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이드로 - 치더니( , 하야 로예) - 이는 분사형으로서 일회적인 의미가 아니라 습관적이고 지속적으로 가축들을 돌봤다는 의미이다. 즉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할 지도자가 되기에 앞서 약 40년간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로서 지속적인 훈련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요셉을 애굽 총리로 등용하기전, 그를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의 신분으로 가사(家事)일을 돌보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맥을 같이 한다.
광야( , 마드바르) - (양떼들을) '정렬시키다'란 뜻의 '다바르'에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광야' 혹은 '사막'보다 '목초지'라 옮기는 것이 더 좋다. 로젠뮬러(Rosenmuller)에 의하면 이 곳은 시내 반도에서 가장 높은 지대이나 매우 비옥한 골짜기들이 있어 목초지로서 안성마춤이라 한다.
인도하여( ,나하그) - 이 말은 이스라엘을 장차 애굽에서 건져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모세의 사명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한편, 이 말이 시 80:1 에서는 '요셉을 양또같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산 호렙 - 성경 기록에 의하면 호렙산은 종종 언약의 산으로서, 십계명을 부여받았던 시내산과 혼용되고 있다. 즉 성경은 두 산의 지리적 구별을 엄밀히 하고 있지 않다. 이런 견지에서 두 산의 관계에 대한 몇몇 견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산의 총칭은 호렙인데 특별히 정상 부분만을 일컬어 '시내'라 한다. (2) 한 산에 두 봉우리가 있어 하나는 호렙이고 다른 하나는 시내이다. (3) 두 산은 동일한 산으로서 두 가지 이름을 갖는다. 이처럼 각 견해를 종합해 보더라도 두 산의 관계를 엄밀히 구분하기란 어렵다. 한편 유대 전승에 의하면 오늘날 호렙(시내)산은 시내 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해발 2,291m의 '예벧 무사'(jebel Musa,모세의산)에 해당한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곳을 특별히 하나님의 산이라고 명명한 것은 혹 자의 주장처럼 이곳에 '이드르'의 신전이 있었기 때문(pulpit commentary)도 아니고, 그 이전부터 거룩한 곳으로서 그렇게 불려왔기 때문(Knobel)도 아니다. 그것은 출애굽 직전 모세가 이 산 정상에서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한 소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이고, 나아가 출애굽 직후에 하나님께서 이 산에 현현하사 언약의 증표로 율법을 수여했기 때문이다(Keil). 따라서 이 산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신 현현의 장소로 간주되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산으로 성별되어 영영히 기억되었던 것이다.
======3:2절
여호와의 사자( , 말라크 예호와) - 여기서 '말라크'는 '파견하다'란 의미의 어근에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이 말은 일반적으로 특정한 메시지를전달하기 위해 파송된 '특사'(왕하 5:10),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대하 36:15), '천사'(시 148:2)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소위 신현현(TheophanicAngel)으로서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성육신하시기 전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Calvin,Pulpit Commentary). 자세한 내용은 창 16:7 주석을 참조하라.
떨기 나무 - 학명은 '아카시아 닐로티카'곧 시내 광야에서 흔히 발견되는 일종의'가시덤불'(thron bush)을 가리킨다. 이 나무는 주위의 고상하고 당당한 나무들과는대조적으로 앙상하고 아주 볼품없이 생기 나무로서 곧 노예로 전락하여 곤핍하고 메마른 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의 현생활을 상징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나무에 거룩,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임재하신 것은 이스라엘 위에 머물러 있던 모든 고통의 멍에를 끊고 해방과 기쁨을 제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반영하는 계시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임재 사건은 후일 죄 중에 신음하던 인류를 구원하시기위해 이땅에 육화(Incarnation)하셨던 예수의 임마누엘 사건을 예표한다(마 1:21-23;요 1:14).
불꽃( , 벨라바트-에쉬) - '창끝'을 뜻하는 '레하바'에 '불'을의미하는 '에쉬'가 결합된 형태이다. 이는 모든 불의한 세력을 태워 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성을 상징한다(Kurtz,Keil, 사 10:17). 특히 이 불꽃이 떨기나무로부터'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과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임을 암시한다.
나타나시니라( ,라아) - 이 말은 '주목하다', '제시하다'(보이다)란 의미도 내포한다. 모세는 낙심 가운데서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었으나, 하나님께서는항상 그를 지켜보고 계셨으며, 이제 때가 차매 그에게 위대한 비젼을 계시하시기 위해초자연적 현상 가운데 모세의 시선을 '주목 시키시면서' 나타나신 것이다.
======3:3절
여호와의 사자(말라크 예호와) - 여기서 '말라크'는 '파견하다'란 의미의 어근에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이 말은 일반적으로 특정한 메시지를전달하기 위해 파송된 '특사'(왕하 5:10),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대하 36:15), '천사'(시 148:2)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소위 신현현(TheophanicAngel)으로서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성육신하시기 전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Calvin,Pulpit Commentary). 자세한 내용은 창 16:7 주석을 참조하라.
