 동인에는 하나님('내가')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하나님은 교만하여 돌이킬 줄 모르는 그들을유기(遺棄)하시고(롬 1 : 28). 자신들에게 생래적으로 주어진 자유 의지(2 : 16, 17)를 악용하여 자신의 오만한 거부 행사를 거듭하는 그들에게 영영히 회복할 수 없는 멸망의 길로 치닫도록 하셨던 것이다(9 : 12).
표징(* , 오트). '신호', '깃발', '횃불', '증거', '표시' 등의 뜻을 지닌 이 말은 애굽에서 행한 하나님의 이적들을 뜻한다. 역사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초자연적인 이적은 그분의 능력과 권위를 나타내는 표시요 증거이다.
=====10:2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게 하려 함이라 - 하나님께서 교만한 바로에게 여러번 참회의 기회를 주시면서 그가 항복할 때까지 애굽에 여러 재앙을 내리시는 이유가9 : 16에 나타난 2가지 이유 외에 한가기 더 본절에 나타나 있다. 즉 그것은 애굽에서 행한 일들이 자손들의 뇌리 속에 깊은 흔적으로 남아 오고오는 세대에 두려운 증거로 기억되게 하며 그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또한 믿게 하기 위해서였다(롬 10 : 17).이런 점에서 모세의 찬송(신 32 : 1-47)과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수 24 : 1-15) 및시편의 여러 시들(78, 105, 114편)은 바로 이적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후대에 전하라는 본절의 명령을 실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0:3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 - 본서에 자주 나오는 표현인데(9 : 1, 13), 이는 재앙을 내리시며 출애굽의 주체가 되신 분이 그의 택한 백성인 히브리 민족의 전능하신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언약을 변치 않으시는 여호와이심을 애굽 사람들에게 강조하기위함이다<9 : 1>.
겸비치 아니하겠느냐 - 바로의 완강함을 보다 엄하게 책망하고 있다. 실로 참된겸손은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과 피조물 된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바로 인식하는 데서우러나온다(렘 43 : 2).
내 백성을 보내라 -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바로에게서 반드시 찾으시겠다는 일곱번째 경고이다(5 : 1 ; 7 : 16 ; 8 : 1, 20 ; 9 : 1, 13). 이처럼 한번 하나님의 백성 된 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결국 그의 품속으로 돌아올수밖에 없다.
=====10:4
메뚜기 (* , 아르베) - '많음', '증식자', '무리', '떼'라는 뜻을 가진'라바'에서 유래하였다. 메뚜기는 초식 동물로서 이름의 뜻과 같이 대량으로 몰려다니면서 대량 생식을 하며, 또한 바람의 변화에 의하여 천문학적인 숫자로 떼를 지어집단적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모든 초목을 닥치는대로 먹어치우는 메뚜기 떼의 습격을 받으면 그 피해가 엄청나서 그 지역 사람들은 이를 천벌로 생각했다. 요엘서에는바로 메뚜기 떼의 무서움과 메뚜기 떼에 의한 폐허 모습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욜 1: 4-7 ; 2 : 1-11). 한편 기록에 근거하고 있는 자연 발생적인 메뚜기 떼의 피해가이 정도라면, 하나님의 의지로 인해 초자연적으로 임한 애굽의 메뚜기 떼의 재앙은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10:5
지면을 덮어서(* , 카사 에트-아인 하아레츠) - 직역하면'땅의 눈을 덮어서'(cover the eye of the land)이다. 즉 이 표현은 땅이 나무들로 덮여진 채 사람들을 바라본다는 고대의 시적(詩的) 사상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성경에서는 본장 15절과 민 22 : 5, 11에서만 나타나는 모세의 독특한 표현이다. 한편 땅의 지면을 덮을 정도였다 사실은 메뚜기 떼가 얼마나 숫자적으로 많았는지를 말해준다. 메뚜기 떼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메뚜기 떼가 몰아닥치면태양이 밝은 대낮에도 온 천지가 흑암으로 변한다고 한다. 그리고 메뚜기 떼는 약2600km 거리를 가득 메우는 때도 있다고 전한다(Ollivier, Barrow).
