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절
레위 족속 중 한 사람 - 모세의 아버지로서 레위 지파 고핫의 아들 '아드람'을 가리킨다(6:16,17,18).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레위 여자'는 모세의 어머니가 될 '요게벳'을 지칭한다(6:16,17,18,19,20).
가서 - '데려오다'는 뜻. 신부가 본가를 떠나 신랑 집으로 갈 때에는 신부측 식구나 친척이 동행하는 수도 있었으나, 신랑이 직접 가서 데려오는 것이 당시 고대 근동지방의 일반적 결혼 풍습임이 반영된 표현이다.
장가들더니(* , 와이카츠) - '취하다', '고르다'란 의미의 '라카흐'와 연결사 '와우'(* )가 결합한 형태이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대 남성 우위의 가부장적 사회의 일면을 보여준다. 한편 이 구절은 문맥의 흐름상 이미 결혼한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곧이어 출생할 모세에게는 훨씬 연배의 누이 미리암과 세살 정도 위인 아론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15:20).
====2:2절
잉태하여 - 마치 모세가 장자로 출생한 것 같은 인상을 주나 4절과 7:7에 따르면,이때 모세 위에는 누이 미리암과 아론이 있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본서에서 차지하는모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모세의 출생을 최초로 언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들을 낳아 - 모세의 출생 년도 B.C. 1526년 경이다. 왜냐하면 B.C. 1446년 출애굽때 모세의 나이가 80세였기 때문이다(7:7). 한편 모세 출생 당시의 바로는 애굽 18왕조의 첫 왕 아모세(B.C. 1584-1560)의 손자인 투트모세 1세(B.C.1539-1514)로서 그가 바로 히브리 신생아 학살의 주역이었다.
준수함(* , 토브) - 외형적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내적 순결함까지 내포한말이다. 출애굽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세의 탁월함이 어려서부터 드러남을 보여준다.
(이상근
1) 그 준수함이 그녀에게는 하나님의 승인의 증거요, 또 하나님이 그에 관해 특별한 계획을 가지신 표적으로 받아들였다(델리취)
2) 모세가 나기 전에 그의 아버지에게 계시된 바 아이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된다는 표적이었다(요세푸스)
3) 준수한 아기에 대한 모성의 본능적 강력한 애정으로 석달동안 숨겼을 것이다(카일).)
석달 - 생후 이 정도 기간이 지나면 아기의 울음 소리도 커지고 활동 범위도 넓어져서 한 귀퉁이에 몰래 숨겨 놓고 키우기에는 힘들게 된다.
숨겼더니(* ,차판) - (위를 덮음으로써) '숨기다'는 뜻이다. 즉 외부로부터의 침해를 자신의 몸으로 대신 당하고, 반면 그 속에 든 것을 보호한다는 의미이다.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무릎쓰고 모세를 숨긴 그 어머니의 사랑과 용기를 통해, 우리는 모성애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더욱이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노력을 가리켜 바로의명령보다 하나님을 더욱 신뢰한 믿음의 행위라고 격찬하였다(히 11:23).
======2:3절
갈(* , 고메) - 대롱을 통해 '흡수하다'는 뜻인 '가마'에서 유래한 말로서나일 강변에 흔한 수중 식물인 파피루스(Papyrus)를 가리킨다. 물을 다량 흡수하며 성장 속도가 매우 빠르다. 대략 3-4.5m의 높이에 이르고 종이나 배를 만드는데 많이 사용되었다.
상자(* , 테바) - 이 '테바'란 말은 노아가 건조한 '방주'를 지칭할 때도사용된 특수 고어(古語)이다(창 6:14). 따라서 이 말은 단순한 문자적 의미 외에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것은 '죄악과 죽음이 넘실대는 위기에서당신의 백성을 온전히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처소'란 뜻이라 하겠다. 결국 이'상자'는 자신의 몸을 바쳐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품을 암시하는 예표적도구라 할 수 있다.
역청(* ,헤마르) - 광물성 피치(pitch)로서 방수, 방부, 도로 포장 등의 용도로 쓰인다. 당시에는 팔레스틴으로부터 수입되었다한다. 사해 근처는 역청이 많은곳으로 유명하다(창 14:10). 여기서 나무 진과 더불어 이것을 칠한 것은 어떻게든 아들을 살려보려는 진한 모성애의 발로이다.
(김이곤,
에집트의 한 거룩한 관습에 의하면, 성전에 바치는 서약 제물은 성전 모양의 작은 복제물을 만들어 (모세를 담았던 것과 같은) 파피루스 상자에 실어서 떠내려 보내는 관습이 있었다. 이 거룩한 관습을 제사장 계열의 지파의 요게벳이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G. A. F. Knight))
======2:4절
그 누이 - 모세의 친누이로서 훗날 여선지자가 된 미리암을 가리킨다(15:20; 민26:59).
멀리(* , 메라호크) - '물러나다', (거리나 인척 관계를)'멀리하다'란 뜻의 동사 '라헤크'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갈 상자에 담긴 아기의 신변을 염려하는 누이의 애타는 심정을 상대적으로 심화시키는 표현이다.
====2:5절
바로의 딸 - 여기 이 공주는 애굽 18 왕조의 창설자인 아모세의 아들 아멘호텝 1세( B.C. 1560-1539)의 딸과 투트모세 1세(B.C. 1539- 1514) 사이에서 태어난 무남독녀 '핫셉슈트'(Hatchepsut)를 가리킨다.
하수(* , 예오르) - 애굽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시내', '수로' 등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나일 강을 가리킨다. 애굽의 유일한 젖줄이라 할만한 나일 강은 고대 애굽인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풍요와 건강을 제공하는 성역(聖域)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이 강 유역에는 여인들을 위한 특별 구역을 설치해 두고 일종의 종교 의식으로서,또는 다산(多産)과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목욕하도록 했다고 한다(Wilkinson,Strabo, Seetzen). 그러므로 나일강 유역에 애굽 왕실을 위한 목욕장이 특별히 마련되어 있었으리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아울러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도 이 모든 사실을 익히 알고 계획을 세워 신중히 행동하였을 것이다.