떨기 나무 - 학명은 '아카시아 닐로티카'곧 시내 광야에서 흔히 발견되는 일종의'가시덤불'(thron bush)을 가리킨다. 이 나무는 주위의 고상하고 당당한 나무들과는 대조적으로 앙상하고 아주 볼품없이 생기 나무로서 곧 노예로 전락하여 곤핍하고 메마른 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의 현생활을 상징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나무에 거룩,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임재하신 것은 이스라엘 위에 머물러 있던 모든 고통의 멍에를 끊고 해방과 기쁨을 제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반영하는 계시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임재 사건은 후일 죄 중에 신음하던 인류를 구원하시기위해 이땅에 육화(Incarnation)하셨던 예수의 임마누엘 사건을 예표한다(마1:21-23;요 1:14).
불꽃( , 벨라바트-에쉬) - '창끝'을 뜻하는 '레하바'에 '불'을의미하는 '에쉬'가 결합된 형태이다. 이는 모든 불의한 세력을 태워 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성을 상징한다(Kurtz,Keil, 사 10:17). 특히 이 불꽃이 떨기나무로부터'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과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임을 암시한다.
(김이곤 - 태양신[아몬-레]으로 신격화된 에집트 왕의권세 앞에서 발화, 소멸의 위기에 있는 대책없는 에집트 노예들인 눌림받는 이스라엘 민중의 고통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나타나시니라( ,라아) - 이 말은 '주목하다', '제시하다'(보이다)란 의미도 내포한다. 모세는 낙심 가운데서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었으나, 하나님께서는항상 그를 지켜보고 계셨으며, 이제 때가 차매 그에게 위대한 비젼을 계시하시기 위해초자연적 현상 가운데 모세의 시선을 '주목 시키시면서' 나타나신 것이다.
=====3:4절
여호와...하나님( ... , 예호와...엘로힘) - '자존자' 또는 '영원한 자'를 뜻하나 '예호와'(야웨)라는 이름과 '전능자'나 또는 '위엄을 가지신 자'를 뜻하는 '엘로힘'이 동시에 사용되었다. 이는 모세에게 계시된 신이 절대 유일하신 분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보려고( , 라아) - '면밀히 관찰하다', '깊은 주의를 기울이다'란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이 명사로 쓰이면 '맹금'(독수리)을 뜻하는데 이는 예리한 관찰력에서 유래한 듯하다. 한편 (하나님이)'보신지라'에 해당하는 본절의 히브리어도 이와 동일함에 유의하라.
불러 - '명하다', '초대하다', '선포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에 참여케 하시기 위해 일꾼을 불러 소명(召命)을 부여하심을 가리키는 말이다(삼상 3:6). 특히 이 말 속에는 일꾼을 택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일꾼으로 부름받은 자의 고귀한 특권이 암시되어 있다.
모세야 모세야 - 모세의 이름이 거듭 불려짐으로써 상황의 긴박성과 사명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삼상 3:10).
내가 여기 있나이다 - 초자연적 불꽃 가운데서 들리는 음성을 듣고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직감했을 것이다. 따라서 본절의 대답은 지극히 초라한 자신에 대한 고백과 겸양을 내포하고 있다 하겠다(비교, 창 3:10;삼상 3:10).
=====3:5절
가까이...말라 - 이 말은 죄악된 인간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격이 있음을 암시한다. 에덴 범죄 이전, 인간은 하나님과 대면하며 교제할 수 있었으나 범죄 이후 인간은 자력으로는 하나님께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는 열악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창 3:24).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간격을 좁히시기 위해 구약 시대에는 예표적 의식으로서 피흘림 있는 제사 제도를 제정하셨고 신약 시대에는 그 제사의 절정이요 완성으로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희생제물로 내어 주셨다(요일 4:10).
거룩한 땅( , 코데쉬-아다마) - '코테쉬'는 '성별된', '성결한'이란 뜻이고, '아다마'는 '붉다'란 뜻의 '아담'에서 유래한 말로 이는 팔레스틴 지경의 땅이 대체로 붉은 색을 띰을 반영한다. 한편 언약 백성이 정주했던 가나안 땅, 예루살렘, 혹은 하나님의 성전이 각각 성지, 성도(聖都), 성소 등으로 불리웠거니와(느 11:1;시 18:2;슥 2:12),본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바로 그곳은 어디나 거룩한 땅이라 하겠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여호수아에게도 반복된 명령으로(수 5:15) 여기서 신(Sandals)은 인간의 타락된 품성과 행위를 상징한다. 즉 죄악된 장소를 두루 다니고, 죄악된 행위를 하느라 더러워진 신에는 온갖 냄새나는 더러운 먼지나 때가 끼여 있는 법이다. 따라서 그러한 신을 신은 채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거룩한 땅을 밟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상의 의미를 좀더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1) 허물과 죄로 오염된 인간은 감히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에 설 수 없으며 그의 일꾼으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속 사람이 강건하게 무장되어야 한다는 뜻이다(엡 3:15) (2) 인간 스스로의 재능, 자존심 등을 과감히 버리고 겸손히 순복하는 자세롤 지니라는 뜻이다-고대에 노예는 신발을 신지 않았다(눅 15:22).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도 각오하라는 뜻이다(롬 8: 17) (4) 거룩하신 하나님께 마땅히 경외와 경배를 드려야 한다는 뜻이다. (5) 부패한인간은 중보자의 피가 없이는 감히 거룩한 하나님과 동거할 수 없다는 뜻이다.