우박을 면하고 남은 것 - 메뚜기 떼가 지나간 곳에는 푸른 식물이라곤 찾을 수 없는 것이 보편적이다. 즉 메뚜기 떼는 처음 푸른 잎사귀로부터 시작해서 점차 줄기와 나무 껍질까지 모조리 갉아 먹으므로 그 땅들을 폐허로 만들어 버린다(욜 1 : 7).9 : 32을 보면 우박 재앙시 밀과 나맥은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우박 재앙의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라난 후 결국 메뚜기 재앙에 의해 피해를 입게 됨으로 애굽의 주요 농작물 재배는 모두 망치게 되었다.
=====10:6
집들에 가득하리니 - 하늘과 땅을 가득 메운 메뚜기 떼의 극성을 짐작케 해준다.메뚜기는 초식 동물로서 동물에게는 직접 피해를 가하지 않지만 간혹 먹을 것이 부족한 경우나, 성질이 고약한 놈의 경우 주거지에 침입하여 가죽이나 의복을 갉아 먹거나심지어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전혀 할 수 없게 만드는 때도 있다고 한다(Burckhardt,Beauplan).
오늘까지 보지 못하였던 것 - 메뚜기 떼의 공격이 근동 및 아프리카 지방보다 상대적으로 흔치 않았던 애굽 지역에 유사 이래 보지 못한 무수한 메뚜기 떼가 예고된 날에 정확히 내습한다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한 초자연적인 재앙의 결과임을 분명히 밝혀 준다.
====10:7
어느 때까지 - '얼마나 오랫동안'(KJV, How long)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박 재앙때까지만해도 바로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완강 하였던 바로의 신하들이(9 : 34)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줄 것을 바로에게 간청한 것은 그들 역시 자신들에게 임하는 재앙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그들의 외침은 곧 그들이 여호와를 신앙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베푸신 두려운 역사로 인해 애굽에 몰아닥친 심각한 위기 의식을 절실히 느꼈다는 의미이다(Lange).
함정 - 동물들을 잡기 위해 파거나, 설치해 놓은 '구덩이' 또는 '덫'을 뜻한다. 여기서는 모세를 통한 재앙으로 애굽이 그 구덩이에 빠져 멸망하게 되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10:8
갈 자는 누구 누구뇨 - 폭군 바로가 처음으로 재앙 전에 관심을 가지고 타협안을 제시하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의 이 질문은 바로가 그때까지 모세의 요구가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몇번에 걸친 모세와의 면담에서 출애굽 대상이 이스라엘 민족 전부라는 사실이 명확히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짐짓 이런기만적인 질문을 하는 것은 바로가 아예 처음부터 모세의 요구를 허락할 의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10:9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 당시 민족적 절기에는 남녀노소를 포함하는 전국민의 참석은 물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한 짐승의 희생도 반드시 수반되었다(Lange, Keil).
남녀 노소와 우양 -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대상은 직접 신체적인 학대를받고 있던 성인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스라엘 민족이면 누구나 할것 없이 여호와의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있었다. 여기서 특별히 '우양'이 언급된 것은 재산으로서의 가치와 더불어 희생 제물로서의 가치가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10:10
내가...어린 것들을 보내면...일반이니라 - 원문을 직역하면 '내가 너희와 너희 어린것들을 보내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여호와께서 너희를 도우시기를 바란다'이다.이 말은 조소 섞인 비아냥으로 다시 말해, 자기가 어린것들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한것처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는 것도 불가능 하다는 뜻이다. 따라서이 말은 모세와 아론에 대한 모욕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이적으로 자신을 증명하셨던절대자 여호와께 대한 모욕이기도 했다.
