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론적 인간관계의 가장 핵심은 바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적인 사랑의 결사체이기 때문에 교회에서의 교제 즉 성도의 교제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 방식은 바로 남의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가르침에서 시작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결사체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자원하는 심령으로 참여하는 가장 개인적이면서 가장 자유롭고 동시에 가장 사회적인 결사체이다. 교회는 잘난 자가 못난자를, 가진 자가 못가진 자를,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섬겨야 하는 운명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자원적이고 자발적인 자유로운 동감의 결사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래서 모든 사회중에 가장 탁월하고 모범적인 사회이다. 본질적으로 사회란 모든 개인의 자발적인 참여를 기초로하는 자유로운 동감의 결사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감의 원리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관찰적 지혜를 가지고 있다. 이는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본질적 원리다. 이러한 원리는 다음 세가지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인간의 모든 사회적 관계의 기초에서 인간의 행위는 궁극적으로 두가지 유형으로 압축된다. 첫째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고 두번째는 나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첫번째 유형을 겸손이라고 부르고 두번째 유형을 교만이라고 부른다. 즉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행위방식을 겸손이라고 하고 나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행위 방식을 교만이라고 한다. 겸손의 정점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교만의 정점에는 사탄이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그리스도와 사탄은 두가지 사회의 모형이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하는 사회와 사탄을 목표로하는 사회의 싸움이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과 나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의 싸움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의 삶속에서 치열하게 진행되는 영적 전쟁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기초적 원리에 따른 사회 즉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겸손한 인간관계를 기초로 해서 개인의 자발적이고 자원적이며 자유로운 동감의 참여에 의해서 실현되는 사회이며 오늘날 교회의 본질로서 이해된다. 반면에 사탄은 나를 남보다 낫게 여기며 교만한 인간관계로서 지배와 정복을 목적으로 강제적이고 집단적으로 동원되는 본질적으로 비사회적인집단적 유형이다. 예수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전혀 죄가 없는 분이지만 피조물인 사람의 모습으로 나서 본질적으로 죄로 멸망할 사람의 운명을 동감적으로 경험하며 인간을 사망과 운명의 처절한 지옥에서 자신의 혹독한 저주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해방하였다. 예수는 인간의 저주를 스스로 담당하면서 반대로 저주의 삶을 살아야하는 인간의 운명을 복된 존재로 변화시켰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승리자가 되어서 모든 피조물에게 영광을 얻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장 5절 -11절)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삶을 본받아서 항상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 바로 겸손이다. 겸손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사실의 마음이다. 예수그리수도께서 친히 세상에 오심 즉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임하심의 본질은 나를 남보다 못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데 있다. 내가 남보다 낮아지는 것은 남보다 내가 못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이 나보다 낫기 위해서이다. 참으로 남을 유익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마음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겸손의 다른 얼굴은 바로 사랑이다. 겸손한 사람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남을 행복하게 유익하게 만들어준다. 그것이 동시에 바로 나의 행복이요 유익이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런 사람 즉 겸손한 사람에게 반드시 복을 주고 그를 영화롭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않고 자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이고 이러한 사랑은 다름 아닌 자발적이고 자원하는 마음의 자유로운 동감의 결사체인 사회의 본질적 관계이다. 그래서 교회는 동감의 결사체요 사랑의 결사체요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의 교제의 모임이다.



반면에 사탄은 피조물이면서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자기를 하나님보다 더 높여 부르고 스스로 저주에 떨어진 존재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이사야 14장 12-15절) 그는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다른 사람을 무고하며 참소하는 자이며, 남이 나보다 나은 것을 결코 참지 못하며 반드시 자기를 최고로 생각하는 병적인 강박과 집착에 시달린다. 사람의 교만한 마음에 사탄의 유혹을 받아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심을 품고 먹지 말았어야 할 선안과를 먹음으로서 사망의 형벌을 받게 되었다. 아담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즉 만물을 창조하시되 보기에 좋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세계를 자신을 것으로 참칭하려는 욕심에서 스스로 하나님처럼 창조자요 입법자가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었지만 결과는 자신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벌거벗은 존재라는 사실에 사망이라는 형벌까지 감수해야만 하는 파멸가 저주의 존재로 전락하게 된것이다.



