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2절
그 후에 - 문자적으로 '이 말씀들 후에'란 뜻으로 39장에 기록된 요셉의 투옥사건 이후를 말한다. 즉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무고(誣告)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옥된 후를 가리키는데 이때는 요셉의 나이 약 27세 가량으로 애굽으로 팔려온 지 10년쯤된 때이다(37:2;41:1,46). 술 맡은자( ,마쉬케) - '마시게 하다', '물을 대다'란 동사 '솨카'의 사역형 분사로서 '다른 사람에게 술을 마시게 하는 자'를 뜻한다. 이는 단순히 술을 따라 주며 시중 드는 일 이상으로 왕의 자문(諮問)과 국정(國政)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자로서 오늘날의 비서실장직에 해당되는 자이다. 한때 느헤미야도페르시아 왕실에서 이런 관직을 맡은 일이 있었다(느 1:11;2:1). 떡 굽는 자( , 오페) - '떡을 굽다'란 '아파'에서 유래한 말로 이 직책은 제례 의식을 중요시하며 고대 근동의 신정국가에서 제의(祭儀) 음식(14:18;레24:5)과 관련되어 신성시 여겨졌다. 특히 앗수르에는 떡 굽는 관원장의 이름을 딴 지명도 있었다고 한다.
====40:3절
시위대장의 집안에 - 보디발의 집을 가리키며 요셉이 갇혀 있는 곳이다.(37:36;39:20). 따라서 보디발은 시위대장으로서 관저(官邸)에 살았던 것 같다. 옥( , 미쉬마르) - '지키다' 혹은 '보호하다'란 뜻을 가진 동사 '솨마르'에서 파생된 말로 '보호소'를 의미한다. 이처럼 전직 고위 관리들이 갇힌 옥을'보호소'라 칭한 점으로 보아 그들은 일반 죄수들보다 훨씬 더 나은 대우를 받은 것같다.
====40:4절
시위대장이 -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던 시위대장이 등장한 것은 관원장들의 신분의 중요성을 나타낸다. 즉 그 두 사람은 국가의 고위직에 있었던 관계로 저들이 복직될 경우 시위대장에게 정치적 특혜를 베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수종하게 하매 - 문자적으로 '그들과 함께 있도록 (요셉을) 임명하였다'란뜻이다. 이것은 비록 보디발이 요셉을 옥에 보내었지만 아직도 그에 대한 정리(情理)와 오히려 전보다 더 깊어진 신뢰를 갖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섬겼더라( , 솨라트) - 중요한 인물이나 하나님을 최대한의 봉사와 충성으로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호수아가 충심(忠心)으로 모세를 섬기 듯(출24:13;33:11;수 1:1), 엘리사가 진심으로 엘리야를 수종들 듯(왕상 19:21), 천사들이뜻을 받들어 여호와를 섬기듯(시 103:21) 요셉이 두 관원장을 섬기기를 마치 하나님을 섬기듯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여 섬겼음을 보여 준다.
====40:5절
꿈을 꾸니 - 일반적인 꿈이 질병이나 일상사에 대한 심리적 혹은 정신적 반응 현상인 것에 반해 두 관원장은 자신들의 꿈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두 관원장 모두 똑같이 같은 날, 같은 밤에 비슷하면서도 내용이 상이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향편 이 꿈의 사건은 요셉의 생애에 발생한 3대 사건 중 두번째에 해당된다. 각기 몽조가 다르더라( , 이쉬 케피트론 할로모) - '사람'을 뜻하나 '이쉬'와 '해석' 혹은 '해몽'의 뜻의 지닌 '피트론'에 ' ...을 따라서'라는 전치사 '케'가 붙고 '꿈'을 의미하는 '할롬'에 3인칭 접미어가 합쳐져 '각기 의미를 지닌 꿈'(RSV; each dream with its own meaning)을 꾸었다란 말이다. 이처럼 두 관원장이 같은 날 밤 똑같이 꿈을 꾸었지만 그 내용과 해석에 있어서는 전혀 달랐던 이유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1) 그들의 꿈이 우연적이거나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섭리적 현상임을 보여 주기 위함과 (2) 하나님께서 그 꿈 해석의 열쇠를 요셉에게 주어 그의 예언자적 능력을 분명히 입증시킴으로써 그를 바로 앞으로 이끌어(41:9-13) 애굽의 총리로 등용시키기 위한 것이다.
