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 어느 종교나 문화에서든지 지혜는 인간이 추구해야할 최고의 가치로 인식되어져 왔다. 사람이 사는 관습과 사고 습관은 달라도 지혜로 인정되는 내용이 가져다 주는 교훈은 대체로 유사한 경우가 많다. 속담이나 격언의 내용으로 보아도 인간에게 지혜로 인정되는 행동이나 사고 유형은 인종이나 문화나 언어를 초월해서 거의 보편적인 유사성을 갖는다. 이는 사람이 가지는 그 본성의 동질성에 유래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어느 문화권에서든지 교만보다는 겸손이 지혜로 인정된다. 게으름보다는 부지런함을 칭찬한다. 외적인 아름다움보다는 내적인 아름다움에 더 높은 가치를 둔다. 열심히 배우고 익히는 것이 노는 것보다 더 잘하는 행위로서 열심히 배우도록 권하여진다. 이로 보아서 지혜는 대체로 사람이 살아가는 경험과 연관하여 얻어지는 결과물이며 이는 인간의 본성과 조건에서 유래하므로 인간이 사는 곳이면 보편적인 통찰과 타당성을 가지는 경우가 많고 자연법적 권위를 가는 경우도 많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당연히 지혜라고 대답한다면 당연히 기대했던 대답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부나 명예나 미모나 권력을 실제로는 인간들이 더 좋아하고 추구하지만 그럼에도 이 모든 것보다 지혜가 더 사모할만하고 추구할 가치가 있는것으로 인정되는 데는 인류의 공통성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성경에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성경에서도 당연히 지혜에 대한 많은 찬양이 있다. 특별히 성문서에서 역사서를 제외한 대부분의 책을 우리가 지혜문학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특히 욥기 시편 잠언 아가서 등은 지혜 문학과 아주 깊은 관련이 있으며 특히 잠언의 내용에는 지혜에 대한 아주 많은 구체적 내용이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잠언이 말하는 지혜에 대해서 말하는 몇구절을 들어보자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 /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잠언 1장 1-6절)에서 보듯이 잠언의 기록목적 자체가 지혜를 위한 것이며 지혜의 가치에 대해서 다음의 구절을 인용하는 정도로만도 충분할 것이다: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언 3장 13-18절)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 /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였느니라"(잠언 4장 5-9절)



대체로 지혜는 어느 문화권에서든지 그 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종교와 연결되어 추구되어 왔고 대체로 지혜자들은 그 종교의 주도적 인물로 인정되는 경우가 많다. 지혜가 최고의 종교적 가치로 인정되는 경우에 주로 지혜는 신적인 선물인 경우가 많다. 사람이 경험을 통해서 알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지혜는 대체로 하늘이나 신들로부터 얻는 선물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이점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지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에게 돌려지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언 1장 7절),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욥기 12장 13절),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욥기 28장 20절),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욥기 28장 28절)



그러나 그 본질적인 바탕에 있어서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는 일반적인 세상이 말하는 지혜와 궁극적인 차이를 보인다. 성경은 지혜의 출발점을 사람의 노력이나 경험에서 찾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일반 철학이나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 처럼 인간이 보다 나은 존재로 가는 길에서 얻어지는 결과물이 아니라 그 출발부터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며 성경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인간은 다른 특별한 고차원의 존재나 특별한 인간이 될 필요가 없고 스스로 피조물임을 인정하고 만물의 창조자이며 세상을 자신의 뜻대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만 하면 된다. 지혜는 특별한 것이 아니고 또 지혜자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그를 의지하여 사는 것 자체가 지혜의 삶이며, 온 천지 만물 중에비치는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과 위엄을 관찰하기만 해도 저절로 지혜로와 질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사람은 결코 자신을 하나님처럼 될수 있다고 생각지 않고 유한한 존재로서 무한한 존재가 되려는 덧없는 충동에 사로 잡혀 살지 않는다. 자신을 유한한 존재로 인정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경험하며 관찰하는 예지를 따라 살때 인간은 소박하지만 지혜로운 인간이 된다. 이것이 바로 빛이 가져다 주는 지혜이다.