시녀들(* , 아마) - 여기서 복수로 쓰인 '시녀들'은 공주의 집안 일을 돌아보는 하녀들을, 그리그 뒤이어 단수로 쓰인 '시녀'(* , 나아라)는 공주의 측근에서 특별 시중을 드는 젊은 여자를 각각 가리킨다. 기록에 의하면 애굽의 고관 자녀들이 목욕하러 갈 때에는 최소한 서너 명의 하녀들을 대동하였다한다(Wlikinson).
거닐 - '이리 저리 배회하다'는 뜻이다(삼하 11:2). 시녀들은 공주가 목욕하는 동안 주위를 감시하고 경관을 즐길 겸하여 느긋한 마음으로 강변을 왔다 갔다 했을 것이다.
보고. - '주시하다'는 뜻이다. 모세를 담은 갈 상자는 매우 정성스럽게 소중히 만들어졌으므로 공주의 특별한 주목을 끌기에 충분 하였다.
=====2:6절
불쌍히 여겨(* , 하말) - '아끼다', '긍휼히 여기다'는 뜻이다. 여기서(하나님의) '긍휼'을 뜻하는 '헤믈라'(* , 사 63:9)가 유래했다. 실로 긍휼지심(矜恤之心) 이야말로 다른 모든 의식 준수에 선행해야 하는(마 9:13) 참된 사랑의원천이라 할 수 있다.
히브리...아이로다 -공주가 아이를 보는 순간 바로 히브리 유아라고 단정할 수있었던 것은 (1) 그 아이의 용모가 셈족 계통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으며 (2) 그 당시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것은 히브리 민족 뿐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에서는 (1)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당신께서 쓰실 일꾼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시 45:20;벧전 1:5) (2) 바로 왕의 엄명을 거역하면서까지 어린 생명에게인정을 베푸는 공주의 휴머니즘이 돋보인다.
====2:8절
가라 - '그렇게 하라', 혹은 '그것이 최선의 방책이 되겠구나'란 뜻이다. 영역본(Living Bible)은 '좋다, 그리하라'(Yes,do)로 옮겼다.
===2:9절
데려가다 - (딴 곳으로) '데리고 나가다'란 의미를 함축한다(KJV, RSV:takeaway). 당시에는 바로의 서슬 푸른 엄명이 내려져 있었으므로 궁중에서는 주워온 히브리 아이를 기를 수 없었을 것이다.
삯을 주리라 - 즉 '고용하다', '급료를 주다'는 뜻이다. 여기서 요게벳이 자기 아들을 기르는 댓가로 삯을 받았음은 주목할 만하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제노역에 시달린 나머지 자녀를 양육할 시간조차 얻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요게벳은 어엿이양육비까지 받아가면서 모세를 기를 수 있게 되었으니, 여기서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가 두드러진다.
=====2:10절
그 아이가 자라매...데려가니 - 히브리인들은 특별한 경우 7살까지 젖을 먹이는경우가 있다고 하나 대부분은 3살 정도에서 젖을 끊는다(창 21:8;심상 1:22,23,24;대하 31:16). 따라서 그 아이(모세)가 바로 공주에게 되돌려진 때는 3,4세 가량 되었던때로 볼 수 있다.
그의 아들이 되니라 - 친 자식처럼 여김을 받았음을 가리킨다. 이로 보건대 당시애굽에는 입양의 풍습이 있었던 것 같다. 스데반에 의하면 이후 모세는 바로 공주의아들로서 애굽 궁중의 모든 학술을 다 배웠다(행 7:22). 여기서 학술이란 철자법, 문법, 역사, 산술, 의학, 기하학, 천문학 등을 통칭한다.
모세( ,모쉐) - '끌어내다', '건저내다'란 뜻을 가진 동사 '마솨'에서 유래한 말이다. 본래 애굽어로 '모'(Mo)는 '물'이란 뜻이고, '우세스'(Uses)는 '건져냄을 받다'란 뜻이다(Delitzsch). 따라서 모세의 원래 이름이자 애굽식 이름인 '모두세스'는 '물에서 건져냄을 받은 자'란 뜻으로 애굽 공주가 아이를 물(나일강)에서 건져낸 것을 기념하여 붙여준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 애굽식 이름은 히브리인들의 발음을따라 히브리식 이름인 '모세'로 고쳐졌는데(Calvin), 그 뜻은 '건져내는 자'란 뜻이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우리는 이 이름의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달을수 있다. 즉 그 이름 속에는 하나님께서는 모세에서 부과하신 민족적 대사명이 한마디로 함축되어 있다. 곧 죽음의 강(나일강)에서 '건지움을 받은' 그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굴종과 예속의 땅 애굽에서 구출하여 역시 죽음의 강 (홍해)으로부터 '건져내야' 할 사명을 부여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영적으로 모든 죄악으로부터 건져냄을 받은 자 곧 중생한 자만이 다른 죄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진리를 암시한다.(마 15:4).
====2:11절
장성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가달'(* )은 '위대해지다', '높게 평가되다'는 뜻이다. 행 7:23에 의하면 그때의 모세 나이는 40세였다. 그 나이 정도면 애굽의 왕자로서 제반 국정(國政)에 참여할 위엄과 지략을 충분히 갖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높아진 모세가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향후 40년 간 미디안 망명 생활을 통해 그 무엇보다도 겸손과 순종의 훈련을 쌓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번은 - 원문상으로 이 말은 단지 막연한 세월의 흐름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반드시 어떤 '특정한 때' 내지는 숫자적으로 '한번'이라는 제약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모세는 장성한 이후 늘 동족의 고통스러운 노역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터라이 '한번'의 경우는 평소의 생각을 행동화한 때로 볼 수 있다.