너희 경영이 악하니라(* , 라아 네게드 파니켐) - 직역하면 '악이 너희 얼굴 앞에 있다'이다. 여기서 '네게드'는 '정면', '시각'을 뜻하는 말로서앞날을 내다보며 계획을 꾸미는 것을 뜻한다. 한편 바로가 모세의 계획을 악하다고 한 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에게서 빼앗아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사실 악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면서도 그는 오히려 모세를 악하다고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가치관이 전도된 사람은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평가함으로 결코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
====10:11
남정(男丁)만 가서 - 9절의 '남녀 노소와 우양'에 대한 바로의 답변이다. 여기서'남정'(* , 게벨)이란 성인 남자를 가리키는 말로서 각 가정을 대표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 말은 가족 대표만 참석하라는 뜻이라기 보다 여자와 어린아이들 그리고 모든 재산은 볼모로 남겨 두라는 계책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절기 후 이스라엘 장정들은 처자식 때문에 다시 애굽으로 돌아올 것이고, 바로는 돌아온 그들을 다시 노예로 부릴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얄팍한 인간적인 계책으로 막으려는 바로의 행위는 결코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로운 행위가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철저히 멸망시키는 미련한 도모이다.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 - 문자적으로는 '한 사람이 그들을 바로의 면전에서 쫓아내니라'이다. 이런 행위는 이전에는 그들에게 가한 적이 없던 대단히 모욕적인 대우였다. 아마 이것은 모세와 아론의 출애굽 요구가 더욱 구체성을 띠자 그에대한 반작용으로 바로의 분노가 더욱 커지고 있음을 잘 보여 주는 것이었다.
=====10:12
첫째 재앙(나일 강이 피로 변한 재앙)의 시기가 아마 나일 강의 수위가 최고조에이른 10월 경이고, 열번째 재앙이 끝난 때가 니산월(Nisan, 3-4월)이라면 재앙의 전기간은 10월부터 익년 3, 4월경으로 볼 수 있다(Leon J. Wood). 그 기간 중 여덟번째재앙인 메뚜기 재앙은 밀과 나맥이 한창 싹이 나거나 익을무렵인 3월 초순경이나 말경에 임한 것 같다. 애굽 땅에 죽음의 그림자가 점차적으로 드리워 짐을 알 수 있다.
====10:13
동풍을 일으켜 - 메뚜기 떼들은 혼자힘으로는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없으나 계절풍등의 바람의 힘으로 먼곳까지 날아갈 수 있다. 한편 보통 애굽에 임하는 메뚜기 떼들은 남서지방(리비아, 에디오피아 등)으로부터 남풍 또는 서풍을 통해 날아왔다고 한다(Keil, Delitzsch). 그러나 이번의 경우 동풍의 영향이라고 하니 메뚜기 떼는 아라비아 사막 북부로부터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을 타고 애굽으로 날아왔던 것 같다. 이처럼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은 바람까지라도 조절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뤄가기도 하신다(신 10:14; 욥 41: 11; 시 24:1; 50:12).
====10:14
메뚜기가 애굽 온 땅에 이르러 - 보통 메뚜기 떼는 어느 특정한 지역만을 강타하나이 경우에는 애굽 전역을 휩쓸었다. 이 사실 역시 메뚜기 재앙이 하나님에 의한 초자연적 사건임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게 한다.
이런 메뚜기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러라 - 이것은 욜 2:2에서 메뚜기 재앙을묘사하여 '이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 후 세세에 없으리로다'라고 한 것과전혀 모순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절 사건은 애굽에 임한 재앙이고, 요엘서에 기록된 사건은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이기 때문이다. 즉 요엘서의 기록은 애굽에 내렸던 무서운 심판이 유다와 이스라얼에도 임할 것이라는 경고이다. 한편 메뚜기 재앙은그 무서운 성격으로 인해 마지막 심판을 예고해 주는 재앙으로 계 9:3-10에 나오는 사건에 대한 배경이 된다.
=====10:15
땅이 어둡게 되었고 - 이 말은 개역 성경의 번역과 같이 무수한 메뚜기 떼가 태양빛을 가릴 정도로 하늘로 날아다니는 것을 표현하는 말인지(Living Bilble), 공동 번역과 같이 메뚜기 떼가 지면을 새까맣게 덮은 상태를 표현하는 말인지(KJV, RSV,Modern Language Bible)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5절과 연결시켜 볼때 두 견해를 모두 취할 수 있다.
다 먹었으므로 - 9:32을 보면 우박 재앙 당시 애굽의 주요 농작물인 밀과 나맥은자라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 재앙에서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이 메뚜기 재앙으로 인해 이제 그것마저 수확할 수 없게 되었다.
======10:16
급히 불러서 - 비슷한 부름이 전에도 있었으나(8 : 25 ; 9 : 27), 이번 경우 처럼다급하고 절박하지는 아니했다. 결국 메뚜기 재앙이 이전의 어떤 재앙보다 더 심각한고통 이었음알 수 있다.