======3:6절
네 조상의 하나님( , 아비크 엘히) - 여기서 '아브'는 '아버지'(창 2:24), '족장'(창 24:40), '선조'(왕하 14:3) 등 다양하게 사용되나 여기서는 선조를 뜻한다. 특히 본절에서는 대표적인 믿음의 조상들의 이름이 언급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이 추상적 관념속에 국한된 분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일찍이 선민을 대표하여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 되시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의 3대 족장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항상 이들과 맺은 언약에 근거하여 자신을 계시하셨고 또한 백성들을 보호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세 족장들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이 각각 연계된 것은 (1) 그들 각자가 단독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으며, 직접 후손과 기업에 대한 약속을 얻었기 때문이다. (2) 각자에게 거듭 허락하신 언약을 환기시킴과 동시에 그 언약의 계속성과 불변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창 15:1-21; 26:2-5; 35:1-12). 한편 이 부분이 제공하는 중요한 의미는 천지를 지으시고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민족과 약속하신 한 분 하나님에 의해서 모세가 부르심을 받고, 또한 이스라엘 벡성들이 출애굽 하게 되며, 그리고 그 백성을 통해 만방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상을 나타내는 데 있다.
두려워하여( , 야레) - '파하드'( ), '구르'( ) 등이 주로 공포심을 가리키는데 비하여 (신 1:17;대하 14:4), 이 말은 하나님의 존전에서 유한한 인간이 본능적으로 갖게 되는 외경심을 뜻하는 말로 많이 사용되었다(9:30;느 1:5;시 99:0.
얼굴을 가리우매 - 여기서 '가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타르'( )는 '숨기다', '감추다'는 뜻이다. 얼굴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앞에서 허물 많은 인간이 취하게 되는 지극히 생래적인 태도이다(Keil). 엘리야(왕상 19:13) 도, 심지어 하나님을 호위하는 천사들조차도(사6:2) 이러한 행동을 취했다.
=====3:7절
간역자 - 히브리인들을 일선에서 직접 감독하고 그들에게 육체적으로 고통을 직접 가했던 애굽 출신의 하급 지배자들을 가리킨다(1:11; 2:11).
우고 - '괴로움', '비탄', '슬픔' 등의 뜻으로서 이는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통의 정도가 극에 달한 상황을 대변해 주는 말이다.
알고( , 야다) - 본래 의미는 (직접 보아서) '확인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단순히 지식적, 추상적으로 인지하는 데서 그친다는 것이 아니라, 뼈져린 체험을 통해 속속들이 깨닫게 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당한 압제를 깊이 유념하사 도움의 손길을 베푸시고자 함을 가리킨다.
======3:8절
내가 내려와서 -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하에 친히 개입하심에 대한 신인동형동성론(Anthropomorphism)적 표현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때가 찬 경륜에 따라 역사에 깊이 개입하셔서 당신의 뜻하신 바대로 그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다. 후일 이말은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당신의 특별한 처소를 두고 계신다는 '세키나 사상'으로 연결 된다.
건져 내고 - '회복하다', '구출하다', '고치다', '빼앗다' 등의 의미로 하나님의 구원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를 한마디로 함축하는 말이다. 즉, 하나님은
=====3:9절
이제( , 아타) - '이제부터는', '곧장'이란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에 개입하셔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시고자 하는 적극적 의지를 담은 표현이다. 이렇듯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적 경륜에 따라 당신의 때에 개인적으로든 민족적으로든 한 때를 마감하고 새로운 때를 여시는 바, 그 경륜의 가장 두드러지는 구획선은 예수의 강림이다. 그러므로 히9:26에는 이러한 사실이 '이제', 곧 '그러나 이 제는'(but now)이란 말로 나타난다.
======3:10절
보내어 - '임명하다', '특별한 사명을 부여하여 멀리 파송하다'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파송하신다는 표현으로도 사용된 말이다(사 6:8;렘 7:25). 한편 여기서 모세가 보내어져야할 곳은 모세의 생명을 찾던 왕이자 고대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던 애굽의 바로 왕 앞이었다. 따라서 그는 온 세상을 대표하는 세속적 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권력자에게 가는 것은 일마개 목사인 모세 혼자만이 아니라, 그 목자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며 온 세상의 왕들을 폐하기도, 세우기도 하시는 권력과 힘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이다(대상29:12;시 22:28;단 2:21;롬 13:1).
=====3:11절
내가 누구관대 - 여기서 '...관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키'( )는 겸양과 자기 비하(卑下)의 뜻을 담고 있다. 40년 전 모세는 자신을 스스로 이스라엘의 구원자요 재판관으로 내세웠으나(2:14), 이제는 초라한 한 목자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무능감을 절실히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그는 미디안 이라는 학교에서 겸손의 덕을 배웠던 것이다(Keil). 한편 또한 이 말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바로에 대한 모세의 두려움과 의기소침을 반영한 탄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신의 일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철저히 자아를 부인하는 자를 들어 귀하게 쓰시는 역설적 방법을 많이 사용하신다(욥 5:11;고전 1:27)
가며( , 엘레크...웨키) - 여기서 '엘레크'는 '알라크'의 강의형 능동태로서 '내가 가야만 한다'(KJV: 'I should go')는 뜻이고, 접속사 '와우'( )와 함께 쓰인 '키'( )는 '게다가', '더군다나'의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사지(死地)로 가서 애굽 왕을 만나는 일만 해도 몸서리 쳐지는데 거기다 이스라엘 자손을 출애굽시키는 사명까지 감당해야 한다니 도대체 내게 무슨 능력이 있어 그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란 뜻이다.