===40:6절
아침에...들어가 보니 - 같은 감옥 안에서도 두 관원장은 전직 고관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일반 죄수와 달리 특별 처소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여느 날처럼 요셉은 수종들기 위해 저들의 감옥으로 찾아온 것이다. 근심 빛이 있는지라 - 옥에 갇힌 상태에서 꾼 범상치 않은 꿈으로 두 관원장은 자신들의 운명에 관한 불길한 예감을 떨쳐 버릴수가 없었다. 이것은 고대 근동 지방에서 꿈은 특별한 뜻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고, 적절한 해석을 통해 미래의 사건을 예견할 수 있다고 믿어졌으나 해석할 수 없는 데서 기인된 불안의 빛이었다.
====40:7절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 문자적으로 '오늘 어찌하여 당신들의 얼굴들이 악합니까'란 뜻이다(Pulpit). 이처럼 자신이 섬기는 자의 얼굴 빛까지도 살리는 요셉의 깊은 관심 표명은 그의 충실성을 나타낸다. 만일 그러한 질문이 없었더라면 그를 영광의 길로 인도한 일련의 사건들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깊은 관심과 존경심을 가지고 무엇인가 돕고자하는 이 봉사 정신은 요셉의 성공의 비결이었다.
===40:8절
해석할 자가 없도다 - 당시 애굽에는 신탁(神託)임무와 꿈 해석 등을 전문으로 하는 박사와 술객 등이 있었다(41:8). 그러나 지금은 갇힌 몸이라 그들을 면회할 길이 없다는 두관원장의 하소연이다. 해석은 하나님께 - 일찍이 하나님이 주신 꿈(37:5-9)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요셉은 두 관원장의 꿈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기인한 초자연적 성격의 꿈이라는 것을신앙의 내적 확신을 통해 분명히 믿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다신론자인 애굽인들에게도 꿈을 주관하는 어떤 신을 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공감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 당시 애굽에서 꿈 해석은 고도의 학문적 기술을 요하는 난해한 분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일개 비천한 이방인 종의 입에서 이처럼 확신에 찬 질문이 나왔다는 사실은 화려한 경력과 학식을 가졌을 관원장들에게 분명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40:9절
포도나무 - 혹자(Plutarch)에 의하면 요셉 당시 애굽에는 아직 포도가 재배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애굽인들이 포도나무를 경작하고 포도주를 만들어 마셨다는 기록은 고대의 기록 및 당시대의 기념비에 나타난 그림 등의 외증(外證)과 성경 자체의 내증(內證)을 통하여 볼 때(민 20:5;시 78:47)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40:10절
본문은 매우 빠른 속도로 어떠한 상태를 목표로 하여 질주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장면이다. 즉 포도나무의 상태가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으로 싹이 트자마자 꽃이 되고 바로 그 직후 포도송이가 익는다. 성경에서 포도나무 자체가 좋은 결실을 상징하듯(시 128:3'호 2:15) 이것은 어떤 커다란 성취를 향해 촉박하고 신비스러운 힘이 그 계획한 일을 바쁘게 전개시키고 있다는 인상을 새겨 준다. 세 가지가 있고 - 사흘을 암시하는 상징이다(12절). 즉 삼일후는 바로의 생일인데 그 날에는 전례에 따라 죄수를 석방하기도 하고 처형하기도 하였다.
====40:11절
내가...따서...짜서...드렸노라 - 매우 빠른 속도로 일이 급전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즉 원래의 영광스러운 자리에로의 복귀가 멀지 아니했다는 소망을 마치 화면을 비춰주듯 보여준다. 즙 - 히브리어로 '야인'( )이라 불리우는 포도주(Wine)을 뜻한다.
===40:12절
그 해석이 이러하니 - 머뭇거림도 없이 곧 바로 해몽을 하였다는 사실은 요셉이 하나님의 지혜의 영으로 충만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40:13절
머리를 들고 - 수치스런 상태에서 영예로운 지위에로 올리움을 받는 것을 뜻한다. 즉 사면(赦免))과 복권(復權) 및 은택 받음을 뜻하는 히브리인들의 관용적 표현이다(왕하 25:27;렘 52:31).