그래서 이제 인간은 죄의 충동에 따라서 말할수 없는 수치와 모멸감을 느껴,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이 주신 청지기로서의 왕적 수임을 오직 자신의 욕구와 소유를 채우려는 지배와 권력의 집단적 광기로 착각하며 어둠속에서 거칠며 고독하게 방황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타락의 근본에는 바로 스스로 하나님으로 참칭하며 멸망의 가증한 저주로서 사탄의 욕심이 있는 것이다. 이런 마음은 교만한 마음이요 교만한 마음은 반드시 추락한다. 자신만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몰락을 야기시킨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언 16장 18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누가복음 10장 15절).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큰 악은 바로 교만이다. 욕심, 그것이 얻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바로 교만이다. 그리고 외식이란 교만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외식은 교만 중에서도 가장 교만한 것이며 자신을 겸손하게 보이려고 위장한 교만이라는 점에서 가장 악독한 교만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외식에 대해서 그렇게 무섭게 저주를 한것이다. 외식이란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탄의 마음이다.



2.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교만의 자리에서 겸손의 자리로 이행을 말한다. 겸손한 자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자이고 교만한 자는 나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자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가르친다:"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태복음 7장 1-5절) 이 가르침은 일차적으로 바리새인에게 다음으로는 모든 인간의 일반적 삶에 대해서 말하는 진리의 교훈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눈에 들보를 넣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보고 사는 존재이다. 자기 눈의 들보는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말하면서 산다. 눈에 티만 들어있어도 얼마나 아플까 그런데 자기 눈에 널판지를 넣고 다니면서 그 아픔은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티의 아픔에 대해서 말한다. 또 자기 눈은 들보로 완전히 가리워져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 티는 어떻게 그렇게 잘보는지...사실 들보로 가리워져 있으면 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밝은 눈으로도 보기 힘든 티를 다른 사람의 눈에서 찾아 내는 불합리성 이게 인생이란 것이다. 사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자기 눈을 덮고있는 관념을 따라서 판단하면 사는 것이 인생이다. 들보와 티의 비교는 양과 질적인 면을 다 포함한다.



먼저 양적인 면에서는 당연히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아니 자기의 잘못은 아주 많이 알지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적다. 즉 정직한 자라면 인간은 타인의 허물보다 자신의 허물을 훨씬 많이 보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의 마음은 자기가 알기때문에 자기의 허물과 죄가 얼마나 많은지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죄가 머리털보다 많다"(시편 40장 12절)고 말한다. 정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자라면 자신의 얼마나 죄인인가를 잘 알것이다. 그런데 욕심으로 가리워진 사람의 마음은 자신의 죄를 보지 않고 오직 남의 죄를 찾기에 바빠서 다른 사람의 눈에 티끌같은 죄를 찾으려고 안달이다. 들보처럼 커다랗게 허다히 늘린 자신의 죄는 보지 않고 세밀히 살펴야 겨우 보일듯 말듯한 남의 죄를 찾으며 헤아리고 판단하는 것이다. 자신의 눈은 들보에 가리워서 앞도 보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뺀다고 야단들이다. 이것이 바로 나를 남다보 낫게 여기는 교만한 마음이 행동하는 유형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은 인생은 바로 이렇게 행동한다.



교만한 마음은 결코 자신을 알지 못한다. 언제나 자기는 남보다 높은 자리에 서서 다른 사람을 밑으로 내려다 보기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알지 못한다. 그 양과 크기에 있어서 들보만큼 큰 허물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을 알지 못하고 남의 티만한 허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거짓되고 무정하고 잔인하고 포악한 마음이 바로 교만중의 교만 바로 외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하게 허위의식이다. 사실에 기초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관념으로 욕심으로 회칠한 관념의 세계다. 교만은 언제나 지배와 권력의 소유에 내몰리는 강박으로 우겨쌈을 당한 관념과 표상의 세계이다. 성경은 이러한 원리에 따라서 증거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한복음 9장 39-41절)