=====3:12절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 문자적으로는 '내가 너와 함께 있는 한에는'이다. 출애굽은 단지 피지배 민족이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단순한 역사적 서건일 수는 없으며 또한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성취될 성질의것도 아니었다. 요컨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심으로써만 가능하다. 따라서 하나님은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고 지레 낙담에 빠진 모세에게 '임마누엘'의 약속을 해주신 것이다(수 1:9). 실로 이 약속이야말로 막강한 100만 대군을 얻는 것보다 더 확실한 보장으로서 그 어떤 세력에도 담대하며 능히 무찌를 수 있게 하는 힘이 된다(사 35:3;고저 1:27;히 12:12)
섬기리니( , 아바드) - (하나님께) '예배드리다'(말 3:14), '종살이하다'(렘 27:7), '봉사하다'(창 29:15)등 다양하게 사용된 말로서 신앙 생활 전반을 일컫는다. 진정 인간이 섬겨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곧 만군의 주이신(사 28:22) 하나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스라엘은 애굽 땅의 우상 숭배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32:1-18).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들의 해방을 주도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제 일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섬김 받으시기 위함이다.
증거( , 오트) - '신호', '표시'란 뜻이다. 당신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언약)이 역사상 구체적인 성취로 나타난 것은 당신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다.
======3:13절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로서 그 사람의 기질과 성품과 지위와 생애를 반영한다. 특별히 고대 세계에서 권력자들은 자기의 사신(使臣)을 타인에게 보낼 때 그 사신에게 자신의 권위를 위임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명호가 담긴 도장, 편지 내지는 그 사신에게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모세가 자신을 애굽에 파견하시는 절대자의 이름을 확인한 것 은 자연스런 일이다. 한편 신약 시대의 사도들도 복음 사역에 있어서 자신의 권위로서가 아니라 자신을 사신으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행하는 이적과 기사의 출처를 사람들에게 분명히 제시하였다(행 4:7-12). 향편 혹자(pulpit commentary)의 견해에 따르면, 다신교롤 신봉하는 애굽인들은 당시 개개의 신들에게 다양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따라서 애굽 우상들에 익숙했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도 물어볼 것이 븐명했기 때문에 모세가 자기를 보내는 분의 이름을 확인했다고 한다. 물론 이 견해도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으나 전자의 견해가 더욱 환영할 만하다.
======3:14절
나는 스스로 있는 자( , 예흐웨 아쉐르 예흐웨) - 여기서 '아쉐르'(who)는 관계 대명사로서 '나는 존재한다'(I am)는 뜻인 '예흐웨' 성호를 결합시켜 자존성(自存性)을 강조한다. 즉 시작과 끝이 없으신,언제나 존재하는 자존자(自存者)란 뜻으로 피조된 존재들과는 달리 능동적으로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계시는 분 (I am who I am)이심을 강조한 표현이다(계 1:4,8). 이는 절대 완전하고, 독립적이시며 우주 안의 모든 인과 법칙을 초월한, 모든 존재의 근거와 기반이 되시는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그대로 반영한 말이다. 더욱이 이 말 속에는 ,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변함없으시며 그 말씀하신 바를 온전히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이 말이 언약과의 관계에서 쓰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속주로서(6:6) 언약의 주체자가 되사 그 언약하신 바를 변개치 않으시며 영원히 성취해 가시는 분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3:15절
여호와( , 예호와) - '나는 스스로 있는 자'(14절)란 말과 같은 뜻을지닌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다. 즉 이 이름은 '존재하다'란 뜻의 히브리어 '하야'( )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말로서 하나님의 자존성과 영원불변성을 강조한 이름이다(14절). '여호와'의 히브리형 '예호와'는 원래 자음만으로 구성되었는데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4개의 자음 곧 'YHWH'가 된다. 따라서 발음하기에 곤란하나 통칭 '야웨'(야훼), '예호와' 등으로 불려져 왔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성호에 대한 경외심에서 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아도나이'( ,나의주님)라는 명칭으로 대신했다. 따라서 성경을 옮겨 기록하거나 낭독하는 일을 맡고있던 서기관들은 이 단어가 나오게 되면 '야웨' 대신 '아도나이'라 발음했다. 따라서결국 '여호와'(Yehowah)라는 명칭은 '야웨'의 히브리 자음에 '아도나이'의 모음이 합쳐져 구성되었다. 한편 우리말 '여호와'는 헬라어 및 라틴어를 거쳐 정착된 영어'Jehovah'의 음역이다.