===40:14절
득의하거든 - 꿈 해석대로 '일이 잘되어 형통하게 되면'(RSV;when it well with you)이란 뜻이다.
===40:15절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 히브리인의 문자적인 뜻은 '건너온 자'란 뜻으로 아브라함에게 맨 처음 적용되었다(14:13). 히브리(Hebrew)란 명칭이 사용된 경우는 (1)이 스라엘 민족이 타(他)민족에게 자신들을 소개할 때(43:32;욘 1:9).(2) 타(他)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을 부를 때(출 2:6) 사용되었다.한편 여기서 요셉이 자신을 히브리인으로 소개한 이유는 셈과 에벧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10:21;11:26)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언약의 백성임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렘 34:14).
===40:16절
그 해석이 길함을 보고 - 미덥지 않게 생각하던 떡 굽는 관원장이 요셉의 소망적인 해몽을 듣자, 자신의 꿈도 길할 것이라는 기대를 걸게 된 까닭은 두 관원장의 꿈 사이에 현저한 유사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 세 광주리도 역시 삼 일을 의미한다(18절). 당시 애굽의 남자들은 물건을 머리에 이어 나르고 여자들은 어깨에 메어 날랐다. 그런데 삼 일을 나타내기 위하여 각각 그 사람과 관련이 깊은 사물이 이용된 점이 매우 흥미롭다.
===40:17절
각종 구운 식물 - 빵 굽는 자가 만든 여러 가지의 과자류와 빵 종류를 가리킨다. 새들이... 먹더라 - 그가 새를 쫓아 버리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흉조의 원인이었다. 결국 관원장은 바로의 생일날에 참수형을 당하여 새들에게 뜯겨 먹힘으로 이 꿈은 사실로 드러났다. ====40:18,19절
그 해석은 이러하니 - 비록 부드러운 음성의 해석이나 그 이면(裏面)에는 하나님뜻에 대한 한 치의 틀림도 없는 계시가 담겨 있었다(19절). 당신의머리를 끊고( ,이사 에트 로쉬카 메알레카) - '당신의 머리를 당신 위에로부터 들러 올릴 것이다'(RSV;[pharaoh] will liftup your head from you)란 말. 즉 '(바로가) 너를 교수형에 처할 것이다'라는 뜻이다.이처럼 요셉은 그 표현 양식에 있어서는 정중하였지만 그 전하는 메시지에 있어서는가혹하리만큼 단호하였다(딤전 4:12;계 22:18,19). 나무에 달리니...먹으리이다 - 죽임당한 죄수의 시신(屍身) 땅에 묻지 않고 나무 기둥에 붙들어 매어 죽음에 수치를 더하는 극형 집행 방법이다(신 25:1-3;수10:26). 이러한 제도는 페르시아와 카르타고인(Carthaginians)들에게서도 전해진다.
===40:20절
바로의 탄일 - 이날은 하나님께서 꿈해석의 성취를 위한 날로 이미 예비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이날에는 거대한 잔치와 함께 각종 죄수들이 왕의 특별사면을 받기도 하고 처형당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예(例)는 신약 시대 헤롯의 생일에 세례 요한이 처형당했던 사실을 들 수 있다(마 14:6-11).
===40:21절
바로의 손에( , 알카프 파르오) - '...위에'(upon)를 뜻하는 전치사 '알'이 '손바닥'(출 9:29; 사 1:15)을 나타내는 '카프'에 붙고 '바로'인 '파르오'가 합쳐져 '바로의 손바닥 위에'란 뜻이다. 이것은 본래 애굽의 잔은 손잡이가 없기 때문에 손바닥 위에 올려 놓았던 당시의 관습을 반영한다.
====40:22절
매여 달리니( , 탈라) - '매달다', '걸다'란 뜻으로 '그가 말뚝에 찔려 꿰어졌다'(41:3;신 21:22;삼하 4:12)란 말이다. 이러한 처형법은 히브리 왕조시대의 앗수르 부조(浮彫)에 종종 나타난다. 이처럼 시신들을 나무에 매달거나 말뚝에 매다는 행위는 저들을 신에게 저주받은 자들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러한 자들로 신의 축복이 깃든 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한 의도에서였다(신 21,22장).