내가...득죄하였으니 - 9:27에 이어 이번에도 역시 바로는 마음속 깊이 회개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재앙이 지나가고 난 뒤에는 또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자신의 약속을 헌신짝 처럼 저버린 것(20절)을 보면, 이역시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발등에 떨어진 위기만을 모면해 보려 한 임기 응변적 제스츄어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멸망받을 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10:17
이번만 용서하고 - '이번만'이라는 표현은 바로의 심정이 매우 절박함을 말해 준다. 그러나 참된 회개에는 자신의 허물에 대한 진지한 고백과 더불어 그에 합당한삶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약 3 : 17, 18).
이 죽음 - 메뚜기 재앙을 가리킨다. 바로가 이 재앙을 '죽음'이라고 부른 것은 이재앙이 땅의 황폐는 물론, 계속 지속된다면 인간과 모든 생물의 죽음과 파멸을 초래할것이기 때문이었다.
======10:18,19
여호와께서 돌이켜 강렬한 서풍이 불게 하사 - 여기서 '서풍'(* ,루아흐 얌)이란 원뜻대로 번역하면 '바다 바람' 곧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해풍(海風)을가리킨다. 한편 본절에 대해 KJV는 '여호와께서 강렬한 서풍으로 방향을 바꾸셨다'(the Lord turned a mighty strong west wind)로 번역하였다. 이처럼 동풍이 일시에강렬한 서풍으르 바꾸어지는 것은 실로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 뿐만 아니라, 자연계의 순환까지 그의 지배 아래 두심을 보여준다.
홍해 - 이 말의 히브리어 '얌 수프'(* )는 문자적으로 '갈대 바다'를뜻한다<13:18>. 이 말이 한글 개역 성경, KJV, RSV, Living Bible 등에서는 '홍해'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얌 수프'의 위치를 현재의 수에즈 만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므로 TEV의 번역은 적절하다<13:18>.
하나도 남지 아니하니라 - 메뚜기의 갑작스런 출현과 더불어 갑작스런 완전한 몰사(沒死)는 이 기적의 연출자가 자연계를 홀로 지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강력히 시사한다.
=====10:20
강퍅케 하셨으므로 - <9:12>.
=====10:22
캄캄한 흑암(* , 호쉐크 아펠라) - '호쉐크'와 '아펠라'는 동의어로서 '어두움', '흑암'이란 뜻을 동시에 지닌다. 히브리어에서 동일한 두 단어 혹은동의어를 결합시키면 그 의미를 아주 강하게 하는 효과를 준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극히 어두운 상태를 뜻한다. 이런 측면에서 KJV, RSV, 공동 번역은 모두 '짙은 어두움'(thick darkness)으로 번역하였다.
삼일 동안 - 애굽 궁중에서는 매일 아침 솟아오르는 태양을 향하여 북을 치고 노래부르며 경배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32:1-6강해, 애굽의 종교>. 이러한 행위는 곧 태양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전능한 신(神)임을 고백하는 것인 동시에 하루의 생활을인도해 주실 것에 대한 기원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만일 제사를 소홀히 한다거나,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 날(구름으로 인해)이 발생할 경우 그들은 불안에 떨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태양신(Sun-god)은 그들 운명의 열쇠였다. 그러나 칠흑 같은 흑암이 3일동안 애굽 전역에 계속 됨으로써, 그들이 최고의 주신(主神)으로 숭상했던 태양신'라'(Ra)의 허구성이 여실히 파헤쳐졌으며, 반면에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 홀로 역사와 자연의 실질적인 주인이심이 확연히 드러났다.
======10:23
사람 사람이 서로 볼 수 없으며 - 흑암이 극심했음을 말해 주는 시적 표현이다.
자기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 처소로 번역된 히브리어 '모샤브'(* )는 '앉다', '거하다'를 뜻하는 '야샤브'(* )에서 유래한 말로 곧 '자리', '거하는 곳'을 뜻한다. 그리고 '일어서다'로 번역된 '쿰'(* )은 '일어서다', '서다'를 뜻한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때 이 구절의 뜻은 누워있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기 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움직이거나 활동하지도 못하는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좋다. 따라서 공동 번역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했으나'로번역하였다.