이것이 바로 들보와 티의 질적인 차원이다. 즉 들보는 사실에 입각해서 엄청난 크기의 허물을 가지고도 자신의 허물에 가리워서 오히려 타인의 티끌만한 죄를 찾는다는 역설이다. 즉 눈에 들보가 있다면 아파서 눈을 뜨지도 못할것이요 동시에 들보의 크기에 가려서 아무것도 볼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들보를 가진 눈은 그 크기의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스스로 가리워서 보이지도 않으면서 밝은 눈으로도 찾기 힘든 작은 티를 본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스스로 헤아리고 판단하는 것이다. 결코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에 따라서 생겨난 관념을 따라서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죄의 근거다. 결코 하나님이 아니면서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인생의 비극이다.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스스로 판단하고 헤아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스스로 입법자로 자처하면서 수많은 허물과 오류를 감추고 세계와 다른사람을 판단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먼저 자신의 눈에 들보를 빼고 나서 밝히 보이면 그때에 비로소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뺄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세상을 사실에 따라서 관찰하는 눈을 가지면 바르게 판단하고 헤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을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수는 없는 법 먼저 스스로 사실에 따라 밝히 보고 그다음에 눈이 어둡거나 보지 못하는 자, 즉 관념에 의해서 왜곡된 삶을 사는 자를 바르게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인에 비교해 볼때 그리스도인에게는 관념의 삶에 사실의 역전이 일어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바 사실에 따라 보고 산다는 것외 다른 것이 아니다. 자신의 욕심과 죄에 이끌려서 자기 뜻대로, 즉 관념에 따라서 임의로 살다가 하나님이 만들고 정하신 세계의 질서를 보고 관찰하고 사실에 따라서 사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회개이다. 만물의 자신을 중심으로 보고 살다가 이제 하나님을 중심으로 보고 사는 것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되면 이제 사실을 관찰하게 되므로 비로소 인간은 자기 눈의 들보를 보게 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예레미야 17장 9절) 그리스도인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성령의 조명을 받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보혜사로서 하시는 일중의 하나 즉 바로 죄에 대해서 책망하시는 일이다 이제 밝은 눈으로 보니 자신의 눈에는 들보가 있고 마음에는 엄청나게 많고 큰 허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작은 티끌만을 보게 되는 다른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그런즉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삶의 자세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티가 있고 내눈에는 들보가 있다는 것을 사실로 인식한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실은 남보다 낫지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명령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생각을가진 사람이라면 그는 아직 사실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한 사람이며 여전히 교만한 자요 외식하는 자이다. 자기가 남보다 나은데 남이 나보다 나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바로 교만 중에 교만 바로 외식이기 때문이다.



들보와 티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는 이제 아무도 판단할수 없게 된다. 즉 나는 들보로 가리워져서 볼수 없는 눈이니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볼수는 없기 때문이며, 나의 허물은 들보만큼 크기때문에 남의 티끌만한 허물을 판단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사실의 차원에서 남의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삶이 시작되며 이는 사실의 삶이며 겸손한 삶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사실에 있어서 정직과 겸손이다 정직한 자는 내가 남보다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가르침에 따라서 내가 하나님에게 더 큰 용서를 받은 사람이 되고 더 크게 용서 받은 사람은 더 큰 은혜를 받은 것이요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것이고 그래서 더 많이 감사하고 더 많이 봉사하고 헌신하는 마음을 자발적으로 갖게 된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헌신된 마음이 모여서 이루어진 자유로운 결사체로서의 동감의 사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에 기초한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사랑이다:"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서 13장 4-7절) 교회는 겸손과 사랑의 자발적 결사체이면 자유로운 동감의 사회이다.



3. 위에 말하여진 사실에 기초해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먼저 자신의 일을 돌아보고 그 다음에 남의 일도 돌아보아 그리스도의 기쁨이 되게 하는 사랑의 마음이 말하여져야 한다. 교만이란 자신을 낫게 보이려는 허영심에 근거하고 이런 곳에는 반드시 분쟁이 생긴다. 분쟁은 다툼으로 시작하여 마침내 엄청난 재난을 가져오기도 한다. 역사는 얼마나 많은 분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가? 겸손한 마음 즉 남을 나보다도 낫게 여기며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에도 무관심하지도 않고 동감적으로 즉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으며 자유로운 양심에 따라 다른 사람의 삶에 동감적으로 참여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을 적극적으로 돌아보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연대를 실현하는 것이 교회가 가진 진정한 사회적 결사체적 본성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이 그 마음에 새겨진 동감적 존재이다.



비록 죄로 말미암아 이 동감이 엄청난 붕괴를 겪었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회복되어질 때 인간은 하나님의형상으로서 동감의 삶을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존재가 된다. 나의 눈에 들보를 인식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자신의 일을 하면서 남의 일에 동감적으로 참여하면서 다른 사람의 유익에 기여하면서 전체의 삶의 유기적으로 실현하고, 무엇을하든지 남의 유익을 구하며 덕을 세우는 사랑의 정신을 따라 그리스도의 자발적 결사체로서 자발적이고자유로운 삶과 다른 사람에게 동감하는 마음을 양육하는 일이 바로 성도의 어머니이자 하나님 나라의 가장 탁월한 사회적 주체인 교회의 본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성에 있어서 하나의 사회이며 이러한 인간의 자발적인 결사체인 교회는 겸손과 사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수평적으로는 예수와 및 함께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과 교제하는 사회이며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형상인 모든 사람을 사실과 동감의 삶으로 변화시키고 전 피조세계를 행복의 연대로 실현해가는 사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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