====40:23절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 꿈이 길조(吉兆)로 풀이되었을 때(12,13절) 아마 술관원장은 기쁜 마음으로 요셉의 부탁(14,15절)을 반드시 들어주겠노라고 거듭 맹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형편이 바뀌자 까맣게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요셉은 인간의 기억 속에선 사라졌을지라도 하나님의 기억 속에는 뚜렷이 남아 있었다(시 27:10;사 49:14-16). 이 사건 이후 요셉에게 닥쳐온 2년이란 세월은 사랑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연단 기간이었다(41:1).
본장은 첫번째 꿈 사건(37:5-11)에 이어 다시금 요셉의 생애에 중요한 영햐을 미치게 될 두번째 꿈 사건이다. 즉 자신이 꾼 꿈 때문에 애굽으로, 급기야는 감옥에까지 이르른 요셉은 이제 그곳에서 만난 바로의 두 관원장이 꾼 꿈 때문에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중 1-4절은 요셉이 함께 감옥에 갇힌 두 관원장을 시중들게 된 배경이다. 그리고 5-19절은 그들이 꾼 꿈을 요셉이 해몽해 주는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20-23절은 요셉의 해몽이 성취되는 데 대한 기록이다.
이상과 같은 본문은 바로의 두 관원장이 꾼 꿈이 한갖 일상적인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 섭리에 의한 비상한 꿈이었음을 증거해 준다. 애냐하면 두 관원장이 한날 한시에 비슷한 유형의 꿈을 꾸었으며 그에 대한 요셉의 해몽이 어김없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꿈 사건은 요셉의 예언자적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관원장에게 입증시켜 훗날 그로 하여금 요셉을 바로에게 천거케하기위한(41:9-14)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음이 드러난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진행 과정은 비록 더디는 것 같으나 때가 되면 모두다 성취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주 만물, 즉 불신자의 꿈까지도 선용하시어 당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심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 장(41장)에 나오
는 바로의 꿈 사건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1. 수인(囚人)이 된 바로의 두 관원장(40:1-4)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혀 있던 요셉이 바로에게 범죄하여 투옥당하는 두 관원장을 상면한 데 대한 기록이다. 그중 1-3절은 두 관원장이 요셉의 갇힌 곳에 함께 갇히게 된 배경이다. 그리고 4절은 요셉이 보디발의 명령에 의해 두 관원장을 시종들게 되었다는 기사이다. 이러한 본문은 이제까지 품어 오던 의문을 해결해 준다. 즉 요셉에게 미래의 비젼(vision)을 보여 준 하나님(37:7,9)께서 왜 그와는 정반대된는 듯한 수난만을 안겨 결국 그를 옥중에까지 흘러들게 하셨는가 하는 해답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즉 옥중에서 요셉이 바로의 두 고위 관리를 만났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들 중 누군가가 다시금 복직되기만 하면, 그와 안면을 익혔던 요셉은 쉽게 바로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특히 요셉으로부터 수종을 받는 동안 두 관원장은 요셉이 경건하고 진실하며 전혀 옥에 갇힐 이유가 없는 자임을 감득(感得)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하여서도 전해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그들이 복직되면 요셉에게도 서광이 비취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더욱 확실히 하시기 위하여 두 관원장들에게 꿈을 주시고 요셉으로 하여금 해몽케 하시기까지 하셨쟎는가(9-23절).
한편 본문 중에는 요셉과 두관원장의 '만남'에 대하여서만 언급할 뿐, 그들의 범죄 내용 및 기타 인물들에 대하여서는 침묵하고 있다. 그러므로 혹자는 이에 대하여 의아히 여길수도 있는데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여야 한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을 중심으로 그 언약의 성취 과정을 다루는 구속사의 책으로서,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기 위하여 꼭 필요한 사건이나 내용, 그리고 인물만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2. 관원장(官員長)의 꿈을 해석하는 요셉(40:5-19)
본문은 드디어 요셉의 생애에 또 한번의 전환점을 가져다 줄 두번째 꿈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한 기록이다. 그중 5-8절은 그 관원장이 옥에 갇힌지 몇 일 후 각기 징조가 있는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해 줄 자가 없어 고민하자 요셉이 이를 해몽해 준 되 자신의 처지를 부탁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9-15절은 이에 술맡은 관원장이 자신의 꿈을 털어놓자 요셉이 이를 해몽해 준 되 자신의 처지를 부탁하는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16-19절은 술맡은 관원장의 꿈이 길한 것을 본 떡굽는 관원장이 자신의 꿈을 털어놓자 이에 요셉이 그 꿈도 해몽해 주는 장면이다.