나가서 - (어떤 목적을 지니고)'빠져 나가다'(14:11).'전진하다'는 뜻이다. 이는모세의 외출이 고통 당하는 동족의 근황을 살피기 위함이었음을 암시한다.(행 7:23).모세가 애굽의 모든 영예와 보화를 마다하고 동족의 고난에 동참한 것은 아브라함이여호와의 인도하심만을 믿고 본토와 친척을 떠났던 결단과 그 맥을 같이하는 바(창15:7), 이는 결코 도피나 실패가 아니라 용기와 동족애는 일찍이 유아기 때 어머니 요게벳으로부터 전해들은 여호와 신앙과 히브리 역사에 깊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되어진 것이 분명하다<7절>.
고역( , 시벧르탐) - '무거운 짐을 지다', '고통스럽게 짐을 나르다'란 의미의 동사 '사발'에서 유래했다. 이는 일반적 의미의 '노동'을 뜻하는 '마이사'(23:12)와는 구별되는 혹독한 노역을 나타낸다.
보더니(* , 라아) - '숙고하다', '주목하다'는 뜻으로 단순히 '바라보는뜻의 히브리어 '마르에'(* )와는 구별된다. 한편 이 말로부터 '선지자'를 뜻하는 명사 '로에'가 유래되었다. 모세는 학대받는 동족들의 비운을 강건너 불구경하듯하지 않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늘 지켜보아 왔음에 틀림없다.
어떤 애굽 사람 - '감독들'(1:11)인 듯하다. 애굽의 고고학적 자료들에 의하면,종종 긴 막대기를 팔에 낀 노역 감시관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는 당시의 혹독했던 고역 상황을 생생히 전해준다.
=====2:12절
좌우로 살펴...없음을 보고 - 혈기에 찬 기질과 더불어 본절은 모세가 침착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또한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사람만을 의식하여 주위를 살폈을뿐 공의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았다. 이때 모세의 시야는 좌우보다 위,곧 하늘에 머물렀어야 옳았다.
애굽 사람을 쳐 죽여 - 이것은 동족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은 갖추었으되, 그들을돕는 구체적 방법에 있어서는 단지 혈기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던 나약한 인간 모세의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예수께서 잡힐 당시 혈기에 찬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칼로 친사실을 상기시킨다(요 18:10).
모래에 감추니라 - 애굽의 지리적 특성으로 미루어, 시체를 몰래 파묻을 만한 두터운 모래더미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특히 히브리인들의 노역 장소인 고센 땅 동부 지역에는 모래가 많았다(Pulpit Commentary).
====2:13절
동포 - 형제, 남편, 애인, 친구, 동지, 이웃 등 매우 친밀한 관계를 나타낼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실로 좁은 자아의 울타리를 헐고 타인의 아픔을 곧 자신의것으로 받아들이기란 결코 쉽지 않다(롬 12:15). 특히 당시 모세의 특별한 지위를 고려하건대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여기 히브리 노예를 동족으로 인식하는 모세의 말 속에서 우리는 장래 출애굽의 영도자로 등장할 모세의 대아적 인품을 엿볼 수 있다.
=====2:14절
주재(* , 사르) - '주권을 소유하다', '통치하다'란 뜻의 동사 '쇠라르'에서유래한 말로 일국의 통치자나 고급 관료 등을 의미한다. 그러한 견지에서 후일 유다서기자가 언급한대로 궁극적 의미에서의 주재는 홀로 하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유 1:4). 한편 본절 전반부에 나타난 바 모세를 향한 그른 자(악한 자)의 악의에찬 비난은 개인적 울분에 사로잡힌 나머지 모세의 애정어린 설복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살인자라는 약점을 이용하여 모세를 곤경에 빠뜨릴 의향마저 드러내었다. 이것은 이후에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될 자로서 그가 가장 우려했던 한가지 요인이 되었다. 하여튼 동족에 대해서 인간적 접근을 시도했던 모세의 방법은 철저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따라서 그는 이사건 후 수많은 연단 과정을 겪으면서 동족에 대한 구원은 인간적인 방법에 의해서가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공의로우신 방법에 의해서라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배울수 있었다(시 66:3;행 4:33).
법관(* , 쇼페트) - '재판하다', '심판하다'의 뜻인 동사 '솨파트'의 분사형이다. 이스라엘에 재판 제도가 정비되어 전문화된 재판관이 선임된 때는 남왕국 유다왕 여호사밧 치세 당시( B.C. 872-848)였으며, 그 이전에는 족장, 사사, 혹은 왕 등이 재판 사무를 주관했다.
삼았느냐 - '지명하다'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꾼을 지명하여 부른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 말이다(사 43:1).
두려워하여(* , 야레) - 여기서는 사역 동사로 쓰여 간담이 뚝 떨어질 정도로 '깜짝 놀라다'는 뜻이다. 자신이 어제 살해한 애굽인을 감쪽같이 숨겨두었다고 생각했던 모세로서는 동족의 이 폭로성 말에 당혹한 나머지 급거 도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행 7:29). 이렇듯 하나님의 일이란 단순한 의협심이나 자력적 혈기 등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2:15절
바로가 ...모세를 죽이고자 - 전제 군주 제도하의 애굽에 있어서 왕이나 그 가족은 절대 권력을 행사했었다. 따라서 비록 양자이긴 하나 애굽의 왕자로서의 신분을 가진 모세가 사람 하나를 죽인 것은 사실 그 자체로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애굽인 살해 사건이 모세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당시 애굽 궁중의 정치 세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모세의 살인 사건 당시 애굽의 바로는 투트모세3세(Thutmose III, B. C. 1504-1448)였는데, 그는 부친 투트모세2세와 궁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리고 당시 투트모세2세의 왕비인 핫셉슈트(Hatshepsut)는 아들을 낳지 못하자 모세를 강에서 주워 자신의 양자로 입양 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때 투트모세2세가 일찍 죽자 모세를 입양시킨 투트모세1세의 무남독녀 핫셉슈트가 애굽의 실권을 장악했고 아울러 모세의 지위도 격상되었다.그러자 핫셉슈트에 눌려 섭정기에 있었던 야심에 찬 투트모세3세는 자신의 확고한 왕권 구축을 위해서 최대의 정적(政敵) 모세를 제거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 모세의 애굽인 살해 사건이 들리자 이것을 민족적 감정으로 비화시켜정치 쟁점화함으로써 모세를 제거코자 했고, 이에 모세는 어쩔 수 없이 도망치기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Jack Finegan).