광명(* , 오르) - '조명','발광체', '해' 등의 뜻으로 고센 지역에는 어두움의 흔적조차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애굽의 흑암을 조소하듯이 찬란한 해가 온누리에 비취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헹스텐베르그(Hengstenberg)가 지적했듯이, 여기서 애굽의 흑암은 하나님의 진노를(계 16 : 10), 이스라엘의 광명은 그의 은총을 각기 상징한다(엡 5:8).
======10:24
머물러 두고(* , 야차그) - '두다', '공탁하다'는 뜻으로서, 돌아오겠다는 담보로 가축을 두고 갈 것을 의미한다. 양과 소를 귀중한 재산으로 여겼던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위의 말은 맨몸으로 떠나라는 의미와 같다. 결국 바로는 아무런 생계대책없이 떠날테면 떠나보라는 식의 얄팍한 계산에 따라 출애굽을 허락했던 것이다. 더욱이 그의 말은 여호와께 드릴 희생 제물마저 가져갈 수 없다는 의미로서 이스라엘의출애굽 목적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발언이었다.
=====10:25
왕이라도...주어야 하겠고 - 제물도 없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라는 바로의 모순된제안에, 모세는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 야훼께 드릴 제물과 번제물을 당신이 손수 마련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공동 번역)라고 반문함으로써, 바로의 간교한 술책을일축해 버렸던 것이다.
=====10:26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 - 출애굽 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처음부터 여호와를섬기는 데 있었다(3 : 12 ; 5 : 1 ; 7 : 16 ; 8 : 1 ; 9 : 1). 즉 하나님께 구속받은백성이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의 제사를 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출애굽 운동의 요점이었다. 가시적인 예배나 모든 삶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데로 귀결된다.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들, 즉 영적 이스라엘의 최종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음을 늘 명심하자(고전 10:31).
거기 - 출애굽에 대해 첫 약속이 주어졌던 시내 산을 가리킨다(3:12).
알지 못함이니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까지 하나님께로부터 제사 제도에 관한 지시(레 1-7장)를 받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짐승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할지 알지 못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여 하나님의 규례대로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 다른 이방 종교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기독교의 특징이다. 한편 나아가 본절의 내면적인 의미는 가축 한 마리도 애굽에 남겨둠이 없이 다 가져가야 되겠다는 뜻을 다시한번 완곡한 어조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10:29
왕의 말씀이 옳으니이다 - 이 말은 돌이킬 수 없는 바로의 완악함에 대해 하나님의전권 대사 모세가 그 권위로 바로에게 단호히 선포하는 결별 선언이다. 따라서 이는'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이제 끝났읍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다시는 왕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바로의 면전에서 계속 머무르면서 마지막 재앙에 대한 무서운 경고를 하게 된다(11 : 4). 반면 이것은 바로에게 주어진 회개에의 마지막 처절한 기회이기도 하다. 이로 볼 때 악인이멸망받는 것은 회개할 기회가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도 아니다. 오직 자기 죄에 대한 억척스런 고집-바로 그것 때문이다.
일련의 계속된 일곱 가지 재앙에도 불구하고 바로가 계속 이스라엘 출애굽의 약속을 이행치 않자 하나님께 이번에는 여덟번째 메뚜기 재앙(1-20절)과 아홉번째 흑암의 재앙(21-29절)을 내리시는 장면이다. 그리하여 이제 애굽의 모든 농작물을 완전히 황폐화시키는 동시에 그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하던 태양 신 우상의 허구성을 밝히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다. 이처럼 애굽에 임한 모든 재앙은 인간으로서는 대항할 수 없는 신적 재난이었다. 이제 애굽의 전 국토는 초토화되었으며 그들의 마음마저 황폐해져 갔다. 심지어 극심한 재난으로 인해 절대 군주국인 이 나라에서 왕에게 항의하는 사태까지 생겨 났다(7절). 아마 바로는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왠지 모를 두려움에 떨었고, 자기를 정죄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당신의 백성을 놓아 주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 이유인즉 비록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도 풍부한 노동력과 명예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 요구에 쉽게 응할 수 없어서였다(9-11,24절).