그러나 이러한 빛의 지혜에 반대해서 낮에 빛가운데서 아무것도 보지 않고 밤에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충동이 지혜자가 되려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 그래서 종종 낮에는 보지 못하고 밤에만 보는 올빼미가 지혜나 철학의 상징으로 인정되어 온것이다. 이러한 올빼미의 지혜나 밤의 지혜는 궁극적으로 보면 남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다는 우월감을 따라서 보다 더 높은 존재로 상승하려는 존재론적 위계질서 충동이며 이는 근본에 있어 지배지향적인 부패한 마음의 결과물이다. 일반 사람은 높아서 알수 없는 어떤 것으로 보다 높은 수양을 동반하거나 보다 높은 존재로의 지향이 필요한 것처럼 이해되는 그러한 지혜는 지배를 꿈꾸는 인간에 의해서 꾸며지고 날조된 허구에 불과하다. 이러한 지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사회는 항상 권위주의적 사회이며 지배중심 사회가 되어 지혜는 결국 지배자가 되는 길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이와 같지 않다. 성경의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있다고 가르친다. 이점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와 일반 종교나 철학이 가르치는 지혜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발견된다. 성경의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데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특별한 존재가 될 필요는 없다. 또 하나님 앞에는 누구나 다 인간이며 그것도 허물과 오류로 가득찬 죄인이며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하나의 피조물이며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고 하나님이 친히 사랑하시는 귀한 존재이다.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분야에 여러가지 지혜가 존재하지만 궁극적으로 지혜의 근원은 사람이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신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순환적으로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가장 단초적인 지혜가 된다. 즉 이 지혜가 없으면 그외 모든 것이 지혜로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된다. 인생이 지혜롭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지혜을 출발점이다. 하나님을 알때에 인생을 제대로 알수 있고 반대로 인생을 제대로 관찰한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또한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여러가지 세속적 지혜들도, 자연을 관찰함으로써 얻어지는 지혜도 결국은 하나님에게서 주어지는 지혜로 인정된다. 그래서 지혜로운자와 그 반대 즉 어리석은자 혹은 미련한 자 사이에 존재하는 분명한 차이는 전자가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반면에 후자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업신여기는 자이다. 하나님이 정한 방식과 규칙대로 사는 인생과 하나님의 규칙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과 스스로 정한 규칙에 따라 사는 인생의 차이가 바로 지혜와 우매 혹은 어리석음 혹은 미련함의 차이다. 그래서 성경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기 생각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자기 삶을 맡길 것을 권고한다. "3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언 3장 5-7절)



성경에 따르면 두가지 인간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규칙에 따라 사는 인간과 자기 스스로 규칙을 부여하면서 사는 인간이 그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전자는 겸손한자 혹은 경건한자, 하나님을 경외하는자로 일컬어지고 후자는 교만한 자, 불경건한 자, 혹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로 일컬어진다. 이러한 두 유형의 인간이 추구하는 지혜는 그 본질에서 이미 서로 길을 달리한다. 사실 두 가지 유형의 인간은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 두가지 사회적 행위 유형이요 우리가 앞에서 읽은 글로 표현하면 두가지 유형의 마음의 자세이다. 마음은 바로 활동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추구하는 삶도 다르고 얻으려는 지혜의 종류도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 즉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을 하나님의 지혜라고 한다면 세상이 자기 방식으로 추구하는 지혜, 즉 남보다 나를 낫게 여기는 마음을 세상의 지혜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이 자기 생각대로 지혜라고 가르치는 지혜를 성경은 구별하고 있고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일 뿐이다. 나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자가 바로 어리석은 자요 미련한 자요 교만한 자이다. 이런 사람은 그 마음에 하나님 없다 하거나 그 모든 사상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그들에게 임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는 성경이 사람에게 가지도록 하는 마음이다. 성경은 사람이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경고한다. 겸손이란 단순히 자기를 낮추는 세속적인 처세술이 정도가 아니며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삶의 자세이다. 즉 겸손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는 외적인 모양 안에 하나님을 하나님의 존재에 합당하게 높이는 내적인 열정이 있다. 하나님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기를 낮추는 것이야 말로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의 출발점이다. 반면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편 14장 1절)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리며 주린 자의 심령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의 마시는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이사야 32장 6절),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편 10장 4절)



두 가지 유형의 지혜는 바로 두가지 유형의 마음이요 이는 두가지 유형의 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대로 나를 남보다 낫다고 여기는데는 바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마음이 있고 반대로 남을 나보다 낫다고 여기는 데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높이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 하나님은 경외하는 데 사람은 무시하고 반대로 하나님을 무시하는데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고 아낀다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간혹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스스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지만 그의 마음에는 결과적으로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의롭게 여기는 자기의가 자리잡고 있다. 인생이 스스로 수양과 노력을 통해서 참된 삶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념은 자기 의나 자기 선이다. 왜냐하면 이런 노력이나 수양을 하지 않은 사람은 결과적으로 수양한 자신보다 못한 사람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그들보다 낫다는 우월감이 내적으로 자리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마음이 있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인정할 수 없게 되지만 그러나 선의 궁극적인 기준은 하나님에게 있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다.