찾은지라 - 원래 (기도로)'간절히 탄원하다'는 뜻이다. 이는 바로가 모세를 찾기에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미디안 땅 - 본래 미디안 사람들은 목축을 위주로 하는 유랑민으로서 여러 곳에걸쳐 거주지를 이동하면서 사는 족속이다. 그러나 일부는 정착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그 주요 정착지는 엘란(Elan) 만(灣) 동부지역, 곧 아카바 만 지역이다. 따라서 대체로 미디안 땅이라 함은 아카바 만 지역을 의미한다. 그러나 때로는 모압 경계선 북부(민 22:4,7), 혹은 시내 반도 일부에까지 확장되기도 했다. 그런데 시내 반도 부근에거주하는 미디안 족속들은 보다 셈족속의 전통과 풍습 및 종교에 영향을 받은 족속이다(Lange).
앉았더라 - '거주하다'는 의미도 내포하는데, 본절에서 이렇게 번역되어도 무방하다. 물이 귀한 지역에서 동리는 자연히 우물이나 샘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마련이었다.따라서 모세는 황망히 쫓겨 다니다 어느날 우물 근처에 이르러 거주를 삼은 듯하다.
=====2:16절
제사장(* , 코헨) - 이 말은 살렘 왕 멜기세덱(창 14:18), 애굽의 제사장(창 47:22), 삯군 제사장 미가(삿 18:4), 이스라엘 국가내의 공인된 제사장들(삼하15:27)에게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즉 '제사장'이란 어떤 종교를 불문하고 신에게 제사를 집례하는 사제(司祭)를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곳에 등장하는 미디안 제사장도유일신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라고 보기는 힘들다. 단지 그는 당시 고대 근동 지역에권능자로 알려진 셈족의 하나님 '엘'(El)을 숭배했던 자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영향하에 있었기에 그는 훗날 이스라엘의 출애굽 기사를 들은 후 여호와 신앙으로 쉽게 개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미디안 제사장은 미구에 모세의 장인이 된 '르우엘'<18절>이었다.
=====2:17절
쫓는지라 - '괴롭히다', '몰아내다'는 뜻이다. 사막의 거친 젊은 목동들이 우물가에서 차례를 기다리기는 커녕, 먼저 길어둔 것 마저 빼앗아 가려고 하는 상황을 짐작하기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더구나 19절로 미루어 목자들은 르우엘 딸들에게 음흉한 수작을 걸어오기까기 했던 것 같다.
일어나( , 쿰) -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다', '도와주다'는 뜻이다. 홀홀단신 그것도 지친 몸으로 여러 상대를 향해 과감히 들고 일어난 것으로 미루어 모세는(1) 약자의 핍박을 그냥 두고 지나치지 못하는 의로운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2) 애굽궁중에서 무예를 익힌 그의 용력 또한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2:18절
르우엘 - '하나님의 친구' 혹은 '전능자의 친구'란 뜻의 이름이다. 여기서 '엘'은유일신 여호와를 지칭하는 말이라기 보다 당시 고대 근동 지역에 전능한 신으로 여겨져 왔던 셈족의 하나님 이름이다. 따라서 '르우엘'을 유일신 여호와 신앙자라 보기는힘들고, 단지 셈족속의 일반적인 전능자 하나님을 단일신(單一神)으로 믿었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그는 '이드로'(3:1;18:1) 또는 '호밥'(민 10:9;삿 4:11)이라고불리워졌다. 그것은 아마 '르우엘'이 그의 본명이었으며, '이드로'는 그가 제사장이된 후에 얻은 공식 존호(尊號)인 듯하다. 그리고 '호밥'이란 이름은 모세의 장인이 아닌 처남의 이름이다. 이는 장인과 처남을 뜻하는 히브리어(* , 호텐)가 동일하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다<민 10:29>.
======2:19절
한 애굽 사람 - 모세는 애굽 왕실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고 성장했으므로 그 용모나 기품에서 전형적인 애굽인의 체취를 풍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모세는 애굽 귀족의 옷을 입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르우엘의 딸들이 모세를 애굽 사람으로 판단한것은 자연스럽다.
건져내고...물을 길어...먹었나이다 - 르우엘의 딸들은 모세의 각별한 친절을 매우 소상히 묘사했다. 이 말을 들은 르우엘은 당연히 최상의 예우로 그 은혜를 갚고자했을 것이다.
====2:20절
버리고(* , 아자브) - 쓸모없는 물건 혹은 가증스러운 것을 '내버린다' 또는 '배반한다', '도망하다'는 의미로 자주 쓰인 말이다(창 39:12;사 55:7). 이는 자신들의 안전만을 위해 황급히 피신해 옴으로써 은혜 갚기를 가벼이 여긴 딸들에 대한 호된 책망과 아울러 은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강조해 주는 표현이다.