하나님은 얄팍한 바로의 이 같은 욕심을 꺽으시려 애굽 땅에 메뚜기를 보내셨다. 메뚜기의 내습은 농경 민족이었던 그들에게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다. 이 재앙 이후 애굽에 남은 것이라곤 사람뿐이었다(15절). 그럼에도 바로는 자기의 완강한 고집을 꺽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과 배치(背馳)되는 방향으로 치달았다(20절). 이는 아주 놀라운 사실이다. 인간이 한번 죄악의 세력에 물들게 되면 다시 회복한다는 것은 이처럼 어렵다. 그런데 바로가 끝까지 고집을 꺽지 않았던 것은 아직도 신뢰하는 그들의 신(神)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그들의 태양 신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가 기대한 마지막 희망마저도 흑암의 재앙을 통해 꺽으시고 말았다(21-23절). 즉 하나님은 애굽인들이 가장 뛰어난 신으로 생각하던 태양신 '라(Ra)'의 실체가 허구임을 흑암 재앙을 통해 밝히 드러내셨다<주석, 23절>. 그리하여 버틸 수 있는 근거는 모두 사라지고 허무와 절망만이 남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 없는 세상에는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 메뚜기 재앙 예고(10:1-6)
여덟번째 재앙과 아홉번째 재앙이 기록되어 있는 본장의 서론이자 도입부로, 메뚜기 재앙을 보내기에 앞서 모세가 바로와 그 신하들에게 메뚜기 재앙이 임할 것을 예고하는 부분이다(4-6절). 동시에 재앙의 참된 목적을 밝히는 부분이다(1-3절). 이러한 본문에 의거하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린 목적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택한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다(3절).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난 받는 당신의 백성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 요청에 응답하심으로써 당신이 인간의 역사와 무관히 계시지 않음을 알리셨다. 즉 그분은 이 세계 속에서 활동하시며 인간들의 모든 문제에 개입하고 계심을 보이셨다. 더욱이 인간과 함께 하시며, 그 마음에 들어오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구원을 베풀 것을 약속 하심으로써(3:9,10) 그들의 하나님이 되심을 알리셨다. 둘째, 악인의 전형인 애굽인을 징계하심으로써 죄인은 반드시 징벌받을 것임을 표명하기 위함이다(1,2,5,6절). 즉 사단이 세상을 지배하며, 사단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득세하는 것 같으나 결국 그들의 운명은 그들의 왕 사단과 함께 멸망받을 것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계 20:10,12).
*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우주의 주권자이자 통치자이시지(사 103:19) 고대 근동 국가들의 민족 수호신이 아니다. 그럼에도 2세기에 마르시온(Marcion) 같은 영지주의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구약의 신(神), 부족적인 신으로 제한하여 저급한 신으로 규명, 기독교의 전통으로부터 추방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히브리인만의 하나님으로 제한된 분이 아니시다. 단지 세상에 당신의 뜻을 알리기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계신 분이기 때문에 누구를 선택하든 그것은 당신의 의지이시지 인간이 관여할 성질의 아니다. 한편 히브리인에게 대한 견해는 여러 가지이나 일반적으로 롯의 가계를 포함한 아브라함의 후손 모두를 지칭한다. 이는 이스라엘인, 유대인이라는 말과 엄연히 구분된다. 이스라엘인은 야곱의 후손 12지파 연합체를 가리키며 유대인은 12지파 중 유다 지파의 후손을 지칭한 것이다<창 10:21-32 강해, 히브리인과 이스라엘인>. 이처럼 히브리인에게 점진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우리는 구속사의 한 단면을 엿보게 된다. 즉 온 인류의 씨 아담의 후손에서 히브리인으로, 히브리인에게 이스라엘인으로 이스라엘인에서 다시 유대인으로 좁혀지다가 마침내 유다 가문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다시 온 인류로 펼쳐가시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깨닫게 된다. 이로써 히브리인의 하나님 여호와가 우리와 관계 없는 편협한 신이라는 견해는 어불 성설(語不成說)임을 알 수 있다.