나의 영원한 이름 - 하나님에게 가장 합당한 이름이자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속성과 본질을 지니신 당신의 영원 불변의 이름 이란 뜻이다. 실로 이름의 영원성은 그존재의 영원성을 강력히 시사한다.
표호(表號) - '표하다', '기억을 되살리다'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로서 곧 '기념물'이란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는 '표시가 되는 이름', 곧 그 이름만 들어도 그분의품성과, 이뤄 놓으신 놀라운 사건들과, 미래에 완성하실 원대한 계획까지 생각할 수 있을 그러한 기념비적 이름이란 뜻이다.
=====3:16절
장로( , 자켄) - '나이 먹다'란 뜻의 동사에서 유래한 말로서 문자적으로는 '노인'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한 가문의 어른으로서 추앙받을 만한 재덕을겸비한 자를 가리킨다(6:14,25). 체계적 행정 체제가 미비하였던 당시대에 이들은 백성의 대표자 역할을 폭넓게 감당하였다.
권고하여( , 파카드) - '방문하다'(KJV: 'visited'), '감시하다', '보살피다'(RSV:'observed), '판단하다' 등의 뜻이다. 요셉이 임종시에,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권고하실 것이라던 예언의 말과 같은 표현으로서 (창 50:24). 영감된 예언의 필연적 성취를 보여준다. 실로 하나님은 요셉의 말을기억하시고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보살피시기 위해 지금 이 땅에 방문하실 것을 모세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3:17절
고난( , 마아나) - '위협하다', '괴롭히다', '강탈하다'의 뜻을 지닌 동사 '아나'에서 유래한 말로서 곧 애굽의 압제를 집약한 말이다. Living Bible은 이를 '고역'(drudgery)과 '굴욕'(humiliation) 등 구체적으로 번역했다.
=====3:18절
들으리니( ,솨마) - '순종하다', '경청하다'란 뜻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요구에 순복하리라는 의미이다. 한편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유명한 신앙 지침인 '쉐마'(들으라) 부분도 동일한 말로 시작된다(신 6:4). 실로 애굽의 강력한 압제하에 신음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일개 초라한 망명객의 말에 순복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결과는 인간의 생각과 판이했다(4:31).
장로들과 함께 - 모세는 여호와의 권능에 찬 이름과 더불어 백성의 장로들과 함께 바로 앞에 서서 담대히 말해야 했다. 즉 그에게는 하늘과 땅의 많은 후원자들이 있었다(5:1).
히브리사람의 하나님( ,엘로헤 하이브리임) - 아브라함을 우상의 땅 갈대아 우르에서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으로' 불러내 그와 언약을 맺으신 그 하나님(창 12:1,7;14:13)을 특별히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 이 말이 사용된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또 한번의 '건너는'(히브리, 창 14:13) 역사(홍해 사건)를 통해 그들의 구원을 주도하시겠다는 의미이다.
우리에게 - 하나님께서 실제로는 모세에게만 나타나셨으나, 임하신 목적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모세가 그들의 대표격이었으므로 '우리'라는 복수형이 사용된 것이다.
희생( , 제바흐) - '짐승을 살육하다'란 뜻의 동사 '자바흐'에서 유래한 말로서 '제사', '헌물'(제물)을 의미한다. 어느 종교에서건 제사 의식은 종교 생활의 핵심 중 하나이다. 더욱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 제사 의식은 유일신 여호와 신앙으로 전민족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희생 제사 요청, 그것도 민족적 대이동을 수반해야 하는 이 요청이 강퍅한 애굽 왕에게 받아들여질리 만무했다. 따라서 결국 이 요청은 바로를 시험하기 위함이었을 뿐이다.
사흘 길 -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주지인 고센 지역으로부터 제사를 위해 하나님의 현현 장소인 시내산까지 이를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 동시에 애굽의 속박과 추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거리를 지칭한다.
(아란 콜 - 세가지 가능성이 있는 말이다.
1) 시내산이 고센으로부터 직선으로 삼일 길로 여겼다는 가능성 - 짐이 없는 성인이 고센과 가데스 사이에 직선도로가 있는 경우만 가능한 해석이다.
2) 모세가 계략을 써서 애굽을 빠져 나가려고 하는 가능성 - 도덕적인 문제를 야기시킨다.
3) 사흘길이라는 말이 불투명한 시간의 길이를 어림잡아 말하는데 사용하는 가능성 - "어제와 삼일 전에"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보통 "이전에"라는 의미가 된다(출 5:7).
여기에 나오는 표현은 동양적인 흥정의 복잡한 형태이다.)
======3:19절
아노니( , 야다) - '확신하다'로 번역됨이 더 낫다(KJV, 'be sure'). 시공(時空)을 초월하신 하나님은 출애굽 과정에서 겪게 될 우여곡절을 이미 알고 계셨다.
강한( , 하자크) - '정복하다'는 말에서 파생된 말로서 상대의 어떤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기필코 이겨낼수 있는 강력한 힘을 암시한다.
손( , 야드) -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손'은 주로 당신의 권능을 상징한다(7:4;15:9).
전에는( , 울로) - '심지어...할지라도...않다'(KJV:not even)로 번역될 수 도 있다. 참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절대 권력자로 자처한 바로 왕의 완악함을 잘 드러낸 표현이다.