대접하라(* , 아칼) - '먹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이다. 귀한 손님에게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고대 근동 지역의 오래된 풍습이었다(창 18:5). 여기서 모세와 르우엘 간에 주고 받은 선행의 자취는 오늘날 모든 성도들에게 귀감이 되며(마 7:12;롬 12:13), 아울러 그것은 전혀 보상을 기대하지 않은 구제임에도 불구하고필경 되돌려 받게되는 축하의 전형을 보여준다(전 11:1).
=====2:21절
기뻐하매 - '족하게 여기다', '승낙하다'란 의미이다. 애굽 왕궁에서 도피한 이후 모세는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던 터라 르우엘의환대에 대한 그의 태도는 사뭇 반가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르우엘의 집안에 머물면서 마치 지난날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고용된 일꾼으로 있었던 때와 마찬가지의생활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1) 르우엘은 딸을 구해준 믿음직스러운 모세에게 먼저혼인을 청했으리라 짐작된다. (2) 그러자 모세는 자신의 현재 처지를 고려하여 별다른심사숙고 없이 곧장 그 제안을 승락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일생에 걸쳐 가장 중요한 대사 중의 하나인 혼인을 그토록 쉽사리 결정한 것은 다소 무모하다는 인상을 준다. 아마도 모세는 고달픈 방랑 생활에 시달린 나머지 현실에 안주하고픈 일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 이방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인 이 사건은 단순히폐쇄적인 히브리주의에서 개방적이고 포괄적인 여호와 신앙주의로의 변화를 보여준다.일찍이 요셉도 애굽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인 적이 있었다(창 41:45). 이것은구약 시대로부터 여호와 신앙이 이방인들에게도 활짝 열려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십보라 - '새'라는 뜻의 이름이다. 그녀는 르우엘의 일곱딸 중 맏딸로 추정되며모세의 첫 아내가 되어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낳았다(22절;18:3). 할례 사건으로 남편과 심각한 긴장 상태에 놓이기도 했으며(4:24,25,26), 그 후 두아들을 데리고 아버지 르우엘에게로 돌아갈 정도로(18:2,3,4) 성격이 강한 여성이었던 것 같다.
=====2:22절
게르솜(* , 게레숌) - '이방인', '도피처'란 뜻의 '게르'와 어원이 잘 알려지지 않은 '숌'이 결합한 형태이다. 혹자(Kalish)에 따르면 이 '숌'은 지시대명사로서 '그곳'을 뜻하는 말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칼리쉬에 따르면, '게르솜'은 '도피했던 그곳에서 이방인이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리고 모세는 첫 아들 '게르솜'이후 그곳에서 차자 '엘리에셀'도 얻게된다(18:4;행 7:29). 한편 게르솜은 바벨론 포로 때까지 단 자손을 위한 제사장으로서 우상을 섬겼던 요나단 집안의 직계 조상이 되었다(삿 18:30).
객(* , 게르) - (손님으로서) '거주하다', (낯선 장소에서) '움츠려들다'란 의미의 동사 '구르'에서 유래하였다. 바로의 추적을 피해 가까스로 피난처에 정주하게 되었지만, 한 때 지냈던 부귀 권세 및 민족을 위한 포부 등에 견주어 볼 때 작금에 처한모세의 심경은 정처없고 고적한 나그네의 심경,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2:23절
여러 해 후에 - 이러한 표현은 정확한 시간 관념이 희박했던 고대인들의 관습적표현으로서 '매우 오랜 기간이 경과한 후'라고 번역됨이 더 타당하다. 모세가 애굽인을 살해하고 도피하던 당시의 나이가 40세였고(행 7:23-29). 모세가 바로 앞에 나아갔을 때가 80세였므로(7:7)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약40년간의 세월을 보낸 것이 된다.한 인생의 경로에서 40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지 않다. 더욱이 당시 모세가 삶의 지향점을 상실한 무료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40년 기간은 하나님의 연단기간이었다. 즉 장차 선민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로서 육체적으로는 광야 생활 및 지리에 익숙토록 하고, 영적으로는 순종과 겸손 및 자아를 철저히 깨닫도록 한 하나님의학교였다.
애굽 왕은 죽었고 - 여기서 '애굽 왕'은 모세의 생명을 끈질기게 노리던 투트모세3세(B.C. 1504-1448)이다<2:15>. 모세를 양자로 입양시킨 핫셉슈트는 모세의 도피 사건 이후 약 4년 후에 죽었고 애굽의 실권은 투트모세3세에게 넘어갔다. 그는 약 32년간 애굽을 통치한 강력한 왕으로서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Breasted, J.H.).마침내 그도 약 B.C.1448년경 죽었고, 이어 모세는 소명을 받고 B.C.1447년경 애굽으로 귀환하였다. 따라서 출애굽을 놓고 모세가 대결해야 했던 당시 바로는 부왕 투트모세3세를이어 왕위에 오른 아멘호텝2세(Amenhotep II, B.C. 1448-1424)였다. 그 역시 부왕 못지 않은 강력한 통치자였다(J. Finegan).
부르짖으니(* , 자아크) - '소집하다'는 의미도 있으나(삿 4:10) 여기서는막다른 상황에 부딪쳐 외치는 절규에 가까운 외침 소리를 일컫는다. 긍휼이 풍성하신하나님은 고통과 탄식 가운데서 도움을 호소한 당신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다(삿 3:8;6:7,8,;삼상 7:8,9).
상달한지라(* , 알라) - 마치 향이나 연기가 위로 피어오르듯 백성들의 부르짖음이 기도가 되어 위로 올라가 하나님께 닿았다는 뜻이다(계 5:8).
======2:24절
들으시고(* , 솨마) - '주의 깊게 경청하다'란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자세와 관련하여 '순종하다', '복종하다'등의 뜻으로도 사용된다(사 1:19).결국 이 말은 단순히 듣는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고 그 들은 바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실행 여부까지를 가지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깊은 경각심을 불러 일으킴은 물론 벅찬 생의의욕을 지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창 16:13;마 10:30).