이상과 같은 본문에서 우리는 가장 맑은 상태의 머리로써도 자신의 미래를 명확히 예견할 수 없지만, 때로는 베일에 싸인 인간의 운명이 꿈에서 예견되는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에 속한 것으로서, 그분은 하고자 하는 자에게 이처럼 미래를 예시해 주시는데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자기 백성의 구원을 이루기 위함이다. 즉 본 경우에 있어서의 두 관원장의 꿈은 어디까지나 요셉과 훗날 그 가족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 섭리의 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 계시의 정의 및 종류. - 유한한 인간의 제한된 지식으로는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의 역사하심을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드러내실 때 우리는 이를 깨달을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게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실 목적으로 드러내신 것을 계시(啓示)라 한다. 본장에는 미래에 되어질 일들을 꿈을 통해서 계시하는 내용이 기록된 바 여기서는 계시의 정의 및 종류를 논하기로 한다.
1.계시의 정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우셨던 베일을 벗으시고 드러내심을 뜻한다. 즉 하나님게서 자신에 관한 지식을 인간에게 전달하여 이것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며,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을 의미한다.
2.계시의 종류: 계시의 방법에 따라 자연 계시(自然啓示)와 초자연 계시(超自然啓示), 계시의 내용 및 목적에 따라 일반 계시(一般啓示)와 특별 계시(特別啓示)로 분류할 수 있으나 이 두 가지 구별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자연 계시와 초자연 계시 - 자연 계시는 인간의 구조와 자연 현상을 통하여 전달된 계시며, 초자연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연적 과정(過程) 속에서 간섭하시는 계시로, 꿈과 같은 자연적 방법 뿐 아니라 초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하시기도 하신다.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 - 일반 계시는 당신과 더불어 교통하기를 원하는 인간에게 자연 법칙, 인간의 정신, 역사 등 일반적인 방편을 통하여 스스로를 제시하는 것이며, 특별 계시는 일반 계시의 불충족성에서 그 가치가 드러나는 것으로, 하나님의 속죄 사역(贖罪事役)에 뿌리박고 있다. 그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현현(顯現)과 신언(神言)과 이적(異蹟) 등이 있다. 하나님은 구속사의 전개와 함께 타락 직후부터 시작하여 성경의 완성 때까지 여러 방법으로 특별 계시를 주셨던 바, 성경은 그 중 인간의 구원에 필요하고 충분한 내용을 집대성한 것으로 특별 계시의 정수이다. 이에 대하여는 성경 총론 '성경의 권위와 영감'을 참조하라.
* 영적 지도자의 진리 선포. - 진정한 지도자는 결코 진실을 왜곡하지 않는다. 사사로운 이해 관계로 자신의 소신(所信)을 굽히지도 않는다. 기쁜 소식을 전할 때나 슬픈 소식을 전할 때난 사실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소식을 가감없이 전해야만 한다(계 22:18, 19). 즉 상황에 따라 슬픈 자를 위로한다고 거짓된 기쁨을 전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요셉은 비록 한 관원장에게 목이 잘릴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야 했지만, 결코 그 사실을 숨기거나 거짓된 이야기를 꾸며대지 않았다. 진실은 그 관원장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을 정리하며 다가올 큰 변화에 준비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의로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그에게 일시적 기쁨을 주는 것보다 더 큰 친절이 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장차 죽음을 앞둔 모든 인간에게 전해야 할 소식은 물질적이며, 세속적인 영달(榮達)을 추구하는 방법이 아니라, 의의 심판 날을 예비하는 방법이다(마 25:13). 실로 이것만이 영적 지도자된 자가 인간의 마지막 삶에 던지는 진정한 조언이다.