역사를 통해 선에 대한 각가지 철학적 사변들이 생겨나게 되었지만 그 어느 것도 선의 바른 기준을 설정하거나 밝히는데 실패하고 있다. 인생의 가장 지고한 목적이 선이라는 데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철학자들도 대체로 동의한다.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나 칸트의 선의지가 그예다. 이 두개념에서 서양 철학의 모든 가치들이 춤추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외 기타 여러 종교에서 가르치는 수양이나 관조의 지혜도 결과적으로 이런 철학적 선과 다르지 않다. 이는 인간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전히 파괴되거나 소멸되지 않고 남아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빛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선에 대한 양심의 흔적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하나님이 인생에게 정해준 의를 실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서 불가능하다고 말하여 질수 있다. 지혜의 참된 아름다움은 결국 선에 있고 선을 목적으로 한다는 데는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이 대체로 동의한다. 그러나 선에 도달하려는 여러가지 인간적 노력을 세상은 참된 지혜의 길에 도달하는 방법적 차이정도로 이해하려고 하지만 성경은 그와 달리 궁극적 차이를 가르친다.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지혜도 선도 있을 수 없다.



참된 지혜 즉 인생의 선은 사람에 의해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창조하고 그것에 질서를 주고 공정한 관찰자로서 관찰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 이 기준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 경기에서 경기 하는자가 심판을 겸할수 없다. 이것은 불공정하다. 경기에는 심판이 있고 심판의 판정에 경기 하는 사람은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게임에는 규칙이 있으며 그 규칙은 지켜져야 한다. 경기하는 자가 게임의 규칙을 바르게 지키고 있는지 아닌지는 경기하는 사람 자신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제삼의 관찰자로 관찰하는 심판이 판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절대로 오판하거나 판정시비를 일으키지 않는 절대적 공정한 관찰자로서의 심판이며 인생에 대한 규칙을 부여한 분이다.



지혜의 자리는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지혜는 사람의 마음의 활동이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는 결코 지혜자로 인정될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이 정하신 규칙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없이 지혜를 말하는 자는 자기를 스스로 지혜로운 자로 여기는 자이나 자기가 자기를 비교하여 칭찬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로 인정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은 이러한 지혜에 아주 익숙하여 스스로 남보다 낫게 여기고 자기를 남보다 낫게 여기며 산다. 이러한 마음에서 분쟁이 나며 시기와 질투, 원망과 불평과 및 허영과 교만이 생겨나고 그 안에는 결국 인간의 욕심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어느 지혜자든지 욕심을 버리는 것이 참된 지혜의 길이라고 가르치지만 인간 중에 누구도 욕심을 버리는데 성공하지 못한다. 이는 인간 자신이 바로 욕심이기 때문이며 반대로 욕심이 인간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욕심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대치되어야 한다. 자기를 남보다 낫게 여기며 자기를 스스로 높이려는 이런 마음을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스스로 낮아지는 마음으로 교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한다. 회개란 궁극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모든 삶의 자세를 하나님에게로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자기 스스로 지혜롭게 의롭게 생각하면서 나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의 자세가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며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의 자세로 변화되는 과정이 회개에서 출발하여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총체적 성화 과정이다. 남보다 나를 낫게 여기는 지혜에서 출발하는 사회인 일반 사회에 비교해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지혜에서 출발하는 사회를 우리는 원리적으로 기독교 사회라고 부른다. 두 가지 유형의 지혜는 두 가지 유형의 마음이고 두 가지 유형의 마음에서 두가지 유형의 행위를 기반으 로하는 사회가 실현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지혜와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 사는 사람들이며 결국 기독교 사회 즉 교회에서 사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바로 사회 그것도 기독교 사회로 이해되며, 이른 바 그리스도의 마음과 하나님의 지혜로 사는 사람들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결사체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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