언약(* , 베리트) - '자르다', '선택하다'의 뜻인 '바라'에서 유래하였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쌍방간에 언약을 체결할 때에 고기를 쪼개어 그 사이로 지나게 함으로써 언약 파기자들에게는 죽음의 징벌이 내려질 것이라 경고했다. 성경에도이와 흡사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이는 체결된 언약이 필수적으로 준수 되어야함을 시사하는 엄숙한 의식이다(창 15:17;렘 34:19). 한편 본문에 언급된 '언약'의 내용은 이미 650여년전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었고(창 15:13,14,15,16), 이삭과 야곱에게 재 확인 되고 비준된 약속의 땅 가나안에의 복귀 언약이다.
기억하사(* , 자카르) - 과거에 잃어버렸던 사실을 다시금 회상해낸다는 뜻이 아니라, 늘 염두에 두고 있었던 일을 마침내 실행에 옮긴다는 의미이다.
=====2:25절
권념하셨더라(* ... , 야다...라아) - '라아'는 '주목하다'란 뜻이고'야다'는 '알다', '돌아보다' 등의 뜻이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이 말은 '자세히 살피시고 돌아보아 주셨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비록 침묵속에 계셨으나 이스라엘의 모든 한숨을 눈물과 상처를 일일이 기억하셨으며 곧 그들을 구원하실 계획을 세워놓고 계셨음을 뜻한다. 결국 이 같은 표현은 이제 하나님이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당신의 뜻을 실현하실 때가 임박하셨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애굽으로 이주한 이스라엘 백성의 번성과 이를 두려워 한 바로 왕의 이스라엘에 대한 억압 정책을 서술한 전장에 이어 본장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스라엘 구원의 대업을 위해 특별히 선택된 모세의 생애를 기술하고 있다. 즉 본장은 향후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모세의 탄생과 성장 과정(1-10절), 그리고 그의 자기 발견 과정(11-15절) 및 미디안 광야에서의 도피 생활(16-25절) 등에 대하여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모세는 바로 왕의 이스라엘 남아(男兒)학살 정책이 한참 진행되고 있던 불운한 때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이스라엘 학대의 본거지인 애굽 궁정에서 공주의 양자로 그것도 친어머니를 유모로 하여 자라나게 되었으니(7-10절)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위한 하나님의 오묘하신 계획과 섭리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다.
한편 들판의 돌들로도 아브함의 자녀를 만들 수 있듯이(마 3:9),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한다면 어느 때에라도 상관치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실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그 대신 구원의 섭리를 펼칠 적절한 시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구원을 베푸신다. 즉 당신의 택한 자녀들이 애굽에서처럼 눈물 어린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 즉시 권능의 힘으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무르익어 고난당하는 자가 이 역사(歷史)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갈구할 때에만 비로소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다.
아뭏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로운 자세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할 전환기에 이 질곡의 땅 애굽으로 던져졌다. 구약은 바로 이러한 모세를 정점으로 펼쳐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본문은 모세의 영웅적 일대기를 그리려는 위인전 형식의 글이 아니다. 표면적으로 모세를 주인공으로 삼긴 하였으나 그 이면엔 모세를 통해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구원의 섭리가 강조되어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대리자로 보냄을 받았을 뿐이다.
1. 모세의 출생과 성장(2:1-10)
모세의 탄생(1,2절) 및 그가 더 이상 집에서 양육되지 못하고 나일 강에 버려진 과
정(3,4절) 그리고 애굽 공주에게 발견되어(5,6절) 그녀의 아들로 입양되기까지의 과정(7-10절)을 그리고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본문은 애굽의 가혹한 식민지 정책하에서 처참하게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과 구원을 위한 위대한 서곡으로, 애굽의 이스라엘에 대한 노예화 정책이 극대화되어 있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동시에 이 사건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현실의 모든 여건을 변화시킬 능력을 가지고 계실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임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롬 8:28). 이처럼 암울(暗鬱)하고, 바람 앞의 촛불처럼 가물거리는 희망 중에서도 선민을 향한 구원의 여명은 밝아 왔다. 가장 비천한 말구유에서 당신의 생애를 시작하신 그리스도가 그러하듯, 생명을 강물에 표류하는 갈대 상자에 맡긴 모세의 가련한 처지(3절)에서 이스라엘 구원에의 희망은 도래했다.
어찌 보면 모세의 이러한 출생 및 성장 과정은 여타 영웅들의 일대기와 유사하다. 그러나 영웅들의 일대기가 대개 영웅들의 탁월함으로 고양하기 위해 기술된 것인 반면, 본문은 개인의 일생이나 성공이 그 자신의 재주와 역량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로 이루어짐을 밝히기 위해 기술된 점이 다르다. 따라서 우리는 모세의 영웅적 삶보다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시선을 고정시켜 그분의 구원 역사를 진심으로 찬양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역사에 우리도 직접 함께 동참하는 신앙의 용사가 되어야 한다.