허락지( , 나탄) - 이 말 속에는 '보내다'란 뜻도 포함하고 있어 문맥상 의미를 더 명확하게 해준다. 애굽의 경제와 사회는 노예에 의해 유지된다고 할 정도로 노예의 가치는 대단했다. 그들은 농사와 건축 등에서 무한정한 노동력을 쏟아내었으므로 바로에게는 굉장한 재산이었다. 그러한 노예들 중 상당수를 차지했던(약 60만명, 민 1:46) 히브리인들을 그 땅에서 내어보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의 손에 의하지 않고는 압제자 바로에게 있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3:20절
내가 내 손을 들어 - 하나님의 구체적인 개입을 시사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12절)과 더불어 그 약속을 반드시 실현 시키실 것을 이런 표현을 통해 확증하셨다.
이적( , 펠레) - '경이롭다'는 뜻인 '팔라'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의 놀라운 초자연적 권능을 강조하는 말이다. 반면에 '모페트'( , 욜 2:30), '오트'( , 민 14:11)등은 두드러진 '표징'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한편, 본문의 이적은 구체적으로 피 재앙(7:20), 개구리 재앙(8:6), 이 재앙(8:17),파리 재앙(8 :21), 악질 재앙(9:3), 독종 재앙(9:10), 우박 재앙(9:23),메뚜기 재앙(10:13), 암흑 재앙(10:22), 장자의 죽음(12:29)등 열 가지 재앙으로 나타났다.
친( , 나카) - '때리다', '벌주다'란 뜻이다. 이는 애굽에 임한 재앙은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심판)이란 측면을 강조한다.
보내리라( , 솰라흐) - '포기하다', '내던지다'는 의미로서 마지못해 혹은 엉겁결에 떠나 보낸다는 뜻이다. 실제로 바로는 출애굽 소식을 듣자 마자 곧장 추격에 나섬으로써 히브리인들에 대한 노예화정책을 끝내 떨치지 못했음을 나타내었다(14:5).
=====3:21절
은혜( , 헨) - '아랫 사람에게 호의로 몸을 굽히다', '긍휼히 여기다'란 의미의 동사 '하난'에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관련하여 많이 사용되었다(창 6:8;삼하 15:25;시 84:11). 본문에서 이 은혜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때에 노예처럼 쫓겨날 것이 아니라, 귀한 손님처럼 극진한 대접을 받은 후 온갖 재물을 지니고 나갈 것을 가리킨다. 이는 창 15:14에 나타난 예언의 성취이다.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이 쫓겨난 자가 아니라 마치 정복자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출애굽하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출애굽은 노예 상태로부터의 탈출인 동시에 가나안 복지 정복을 위한 첫 걸음이었다.
한편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는다.
(1) 하나님은 모든 역사를 당신의 주권아래 두시고 각 개인과 민족에게 합당한 보상과 억울함을 해결해 주시는 공평한 분이시다.
(2) 하나님은 애굽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위상(位相)을 새롭게 정립하심으로써 당신의 백성이 궁극적으로 영광과 승리를 얻게 될 것을 보이셨다.
(3) 더욱이 광야의 회막 건축에 필요한각종 준비물을 미리 준비시키신 하나님의 풍성하신 경륜을 깨달을 수 있다.(35장).
====3:22절
이웃 사람 - 고센 땅에서 히브리인과 함께 거주하던 애굽인들을 가리킨다.
자기 집에 우거하는 자 - Living Bible에서는 이를 '애굽인 주인의 아내'(her Egytian master's wife)로 옮겼는데 타당성이 있다. 당시 히브리인들 중에는 물질과 권세가 월등했던 애굽인의 집에서 하인 또는 그 아내로 우거했던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구하여 - '빌다'(KJV, 'borrow')보다는 '요구하다'(RSV,'ask')가 더 합당한 번역이다. 애굽은 오랜 기간 동안 이스라엘을 노예로 부려먹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당당히 요구하라 하신 것이다.
우리는 구약 자체의 비교를 1,2장에서 우리는 바야흐로 이스라엘 구원의 때가 도래하였음과 그 역사를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라는 일꾼을 준비하였음을 살펴보았다. 본장은 바로 그러한 역사를 위한 준비 단계로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초자연적으로 현현하시어(1-6절) 소명을 주시는 부분이다(7-15절). 그리고 그에게 이스라엘 구원을 위한 하나님 자신의 계획을 밝혀 주시고 있는 부분이다(16-22절).
한편 이러한 본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극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뜻은 모세처럼 준비된 자를 통해 펼쳐진다'는 점이다. 즉 하나님의 계획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일확 천금을 꿈꾸는 한량(閑良)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자신의 생을 사랑하며 자신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바로 파악하기 위해 처절히 기도하는 훈련된 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모세의 광야 생활은 결코 시간을 헛되이 소모하는 허망의 연속이나 좌절로 실의에 빠진 나날이 아니었다. 그는 사흘 길 건너편에 있는 동족의 탄식을 듣고 있었으며,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자기 백성에 대한 생각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때 그를 부르셨다. 모세의 이러한 경험을 하나님의 소명이 어떠한 자에게 임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첫째, 하나님은 성실히 일하는 자를 당신의 일꾼으로 부르신다. 목자로 일하다 소명을 받은 다윗(삼상 16:6-13), 아모스(암 1:1), 어부로 있다가 부름받은 제자들(마 4:18-22) 등은 그 대표적 실례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성실한 사람을 요구하심을 의미한다. 둘째,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불러 일을 맡기신다. 하나님의 능력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도움을 청하는 자에게 크게 역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획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전 9:27). 모세의 소명 사건은 구속사를 통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인 성도들이 오늘날 진정으로 행할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좋은 실례이다.