2. 궁핍한 바로의 타협안(10:7-11)
애굽에 내린 재앙과 피폐상을 보다 못한 애굽의 신하들이 바로에게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요구하자(7,8절) 이에 굴복한 바로가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의 남자들만 광야로 나가서 여호와께 제사드리는 것을 허락한든 타협안(9-11절)을 제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제 나일 강의 풍요와 강대한 국력을 자랑하던 애굽은 몇 차례의 재앙이 지난 후 폐허나 다름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바로의 권세에 붙어 사는 신하들의 행동에서도 감지할 수 있는바(7절), 그들조차 바로에게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내면적 구심력(求心力)이 핍진(乏盡)된 국가는 외부에서 조금만 충격을 가해도 무너지기 쉽다. 그럼에도 모세는 이 힘없는 세력에 대해 즉각적인 공세를 취하기 보다는 끝까지 하나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맡겼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계셨기에 서두르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참으로 강한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로서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앞세운다. 한편 상황의 절박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바로는 신하들의 요구에 못이겨 모세에게 타협안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는 비록 협상을 제의하긴 하나 아직도 자신의 야망에 집착해 있었다. 즉 그는 순간의 위기를 모면한 뒤에 가축과 어린이를 인질로 잡고 계속 이스라엘을 압박하겠다는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11절). 이처럼 죄에 물든 악인은 다 망해가는 극단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기보다는 순간적인 위기를 모면해 보려고 약은 수를 쓰려 한다. 뿐만 아니라 영원을 생각하지 못하고 순간만을 위해 살아간다. 그러기에 그들의 삶은 순간적일 수밖에 없다. 아뭏든 본문은 이제 구원과 해방을 갈구해야 할 쪽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다 망해 가는 애굽이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하여야 하겠다면서 바로에게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는 광야에 나가 3일간의 순례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다(9절;5:1-3). 그런데 모세가 그러한 제의를 할 당시만 해도 이스라엘에는 아직 제사 규례가 완전히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스라엘 제사 제도의 확립은 출애굽 이후 시내 산 언약에 기초하는데, 이전까지의 제사는 족장 중심의 불완전한 형태의 제사였다. 물론 하나님은 이런 제사마저도 제사의 근본 취지인 헌신과 감사의 의미가 내포된 것이면 기쁘게 받으셨다. 그러나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는 희생 제사는 당시 근동 지역에서 크게 성행하던 우상 숭배나 정령 숭배 등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대신 그것은 곧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류였으며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그 제사에는 반드시 동물을 잡아 '피를 흘리는' 희생이 요구되었다(히 9:22). 또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에서 드리려는 제사는 족장 시대의 불완전함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민족 공동체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가지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 뿐 아니라 애굽의 노예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헌신하고자 하는 취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인간적인 어떠한 욕심도 관여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는 기쁨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의 아이들과 여인들을 볼모로 잡아둠으로써 이러한 제사에 관여하려 한 바로의 의도를 일언 지하(一言之下)에 묵살한 것이다.
3. 메뚜기 재앙(10:12-20)
임기 응변식의 타협안을 제출하여 위기를 모면해 보려는 바로에게 여덟번째 재앙 곧 메뚜기 재앙이 임하는 장면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는 부분이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메뚜기 재앙에 대하여 경고하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가 돌이키지 않자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애굽 전역에 극심한 메뚜기 재앙을 내리셨다(12-15절). 그러자 이번에도 그 당장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바로는 모세에게 재앙을 거두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였다(16,17절).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 재앙을 거두어 주셨지만 여전히 강퍅한 바로의 태도(18-20절)는 필연적으로 또 다른 재앙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주는데 특히 하나님께서는 한번 작정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시고야 만다는 점과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교만이나 불순종에 비례하여 증감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이처럼 애굽에 내린 재앙은 서로 다른 재앙으로 이어지면서 점차적으로 그 강도(强度)가 더해져 감을 볼 수 있다. 사실 메뚜기 재앙은 이제까지의 모든 재앙을 합친 것과 동일한 피해를 가져다 줄 만큼의 위력이 있었다. 즉 이 재앙의 무서움은 우박으로인한 재앙으로부터 남아 있는 애굽의 모든 식물을 깨끗히 쓸어 버렸다는 데에서 짐작할 수 있다(14,15절). 그러기에 혹자는 이러한 메뚜기를 '하나님의 위대한 군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M.Henry). 거스리는 자에게는 이처럼멸망을 위한 심판을 집행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죄를 거듭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으며 가장 심각한 재난으로 그 심판이 다가올 것이다. 본문 가운데서도 우리가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 교만에 찬 마음을 하나님은 반드시 황폐하게 만드신다.
* 신앙 정체(停滯)의 이유.