* 고대 근동 서사시와 모세 이야기.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종교 사학파의 주된 관심은 고대 세계의 종교와 문학, 그 역사적 환경이 이스라엘 종교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당시 고대 근동의 세계관이 이스라엘에게 미치는 영향이 대단히 큰 것으로 판단하였다. 창조 기사와 바벧론 신화(Gilgamesh Epic), 잠언과 애굽의 아멘 엠오펠(Amen-em-opet) 지혜 문학 등은 그들이 비교하기를 즐겨했던 대상이었다. 그들은 또한 모세 출생기와 메소포타미아의 사르곤(Sargon) 대왕의 출생기를 자주 연결시켰다. 사르곤 대왕의 출생기는 "수녀인 어머니가 나를 배서 몰래 낳았다 / 역청 칠한 갈대 상자에 나를 담고 / 강에 던졌으나 물이 덮지 않았다 / 물에 뜬 나를 주인 악키가 데려갔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이 성경에 언급된 모세 출생 기록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들의 주장이다. 그밖에도 고레스(Cyrus) 대왕의 전설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종교 사학파 학자들의 연구 자세는 기본적으로 틀린 것이었다. 이들은 편협하게도 성경의 기록보다 고대 근동의 기록들을 더 믿었다. 이러한 연구는 모든 것을 회의하며, 일단 비판해 보는 근대 이후의 인본주의적 계몽주의 및 합리주의 사조에는 잘 부합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무오(無誤)함을 믿는 신앙인의 계시 의존 사관(啓示依存史觀)과는 거리가 멀다. 문학과 역사는 다르다. 문학이 주로 인간 상상력에 기반을 둔 픽션(fiction)이라면, 역사는 엄연한 사실의 기록이다. 모세 사건은 실재했던 사실(fact)로서의 역사일 뿐 아니라, 구원사적 의미로서의 역사(Geschichte)이다. 우리는 성경 역사를 일종의 허구로 간주하거나 잡다하고 저속한 고대 문서와 동등시함으로써 그것의 신적 기원, 곧 계시성을 무시하는 어떤 견해도 배격한다. 왜냐하면 성경 역사는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며 장차 우리에게 영광을 임하실 하나님(계 1:8)께서 택한 백성의 구원을 위해 일하신 과거의 역사요, 현재의 살아있는 말쓰이요, 미래를 보여주는 계시 자체이기 때문이다.
2. 모세의 자기 발견(2:11-15)
모세의 구출과 그 입양 및 성장 과정을 서술한 앞단락에 이어 본문에서는 모세가 자기 동족을 학대하던 애굽인을 살해한 후(11,12절) 일이 탄로나자(13,14절) 바로의 낯을 피해 미디안 광야로 도피한 사건(15절)을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하여야 할 사실은 이 사건이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니라 모세가 애굽 왕자로서의 모든 영화보다 자기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는 위대한 결단을 내리는 신앙적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즉 모세는 분명 애굽 왕실에서 당대 최고의 학문을 교수받았음에 틀림없지만 온실 속에서 편안히 성장한 교만 방자한 왕자는 아니었다. 그는 히브리 유모, 즉 친모 요게벱의 손에서 자랐으며(7-9절) 그 덕분에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궁궐에서의 편안함 삶 속에서 노예로 신음하는 히브리인들을 바라보며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애굽과 이스라엘.... 나는 과연 어디에 속해야 할 것인가 ?' 이는 현대 그리스도인의 고민이기도 하다. 그러한 때 모세는 마침내 본문에서와 같은 위대한 결단을 하고 만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에 대하여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였다"(히 11:24,25)라고 평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왕상 18:21)고 물으신다. 신앙 생활은 결단없이 성립될 수 없다. 역으로 결단도 신앙없이 내려질 수 없다. 모세의 신앙, 그리고 모세의 결단, 이것은 결단하는 신앙인들에게 영원한 귀감이 된다.
한편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을 학대한 애굽인을 쳐 죽인 행동은 애굽 왕자로서의 영화에 안주하기 보다는 고난당하는 민족의 아픔에 동참한 의분이며 강한 민족적 연대감고 여호와 신앙의 열정이 발현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분명 혈기에서 나온 살인 행위로 그 자체가 결코 미화(美化)되거나 정당시 될 수는 없다. 즉 모세의 그 같은 행동은 그의 신앙적 미숙상태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것으로 앞으로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싱앙적, 인격적 연단 및 자기 성찰의 과정이 필요함을 보여 준다. 이후 모세의 40년간 미디안 광야 생활(행 7:29,30)은 바로 그러한 연단의 기간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3. 망명자의 고독(2:16-22)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한 애굽인의 살해로 말미암아 미디안 광야로 도망할 수밖에 없었던 모세의 광야 40년 연단 과정과 생활상이 자세하게 언급되고 있다. 그중 전반부(16-19절)는 르우엘 딸들과 모세의 조우 장면이다. 그리고 후반부(20-22절)는 그것을 계기로 모세가 르우엘의 딸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목부(牧夫)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우리는 비록 자기 결단에 의한 것이었긴 하나 대제국 애굽의 왕자라는 영화로운 지위를 일시에 잃어버리고 일개 양치는 목부로 전락한 모세의 육체적 고통 및 정신적 갈등은 그 누구도 쉽게 감내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것이었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즉 인류의 대속을 위해 낮고 천한 인간 세계에 오셔서 온갖 고초와 괴로움을 다 당하시고 끝내는 십자가 상에서 처참하게 운명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아무리 현장감있게 묘사하더라도, 많은 독자와 감상자는 이를 무관심하게 지나친다. 왜냐하면 그와 유사한 개개인의 내적 체험이 없이는 결코 그리스도의 괴로움을 자기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광야로 쫓겨간 모세는 앞으로의 삶을 위한 어떤 방책도 강구할 수 없었다. 물론 당장 시급한 빵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혼자인 그는 끝까지 외로운 길을 걸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사 르우엘의 가정에 정착하게 했으며 은둔 생활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도록 아내까지 허락하셨다(21절). 하지만 이렇게 현실 문제가 해결된 후에도 모세는 마음 편한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동포가 아직도 애굽에서 신음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세의 괴로운 심정은 자신의 분신인 아들의 이름에 그대로 투영되었다(22절). 그런데 이러한 미디안에서의 40년 망명 생활은 모세의 일생에 있어 일대 전환기가 된다. 모세는 40세가 될 때까지 애굽의 왕자로 살며 자신이 '무엇인가'(something) 해낼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미디안의 목자로 40년을 지내는 동안 하나님의 도움없이는 '아무것도'(nothing)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마지막 40년의 삶은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하나님의 도움에 의해 '어떤 일도'(anything) 해나갈 수 있는 일꾼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크게 헌신했다.