1. 하나님의 현현(3:1-6)
본장의 서론이자 위대한 출애굽 사건의 본격적인 도입부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사명자로 부르시기 위해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초자연적으로 임재하시는 극적 장면이다. 그중 1절은 모세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드로의 양을 치기 위해 호렙 산으로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2,3절은 모세가 그곳에서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아니하는 떨기나무를 발견하였음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4-6절은 그것을 자세히 보기 위하여 가까이 나아간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음을 보여 준다. 한편 이러한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에는 사전 통보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일깨워 준다. 선지자 이사야에게 나타내실 때에도(사 6:5), 요셉에게 나타나실 때에도(마 1:20), 내가 너에게로 갈테니 단단히 준비하고 있으라는 언질은 없었다. 호렙산에서의 하루, 평소와 다름없는 일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그처럼 모세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 즉 저 애굽에서 그렇게 갈구하는 백성들의 외침에 대답 한마디도 없던 그분이, 40년 동안 말없이 계시다가 갑자기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이처럼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분명 갑작스러운 현현임에 틀림없으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는 분명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로운 뜻 안에서 미리 계획된 대로 가장 적절한 시기(in due time)에 이루어진 임재란 점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광야에서 모세가 당신의 뜻에 합당하게 연단되기를 기다리셨고 때가 되매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역의 완성에 때 맞추어 십자가에 몸을 내어 맡겼듯, 하나님은 정확히 제 시간에 맞추어 역사에 개입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오신다. 현재의 내가 불러도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분은 내가 상상한 인간적 기준의 시간을 넘어서 당신의 정하신 정확한 시간에 전혀 예고없이 오신다. 내가 쓰러지고 낙망하여 인간적 야망을 모두 포기한 바로 그 시간, 하나님의 새로운 시각(時刻)에 맞추어 살 것을 요구하시며 오신다. 하나님은 영광 가운데 거룩하고, 웅장하고, 엄청난 권능을 몰고, 나의 대적들을 쳐부수러 오시기 보다는 초라하고, 볼 것 없는 한적한 들판의 떨기나무 가운데 오신다. 즉 부와 권력과 사치로 번쩍이며,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는 대도시 복판이 아니라 내가 간과하고 무시하는 삶의 일터에서 내 가슴을 밀치고 오신다. 그리곤 역사 속에서 실체로 활동하시고 택한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밝히 보여 주시며 우리를 향해 당신의 사역에 동참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신다. 이 역사적 부름에의 응답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지상의 의무로서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신.불신앙을 나누는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2.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소명(3:7-15)
본문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현현에 이은 모세의 소명 기사로서, 하나님의 임재가 (1) 애굽의 종살이로 말미암아 고난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이며(7-9절) (2) 그 임재의 목적은 바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킴으로써 당신의 구속 계획을 진전시켜 나가는데 있다는 사실을 밝히 드러내 주고 있다(10-12절). 그리고 이에 덧붙여 그 같은 일을 추진하는 하나님은 자존자(自存者)이시자 이스라엘 조상들의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13-15절). 이처럼 모세의 소명은 구약 전체의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로서 성경을 통해서 등장하는 일련의 소명 기사에 대한 서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예례미야를 거쳐 베드로에 이르기까지 전 소명 기사가 갖고 있는 본질적 특성은 모두 같다. 다시 말해서 소명은 인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중요한 방편이자 개인의 생애에 있어서도 중대한 분기점이 되는 것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는 가장 중요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본래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기적이다. 이 부름은 당사자의 생애 변화를 주며(에 4:1-3), 그 삶에 들어온 빛의 원리를 실천케 함으로써 새 역사를 이루게 한다<렘 1:4-10>. 즉 이 소명은 부름받은 자가 일상 생활에서 갖지 못했던 능력과 용기와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한결같이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롬 8:30). 당신의 크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의 결단과 책임에 호소하는 하나님의 부름스 이제 기독교 신앙의 특성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 주의 이름을 들고 나가는 자.