우리는 본문에서 바로가 재앙을 통한 여러 번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끝내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에만 자신의 현 위치를 돌아보았고, 재앙이 끝난 후에는 오랫동안 지켜온 왕위라는 권위와 교만에 다시 빠져 버린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능력을 소유하지 못했던 근본 이유는 아마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얻으려 했던 어리석음 때문일 것이다. 흔히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소유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세상에 미련을 두면서도 자신의 신앙이 좀더 성장하기르 바란다. 하지만 그의 신앙이 좀체로 성장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걸어가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뒤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생각이나 이상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지만 자신의 발은 현실적인 이해 관계와 욕망의 수렁 속에 빠져 한 발자욱도 움직이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이런 자들을 향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 9:62)고 하셨다. 이처럼 인간적인 모든 명예와 재물을 향한 욕망과 이제까지의 세속적 습관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결단코 신앙이 성장하지 못한다. 현실의 안락(安樂)에서 박차고 일어나 앞을 향해 뒤어나가지 않고 달리는 것은 제자리 뛰기에 불과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권능과 이름을 오용해 자신의 현세적 만족과 심리적 안정을 도모하려는 극단적인 이기심의 또 다른 표현이라 아니할 수 없다.
4. 흑암 재앙과 바로의 타협안(10:21-29)
메뚜기 재앙을 언급한 전단락에 이어 본문에는 애굽 전역을 뒤덮은 흑암 재앙(21-23절)과 이로 말미암은 바로 왕의 타협안(24절)이 구체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여기서 모세는 그 타협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는데 그 이유인즉 바로 왕의 타협안은 아직까지도 자신의 교만과 이스라엘을 노예로 묶어 두려는 인간적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재앙의 위기에서만 벗어나려는 이기적인 심성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25,26절). 그러자 바로는 여전히 마음을 강퍅히 하여 오히려 모세를 내쫓아 버렸는데 이는 아직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한 처사이다(27-29절). 하지만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외면하고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 자의 패배는 이미 예약된 것이라 할 것이다. 사실 그의 무모한 고집에도 불구하고 이제 이 싸움의 대세는 모세에게 완전히 기울어졌다. 즉 이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수 있는 자격조차 의심될 정도로 정치.경제적 곤핍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기에 여기서는 이제까지의 고자세에서 이스라엘의 가축만이라도 남겨둘 경우 모든 것을 허락하겠다는 저자세로 돌변한 것이다(24절). 이처럼 아무것도 없었으나 하나님만을 의지한 모세의 신앙적 자세와 모든 것을 소유하였으나 하나님을 무시한 바로의 삶은 결국 인간들이 믿고 바라보아야 할 진실된 가치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보여 준다. 동시에 인생에 있어서 종국적인 승리는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진리를 웅변적으로 역설해 준다. 이처럼 만유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넉넉함을 알 때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포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마 6:33).
* 흑암 재앙의 의미.
하나님은 태양을 예배하던 애굽인들의 우상 숭배적 사고에 치명타를 가하며 또한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라는 당신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애굽 전역에 3일간의 흑암 재앙을 내리셨다(21-23절). 헌데 애굽에서는 약 50일간에 걸쳐 계절풍(서남풍)이 불어오는 기간이 있는 바 이때 그 밞과 함께 사막 지대의 모래가 휘몰아쳐 오면 가끔 앞을분간할 수 없을 정도까지 된다고 한다. 또한 나일 강을 중심하여 생활하기 때문에 안개로 인한 흑암 현상도 간혹 생긴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자연 현상들을 동원하여 3일간의 암흑은 조성하셨는지 아니면 일식을 통해 어두움을 조성하셨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어두움이 당신의 뜻을 계속 거역하는 애굽인들의 콧대를 꺾으시며 당신만을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보이기 위한 징계였다는 점이다. 한편 이 3일간의 재앙 중에서도 이스라엘 자손이 거주하던 고센 땅에는 이러한 피해가 전혀 없었다. 이 사실은 위의 흑암이 하나님의 재앙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23절). 이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공의와 사랑이라는 이중적 성품을 잘 반영해 준다. 즉 하나님은 동일한 분이시지만 악인에게는 어둠의 재앙으로, 의인에게는 빛의 은혜로 다가가신다. 사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전에는 어두움에 거하던 자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과 그 희생을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겨진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이상 어두움과 그 어두움이 제공하는 두려움 및 징벌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요 1:9,14). 그러니 이제 우리는 어두움이 아닌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여야 할 것이다(엡 5:8).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