* 구약에 나타난 꿈과 하나님의 계시. -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꿈에 대해 신비감을 갖고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왔다. 고대 근동 지방의 애굽인이나 갈대아인들은 그들의 풍부한 상상력을 이용하여 사물의 상징성(象徵性)을 중시했다. 그래서 그들은 꿈의 상징적 의미를 탐구하여 학문적 체계로 발전시켰다. 꿈의 해석자는 신(神)으로뿌터 지혜와 영감의 축복을 받은 최고의 학자로 간주되었으며, 중요한 문제의 심의 과정에서 꿈 해석자는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처럼 꿈과 현실을 연결시키려는 고대인들의 신앙심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는 히브리인들의 삶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들은 수세기를 거쳐 오는 동안 꿈의 상징성을 매우 중요시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계시의 중요한 통로로 여겼다(민 12:6; 욥 33:15-17; 렙 23;28; 행 2:7).
꿈에 관한 인간의 관심은 지금도 높다. 현대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꿈은 무의식 세계(無意識世界)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한다. 즉, 꿈을 통해 미래의 예지(豫知)는 있을 수 없다고 과학적 단정을 내린다. 그러나 이런한 여러 견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꿈은 과학적 분석이나 철학적 논리로 해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꿈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 영역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기 위해 모든 도구를 사용하시는데 꿈도 한 방편이 되므로 인간의 한정적인 지혜로는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것이다<20:1-7 강해, 구약에 나타난 꿈>.
3. 성취된 요셉의 꿈 해석(40:220-23)
본문은 요셉의 해몽대로 한 치의 어김도 없이 두 관원장의 꿈이 성취된 데 대한 기사이다. 그중 20,21절은 요셉의 해몽대로 술맡은 관원장이 복직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22절은 떡굽는 관원장이 마침내 처형당했다는 기록이다. 마지막으로 23절은 그러나 술맡은 관원장이 복직 후 요셉을 잊어버렸다는 기록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혹감과 실망감을 금치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꿈으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8절)라고 한 요셉은 굳센 신앙대로 두 관원장의 꿈은 정확히 성취되었지만, 정작 요셉으로부터 입은 은혜를 기억하고 그를 위해 바로에게 탄원해 주어야 할 술맡은 관원장이 도무지 요셉을 기억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들에게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일순간에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자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계속 이어지는 다음 장의 기록을 읽어 보면 그것은 한갖 기우에 지나지 않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하나님께서 두 관워장의 꿈이 성취된 후에도 2년이나 더 요셉을 옥에 두신 데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첫째, 그것은 꿈이 성취될 일로 인하여 요셉이 품을 수도 있는 교만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둘째, 요셉이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 의뢰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세째,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오묘한 방법으로 자신의 구원 계획을 성취시켜 나가신다는 점을 요셉에게 인지시키기 위함이다.
* 은혜를 잊은 사람. - 본문은 요셉의 성실한 자세와는 달리 그에게 돌아온 댓가는 배신과 무관심이었음을 보여 준다. 즉 요셉은 형제들에게 팔리우는 모멸감(侮蔑感)과 음녀의 희롱을 겪은 데다가 설상 가상으로 이번에는 그토록 기대를 걸었던 술 맡은 관원장에게서 기억조차 되지 않은 것이다. 꿈을 해석해 줌으로써 술 맡은 관원장에게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선사한 요셉의 은혜는 무관심에 의해 간단히 소멸되고 말았던 것이다. 과거의 교훈을 쉽게 잊어 버리는 인간에게 있어 미천한 곳의 경험은 더더욱 떠올리기 싫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는 하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은 그곳에서 얻은 값진 은혜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 점에서 그의 무관심은 은혜를 배반한 것과 다름없다, 따라서 술 맡은 관원장의 배은 망덕함은 길이 성도의 뇌리에 남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성도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요셉의 은혜를 잊고 사는 관원장을 비난하기 전에, 과연 자신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며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먼저 자신부터 돌이켜 보아야 한다(롬 6:17; 고전 1:4; 고후 9:15; 엡 5:20).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야말로 20세기의 술 맡은 관원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