그러면 이 깊은 모세의 삶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 그것은 곧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자가 얼마나 쉽게 무기력해 질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자 곧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 그러나 그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 15:5). 모세는 이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는 데 40년이 걸렸다. 이는 장차 이스라엘을 영도할 지도자로 나설 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신앙 및 인격 수양의 훈련 기간이었다. 헌데 오늘날 우리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일터로부터 떠나 자신의 무기력을 탓하며 세월을 보내는 고독한 망명자가 있는가 ? 만일 있다면 그는 모세처럼 때를 기다리며 기도와 영적 무장으로 준비하는 인내를 지녀야 한다.
* 모세와 그리스도.
모세와 그리스도는 모두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했다. 즉 그들은 서로 다른 시대와 환경에서 살았으나 하나님의 역사적 섭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자들이었다. 따라서 양자간에는 비교할 점이 상당히 많다. 다음 도표는 양자 사이의 유사점과 대조점을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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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 세 | 예수 그리스도 |
+-----+--------------------------------------------+--------------------------------------------------------------+
| 인 |(1) 온유하다(민 12:3) |(1) 온유하고 겸손하다(마 11:29) |
| |(2) 충성되다(민 12:7) |(2) 충성되다(히 3:2,6) |
| 격 |(3) 의분을 잘 냄(출 32:10) |(3) 의분을 표출하심(마21:12,13;23장)|
+-----+--------------------------------------------+--------------------------------------------------------------+
| |(1) 바로의 위협 속에 출생 |(1) 헤롯의 위협 속에 출생(마 2:1-18) |
| 생 | (출 1:8-2:10) |(2) 광야에서의 40일 금식(마 4:1-11) |
| |(2) 광야 생활(출 2:15-22) |(3) 변화산에서의 변형(마 17:1-8) |
| |(3) 시내산에서 얼굴 빛남 |(4) 감람산에서 승천하심(행 1:5-12) |
| | (출 34:30-35) | |
| 애 |(4) 산에서 최후 맞음(신 34:1-6) |
| |(5) 무덤의 소재가 불명(신 34:6) |
+-----+--------------------------------------------------------+--------------------------------------------------+
| 신 |(1) 애굽의 왕자로 성장(출 2:1-10) |(1) 이스라엘의 왕으로 나심 |
| |(2) 하나님의 종으로 충성(히 3:5) | (마 2:1-12;요 1:49) |
| | |(2) 고난받는 종으로 헌신 |
| 분 | | (사 52:13-53:12;빌 2:7) |
+-----+--------------------------------------------------------+--------------------------------------------------+
| 이 |(1) 물로 피를 만듬(출 7:20) |(1) 물로 포도주를 만듬(요 2:1-11) |
| |(2) 홍해를 건넘(출 14:21-31) |(2) 바다 위를 걸으심(마 14:22-36) |
| |(3) 고기 만나를 백성에게 먹임 |(3) 오병 이어로 5,000명을 먹이심|
| 적 | (출 16:13-36) | (마 14:13-21) |
+-----+----------------------------------------------------+--------------------------------------------------------------------------------------+
| |(1)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 |(1)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마 1:21)|
| | (출 12:50,51) |(2) 산에서 산상 수훈을 가르치심 |
| 사 |(2) 시내산에서 계명과 율법 선포 | (마 5-7장) |
| | (출 19-23장) |(3) 율법의 완성자(마 5:17;롬 10:4) |
| |(3) 율법의 제정자(출 19-23장) |(4) 12제자를 훈련시키심(마 10:1-4) |
| |(4) 12지파 족장을 영솔(민 1:4-16) |(5) 70인의 전도자 파송(눅 10:1-20) |
| |(5) 70장로를 세움(민 11:16,17) |(6) 성령의 생수를 마시게 함 |
| |(6) 반석에서 생수를 솟게 함 | (요 4:10,14;1:37-39) |
| 역 | (출 17:1-17) |(7) 놋뱀처럼 십자가에 달림(요 3:14) |
| |(7) 놋뱀을 만들어 백성을 치유 |(8)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눅 24:19) |
| | (민 21:8,9) |(9) 위대한 중재자(롬 8:34;요일 2:1) |
| |(8) 위대한 선지자(신 18:18;34:10) | |
| |(9) 위대한 중재자(출 32:11-14,31,32) | |
+-----+-----------------------------------------------------------------------------+-------------------------------------------------------------+
이상과 같이 두 인물의 삶은 여러 가지 면에서 대칭을 이룬다. 그러나 이 두 인물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즉 모세는 인간 가운데서 특별히 선택받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약 율법의 전달자요 상징인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 계시된 모든 율법과 언약의 최종적인 완성자로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것이다. 따라서 모세는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자라 하겠다.
4. 하나님께서 절규에 응답하시다(2:23-25)
여러 해 후 바로가 죽었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애굽인의 학대가 더욱더 그 강도를 더해 가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절규하는 부분이다(23절).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과거 이스라엘 열조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사 그들을 권념하셨는데(24,25절) 이는 곧 하나님의 초자연적 현현과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한 모세의 소명 사건이 언급되어 있는 다음장의 배경을 형성하고 있다. 한편 압제의 근원이라 생각했던 바로가 죽었으나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은 이처럼 전혀 호전되지 않았던 점은 이스라엘이 당한 고역은 한 사람의 통치자 때문에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사단의 역사에 의한 구조적인 악 때문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러한 고난의 땅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땅에 들어갈 것을 더욱더 사모하며 부르짖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때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시 50:1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는 말씀처럼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그들을 돌아보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당신의 선택한 자녀들을 결코 좌절과 실패 가운데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며 울부짖음과 기도를 외면치 않으시고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공의로우신 분임을 재삼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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