두려움과 조바심에 사로잡힌 자는 역사를 창조해 나가지 못한다. 우유 부단한 삶을 살아가는 자는 원대한 일을 추진할 수 없다. 생각은 간절하나 능력이 없는 사람은 결코 자기의 신념을 실천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자기 생을 놓고 기다려 온 수많은 나날들이 그대로 가라앉고 만다. 아마 모세 당시 바로의 엄청난 권세는 그와 같은 자의 사기를 저하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즉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두려움(11절)도 바로의 위세에 압도당함으로써 발생한 자신감의 결여에서 온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절대 권력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선망을 이끌어 내는 일을 자기의 힘과 지혜로 행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이것은 신앙적 무지이자 자신의 능력을 과대 평가하는 인간적 교만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죄이다. 하지만 사실 그보다도 더 큰 문제는 자신 속에만 안주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지도 못한 채 지레 사단의 권세에 무릎 꿇는 나약함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중대한 신앙적인 범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을 의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소명자에게 재삼 명령하신다. '나의 이름을 들고 가라 !'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 다윗은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다(삼상 17:45-49). 또한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간 제자들은 귀신들을 제어할 수 있었다(눅 10:17). 하나님의 이름을 들고 나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헌신함을 의미한다. 승리는 바로 거기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착용한 성도가 성령의 검과 방패로 무장하고(엡 6:11,17) 세상 어느 누구의 명함보다 확실한 하나님의 성호를 앞세우며 나아갈 때 승리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 하나님의 이름.
구약 성경 중 가장 뜻 깊은 구절 가운데 하나는 출애굽기 3장 14절로써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성호(聖號)를 친히岐 나타내신 구절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 곧 자존자(自存者)로 소개하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치 노자(老子)의 도덕경 가운데 "도(道)를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라는 말에서의 '도'처럼 자신의 개념화하지 않으셨다. 엄밀히 말해서 '야훼'(YHWH)는 하나님의 이름이라기 보다는 곧 영원한 자존자(自存者)로서의 하나님을 지칭할 때 부르는 기호(記號)일 뿐이다(호 12:5). 하나님, 곧 우리가 신(神), 궁극적 관심(P.Tillich), 초월자, 하나님이라고도 부르는 그분은 결코 그 지칭에 제한받으시지 않는다. 그러한 명칭은 인간이 표현할 길 없는 하나님의 어느 한 속성을 암시해 줄 뿐, 하나님을 규정하지 못한다. 따라서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는 하나님의 소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사고와 상상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며 인간 역사는 오직 당신의 뜻과 의지에 의해서만 움직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모세는 자존자요 추월자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들고 인간의 상상과 제조 기술로 만들어진 우상을 섬기는 애굽을 가서 이스라엘을 구출해야 했다.
3.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3:16-22)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임재하신 여호와께서 모세를 사명자로 부르신 목적(16,17절)을 밝히는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 때 일어나게 될 사건을 미리 모세에게 개괄적으로 예시하고 있는 부분이다(18-22절). 한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진입(8,17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선조들과 맺은 언약의 성취로서, 신약의 성도들의 최종적으로 다다르게 될 영원한 하늘 나라의 모형이다. 그러나 새로운 삶의 터전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할 만큼 기름진 곳이었기 하나 아직은 우상 숭배, 음란 등 온갖 죄악이 들끓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한고로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관영한 악의 세력(창 15:16)을 제하시려 애굽과 광야에서 강하게 훈련시킨 자들을 보내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가나안으로 옮기신 과정은 결코 무계획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삭.야곱과 맺은 언약을 따라 이스라엘을 권고하셨으며(16절) 그들이 신뢰할 수 있도록 이적을 나타내실 것과(19,20절) 애굽의 갖가지 재물을 지참하여 떠나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21,22절). 즉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은 오래 전부터 계획되었고 이 계획은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 속에 실현 될 것이라는 다짐이 주어진 것이다.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과 17년 동안의 가나안 정복 기간은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이 성취된 과정의 역사이다.
한편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진입해 정복 전쟁을 일으킨 것은 성전(聖戰)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죄악된 문화를 가증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징계 계획이 선민을 통해 현실화된 것을 뜻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같은 계획에 있어서 혈전을 벌일 것도 계획하셨다(신 20:10-18). 이것은 사단이 일시적으로 땅의 권세를 잡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는 오늘을 사는 성도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서 안식할날을 사모한다(히 4:11). 그러나 그전에 우리는 이세상에 살면서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며(히 12:4) 죄악된 문화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복음적 문화를 '건설하며 심는' 사역(렘 1:10)을 감당해야 한다.
*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예로부터 애굽 북부, 팔레스틴, 유프라테스, 티그리스강 유역은 '비옥한 초생달(fertile crescent) 지역으로 불리울 만큼 기름진 곳이었다. 팔레스틴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 사이에 위치해 농경.목축 생활 문화가 꽃을 피워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할 만 했다. 또한 이 가나안은 자연적으로 풍성한 결실의 땅일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이 장차 들어가게 될 영원한 천국의 모형으로, 천국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미 예비하신 곳이요,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가 있는 곳이며, 모든 믿는 자들의 궁극적 소망인 동시에 영원한 약속의 땅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그곳을 차지하고 있던 가나안 거민들의 정신 문화는 소돔과 고모라 못지 않은 타락 속에 병들어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좋은 환경이 반드시 인간 삶을 향상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쩌면 풍요로운 환경은 죄악의 온실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건전한 정신 문화는 그와 같은 죄악된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은 여건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향해 내려진 하나님의 가나안 정복 명령은 가나안의 병든 문화를 일소(一掃)하고 영적이고 신앙적인 새 문화를 창달해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으로 부여된 것이다. 이것은 죄악된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부여된 시대적 사명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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